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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41권
8. 권학품(勸學品)을 풀이함
【경】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단(檀)바라밀을 구족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고,
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구족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합니다.
보살마하살이 물질[色]을 알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고, 나아가 분별[識]에 이르기까지를 알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눈[眼] 내지 뜻(意)을 알고자 하거나,
물질[色] 내지 법을 알고자 하거나,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을 알고자 하거나,
눈의 접촉[眼觸] 내지 뜻의 접촉[意觸]을 알고자 하거나,
눈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受] 내지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을 알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며,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婬瞋癡]을 끊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합니다.
보살마하살이 신견(身見)ㆍ계취(戒取)ㆍ의심[疑]ㆍ음욕(婬慾)ㆍ진에(瞋恚)ㆍ색애(色愛)ㆍ무색애(無色愛)ㆍ도(悼)ㆍ만(慢) 및 무명(無明) 등의 온갖 결사(結使)와 전(纏) 등을 끊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고, 4박(縛)과 4결(結)과 4전도(顚倒)를 끊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며,
10선도(善道)를 알고자 하거나, 4선(禪)을 알고자 하거나, 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4념처(念處) 내지 18불공법(不共法)을 알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합니다.
보살마하살이 각의삼매(覺意三昧)에 들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고,
6신통(神通)과 9차제정(次第定)과 초월삼매(超越三昧)에 들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며,
사자유희(師子遊戱)삼매를 배우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고,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를 얻고 온갖 다라니문을 얻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합니다.
보살마하살이 수릉엄(首楞嚴)삼매ㆍ보인(寶印)삼매ㆍ묘월(妙月)삼매ㆍ월당상(月幢相)삼매ㆍ일체법인(一切法印)삼매ㆍ관인(觀印)삼매ㆍ필법성(畢法性)삼매ㆍ필주상(畢住相)삼매ㆍ여금강(如金剛)삼매ㆍ입일체법문(入一切法門)삼매ㆍ삼매왕(三昧王)삼매ㆍ왕인(王印)삼매ㆍ정력(淨力)삼매ㆍ고출(高出)삼매ㆍ필입일체변재(畢入一切辯才)삼매ㆍ입제법명(入諸法名)삼매ㆍ관시방(觀十方)삼매ㆍ제다라니문인(諸陀羅尼門印)삼매ㆍ일체법불망(一切法不忘)삼매ㆍ섭일체법취인(攝一切法聚印)삼매ㆍ허공주(虛空住)삼매ㆍ삼분청정(三分淸淨)삼매ㆍ불퇴신통(不退神通)삼매ㆍ출발(出鉢)삼매의 여러 삼매와 당상(幢相)삼매 등 이와 같은 모든 삼매문(三昧門)을 얻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온갖 중생들의 원(願)을 채워주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합니다.”
【논】
【문】 초품(初品)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로 얻을 바가 있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거듭 말하는가?
【답】 먼저는 다만 “이러한 공덕을 얻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라고 찬탄했을 뿐이다.
아직 반야바라밀을 설명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미 반야바라밀의 맛[味]을 들었는지라 그 밖의 공덕인 이른바 6바라밀 등을 얻고자 하기에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 위에서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모든 법이 공이라고 말하자,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법이란 아주 없는 것[斷滅]이라 다시는 더 지을 바도 없다.”라고 여기므로,
이런 사람들의 의심을 끊기 위하여,
“보시 등의 갖가지 공덕을 얻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반야바라밀이 진실로 공하여 아무것도 없고 아주 없는 것이라면,
“보시 등의 공덕을 행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지혜 있는 분의 말씀이 어떻게 처음과 나중이 틀리겠는가?
또 앞에서는 자세히 말씀하셨고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며,
그곳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이시고 여기에서는 수보리의 설명이다.
또 반야바라밀은 깊고 묘하기 때문에 거듭 말한 것이니,
비유컨대 마치 덕(德)을 찬미(讚美)하는 까닭에 ,“참으로 훌륭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6바라밀의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5중(衆)을 안다 함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함과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 등을 보는 것이니, 6정(情)ㆍ6진(塵)ㆍ6식(識)ㆍ6촉(觸)ㆍ6수(受)도 또한 그와 같다.
온갖 세간에서 얽어 묶는 것은 느낌[受]이 주(主)가 된다.
느낌 때문에 모든 결사가 생기니, 즐거운 느낌으로 탐욕이 생기고 괴로운 느낌[苦受]으로 성냄이 생기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으로 어리석음이 생긴다.
3독(毒)은 모든 번뇌와 업의 인연을 일으키나니,
이 때문에 단지 느낌만을 말하고 그 밖의 마음에 속한 법인 이른바 생각[想]과 기억[憶念] 등은 설명하지 않는다.
3독(毒)과 10결(結)과 모든 사(使)ㆍ전(纏)에서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각의삼매ㆍ초월삼매ㆍ사자유희삼매 등 이러한 보살들의 모든 삼매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온갖 중생의 원을 채워주는 일은 먼저 이미 설명했다.
【경】 “이와 같은 선근(善根)을 구족하여 항상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고자 하거나,
비천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자 하거나,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자 하거나,
보살의 정상[頂]에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에 혜명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정상에서 떨어진다 하는 것인지요?”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방편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지 않은 채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에 들어가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고 또한 보살의 지위에도 들지 못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마하살에게 법(法)이 생하기[生] 때문에 보살의 정상에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살에게 생한 것이라 하는지요?”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생한 것이란 법애(法愛)를 말합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무엇이 법애인지요?”
수보리가 말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은 공한 것이라고 염착(念著)을 일으키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은 공한 것이라고 염착을 일으킨다면,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도(道)를 따르면서도 법애(法愛)가 생한[生]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물질은 모양 없는[無相] 것이라고 염착을 일으키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은 모양 없는 것이라고 염착을 일으키며,
물질은 조작 없는[無作] 것이라고 염착을 일으키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은 조작 없는 것이라고 염착을 일으키며,
물질은 고요히 사라진 것[寂滅]이라고 염착을 일으키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은 고요히 사라진 것이라고 염착을 일으키며,
물질 내지 의식을 무상한 것이라고 하거나, 물질 내지 의식을 괴로운 것이라고 하거나, 물질 내지 의식을 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염착을 일으키면,
이것을 보살이 도를 따르면서도 법애가 생한 것이라 합니다.
나아가 ‘이것은 괴로운[苦]이니 알아야 하고, 쌓임[集]이니 끊어야만 하며, 다함[盡]이니 증득해야 하고, 도(道)이니 닦아야만 한다.
이것은 더러운[垢] 법이고 이것은 깨끗한[淨] 법이다.
이것은 가까이해야 하고 이것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보살로서 행해야 할 바요 이것은 보살로서 행해서는 안 될 바이다.
이것은 보살의 도이고 이것은 보살의 도가 아니다.
이것은 보살의 배움이고 이것은 보살의 배움이 아니다.
이것은 보살의 단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이고 이것은 보살의 단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이것은 보살의 방편이고 이것은 보살의 방편이 아니다.
이것은 보살이 무르익은 것[熟]이고 이것은 보살이 무르익은 것이 아니다.’라고 [염착하기도]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 모든 법에 염착(念著)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도를 따르면서도 법애가 생한 것이라 합니다.”
【논】
【문】 어떠한 선근 때문에 악도(惡道)와 빈천(貧賤)한 곳과 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지 않고 또한 보살의 정상에서 떨어지지 않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탐내지 않는 선근을 행하기 때문에 애욕 등의 모든 결사(結使)가 약해지고 얇아지면서 깊이 선정에 들어가고,
성내지 않는 선근을 행하기 때문에 성냄 등의 모든 결사가 얇아지면서 깊이 자비심에 들어가며,
어리석지 않은 선근을 행하기 때문에 무명 등의 모든 결사가 얇아지면서 깊이 반야바라밀에 들어간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선정과 자비와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일마다 얻지 못함이 없거늘 하물며 네 가지의 일[四事]이겠는가?
【문】 무엇 때문에 네 가지 일 가운데에서 단지 정상에서 떨어지는 것만을 묻는가?
【답】 세 가지의 일은 먼저 이미 설명했지만, 정상에서 떨어지는 일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묻는 것이다.
【문】 정상[頂]이라 함은 바로 법의 지위[法位]라서 이 이치는 먼저 이미 설명했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거듭 설명하는가?
【답】 비록 그 이치는 설명했다 하더라도 이름이 각각 다르다. 방편이 없이 3해탈문(解脫門)에 들어가는 것과 방편이 있어 들어가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법애(法愛)는 무생법인(無生法忍) 가운데에서 이익이 없기 때문에 생한 것[生]이라 한다.
비유컨대 마치 음식을 많이 먹어서 소화가 되지 않을 때에 만일 치료하지 않으면 몸에 병이 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처음 발심할 때에 법식(法食)을 탐하여 이른바 방편이 없이 모든 착한 법을 행하면서 깊은 마음으로 무생법인에 얽매여 집착하면 이것이 곧 법애가 생한 것이 되며 병이 된다.
법애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不生不滅]에도 역시 애착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반드시 죽을 사람에게 비록 약을 더 먹인다 하더라도 그 약은 오히려 병이 되는 것처럼,
이 보살은 필경공(畢竟空)이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인(法忍) 가운데에서 애착을 내므로 도리어 그것은 우환 거리가 된다.
법애는 인간ㆍ천상 안에서는 묘한 것이 되지만 무생법인에서는 번뇌거리[累]가 된다.
온갖 법 가운데에서 모든 관(觀)과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법을 따르면서도 애착하는 이것을 생한 것[生]이라 하나니,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물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한 것과 반대되는 것을 바로 보살이 무르익은 것[熟]이라 한다.
【문】 이 하나의 일을 무엇 때문에 정상[頂]이라 하고 지위[位]라 하며 나지 않는다[不生]고 하는가?
【답】 유순인(柔順忍)과 무생인(無生忍)의 중간에 있는 법의 이름을 정상[頂]이라 한다.
이 정상(頂上)에 머무르면 곧장 부처님의 도에 나아가서 다시는 두려워하며 떨어지지는 않는다.
비유컨대 마치 성문의 법 안에 난(煖)과 인(忍)의 중간을 정법(頂法)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 만일 정상을 얻으면 떨어지지 않거늘 이제 어찌하여 정상에서 떨어진다 하는가?
【답】 거의 얻어야 할 때에 잃는 것을 떨어진다고 한다.
정상을 얻은 이는 지혜가 안온하므로 두려워하면서 떨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비유컨대 마치 산에 올라 이미 정상에 도달했으면 두려워하며 떨어지는 일이 없으나,
아직 도달하기 전이라면 몸이 기울거나 위태로울 때에 두려워하면서 떨어지는 것과 같다.
정상[頂]이 더욱 자라면서 견고해진 곳을 보살의 지위라 하는데, 이 지위 안에 들어가면 온갖 결사(結使)와 온갖 악마의 무리가 동요시킬 수 없으므로 역시 무생법인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생한 것[生]과는 다르기 때문이니, 탐애 등의 결사가 모든 착한 법에 뒤섞임을 생한 것이라 한다.
또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지혜의 불이 없기 때문에 생한 것이라 하며 모든 법의 실상의 지혜의 불이 있기 때문에 무르익었다[熟] 한다.
이 사람은 모든 부처님의 실상의 지혜를 믿어서 받기 때문에 무르익었다고 부른다.
비유하건대 마치 잘 구워진 병(甁)은 물을 담을 수 있지만 날 흙의 병은 잘 부서지는 것과 같다.
또 생멸(生滅)하는 지혜에 의지한 까닭에 뒤바뀜을 여의게 되고 생멸하는 지혜를 여의기 때문에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이것을 무생법(無生法)이라 하며, 능히 믿고 능히 받고 능히 지니기 때문에 인(忍)이라 한다.
또 지위[位]라 함은 온갖 무상(無常)함 등의 모든 관법(灌法)을 빼어버리기 때문에 지위라 하는데,
만일 이와 같지 않다면 도를 따르면서도 법애(法愛)가 생한 것[生]이 된다.
【경】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무생(無生)이라 하는지요?”
수보리가 말했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내공(內空) 안에서 외공(外空)을 보지 않고 외공 안에서도 내공을 보지 않으며,
외공 안에서 내외공(內外空)을 보지 않고 내외공 안에서도 외공을 보지 않으며,
내외공 안에서 공공(空空)을 보지 않고 공공 안에서도 내외공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공공 안에서 대공(大空)을 보지 않고 대공 안에서도 공공을 보지 않으며,
대공 안에서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보지 않고 제일의공 안에서도 대공을 보지 않으며,
제일의공 안에서 유위공(有爲空)을 보지 않고 유위공 안에서도 제일의공을 보지 않으며,
유위공 안에서 무위공(無爲空)을 보지 않고 무위공 안에서도 유위공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무위공 안에서 필경공(畢竟空)을 보지 않고 필경공 안에서도 무위공을 보지 않으며,
필경공 안에서 무시공(無始空)을 보지 않고 무시공 안에서도 필경공을 보지 않으며,
무시공 안에서 산공(散空)을 보지 않고 산공 안에서도 무시공을 보지 않으며,
산공 안에서 성공(性空)을 보지 않고 성공 안에서도 산공을 보지 않으며,
성공 안에서 제법공(諸法空)을 보지 않고 제법공 안에서도 성공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제법공 안에서 자상공(自相空)을 보지 않고 자상공 안에서도 제법공을 보지 않으며,
자상공 안에서 불가득공(不可得空)을 보지 않고 불가득공 안에서도 자상공을 보지 않으며,
불가득공 안에서 무법공(無法空)을 보지 않고 무법공 안에서도 불가득공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무법공 안에서 유법공(有法空)을 보지 않고 유법공 안에서도 무법공을 보지 않으며,
유법공 안에서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보지 않고 무법유법공 안에서도 유법공을 보지 않나니,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우고자 하면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곧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생각하지 않고,
눈 내지 뜻을 생각하지 않으며,
빛깔 내지 법을 생각하지 않고,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 내지 18불공법을 생각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이러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교만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무등등(無等等)한 마음도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교만해지지 않아야 하며,
큰 마음[大心]도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교만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이 아니며, 마음의 모양은 항상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마음의 모양이 항상 청정하다 하는지요?”
수보리가 대답했다.
“만일 보살이 이 마음의 모양을 알면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전(纏)ㆍ유(流)ㆍ박(縛) 등 결사(結使)의 온갖 번뇌와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과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다면,
사리불이여, 이것을 일컬어 보살의 마음의 모양이 항상 청정하다 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다시 수보리에게 물었다.
“이 무심(無心)의 모양에 마음이 있는지요?”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무심의 모양 안에서 마음이 있는 모양이나 마음이 없는 모양을 얻을 수 있겠는지요?”
사리불이 말했다.
“얻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만일 얻을 수 없다면 ‘이 무심의 모양 안에 마음이 있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사리불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무심의 모양인지요?”
수보리가 대답했다.
“모든 법에 대해 무너뜨리거나 분별하지 않는 이것을 무심의 모양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단지 이 마음만을 무너뜨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지요?
물질도 무너뜨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며, 나아가 부처님의 도까지도 무너뜨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지요?”
수보리가 대답했다.
“만일 마음의 모양이 무너지거나 분별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면, 이 보살은 역시 물질 내지 부처님을 무너뜨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고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혜명 사리불이 수보리를 찬탄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당신은 실로 부처님의 제자이시고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셨으며, 법을 봄에서 나오셨고 법의 교화로부터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법의 몫[法分]을 취하면서 재물의 몫[財分]을 취하지 않으시며, 법 가운데에서 스스로 믿고 몸소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이 가운데에서 으뜸이시니, 실로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그대로이십니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이 가운데에서 역시 분별하면서 만약에 보살이 당신의 말씀대로 행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는다고 알려지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선남자ㆍ선여인이 성문의 경지를 배우고자 하면 역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는 지니고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벽지불의 경지를 배우고자 하는 이도 역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는 지니고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말씀대로 행해야 하며,
보살의 지위를 배우고자 하는 이도 역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는 지니고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3승(乘)이 널리 설해지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보살마하살과 성문과 벽지불은 배워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논】 해석한다.
내공(內空) 안에서는 외공(外空)을 보지 못하고 외공 안에서도 내공을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바깥[外]의 4대(大)로 된 음식이 그 몸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안[內]이라고 하지만 만일 몸이 죽으면 다시 바깥이 된다.”라고 한다.
온갖 법은 오고 가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외공은 내공 안에 있지 않다.
그 밖의 17공(空)도 또한 그와 같으니,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다른 모양도 없고 오고 감도 없기 때문에 저마다 안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또 보살의 위상(位相)이란 온갖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 18불공법까지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니,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문】 보리의 마음[菩提心]과 무등등의 마음[無等等心]과 큰 마음[大心]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보살은 처음 발심하여 위없는 도[無上道]를 반연하면서,
“나는 부처님이 되어야겠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보리의 마음이라 한다.
무등등이란 부처님을 말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중생이나 온갖 법으로써 같을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보리의 마음과 부처님은 서로가 비슷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원인은 결과와 닮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무등등의 마음이라 한다.
이 마음은 일마다 행해지지 않음이 없고 은혜를 구하지도 않으며, 깊고 견고하여 결정적이다.
또 단(檀)바라밀을 바로 보리의 마음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단바라밀의 인연 때문에 큰 부를 얻고 모자람이 없게 되며, 시라(尸羅)바라밀의 인연 때문에 3악도(惡道)에서 벗어나 인간과 천상 안에서 존귀하게 머물기 때문이다.
곧 두 가지 바라밀의 과보의 힘 때문에 편히 존립하면서 큰일을 이룩하니, 이것을 보리의 마음이라 한다.
찬제(羼提)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의 모양은 중생들 가운데에서 기특한 일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다른 이가 와서 살을 베고 골수[髓]를 내는 것이 마치 나무를 베는 것과 같아도 원수에게 인자한 마음을 지니므로 피가 변하여 젖이 되나니,
이 마음이야말로 흡사 부처님의 마음과 같아서 시방의 6도(道) 안에 있는 낱낱 중생에 대해서도 모두 다 깊은 마음으로써 제도하게 된다.
또 모든 법이 필경공(畢竟空)인 줄 알면서도 대비(大悲)로써 능히 모든 행을 행하나니 이것을 기특하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공중에 나무를 심으려 하면 그것은 희유한 일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정진바라밀의 세력은 견줄 데 없는[無等] 것과 서로 닮았기에 이것을 무등등이라 한다.
선정에 들어가서 4무량심(無量心)을 행하여 시방에 두루 차게 하면서 대비의 방편과 합하기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해 주며,
또 모든 법의 실상(實相)으로 온갖 관(觀)이 소멸되고 모든 언어가 끊어졌는데도 단멸(斷滅)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을 큰마음이라 한다.
또 처음 일으킨 마음을 보리의 마음이라 하고, 6바라밀을 행하는 마음을 무등등의 마음이라 하며, 방편의 마음 안에 들어가는 것을 큰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저마다 차별이 있다.
또 보살은 이와 같은 큰 지혜의 마음을 얻으면서도 역시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으니, 그것은 모양이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모양은 항상 청정하나 연기와 구름과 티끌과 안개가 잠시 와서 덮기 때문에 맑지 못한 것과 같다.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항상 스스로 청정하거늘 무명 등의 모든 번뇌의 객(客)이 와서 덮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게 되나니, 번뇌가 제거되면 본래와 같이 맑아지게 된다.
수행하는 이의 공(功)이란 무릇 미미하고 천박해서 이 청정함은 그대가 짓는 바가 아니므로 스스로 교만하지도 않아야 하고 생각하지도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필경공이기 때문이다.
【문】 사리불은 마음의 모양이 항상 청정한 것을 알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묻는 것인가?
【답】 보살이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 깊이 들어가고 깊이 집착하는 까닭에 비록 마음이 필경공이요 항상 청정하다 함을 듣는다 해도 오히려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이 무심(無心)의 모양을 취한다. 이 때문에 묻기를,
“이 무심의 모양에는 마음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만일 있다면 어떻게 무심의 모양이라 하며,
만일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 무등등의 마음으로 장차 부처님 도를 이루게 된다.’고 찬탄하는 것인가?”라고 한다.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이 무심의 모양안은 필경 청정하여 있다 없다 할 수 없나니,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자,
사리불은 다시 묻기를,
“무엇이 무심의 모양인가?”라고 했다.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필경공(畢竟空)이어서 일체의 법을 분별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라고 했다.
사리불이 다시 묻기를,
“단지 마음의 모양만을 무너뜨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가? 그 밖의 다른 법도 또한 그러한가?”라고 하자,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다.”라고 한다.
그러자 “만일 그렇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또한 허공과 같아서 무너뜨리는 일도 없고 분별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라고 한다.
모든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깊이 집착하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모든 범부의 법은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나니,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은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시 청정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거늘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거짓이겠는가?”라고 하면서,
이때에는 마음으로 놀라고 기뻐하지 않게 된다.
수보리는 그런 마음들을 알고 나서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나는 이제 그들을 위하여 실상의 법을 말해야겠다.”라고 하고,
다시 생각하기를,
“지금 부처님께서 앞에 계시니, 실상으로써 대답해야겠다.
만일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시리라.”라고 한다.
이렇게 거듭 생각하고 나서 이 때문에 말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비록 이것이 으뜸간다 하더라도 역시 거짓된 법에서 생기기 때문에 또한 공이요 무너지지도 않고 분별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을 따라 행하되 그 모양을 취하면서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때에 사리불이,
“참으로 훌륭하십니다.”라며 수보리를 칭찬하자,
부처님은 잠자코 계시면서 수보리가 대답하는 바를 듣고 계셨으며,
또한 사리불의 찬탄도 옳다고 여기셨다.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났다[從佛口生] 함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바라문은 범천왕(梵天王)의 입에서 났기 때문에 네 가지 성바지[四姓] 가운데에서 첫째이다.”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사리불은 찬탄하면서,
“당신은 참으로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왔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을 보고 법을 알기 때문이다.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어떤 이라도 역시 부처님을 의존하기 때문에 공양을 얻게 되나니, 이것을 재물의 몫[財分]을 취하다고 한다.
또 마치 못되고 삿된 아들이 아버지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으면서 단지 재물의 몫만을 취하는 것과 같다.
법의 몫[法分]을 취한다 함은, 모든 선정(禪定)ㆍ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 등의 갖가지 착한 법을 취하는 것을 바로 법의 몫을 취한다 하며,
네 가지 믿음[四信]을 얻기 때문에 “법 가운데에서 스스로 믿는다.”라고 한다.
모든 신통과 멸진정(滅盡定) 등을 얻어 몸 안에 쌓여 있기 때문에 “몸소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한다.
마치 사리불은 지혜 가운데에서 제일이요 목건련은 신족(神足)에서 제일이며,
마하가섭은 두타(頭陀)에서 제일이요 수보리는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가운데에서 제일인 것과 같다.
무쟁정을 얻은 아라한은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 삼매는 근본4선(禪) 가운데에 포섭되며 또한 욕계(欲界) 안에서 이용된다.
【문】 반야바라밀은 바로 보살의 일이거늘 어찌하여 “3승을 얻고자 하는 이는 모두 익히고 배워야 한다.”라고 하는가?
【답】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말하니, 곧 그것은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3승의 사람은 모두가 무여열반을 위하여 정진하면서 익히고 행한다.
또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갖 가지 인연에 의해 공해탈문(空解脫門)의 이치를 해설한다.
마치 경 가운데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만일 공해탈문을 여의면 도(道)도 없고 열반도 없다.
이 때문에 3승의 사람들은 모두가 반야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또 사리불은 스스로 인연을 말하면서,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3승의 모양을 널리 해설하니, 이 가운데에서 3승의 사람들은 배우고 이루어야만 한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