순정을 말할 때일수록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순정이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문맥을 벗어날 때
순정은 구경꾼에 의해서 흔히 희화화되고 마니까.
25일 개봉하는 ‘아는 여자’는
순정을 낯간지럽지 않게 말하는 법을 아는 영화다.
프로야구 2군 선수 치성(정재영)은 애인에게 이별을 통고받은 직후
병원에서 3개월 시한부 판정까지 받는다.
참담한 마음을 달래려 단골 바를 찾아간 뒤 엉망으로 취한 그를
바텐더 이연(이나영)이 데려다준다.
다음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어제밤 자신의 이야기가
청취자 사연으로 소개되는 것을 듣게 된 치성.
사실 이연은 치성을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영화와 연극, 텔레비전과 뮤직비디오를 넘나들며
전방위적으로 활동해온 장진 감독은
특유의 재치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기막힌 사내들’에서 ‘간첩 리철진’과 ‘킬러들의 수다’까지,
영화에 관한 한 항상 가능성이 완성도보다 높았던 그에게
‘아는 여자’는 완성도가 가능성과 함께 보조를 맞춰
경쾌하게 질주한 최초의 작품이 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 작품은 코미디와 멜러의 이음새가 가장 능숙한 한국영화이기도 하다.
역설과 아이러니 빚기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 감독은
치성이 마라톤으로 자살하려다가 김치 냉장고를 타게 되거나,
“죽으려고 환장했냐”며 총을 들이대는 강도에게
“나 죽으려고 환장 같은 거 안해”라며 과감하게 나서는 것 같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시종 관객을 웃긴다.
코를 후비는 치성에게 이연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코 파지 마요. 더이상 코 파면 안돼요”라고 비장하게 말릴 때
시침 뚝 떼는 허허실실 유머의 효과는 극에 달한다.
일단 진지하게 한 장면을 마무리한 뒤
과거 회상이나 상상의 형식으로
코믹하게 그 분위기를 뒤집는 구성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다만 내내 흔들리는 핸드헬드(들고찍기) 촬영방식은
이 동화적으로 예쁘게 짜여진 로맨틱 코미디에서
별다른 효과를 빚어내지 못해 패착으로 보인다.
‘수시로 코피를 흘리는 시한부 인생의 남자’와
‘그 남자를 오랜 세월 속으로만 좋아하고 있었던 여자’라는 기본 설정부터
낙엽 쌓인 숲길과 라디오 방송 사연까지,
이 영화는 러브 스토리의 클리셰(상투적인 표현법)들을 잔뜩 담고 있다.
하지만 그런 클리셰들을 밀고 당기면서 맘껏 놀 줄 아는 이 똑똑한 코미디는
유머가 끝난 자리에서
여전히 수줍게 사랑의 아련함을 말할 줄 아는 매력도 함께 지녔다.
‘실미도’ ‘피도 눈물도 없이’ 등에서
강렬한 남성적 연기로 정형화됐던 정재영은
얼굴 한 구석을 언제나 비워두는 넉넉한 연기를 통해
특정 이미지의 과소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풍부한 표정을 지닌 배우인지를 증명했다.
쑥스러운 듯 기쁨을 감추지 못해 씩씩 웃고,
바보처럼 울다가 진심을 드러내며 항변할 때
이나영은 지금껏 스크린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가장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극의 절정에서 이 영화는 그간 치성이 내내 던진
“사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등장 인물들의 대답을 한데 모아서 들려준다.
그렇게 허다한 사랑의 담론들을 다 끌어안음으로써
오히려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규정하지 않는 이 사랑 영화는
그래도 애틋한 분위기 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오래된 골목길과 나무 대문의 아늑함을 알고 있는 이 ‘강북 멜러’에서
두 주인공의 이름처럼 ‘있는 정성을 다하고’(치성·致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이연·怡然)
사랑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