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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3.7. 부록_유명한 석학들의 논의 附 名碩諸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농지세는 3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공물貢物이 지나치게 많아서 이 때문에
민생이 날로 곤궁해져가고 있습니다. 소용될 경비를 미리 헤아려서 공물을 줄여준다면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각 고을의 공물을 보면 토산물이 균등하지 않고 게다가 방납防納하고 있는데, 1되를
납부하면 될 곳에서 1말을 징수하고, 1필을 납부할 것을 3필로 징수하니, 폐단이 쌓이고
쌓여 이처럼 극한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백성의 일을 합당하게 바로잡으려
면 우리 선조들의 좋은 법을 좇아 그 법을 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
남명南冥 조식曹植(1501~1572)은 상소하여 방납防納의 폐단에 관해 이렇게 논하였다.
“아래의 서리들은 제각기 고을을 나누어 자기 소유물처럼 여깁니다. 때문에 공물을 바치
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가 식구들과 협력하여 집안 살림을 다 팔아서 납부하는데, 납부하
는 곳도 관청이 아니라 사가私家인데다가 원래 바쳐야 하는 공물보다 100배나 많이 바치
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어 떼먹고 달아나는 이가 줄
을 잇고, 주현의 신민들이 바친 공물은 쥐새끼들의 몫이 됩니다. 아무리 망국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이런 나라는 없었으니, 백성들은 빈 그릇을 끌어안고 굶주리며 뼈만 남은 채 서
있고, 서울에는 도적들만 가득합니다.”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1542~1607)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 법에 전세田稅는 10분의 1세보다 더 가볍지만, 전세 이외에도 공물, 진상 및 각
절기의 방물方物50)이 대단히 많습니다. 당초에 공물貢物을 마련할 때는 농지 결수에 따라
균일하게 매긴 것은 아닙니다. 1결에 대한 공물貢物의 값은 쌀 12말이 되기도 하고, 7, 8
말이 되기도 하며, 10말이 되기도 하는 등 일정치 않습니다. 백성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
이와 같이 균등치 못하니, 즉시 변통하지 않는다면 백성들도 소생할 길이 없으며, 나라도
재물을 축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한 도에서 감당하는 공물의 양을 모두 헤아리고, 도내 전결의 양을 계산하여
자세히 참고함으로써 세액을 공평하게 부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예를 들
어 갑읍甲邑이 1결에 1말을 낸다면, 을읍과 병읍도 마찬가지로 1결에 1말씩을 내고, 갑읍
이 2말씩을 낸다면 을읍과 병읍도 2말씩을 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백성들의 부
담이 균등해지고 납부하는 양도 동일할 것입니다. 방물의 가격도 이에 의해 포, 쌀, 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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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방물方物: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조공품朝貢品이나,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임금에게 바치는 그 지방의 토산물을 가리키는
데, 여기서는 두 번째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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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균일하게 환산하고, 1년에 1도에서 나오는 방물의 수는 전결田結에 의해 균등하게 정
해야 합니다. 납부하는 양이 1결 당 1되나 1홉에 불과하므로, 백성들은 방물이 있다는 사
실조차 모를 것입니다.
진상進上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쌀의 말을 단위로 환산하여 그 값을 내게 하되, 전
라도全羅道는 군산群山의 법성창法聖倉에 납부하고, 충청도忠淸道는 공진貢津의 가흥
창可興倉에, 강원도는 흥원창興元倉에, 황해도黃海道는 금곡金谷의 조읍창助邑倉에 납
부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상도慶尙道는 본도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51) 진상미를
본도에 납부하여 병사들의 식량으로 삼고, 함경도·평안도 등 2도는 진상미를 본도本道
에 유치하고, 나머지 5도의 쌀과 콩은 모두 경창京倉으로 수송하게 합니다. 각 관사의 공
물 및 방물, 진상물은 제용감濟用監52)에서 모시를 사서 바치듯이 담당 관원으로 하여금
사서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군수품이 부족하거나 국가에 특별히 사용할 물자가 있을
때 이것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공물貢物과 진상進上의 양을 줄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와 같이 하면 곳간에서 쌀과 콩을 한없이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외방外方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다고 신은 들었습니다. 단지 13개 성
省에서 은銀을 거두어 광록시光祿寺에 납부하면, 그곳에서 진상하거나 공납할 물건들을
모두 사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만일 특별히 쓸 물건이 있으면 공물을 줄여주도록 명하여
그 값으로 은銀을 사용할 것이니, 먼 지방의 백성들은 수레로 운반하는 노고가 없으면서
도, 사방의 공장工匠과 온갖 물건들은 모두 서울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이것은 좋은 법이
니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본받아야 합니다.” 【그 때에 이와 같이 쌀을 마련하였다면 해
마다 7만여 섬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상과 공납 이하 여러 필요한 물자를 경성에서
사서 사용했다면, 백성들도 약간은 소생하였을 것이며, 설사 이의가 있었더라도 마침내
잠잠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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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경상도는……기다렸다가: 당시는 임진왜란 때로서, 경상도의 일부가 왜군에 점령되어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52) 제용감濟用監: 제용감은 모시, 마포, 인삼 등의 진상과 나라에서 내려 주는 의복, 능단綾緞에 관한 일 등을 맡아보던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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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쌀로 거두는 법을 시행토록 청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
음과 같다.
“선대 왕들 때에는 방납防納의 금지가 매우 엄격하여서 모든 공물은 백성들이 관에 직접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점차 땅에 떨어지고 폐습이 날로 심해지니,
간악하고 교활한 서리들이 사적으로 온갖 물건을 갖추어서, 관사를 우롱하고 백성들을
막아서며, 사적으로 마련한 물건들을 납부하되 반드시 100배의 가격으로 토색질하고 있
지만, 근래에 이 일을 혁파하고자 하여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폐단을 혁파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해주海州에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공물법貢物法은 1결에 쌀 1말씩을 거둬들여, 관이 경京에 납부하고, 민民은 쌀을 갖추어
낼 뿐이니, 이는 오늘날 백성들을 구제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만일 대신들과 해당 관사로
하여금 8도의 지도와 호적을 모두 가져오도록 하여, 그 고을마다의 인물의 성대함, 전결
의 다과, 물산의 풍부 여부를 조사하고, 다시 그곳의 공물을 부과하여 수고를 균일하게 나
누고, 공물 중에서 국용에 긴요한지의 여부를 헤아려서 경감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8도의
고을에서 마련해 내는 것을 모두 해주海州에서 1결에 1말씩을 거둔 것과 같이 해야 합니
다. 그런 뒤에 그 명령을 반포한다면 어찌 불가능할 일이 있겠습니까” ?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이 상소하여 말했다.
“진상進上은 온 백성들이 응당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본래의 물건을 바치
지 않은 지 너무나 오래되었습니다. 그 중에 푸성귀와 나무 열매 같은 것도 있었는데, 이
는 애초에 아이들 장난거리로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 백성들은 이를 바치기 위해 옷
과 음식을 팔아야하니, 전하께서 이 점을 아신다면, 하루아침의 달고 기름진 상차림을 물
리치시고, 우리 백성들이 하루 종일 도탄 속을 헤매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시지 않으시겠
습니까?
오늘날 논의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진상은 주상께서 덜어주시지 않는다면 신하된 자들이
감히 견감하자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당강唐羌은 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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荔枝53)를 감면해 달라고 청하였고 공규孔戣는 감리蚶蜊54)를 감면해 달라고 청하였지만, 임
금은 그들에게 상을 내렸고 훌륭한 사관이 이 일을 썼습니다. 임금을 섬기는 일은 덮어놓
고 떠받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진상은 날마다 바치고 달마다 바치고 해마다 바치는 규정이 있는데, 이것들을 모
두 다 폐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경영京營에 바치는 일은 손순효孫舜孝(1427~1497)55)에
게서 나왔으니, 은총을 사는 계책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군자는 진실로 그 일을 비
난할 것입니다.”
손순효가 경기 감사였을 때에 마침 중국 사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오랫동안 머
물 것을 염려하여 백성들에게서 물고기와 꿩을 거둬들여 접대에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
런데 중국 사신이 급히 돌아가니 물고기와 꿩을 쓸 곳이 없어서, 날마다 단자로 사옹원司
饔院에 보내기로 하였다. 그것이 다 없어질 때쯤이 되자 손순효는 ‘교체 시기가 다가오니
마땅히 신이 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하고는 백성들에게 한 번 더 거두어서 올렸다. 그
런데 손순효에 이어 감사로 부임한 자들은 생각하기를, ‘순효가 이미 그렇게 하였는데 신
이 어찌 감히 폐지하겠는가?’라고 하고는 옛 규정을 그대로 끌어다가 씀으로써 후대에까
지 이어지게 되었다. 순효가 임금을 지성으로 사랑하여 여러 읍을 순행하면서 혹시 입에
맞는 채소라도 있으면 바로 봉진하였으니, 이것이 경아전京衙前에서 물고기와 꿩을 바치
는 잘못된 관행이 된 것이다【.손순효孫舜孝는 성종 때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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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여지: 여지란 지금도 먹는 리치[Litchi chinensis. leechee]를 말한다. 본래 딸기 빛이 도는 붉은 색 껍질 속에 반투명한 흰색
의 과육을 가진 열매로, 열매는 날것으로 먹기도 하지만 통조림으로 만들거나 또는 말려서 상업용 여지로 만든다. 신선한 과
육은 사향 같은 맛이 나는데, 마르면 시고 매우 달다. 중국 광둥인은 아주 옛날부터 이 열매를 즐겨 먹었으며, ‘남국사대과품
南國四大果品’의 하나로 이를 꼽는다. 1775년 자메이카에 전해지면서 서반구로 도입되었다.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남해南
海에서 바치는 용안龍眼과 여지荔枝가 백성의 큰 폐해가 되었는데, 여남汝南 당강이 상소하기를 “남쪽 지방에는 악충惡蟲· 맹수猛獸가 도처에 가득한데, 용안과 여지를 따다가 그 화를 입어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물건이 대궐에 오른다 하
여 반드시 장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화제가 그대로 따랐다. 『후한서後漢書』 권4 「효화효상제기孝和孝殤帝紀」.
54) 감리: 감리蚶蜊란 밤색무늬조개[Glycymerididae]를 말하는 것으로, 맛이 좋고 크기가 크며, 삼각형의 꼭짓점으로부터 좌우
대칭을 이루며 1/4원형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을 나타낸다. 전 세계의 대륙붕 지대나 조하대潮下帶의 바위틈이나 바위 아래에
서식한다. 당 헌종唐憲宗 때 화주 자사華州刺史로 있던 공규가 명주明州에서 해마다 바치는 담채淡菜와 감리를 바다에서 경
사京師까지 운송하느라 수많은 사람을 고생시킨다고 상소하여 없앤 일을 말한다. 『당서唐書』 권163 「공규전孔戣傳」.
55) 손순효: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齎·칠휴거사七休居士, 시호는 문정이다. 성리
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중용』·『대학』·『역경』 등에 정통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대나무 그림에 능하였다.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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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 초에 고을 서리들의 자손을 뽑아서 서울에 인질로 보냈는데, 이것을 기인其人56)이라
고 하였으니 기인이라는 칭호는 오래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기인을 사재감司宰監에 소
속시키고 궁궐 안에서 사용할 모든 땔나무를 그들로 하여금 바치도록 하기도 하고, 혹은
그 값으로 면포를 억지로 징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들이 지
방의 백성들을 침탈하여 거두니 매우 큰 해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공물대장[貢案]은 연산군燕山君 때에 많이 증가해서 오랫동안 백성들의 폐단
이 되었습니다. 선조 갑진년(1604)에는 청廳을 설치하여 개정하고, 읍세의 강약, 전결의
다과, 토산의 유무를 고려하여 이 읍과 저 읍을 조절하고 이리저리 옮겨서 균평하게 하였
더니, 100년 동안 묵었던 잘못된 관행이 하루아침에 혁파되었습니다. 그러나 방납防納이
심해지는 폐단은 이전보다 여러 배 증가하였으며, 서리들은 이익을 낚아채고, 세력 있는
집안들이 농단하므로, 공용公用이 증가하지 않고 백성들은 더 힘이 들고 곤궁해졌습니
다. 이것은 실제로 나라에 기강이 없고, 사람들이 염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대적으로 개
혁하지 않고서는 제거할 때가 오지 않을 것이니, 병든 나라를 고치려면 그 병에 약을 써야
합니다.
선조 무신년(1608)에 이원익이 처음으로 대동大同, 선혜宣惠의 정책을 경기도에 시행하
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에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1564~1631)이 호서관찰
사湖西觀察使가 되어, 이원익의 방법에 의거해서 온 도의 전세田稅와 각종 역을 조절하
는 혈법絜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적을 작성하여 보관하
여 두었을 뿐 시행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무인년(1638)에 잠곡潛谷 김
육金堉이 이 도의 관찰사가 되었을 때, 이 전적을 발견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백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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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기인其人: 기인은 지방 호족들의 독자적인 기반을 효과적으로 억누르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10~15년간 중앙 관아에서 잡
무에 종사하면서 고향 사람에 대한 신원 조사나 지역 사정에 대한 자문에 응하는 등의 일을 하였으며, 입역이 끝나면 기인전
其人田이 지급되고 관직 진출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고려 사회가 안정되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인질 확보라는 본
래의 의미가 없어지면서 점차 그 지위가 하락하여 갔고, 점차 노예와 다름없거나 심지어 노예보다도 못한 극단적인 천역이 되
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시 이 제도가 폐지되기도 했으나, 대체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어 곧 부활되었고, 이 상황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지속되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향리의 지위 자체가 고려 시대보다 더 하락하는 가운데, 1409년(태종 9) 이
후에는 땔나무와 숯 등 시탄柴炭 공납의 역을 지게 되었으나, 결국 1609년(광해군 1) 대동법 실시와 함께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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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방책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조정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효종 원년(1650)이 되어 관직이 더욱 높아지자,
김육은 가장 먼저 이 설을 개진하고, 이에 이 국局을 대동청大同廳이라고 이름하였습니
다. 연성延城 이시방李時昉(1594~1660)57)도 이 법을 참고하여, 도 전체의 전안田案을 전
부 계산하였습니다. 읍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농토의 양에 비겨 1결에 쌀 12말씩을 바치
게 하고, 배로 운반하여 강으로 올려보냈습니다. 산골의 읍과 먼 바다에 있는 곳들은 쌀에
준거하여 베를 바쳤고, 모두 서울로 운송되었습니다. 진상과 공납, 종묘사직의 제사와 향
사, 접빈객의 모든 물건들로부터, 자질구레하게는 꼴과 땔나무 따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이로부터 마련되었습니다. 관청에서도 그 넓고 좁음을 느슨히 하거나 팽팽히 죌
수 없었고, 아전 역시 그 높고 낮음을 늘리거나 줄일 수 없었으니, 고쳐 내게끔 하는 일이
없이 항상 고르게 분배되어, 봄가을 두 번으로 이 물건이 모두 갖추어지고 그 때에 맞춰
모여들었습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소를 올려 말했다.
“당초 대동법을 창설하였을 때는 쌀은 먹을 만큼이면 되었고 면포의 곱기는5새 [升],58) 길
이는 35자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점차 옛 제도를 잃어버려서 쌀은 백옥미白玉米가
되어, 백옥미 외에는 걷지 않았습니다. 쌀의 폐단은 한도가 있는데, 면포는 해마다 요구하
는 양이 증가하고 곱기가 8새에 이르렀고 길이는 45자에 이르렀습니다. 영세한 농민들은
힘을 다해 새가 가늘고 길이가 긴 포를 바치지만, 그것이 서울의 관아에 이르게 되면, 이
서吏胥들이 모두 바꿔치기 하여 공용으로 쓰는 포들은 모두 거칠고 짧았습니다.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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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연성 이시방: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호는 서봉西峯,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귀貴의 아들이며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이다. 인조반정 당시의 공신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당시에도 군사와 군량을 모으는 공을
세웠다. 인조 대이던 1645년 호조참판이 되었을 때 호서와 호남 지방에서의 대동법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이때는 뜻
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효종 대이던 1651년 호서 지방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을 때, 영의정 김육의 정치적 보호 아래
호조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하였다.
58) 승升: 승이 피륙의 짜인 날을 세는 단위로 쓰일 때는 ‘새’라고 한다. 한 새는 날실 80올[縷]이다. 『의례』 「상복」 참최장斬衰章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참최상에 당초의 복은 거칠었다가……점차 상복의 베가 가늘어지고 다듬질까지 한다. 초기에는 참
최의 최상을 삼승포三升布로 짓고 육승포六升布로 관冠을 지었다가, 장사를 지낸 뒤에는 복을 낮추어 그 관의 승수인 육승포
로 최상을 지어 입고 칠승포로 관을 지어 쓰며, 소상 뒤에는 또 낮추어 그 관의 승수인 칠승포로 최상을 지어 입고 팔승포八升
布로 관을 지어 쓴다.”라고 하였다. 태조 7년(1398) 새벽 조회에서 대사헌 성석용成石瑢이 “늘 사용하는 오승포五升布(닷새
베)는 무거워서 운반하기가 어렵고 발이 굵어서 쓰이지 않는데, 촘촘히 짠 10척尺을 1필로 삼는다면 가볍고 쓸 만하겠습니
다.”고 하자, 임금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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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아랫사람은 이익을 얻고 윗사람은 원한을 얻으며, 백성들은 피를 빨리고 관리들은
자기 배를 두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평천군平川君 신완申琓(1646~1707)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양전하는 제도는 당초에 대단히 소략하였습니다. 척량하는 자[尺]가 상등
上等, 중등中等. 하등下等으로 각각 달라서, 상전을 재는 자는 20지指, 중전을 재는 자는
25지, 하전을 재는 자는 30지로, 모두 실제 면적으로 44척을 단위로 하여 재었습니다.
1촌이 1속束이며 100부가 1결結이었습니다. 중국의 묘법畝法과 비교해 보면 상전上田 1
결이 25묘 4푼쯤 됩니다. 그런데 팔도의 전품田品은 동일하지 않아서 이 3등급으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뒤에 6등으로 고치고, 6등급으로 차이를 둔 뒤에 비옥도에 따라 전세를 부
과하니 조금 균평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사람은 농토가 많은 데도
결수가 적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밭이 적은데도 결수가 많으니, 비옥도를 뒤바꿔 기록
함으로써 부과된 세금이 균평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반드시
20년에 한 번 토지를 다시 양전하도록 규정해 두었는데, 매번 토지를 측량할 때마다 부유
하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갖은 수를 써서 이것을 저지시켰습니다.
고려 말에 토지 제도가 매우 문란해지자 우리 태조께서는 토지를 균평히 하는 제도를 회
복하려 하였지만, 대대로 내려오던 세력가들의 저지로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공양왕 때
에는 논란을 극력 배제한 채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벼슬의 고하高下에 따라 토지를 많거
나 적게 받도록 하였습니다. 논 1결에서는 조미糙米(왕겨만 벗긴 쌀) 30말과 백미白米 2
말씩을 거둬들이고, 밭 1결에서는 잡곡雜穀 30말과 대두大豆 2말씩을 거둬들이며, 상중
하上中下로 밭을 나눈 뒤에 척량할 때 그곳에 적용할 긴 자와 짧은 자를 따로 정했습니다.
다만 그 해의 농사에 따라 잘되고 못된 정도를 10단계로 나누어, 10분의 1의 손실이 있었
으면 세금으로 10분의 1을 감면해 주고, 손실분이 10분의 8이면 세금을 전부 감면해주었
습니다. 답험踏驗하는 법으로는 수령守令이 1차로 답험하고 감사監司 정위관이 2차로 살
피며 수령관이 3차로 답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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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2년(1393)에 손실법損實法을 개정하여 10분의 2의 손실까지는 전부 거둬들이
고, 10분의 3 이상이면 손실에 따라 감면해 주었으며, 절목節目은 모두 이전의 제도를 사
용하여 비로소 경차관敬差官으로 하여금 두루 다니며 직접 살피니, 이것이 곧 주가周家
의 철법徹法입니다.
세종 19년(1437)에 법을 다시 개정하여 하삼도下三道에 먼저 시험하였습니다. 도道
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고, 한 도 안에서 각 고을도 3등급으로 나누었으며, 한 고을
안에서 전품田品을 3등급으로 나누었으니, 이것을 과科로 삼고 등급에 따라 세액을 달리
하였습니다. 흉년凶年을 만나면 곧 감손하는 양은 하후씨夏后氏의 공법貢法을 대략 모방
하되 수년을 비교하여 상수常數를 정하였고, 상도上道의 상전上田, 하도下道의 하전下田
사이에는 9등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세종 25년(1443)에 전분 육등, 연분 구등으로 개정하고 다시 결법結法을 정하였습니다.
상상년上上年에는 1결에 20말씩을 거두고, 하하년下下年에는 4말씩을 거두는 것을 정식
으로 삼았습니다만, 그러나 전제田制가 날로 문란해지고 부역賦役이 균등치 않았습니다.
임진란 이후 갑진년(1604)에 처음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강원도를 양전하고 지금까지 이
토지대장을 그대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 사이 해가 100년이나 지나는 동안 토지의 품등
이 변하였을 뿐 아니라 진전陳田과 기전起田59)이 서로 뒤바뀌어, 그 해 대란이 일어난 뒤
에는 꼴이 되지 못했습니다. 가까스로 옛날 법에 의거하면서 거칠게나마 법을 만드니, 비
록 한 자호字號(글자 번호)에 속하는 농토가 5결이라도 전묘田畝가 서로 인접해 있지 않
아서, 같은 한 자호 안에서도 10리 혹은 15리가 떨어져 있기도 하며, 그 안에 다른 서너 자
호가 끼어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단지 부치고 있는 토지만 양전하고 묵은 곳은 버렸던
것인데, 추후에 그것들을 다시 등록하게 되면서 측량과 기재記載에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모두 개간되고 있어도 가경加耕이라 칭해지는 곳도 있고, 혹은 각 고을에서 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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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진전과 기전: 진전陳田은 우리말로 묵밭, 즉 경작하지 않고 벼려두어 황폐荒廢한 전지를 말한다. 기전起田이란 농사를 지으려
고 논밭을 일구는 일, 또는 그렇게 일구어 농사를 짓고 있는 논밭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후자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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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結60)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를 통해 서원書員이 자기 호주머니를 불리기도 합니다. 서
너 결結의 땅에 다만 10여 부負의 세금만을 매긴 것이 있는가 하면, 서너 부의 땅에 10여
부의 세금을 더하는 수도 있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도 인조조仁祖朝(1634)에 토지를 양전한 뒤에 다시 양전하지 않았습니
다. 충청도·경상도·전라도는 토품이 평안도와 황해도에 비해 10배나 비옥하지만, 조가
의 부세는 이에 의하지 않고 다시 토지를 양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70년이 지난 뒤라
문란하게 되어, 세입이 점점 줄어들고 호족이 이익을 독점하게 되니 참으로 한심한 지경
입니다.
충청도와 강원도는 절반쯤 측량하다가 중간에 그만두었고, 황해도는 단지 4개 고을만을
양전하였을 뿐이며, 이 상태에서 다시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을 함
에 있어 오래 지속할 수 없는 면이 많은데, 그것이 진실로 고질병이 되고 맙니다.
다만 법전에 실려 있는 양전量田의 규칙이 제아무리 상세하고 치밀하다고 하더라도, 감
색監色61)의 농간과 농부의 속임수는 참으로 막기 어렵습니다. 등급 순서[等第]의 높고 낮
음은 면임面任62)의 입에 달려있고, 양전의 척도가 지나친가와 모자라는가는 심부름꾼의
손에 맡겨져 있으니, 뇌물의 다소에 따라 제멋대로 등급을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합니
다. 그러므로 경기도에서는 계묘년(1663) 양전의 일을 다 끝내고 1년이 지난 뒤에 갖춘
것은 모두 다 상세하고 치밀하였지만, 그럼에도 중간에서 간사하게 속이는 폐단을 다 막
을 수는 없었습니다. 같은 자호를 가진 5결 중에서 부민富民의 농토는 자호의 처음에 두
고, 뇌물을 쓰면 집부執負를 처음에 대단히 헐겁게 하다가, 자호의 끝에 가면 세금을 보다
많이 더하여 그 양을 채웁니다. 또 자호의 처음에 두어 세금을 미리 더하였다가, 뇌물을
쓰면 자호의 끝에 가서는 세금을 감면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직전直田에 벌의 허리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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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은결隱結: 실제로 경작하고 있으면서 부정이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국가의 토지대장에서 빠진 토지를 말한다. 처음에는 권세
층·토호들이 토지를 사점私占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으나, 후기로 내려올수록 향리와 심지어 수령 등 지방 관리의 부정·불
법 행위로 인한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평가된다. 은결을 만드는 방법은 양전量田할 때 결부수結負數를 조작한다든가, 농지를
새로 일구거나 묵밭을 다시 경작하게 되었을 때 면적을 조작하는 등 다양했다. 특히 양전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은결이
크게 증가하므로, 양전 반대 세력의 이해 관계가 여기에 걸려 있었고, 그 폐단이 조선조 말기까지 지속됨으로써 농민 항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61) 감색監色: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총칭하는 말로서, 오늘날 말하는 감독·실무자이다.
62) 면임面任: 지방의 각 면에서 호적戶籍 등의 공공사무公共事務를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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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형태63)의 농토는 뇌물을 주면 허리를 너비로 삼아 그 세금을 반감해주고, 뇌물을 안 주
면 머리로 너비를 삼아 그 측량 면적을 배가시킵니다. 이런 것들 외에 갖가지 간악한 허위
에 대해서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작년 경연經筵에서 병조판서 김구金構(1649~1704)가 유집일兪集一(1653~1724)의 방
전법方田法64)을 가지고 황해도의 4읍에서 먼저 행하도록 청하였습니다. 4읍의 양전을 모
두 끝낸 뒤, 소민小民들은 그것이 균평하였다고 하였지만 호족들은 불평하였으며, 중간
에 비방과 칭찬이 각기 엇갈리며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부地部에 올려보낸 그 구정측
량법[丘井量法]의 계본啓本과 도장圖帳65)을 보니, 절목節目이 상세하고 치밀하며 세금
을 분배한 것도 지극히 균평하였습니다. 돈墩(쌓아올린 흙무지)을 정하고 방략을 설정하
여 각기 타량한 지 만 1개월 사이에 일을 다 끝마쳤으니, 이를 이전의 양전법과 비교해보
면 품은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효과는 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 방법은 그 구丘와 정井에
의거하여 거리를 측정하니, 한 고을 안에서 동서남북의 멀고 가까움과 산천과 전야의 형
세가 마치 손금 보듯 뚜렷하였습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이 법이 간편하다는 것을 믿고서
8도에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 암행어사의 서계書啓66)를 보니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방전方田을 시행하는
법은 정전井田의 여제餘制에서 나왔고, 규모規模가 치밀하여 터럭만큼도 새지 않으니,
돈墩과 표標를 설립하고 가로세로 정확하게[井井] 하여 문란함이 없습니다. 산림천택山
林川澤도 모두 1돈墩의 범위 안에 있고, 사람들은 각기 토지 등급의 높고 낮음, 토지 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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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직전에 벌의 허리 같은 형태: 직전直田이란 네모가 번듯하고 기름하게 생긴 밭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직전에 벌의 허리 같은
형태’란 밭의 기본 모양은 직전이지만 모래시계처럼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어 그 너비가 일정하지 않은 밭을 말한다.
64) 방전법方田法: 정방형으로 토지를 다스리고, 이렇게 조성된 명료한 토지 구획 안에서 생산된 물자에 대해 균평하게 세를 걷
으려는 정책 원리를 말한다. 이는 고대 세계로부터 동아시아에서 하나의 이상적 통치 방법으로 여겨져 오랜 내력을 지녔는
데, 북송 시기 중국의 왕안석은 이를 집대성하여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일련의 개혁 조치[新法] 중 하나로 시행하였다. 부
정 또는 불법적으로 은닉된 땅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세율의 평준화를 기하기 위해, 한 변의 길이가 천 보步인 정사각형의 땅
1방方을 단위로 토지의 비척肥瘠을 측정하고, 이를 5등급으로 나누어 그에 따라 과세하려는 것이었다. 1072년 처음으로 시
행하였으나, 측정이 복잡하고 지주층의 반대가 심하여 실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행 2년 뒤 일단 폐지되었다. 이후 화북의
대지주와 대상인을 기반으로 삼는 구법당舊法黨과 강남 출신 신진 관료들이 중심이 된 신법당新法黨의 정권 다툼 와중에 부
활과 폐지가 되풀이되었는데, 1085년 기본적으로 효력이 정지되었고, 1120년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명말청초의
개혁사상가 황종희黃宗羲가 그의 저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그 변통을 통한 부활을 주장하는 등, 그 후로도 오랫동
안 동아시아 토지 개혁 사상의 한 중요한 참조 지점이 되어 왔다.
65) 구정측량법의 계본과 도장: 원문 “丘井量法啓本圖帳” 중 구丘와 정井은 모두 중국 고대의 토지 단위로, 1구는 16정, 1정은
900무畝에 해당한다. 계본啓本은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중요한 일로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이며, 도장圖帳은 토지 형태를 나
타내는 그림을 갖춘 장부 문서이다.
66) 서계書啓: 임금의 명령을 받은 관원이 돌아와서 써 바치는 복명서復命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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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많고 적음을 판정할 수 있으며, 끝내 균평하도록 돌아가 낮고 높음과 가볍고 무거움이
여러 사람의 입에 의해서 결정되니, 실로 간악함을 막는 긴요한 방법이며 역을 균등히 하
는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은 척량의 제도는 실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
이다 보니, 사람들의 원망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그러나 몇 달 안에 세 읍에서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제도가 엄밀하여 간악한 거짓이 용납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양전
의 제도는 황해도 관찰사의 방법에 의하고, 재실災實의 등급을 정하는 것은 구전동의丘
典同議의 규약을 따르십시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말하였다.
“전세田稅는 1결에 쌀 4말씩을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물貢物은 각 도에서 많은
것은 16말씩, 적게는 12말씩이니, 원전元田의 전세와 비교한다면 3, 4배에 이른다. 그러나
전세에 응하는 것은 오히려 견딜 만하였다. 임진난 뒤에 연분구등年分九等의 법이 폐지
되고, 상상등上上等으로 1결에 쌀 20말씩을 내던 밭이 모두 변하여 하하등下下等으로 1
결에 쌀 4말씩을 내는 법례를 따르게 되어, 비록 대동법에 의한 역이 별도로 있었지만 도
탄에 빠질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만약 전결田結에 대해 공물을 베로 거둬
들이고, 또 전결에 따라 속오束伍67)를 낸다면, 농민은 본래 전세에 응한 뒤 또 공물에 응하
고, 거기에다 또 속오로 수포收布를 더하니, 반드시 그 농토는 황폐화되어 더 이상 갈아지
지 않을 것이다”.【이 조항은 토지에 대해 베를 내는 것을 전제로 한 논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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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속오: 속오는 다섯을 한 단위로 묶어놓았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조선 후기 속오법에 따라 편성된 지방 군대인 속오군의 역
과 관련하여 납부하는 베 또는 쌀을 의미한다. 속오군은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지방 군대의 재건을 위해 설치되어, 정유재란
때는 실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평시에는 연중 일정 기간 군사 훈련을 받고 전시에 전쟁에 나서는 것이 기본 임무였는데, 특별
한 경우 군포軍布를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고, 이 예외가 관행처럼 되면서 군포 납부가 일반화되어 갔다. 특히 도성 중심의 오
군영五軍營 체제가 확립되면서 거의 유명무실해졌으며, 양인 중심에서 천민 중심으로, 지역 방위를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수
포收布를 위한 재정적 목적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갔다.
우하영의 천일록 --토지제도 田制 중에서....
석학 名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