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니 타다
낭만적인 은색 지프니
동그란 소년의 눈망울 매달고 달리는 막다른 골목
맨발의 아이들 손을 흔드네
집들은 낡은 영화 세트장처럼 허름해서
반나절 공중을 선회하는 바다새 대신
뚫린 창으로 너를 기다리는 눈먼 내가 스치네
황혼에 널어놓은 빨래는 조용해서
초대받은 손님처럼 바깥 구름은 느긋해질 수 없다며
기댈 어깨를 내어주네
서 있는 것이 모두 정류장이 되는
저물어가는 톤도*의 땅에서 시계를 버리고
가방을 버리고 속눈썹을 버리고
단맛에 길들여진 혀를 버리네
흔들리는 야생에게 탈탈 털어낸 희망마저 돌려주고
지프니 심지의 촉 점화를 위해
부르릉 나에게 시동을 거네
*필리핀 빈민가
<시작 노트>
서 있는 곳이 모두 정류장이 되는 필리핀 빈민가 톤도에서 나는 보았습니다. 집집마다 널어놓은 빨래의 남루함을, 뚫린 창마다 눈먼 권태로움을. 맨발로 걷던 한 아이가 아무렇게 버려진 유리 조각 밟고도 환히 웃는 눈웃음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을 것만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은색 지프니 타려는 사람들로 분주한 남의 나라에서 나는 초대 받지 못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잠시 머문 톤도에서 또 다른 나에게 부르릉 시동을 걸어야겠다고 욕망에 가득 찬 손목시계와 가방, 가식으로 얼룩진 속눈썹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이 이것들뿐일까요. 주섬주섬 뒤지다 야생에게 탈탈 털어낸 희망마저 돌려주고 단맛에 길들여진 혀마저 버리기로 했습니다.
첫댓글 강지희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올립니다.
개미떼
팽팽한 고무줄이 되죠
한 마리... 세 마리... 아홉 마리...
저물도록 만드는 파장
담벼락은 세상을 거꾸로 보기 위해 물구나무선 것인데
새살 돋은 감나무가 허공을 당겨주려 팔을 뻗어요
한 블록 위에 또 다른 블록 위로 줄 서서
어스름 손잡고 걸어가는 개미들
늘어났다 줄어든 발랄한 행렬에
노을 선생님 회초리 들고 아무리 훈계해도
푹 빠진 고무줄놀이 끝낼 수 없네요
살이 차오른 체온을 어쩌다가
시치미 떼는 거미가 끊으려 하지만
어둠은 이미 오래 전 단짝인걸요
일찍 공중에 솟구친 개미 그림자가
팽팽한 고무줄에 발을 걸고
척척 달빛을 개어서 담벼락을 덮고 있네요
- 『대구의시』(2019)에서
빈민촌의 갈래난 구석을 보고온 것을 떠 올리며 안스러움을 쏟아내셨군요
어디든 서 있으면 정류장이 되는 곳이고
아이가 깨진 유리를 밟아도 별 것 아닌 것 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그저 씩 웃어주는 톤도라는 빈민촌
욕망으로 환치된 시계 가방 다 버리고 가식인 속 눈썹까지 단맛만 보는 혀까지도.....
다시 태어나는 시인을 보는 듯합니다
단기 선교라도 가신 것 같은데......
아마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일 것입니다
시인이 멀리서 와 곁에 있어 주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도 별반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나무껍질 벗겨먹고 (송기)
물곳 삶아먹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빈곤은 하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지 않아요
가장 무서운 것이 빈곤일 것 같습니다
이만큼이라도 잘 살때 아끼고 저축하여 온 나라가 부강해져야겠습니다
좋은 시 잘 읽고 갑니다
·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맨발로도 소년의 눈망울이 맑고 둥근 것은?
· 낡고 허름한 집의 뚫린 창, 푼크툼punctum으로 너를 기다리는 눈 먼 나의 시선은?
· 황혼에 널어놓은 빨래가 저리도 조용한 것은?
· 저물어가는 톤도에서 버리고 싶은 것이 톤tone도 사물도 신체도 아닌 까닭은?
· "왜 모든 쓸쓸한 것들은 집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가?"
· 지프니가 은색인 이유: 낭만과 현실, 희망과 절망, 남루와 숭고, 지와 사랑-연민 사이엔 무엇이 있는가?
· 시는 절대적인 현실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핵심이다.(노발리스)
·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점화點化하는 순간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