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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2권
16.2. 진리(諦)에 대한 상세한 주석[2]
(8) 태어남 등의 해설에 따라
31.
(8) 태어남 등의 해설에 따라: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시면서 세존께서는,
(가) 괴로움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은 12가지 법을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자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자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략히 설하자면 [‘나’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Vbh.990’라고.
(나) 일어남의 해설에서 세 가지 갈애를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이다.(M9/i.48-49); Vbh.101)”라고.
(다) 소멸의 해설에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Vbh,101)” 이라고 뜻으로는 오직 하나인 열반을 설하셨다.
(라) 도의 해설에서
“어떤 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인가?
이것은 오직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八支聖道)이다.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 바른 삼매이다.(Vbh104)”라고 여덟 가지 법을 설하셨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해설에서 태어남 등의 법을 설하셨다.
이런 태어남 등의 해설에 따라 여기서 판별을 알아야 한다.
(가) 괴로움의 해설
① 태어남(jāti)
32. 이 태어남이란 단어는 많은 뜻을 가졌다.
“한 생, 두 생” 이라는 데서는 존재(bhava)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위사카여, 니간타라 불리는 사문의 태어남이 있었다.(A.i.206)”라는 데서는 종파(nikāya)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태어남은 두 가지 무더기(蘊)에 포함된다(Dhk.15)”라고 한데서는 형성된 것(有爲)의 특징(lakkhaṇa)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모태에서 첫 번째 마음이 일어났고, 첫 번째 알음알이가 나타났다. 그것 때문에 이 태어남이 있다.(Vin.i.93)”라고 한데서는 입태(入胎, paṭisandhi)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아난다여, 보살이 태어나자마자(M.iii. 123)”라고 한데서는 출산(pasūti)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태상 때문에 멸시받지 않았고 비난받지 않았다(D.i.113)” 라고 한데서는 가문(kula)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자매여, 나는 성스러운 태생과 함께 태어났다.(M.ii.103)”라고 한데서는 성스러운 계(ariya-sīla)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33. 여기서 태어남이란 태로 태어나는 중생의 경우엔 입태에서부터 시작하여 모태에서 나올 때까지 일어나는 무더기(蘊)를 말하며, 나머지 경우엔 입태할 때의 무더기만을 태어남이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설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설하면 어느 곳에 태어나든 중생들에게 무더기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처음 나타난 상태를 태어남이라 한다.
34. 이것은 어떠한 삶이든 그 삶에서 처음 태어남의 특징을 가진다.
[무더기(蘊)를] 건네주는 역할을 한다.
과거 생으로부터 여기에 출현함으로 나타난다.
혹은 가지가지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만약 ‘왜 이 태어남이 괴로움인가’라고 한다면, 갖가지 괴로움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dukkha-dukkha, 苦苦)
②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vipariṇāma-dukkha,壞苦)
③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saṅkhāra-dukkha, 行苦)
④ 감춰진 괴로움(paṭicchanna-dukkha)
⑤ 드러난 괴로움(appaṭicchanna-dukkha)
⑥ 간접적인 괴로움(pariyāya-dukkha)
⑦ 직접적인 괴로움(nippariyāya-dukkha)
35. 이 가운데서
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은 고유 성질로서도, 이름에 따라서도 괴롭기 때문에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
②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
③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상카라들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됨에 기이한 괴로움이라 한다.
④ 귀의 통증, 이빨의 통증, 탐욕으로 인한 열, 성냄으로 인한 열등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은 질문을 해야 알 수 있고 발병하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감춰진 괴로움이라 한다. 분명하지 않은 괴로움(apākaṭa-dukkha)이라고 한다.
⑤ 32가지 형벌 때문에 생긴 괴로움은 질문을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고 발병하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드러난 괴로움이라 한다. 분명한 괴로움(pākaṭa-dukkha)이라고도 한다.
⑥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을 제외하고 분별론의 괴로움의 진리의 해설에서 언급된 태어남 등의 나머지 모든 괴로움은 갖가지 괴로움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간접적인 괴로움이라 한다.
⑦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은 직접적인 괴로움이라 한다.
36. 「우현경」(愚賢經, Bālapaṇḍita Sutta, M129/iii.165-178)등에서 세존께서 비유로 드러내신 악처(惡處)의 괴로움이 있다.
태어남은 이런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선처인 인간의 세계에도 입태 등의 괴로움이 일어난다.
태어남은 이런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37. 여기서 입태에 기인한 것 등으로 분류되는 괴로움은 다음과 같다.
이 중생이 모태에 태어날 때, 청련, 홍련, 백련 등의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위장의 아래와 소장의 위인 위장막과 척추 중간의 아주 좁고 어둡고 갖가지 몸의 냄새가 퍼져있고 심한 악취가 통풍구로 순환하며 극도로 혐오스런 자궁에서 마치 썩은 생선과 썩은 죽과 오물구덩이 속의 벌레처럼 태어난다.
그곳에 태어나서 그는 열 달 동안 자궁에서 생긴 열로 자루에 넣어서 구워진 과자처럼 구어지고 경단처럼 쪄져서 구부리거나 펴는 것도 없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은 입태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38. 어머니가 갑자기 비틀거리거나 가거나 앉거나 일어서거나 둘 때, 마치 술 취한 자의 잡힌 새끼 염소처럼, 뱀 장수의 손아 귀에 든 새끼 뱀처럼, 위로 끌리고 아래로 끌리며 위로 흔들리고 아래로 흔들리는 등의 습격으로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어머니가 찬물을 마실 때 마치 차디찬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고,
뜨거운 죽과 밥을 마실 때 마치 숯불의 비가 쏟아지는 것 같고,
짜거나 신 것을 삼킬 때는 마치 도끼로 몸을 찍고 소금물을 붓는 등의 고문을 겪는 것 같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은 임신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39. 어머니가 [임신이 잘못되어] 낙태를 할 때 괴로움이 생긴 곳을 자르고 째기 때문에 그에게 괴로움이 일어난다.
괴로움이 생긴 곳은 가까운 친지, 친구, 동료들도 볼 수 없다.
이것은 낙태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40. 어머니가 출산할 때 그는 업으로 생긴 바람에 의해 거꾸로 틀어 자궁으로부터 마치 지옥의 낭떠러지와 같은 너무나 무서운 통로 자궁으로부터 마치 지옥의 낭떠러지와 같은 너무나 무서운 통로로 내던져지며,
마치 열쇠 구멍으로 큰 코끼리를 끄집어내듯이 극심하게 좁은 자궁의 입구를 통해 끄집어내어질 때,
마치 지옥 중생이 굴러내리는 바위에 의해서 부서질 때 괴로움이 일어나듯이 그에게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분만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41. 갓 태어난 그의 몸은 예민한 상처처럼 연약하다.
손에 들거나, 목욕시키거나, 씻기거나, 천으로 문지를 때 등에 바늘 끝으로 찌르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모태로부터 나옴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42. 그 다음으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혹사시키거나 나체의 서계 등으로 고행과 금욕 행위를 하거나 화가 나서 단식을 하고 목매다는 자에게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폭력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43. 타인으로부터 매질을 당하거나 투옥 등을 경험하는 자에게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타인의 폭력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이와 같이 태어남은 이런 모든 괴로움의 토대이다. 그래서 이처럼 설하셨다.
만약 중생이 지옥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타는 불길 등 그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
어디에서 발판을 얻으랴.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라고 대성자께서 말씀하셨다.
채찍과 막대기와 몽둥이로 매 맞는
축생의 괴로움은 갖가지
그곳에 태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괴로움이 있으랴.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배고픔, 목마름, 바람, 태양 등으로 인한
아귀의 괴로움은 여러 가지
그곳에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 그것은 없다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라고 대성자께서 말씀하셨다.
짙은 암흑과 극심한 추위와
세상의 끝에 있는 아수라들의 괴로움
그곳에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 그것을 없다.
그래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똥오줌 지옥과 같은 모태에서 중생이 여러 달을 지내고
밖으로 나와서는 무시무시한 괴로움을 받네.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괴로움 없으니
태어남은 참으로 괴로움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어디서든 괴로움은 있는 것을.
그러나 태어남이 없이는 괴로움도 없네.
그래서 대성자께서 첫 번째로
이 태어남을 괴로움이라 말씀하셨다.
이것이 태어남에 대한 판별이다.
② 늙음(jarā)
44. 늙음도 괴로움이다(§31): 여기서 늙음은 두 가지이다.
형성된 것(有爲)의 특징으로서의 늙음과 이빨이 부러지는 등으로 알려진 한 생애에 포함된 무더기(蘊)의 늙음이다. 여
기서는 두 번째 것을 의미한다.
늙음은 무더기가 성숙해 가는 특징을 가진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젊음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늙음은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이고, 또한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45. 사지가 무력하고, 감각기능이 쇠하고 비틀어지며, 젊음이 사라지고, 기력이 쇠퇴하고, 기억력과 이해력이 희미해지고, 타인으로부터 경멸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조건으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이 일어난다.
늙음은 이런 괴로움의 토대이다. 그래서 이처럼 설하였다.
사자가 무력함으로 감각기능이 쇠함으로
젊음이 사라짐으로 기력이 쇠퇴함으로
기억력 등이 희미해짐으로
자기의 기족들조차도 하찮게 여김으로
더군다나 망령이 드는 것으로
인간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나니
이 모든 괴로움은 늙음이 가져온 것
그래서 늙음을 괴로움이라 한다.
이것이 늙음에 대한 판별이다.
③ 죽음(maraṇa)
46. 죽음도 괴로움이다:
여기서도 죽음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형성된 것의 특징으로서의 죽음이다.
이것에 관해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늙음과 죽음은 두 가지 무더기(蘊)에 포함된다(Dnk.15).”
두 번째는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인간은 죽을까봐 항상 겁낸다.(Sn.576)”
여기서는 두 번째 것을 의미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한 죽음, 습격으로 인한 죽음, 자연적인 원인으로 인한 죽음, 수명이 다 함으로 인한 죽음, 공덕이 다함으로 인한 죽음 등이 이 죽음의 이름이다.
47. 이것의 특징은 사망이다.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운명처를 잃어버림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임종에 다다라 악업 등의 표상을 보는 악한 자에게도
아끼던 물건과 헤어짐을 견디지 못하는 선한 자에게도
예외 없이 모두에게 근육과 관절을 끊는 등의
참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단말마(斷末魔)의 육체적인 괴로움이 있다.
죽음은 이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이것을 괴로움이라 말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판별이다.
④ 근심(soka)
48. 근심 등에서 근심이란 친척 등을 잃어서 겪는 것으로서 마음이 불타는 것이다.
이것은 뜻으로는 정신적 고통이다.
하지만 이것의 특징은 속이 타는 것이다.
속이 완전히 타는 역할을 한다.
근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苦苦)이고, 또한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근심은 중생의 가슴을 찌르는 독화살이다.
벌겋게 타는 창으로 중생의 가슴을 지진다.
병, 늙음, 죽음, 멸망 등 갖가지 괴로움을 자져오나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이것이 근심에 대한 판별이다.
⑤ 탄식(parideva)
49. 탄식은 친척 등을 잃어서 겪는 것으로서 말을 하면서 우는 것이다.
이것의 특징은 통곡이다.
덕과 허물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혼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이고, 또한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탄식이라는 화살에 찔린 자가 비탄하면서
목과 입술과 입천장이 마르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은 더욱 더해간다.
그래서 세존께서 탄식을 괴로움이라 하셨다.
이것이 탄식에 대한 판별이다.
⑥ 육체적 고통(dukkha)
50. 육체적 고통이란 육체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이것의 특징은 몸을 압박하는 것이다.
통찰지가 없는 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육체적인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苦苦)이고, 또한 정신적인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육체적 고통은 사람을 압박하고
다시 정신적인 고통을 자아내나니
그래서 특별히 이것을 괴로움이라 했다.
이것이 육체적 고통에 대한 판별이다.
⑦ 정신적 고통(domanassa)
51. 정신적 고통이란 정신적인 괴로움이다.
이것의 특징은 마음을 압박하는 것이다.
마음을 괴롭히는 역할을 한다.
마음을 압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苦苦)이고, 또한 육체적인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자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울고, 가슴을 치고, 앞으로 뒹굴고, 빙글빙글 뒹굴며, 거꾸로 떨어지고, 칼을 휘두르고, 독을 마시며, 밧줄로 목을 매달고, 불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갖가지 괴로움을 경험한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정신적 고통은 마음을 압도하고
몸에도 압박을 가져온다.
그래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자는
이것을 괴로움이라 한다.
이것이 정신적 고통에 대한 판별이다.
⑧ 절망(upāyāsa)
52. 절망은 친척 등을 잃어서 겪는 것으로서 극심한 정신적인 괴로움에서 생긴 성냄이다.
어떤 자는 이것이 상카라의 무더기(行蘊)에 속하는 하나의 법이라고 말한다.
이것의 특징은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슬퍼하는 역할을 한다.
우울함으로 나타난다.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이고, 또한 마음을 태우며 몸을 억압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절망은 마음을 태우기 때문에
몸을 억압하기 때문에
극심한 괴로움을 더해가나니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이것이 절망에 대한 판별이다.
53. 여기서 근심은 약한 불로 조리한 냄비 속에 있는 익힌 것과 같고, 탄식은 강한 불로 조리할 때 냄비 밖으로 넘치는 것과 같으며, 절망은 냄비 밖으로 넘친 나머지가 더 이상 넘칠 수 없어 냄비 안에서 마를 때까지 익히는 것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⑨ 싫어하는 자들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
54. 싫어하는 자들과 만나는 것은 원하지 않은 중생들이나 상카라(行)들을 만남이다.
이것의 특징은 원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마음을 괴롭히는 역할을 한다.
해로운 상태로 나타난다.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싫어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로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들의 행위로 생긴 괴로움이
그 다음에 몸에도 일어난다.
이것은 두 가지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대성자께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괴로움이라 하셨다.
이것이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판별이다.
⑩ 좋아하는 자들과 헤어짐(piyavippayoga)
55. 좋아하는 자들과 헤어지는 것이란 원하는 중생들이나 상카라들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의 특징은 원하는 것으로부터 떨어짐이다.
근심을 자아내는 역할을 한다.
불운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근심인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친척과 재산 등을 잃어버려 근심의 화살에 맞아
어리석은 자들은 괴로워하나니
그래서 좋아하는 자들과 헤어짐을
괴로움이라 했다.
이것이 좋아하는 자들과 헤어짐에 재한 판별이다.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ālābha)
56.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란 “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Vbh.101)”하는 등의 얻을 수 없는 대상을 원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역시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이것의 특징은 얻을 수 없는 대상을 원하는 것이다.
그것을 찾는 역할을 한다.
그것을 얻지 못함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통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원하는 것마다 얻지 못하기 때문에
망연자실해진 중생은 여기서 괴로움을 겪나니
얻을 수 없는 대상을 원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 괴로움이라고
승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에 대한 판별이다.
⑫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
57. 간략히 말하지면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 여기서,
여여한 분이 설하신 것이든, 설하시지 않은 것이든
태어남 등의 괴로움, 그 모든 것은 이들 없이는 없나니
그래서 괴로움의 종식을 설하시는 대성자께서 말씀하셨네.
요컨대 취착하는 무더기들이 괴로움이라고.
58. 마치 불이 연료를, 무기들이 과녁을, 파리모기 등이 소의 몸을, 수확하는 자가 들만을, 마을을 약탈하는 자가 마을을 괴롭히듯이,
태어남 등은 여러 가지로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를 괴롭힌다.
이는 잡초와 덩굴이 땅에서 생기고, 꽃과 열매와 새순이 나무에서 생겨서 그들을 괴롭히는 것과 같다.
59. 취착하는 무더기들의 처음 괴로움은 태어남이다.
중간 괴로움은 늙음이고 마지막 괴로움은 죽음이다.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이 엄습하여 불타는 괴로움이 근심이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울부짖는 괴로움이 탄식이고,
그 다음으로 체액의 부조화라 불리는 원하지 않은 맞닿음과 부딪힘으로써 몸을 괴롭히는 괴로움이 육체적 고통이다.
범부들은 그것에 의해 핍박당하여 적개심을 가진다.
그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는 괴로움이 정신적 고통이다.
근심이 커져 낙담하여 흐느끼는 괴로움이 절망이다.
가슴속의 소망이 꺾어버린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이와 같이 여러 측면에서 면밀히 조사해보면 오직 취착하는 무더기들이 괴로움이다.
60. 이런 것을 낱낱이 다 보여서 전부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 겁을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온 바닷물의 맛을 한 방울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괴로움은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 가운데 어디든지 있다는 것을 간략히 설하시고자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이 괴로움이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이 취착하는 무더기들에 대한 판별이다.
이상으로 괴로움의 해설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나) 일어남의 해설
61. 일어남의 해설에(§31) 그것은 갈애이니(yā’yaṁ taṇhā)라는 것은 ‘이 갈애’란 뜻이다.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ponobbhavikā)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시 태어남을 만든다’는 뜻이 ‘뿌놉바와(punobbhava)’이고, ‘습관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 이 ‘뽀놉바위까(punobbhavikā)’이다.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nandi-rāga-sahagatā)’라는 합성어는 즐김과 탐욕이 함께 했다.(nandirāgena saha gata)로 풀이된다. 즉 [갈애가] 즐김과 탐욕과 뜻으로서는 하나라는 말이다.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즐거워한다.
‘즉’: 부사이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라고 만약 한다면’의 뜻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
이것은 연기의 해설에서 밝혀질 것이다.(ⅩⅦ. §233이하)
이것이 비록 세 가지이지만 괴로움의 진리를 구성한다는 뜻에서 하나로 만들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다) 소멸의 해설
62. 괴로움의 소멸의 해설에서(§ 31) 갈애가라고 시작하는 방법으로 일어남의 소멸을 설하셨다.
만약 ‘왜 그런가’라고 한다면,
일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소멸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일어남의 소멸을 통해서만이 괴로움이 소멸할 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그 뿌리가 손상되지 않고 굳건할 때
잘린 나무라도 다시 자라나듯
갈애의 잠재성향이 뽑히지 않는 한
이 괴로움은 계속해서 생겨난다.(Dhp.338)”
63. 이와 같이 일어남의 소멸을 통해서만이 괴로움이 소멸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소멸을 설하시면서 일어남의 소멸을 가르치셨다.
세존들께서는 사자처럼 행동하신다.
그들은 괴로움을 소멸하게 하시려고 괴로움의 소멸을 설하실 때 원인을 중요시 여겼을 뿐 결과를 중요시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외도들은 개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괴로움의 소멸을 설할 때 자기를 괴롭히는 [고행의] 가르침 등으로 결과를 닦지 그 원인을 [없애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일어남의 소멸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치신 목적을 알아야 한다.
64. 이것이 그 뜻이다.
‘갈애가’: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한 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등으로 분류되었다. 빛바램을 도라 한다. 왜냐하면
“[감각적 욕망이] 빛바래어 해탈한다(M.ii.20)”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빛바래어 소멸함’(virago-nirodha)이라는 합성어는 빛바램 때문에 소멸이 있다는 뜻이다.
잠재성향을 뿌리 뽑았기 때문에 남김 없는(asesa) 빛바램을 통한 소멸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이란 합성어의 뜻이다.
혹은 빛바램을 버림이라 한다.
그러므로 ‘남김 없는 버림’, ‘남김 없는 소멸’이라고도 여기서 문장의 구성을 알아야 한다.
뜻으로는 이 모두가 열반의 동의어이다.
65. 궁극적인 뜻에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란 열반을 말한다.
이것을 얻고서 갈애가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에 빛바래어 소멸이라 한다.
그 [열반을] 얻고서 그 [갈애를] 버림 등이 있고, 감각적 욕망의 집착들 가운데 단 하나의 집착도 없기 때문에 버림, 놓아버림, 해탈, 집착 없음이라 한다.
66. 이것(열반)의 특징은 고요함(santi)이다.
죽지 않는(accuti) 역할을 한다. 혹은 안식(安息, assāsa)을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표상이 없음(animitta)으로 나타난다. 혹은 사량분별(papañca)이 없음으로 나타난다.
[열반에 대한 논의]
67.
① 만약 ‘열반은 없다. 마치 토끼 불처럼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방법(upāya)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적절한 도닦음이라 불리는 방법을 통해서 열반을 얻는다.
마치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로 남들의 출세간적인 마음을 알 수 있듯이.
그러므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열반은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어리석은 범부들이 얻지 못하는 것이라 해서 없다고 말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68. 더욱이 열반을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도닦음이 무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이 없다면 바른 견해(正見)를 제일로 하고 계의 무더기 등 세 가지 무더기(즉 계·정·혜)를 포함하는 다른 도닦음이 무익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도닦음은 무익한 것이 아니다. 열반을 얻기 때문이다.
② 만약 ‘도닦음이 무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음에 도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과거와 미래의 [오온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서 열반을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③ 만약 ‘그럼 현재들(현재의 존재인 오온)이 없는 것이 열반인가’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그들의 없음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을 땐 이미 현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의 존재들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면] 현재 무더기들(五蘊)을 위지하여 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유여열반(sopādisesanibbāna)의 요소를 얻지 못하는 결점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④ 만약 ‘[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오염원들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허물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성스러운 도가 나타나는 순간의 이전에도 오염원들은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도는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내세운] 이유는 합당하지가 않다.
69.
⑤ 만약 “도반이여, 탐욕이 다한 것이 열반이다.(S.iv.251)”라고 시작하는 말씀 때문에 ‘다한 것(khata)이 열반이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아라한 됨이 단순히 다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도반이여, 탐욕이 다한 것이 ··· (S.iv.252)”라는 방법으로 [아라한 됨을] 설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열반이 일시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결점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열반은 일시적인 것이고 형성된 것의 특징을 가지며 바른 노력과는 상관없이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형성된 것의 특징을 가지며 바른 노력과는 상관없이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형성된 것의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탐욕 등의 불로 탈 것이고, 타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되고 말 것이다.
⑥ 만약 ‘다한 뒤로 다시 일어남이 없는 그런 다한 것을 열반이라 하면 결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그런 다함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앞서 말한 결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도가 열반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도는 번뇌를 다하게 하므로 다함이라고 했다.
성스러운 도 다음에는 다시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
70.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열반은 다시 일어남이 없는 소멸이라 불리는 다함(khaya)에게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열반은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유적으로 열반을 다함이라 했을 뿐이다.
⑦ 만약 ‘왜 간접적으로 설하지 않으셨는가’라고 한다면,
아주 미묘하기 때문이다.
아주 미묘하다는 것은 세존께서 [열반을 있는 그대로 설하기를] 주저하셨고(cf.M.i.186),
또 성스러운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증명이 되었다.
71. 이것은 도를 가진 자만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이 아니다.
시작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다.
⑧ 만약 ‘도가 있을 때 열반이 일어나는데도 이것이 생긴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도가 이것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로써 증득하는 것(.pattabba)이지 생기게 하는 것(uppādetabba)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생긴 것이 아니다.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늙음도 죽음도 없다.
생김, 늙음,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
72.
⑨ 만약 ‘열반도 원자(aṇu) 등이 가지는 그런 항상함을 가진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⑩ 만약 ‘열반이 항상하기 때문에 그들도 항상하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당신들이 내세운] 이유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⑪ 만약 ‘열반처럼 생김 등이 없기 때문에 그들도 항상하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원자 등은 [항상한 것으로] 증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73. 앞서 말한 논법(yutti)이 실재(sabbhāva)하므로 오직 열반만이 항상하다.
이것은 물질의 고유성질을 초월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다.
부처님 등의 구경의 목표인 [열반은] 차별 없이 하나이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인 열반도] 과거의 업으로 받은 몸(upādi)과 함께(saha) 알아진 것이기 때문에 유여(有餘)[열반]이라 한다.
왜냐하면 수행으로써 그것을 증득한 사람의 오염원이 가라앉았고 또한 아직 살아있는 몸을 의지해서(sa-upādi-sesa)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업으로 받은 몸(upādi)이 없기 때문에 무여(無餘, anupādi)[열반]이라 한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일어남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미래에 결과를 가져올 업이 다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마음 다음부터는 무더기(蘊)들이 일어나지 않고 또 일어난 것은 없어지기 때문에 [과거의 업으로] 받은 몸이 없다.
이것을 의지해서 있기 때문에 무여[열반]이라 한다.
74. 간단없이 노력으로 성취한 지혜로써 얻어지기 때문에, 또 일체지아(一切知者, Sabbaññu)의 말씀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열반은 고유성질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생긴 것이 아니고, 괸 것이 아니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형성된 것이 아닌 것이 있다.”
이상으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해설을 마친다.
(라) 도의 해설
75.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해설에서(§31) 여덟 가지 법들을 설했다.
물론 무더기(蘊)의 해설에서도 뜻에 따라 이미 설명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도의 과정에서] 한 순간에 일어날 때 그들의 차이점을 알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 설명하려 한다.
76. 간략히 설하면, 네 가지 진리를 통찰하기 위해서 도닦은 수행자의 통찰지의 눈(慧眼)이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正見)이다.
그 혜안은 열반을 대상으로 삼으며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는다.
바른 견해의 특징은 바르게 보는 것(sammā-dassana )이다.
이것은 요소(界)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무명의 어둠을 쓸어버림으로 나타난다.
77. 그런 바른 견해를 가진 자가 마음을 열반으로 기울이는 것이 바른 사유(sammā-sa ṅkappa, 正思惟)이다.
이것은 삿된 사유를 부순다.
바른 사유의 특징은 마음을 대상으로 바르게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의 역할은 본삼매를 가져오는 것이다.
삿된 사유를 버림으로 나타난다.
78. 그렇게 보고 생각하는 자가 삿된 말을 절제하는 것이 바른 말(sammā-vācā, 正語)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연결되어있고, 삿된 말버릇을 부순다.
이것의 특징은 꺄안는 것(pariggaha) 니다.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
삿된 말을 버림으로 나타난다.
79. 그렇게 절제하고 자가 살생 등을 절제하는 것이 바른 행위(sammā-kammanta, 正業)이다.
이것은 [바른말]과 연결되어있고 삿된 행위를 끊어버린다.(samucchedika).
이것은 나쁜 행위를 부순다.
이것의 특징은 일어나게 하는 것(samuṭṭhāpana)이다.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
삿된 행위를 버림으로 나타난다.
80. 바른 말과 바른 행위가 청정해지도록 삿된 생업으로부터 절제함이 바른 생계(sammā-ājīva, 正命)이다.
이것은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연결되어있고, 음모 등을 끊는다.
이것의 특징은 깨끗이 함(vodāna)이다.
합리적인 생계를 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삿된 생계를 버림으로 나타난다.
81.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라 불리는 계의 땅(地)에 굳건히 서있는 자의 노력이 바른 정진(sammā-vāyāma, 精進)이다.
이것은 그것에 걸맞고 그것과 연관되었으며 게으름을 물리친다.
이것의 특징은 용감함(paggala)이다.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삿된 정진을 버림으로 나타난다.
82. 이와 같이 정진하는 자가 그의 마음에 잊지 않음이 바른 마음챙김(sammā-sati, 正念)이다.
이것은 삿된 마음챙김을 흔들어 버린다.
이것의 특징은 확립하는 것이다.
잊어버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삿된 마음챙김을 버림으로 나타난다.
83. 이와 같이 그의 마음이 수승한 마음챙김으로 보호될 때 마음의 하나됨(一心境性)이 바른 삼매(sammā-samādhi, 正定)이다.
이것은 삼매를 없애버린다.
이것의 특징은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avikkhepa)이다.
집중하는 역할을 한다.
삿된 삼매를 버림으로 나타난다.
이상으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해설을 마친다.
이와 같이 여기서 태어남 등의 판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