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영락경 제14권
45. 삼계품[2]
[머무름 없는 머무름]
구경보살이 다시 물었다.
“어떠하나이까, 문수사리시여. 어떤 것을
보살이 구함이 있음과 구함이 없음, 나고 죽음이 있음과 나고 죽음이 없음을 깨달아서
3세의 다함 있음과 다함없음, 도달함과 도달하지 않음, 유상(有常)과 무상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법에서 선삼매(禪三昧)에 늘고 준 것이 있다고 깨닫는 것이나이까?
이와 같이 짓는 이는 나고 죽음이 있나이까, 없나이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나고 죽음은 어느 곳에 머무는가?”
“처해도 처하는 바가 없습니다.”
“무엇이 도(道)와 합하는가?”
“나고 죽음이라면 도와 합합니다. 도라는 것이 나고 죽음이니까요.”
“어떠합니까, 족성자여. 해의 밝음과 어둠이 함께 합하는가, 합하지 않는가?”
“족성자여, 밝음과 어둠은 합한다.
다만 당신은 보지 못해서 합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외다.”
구경보살이 또 물었다.
“어떠한가요. 족성자여, 어둠은 어디에 그쳐 있나요.”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볼 수없는 것, 이것을 어둠이라 말하는데, 처해도 처하는 곳이 없나이다.
왜냐하면 만일 해가 뜬 때에 달 또한 함께 비추면, 어찌 다시 밝음에 이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서로 함께 받아 들여서 따로 떨어질 수가 없다.
족성자여, 또한 들으라.
해가 떴을 때에 어둠의 소재는 동으로 돌아가는가, 서로 돌아가는가, 남으로 돌아가는가, 북으로 돌아가는가, 사유(四維:네 간방)와 위ㆍ아래의 어느 곳에 있는가?
이런 관(觀)을 내지 말라.
왜냐하면 어둠은 항상 존재하면서 돌아가는 바가 없고, 밝음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어둠과 함께 합한다.
마땅히 이 뜻을 관해야 나고 죽음이 도와 더불어 합하나니, 도가 곧 나고 죽음이외다.”
문수사리가 다시 구경보살에게 말하였다.
“비근한 비유를 취하리니, 지혜 있는 이는 이를 통해 스스로 깨칠 것이라.
수미산은 동쪽은 황금색, 남쪽은 수정색, 서쪽은 유리색, 북쪽은 흰 은색이다.
그 나아가는 것은 색으로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이런 관을 짓지 말라.
왜냐하면 색이란 본래 하나로서 또한 다른 무엇이 없다. 다만 어리석은 이가 다름이 있다고 여길 뿐이니라.
그러므로 정사(正士)여, 도는 나고 죽음과 합하고, 나고 죽음은 도와 합한다.
이것을 알면, 일체 모든 법도 또한 다시 마찬가지니라.
왜냐하면 모두 다 공인 까닭이니라.
어떻게 생각을 내어서 온갖 법 가운데서 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 일은 그렇지 않느니라.”
그때에 구경보살이 다시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아직 해탈하지 못한 이도 다시 해탈과 합하나이까?”
“그렇소이다.”
“어떻게 하면, 족성자여. 해탈과 해탈치 못함이 합하나이까?”
“해탈 못한 이는 이미 해탈했고, 이미 해탈한 이는 해탈 있음도 생각지 아니하고 해탈 없음도 생각지 아니한다.
‘해탈 없음’은 성품이 없고[無性],
‘성품 없음’은 생겨남이 없고[無生],
‘생겨남이 없음’은 또한 온 때를 보지 않고 또한 간 때를 보지 않는다.
이것을 도(道)라 하고 열반이라 한다고 이르나이다.”
“어떤 것이 구함 없고 해탈 없음으로 큰 도를 삼는 것이나이까?”
“해탈에 있되 해탈 있음을 생각지 아니하니,
해탈 아님과 도(道)라는 두 소견을 내지 않는 이는 바로 열반에 응하나이다.”
“그 도라 함은 열반과 다르나이까?”
“아닙니다, 족성자여, 도는 하나이지 둘은 없나이다.
도가 곧 열반이요, 열반이 곧 도로서, 조금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렇다면 다른 법이 있어서 열반을 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또 물었다.
“누가 열반에 처했기에 열반이라 말한 것입니까?
어떤 법으로부터 열반에 이른 것입니까?
이것은 세속의 법인가요, 이것은 도의 법인가요?
이것은 생사(生死)의 법인가요, 이것은 열반법인가요?”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 처소 없는 것이 열반이니, 또한 가는 것도 없고 또한 오는 것도 없으며,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또한 집착하고 끊음도 없나이다.
그 도를 아는 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도가 동등하고 열반도 동등하여 구해도 볼 수 없고 또한 처소도 없나이다. 그러므로 도가 동등하고 열반도 또한 동등하나이다.”
구경보살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교묘한 방편이 있어서 머문 바 없이 머물면서 도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여 말하였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묾이 도와 다르겠습니까?
어찌 이러한 법으로 도를 배우고자 하는가요?”
구경보살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도이며, 어떤 것이 도가 아니나이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물면, 이것이 바로 도가 되니, 어찌 머무름으로부터 도를 배울 수 있으랴?
이것은 옳지 않다.
유위법(有爲法)으로부터 무위법에 이르고, 깨끗한 계의 몸[淨戒身]ㆍ삼매의 몸ㆍ지혜의 몸 등의 머무름으로부터 도를 배우려는가?
이것도 옳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머무름 없음으로부터 도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대저 도를 배운다 함은 37품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과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과 온갖 선삼매(禪三昧)와 신상(身相)의 온갖 좋음과 권도를 나타내어 알맞게 교화함과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ㆍ해탈을 반연하지 않고 도를 배운다.
그러나 이 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도는 배움이 아니요 또한 배움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만 잘난 체함을 보지 않고 머물러도 머무른 바 없다면, 이렇게 짓는 자는 곧 도에 응한다.
삼계를 논하고 분별하는 상념을 반연하지 않고, 다시 법을 보지 않고서 위없는 도를 이룬다면, 이렇게 관(觀)을 짓는 자는 곧 머무는 곳이 있다.
도의 성품이 공한 것처럼 열반도 또한 공이니,
그러므로 정사(正士)여, 열반의 도에 의심을 내지 말라.”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때에 구경보살이 다시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위없는 지진 등정각을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어떤 법을 행하여야 도에 이르게 되나이까?”
문수사리가 답하여 말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서 도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비록 5무간(無間)의 지옥에 처하더라도 또한 다시 두렵지 않으며,
5음ㆍ여섯 가지 쇠함[六衰]ㆍ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ㆍ세간의 고통ㆍ마구니ㆍ또는 대마왕[魔天]이라도 능히 어쩔 수 없으리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또한 법의 유상(有常)ㆍ무상(無常), 유위(有爲)ㆍ무위(無爲), 유루(有漏)ㆍ무루(無漏), 유탈(有脫)ㆍ무탈(無脫)을 보지 않으며,
또한 법이 아소(我所)라고도 아소 아님[非我所]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나[我]ㆍ사람[人]ㆍ목숨[壽命]ㆍ선악(善惡)의 나아가는 바는 모조리 공이요, 모조리 적적하다.
온갖 법성(法性)과 나고 죽음 및 열반도 또한 마찬가지이며,
온갖 세속의 법 및 세상을 제도하는 범부(凡夫)의 불법과 학(學)ㆍ불학법(不學法)과 성문(聲聞)ㆍ연각(緣覺)과는 널리 다 한 가지로서 차별이 없다.
공하여 상이 없음[空無相]을 이해해서 온갖 종자를 버려 생겨남도 없고 행함도 없으니,
이 법에서도 똑같이 이와 같은 업을 닦아서 적절히 분별하여 이와 같이 배우면, 바로 도라고 하나이다.”
[구경보살이 문수사리 보살을 찬탄하다]
그때에 구경보살이 문수사리 보살을 찬탄하였다.
“거룩하고 거룩하도다. 설하신 바는 일체를 이롭게 하나이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건대, 감히 온갖 법상(法相)에 의심이 없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내가 없고[無吾], ‘나’도 없고[無我] 또한 수명도 없기[無壽命] 때문이외다.
법관(法觀)을 분별하니 평등하여 둘이 없고, 여래 지진은 해탈하여 걸림이 없으니,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살펴서 설하실 뿐이외다.
왜냐하면 여래는 온갖 번뇌[漏]를 다하여서 애욕(愛欲)ㆍ소리와 빛깔[聲色]의 더러운 근심이 다시는 일어난 적이 없고,
탐욕으로 맺힌 그물을 부처님은 모두 벗으셨으며,
온갖 나고 죽음의 고통은 이미 남김없이 끊으셨으며,
훌륭한 권도의 방편으로 머물면서도 머무는 바 없으시고,
형상에 처하여 교화하면서 남을 위하여 수고하시고,
모두 중생을 위하여 경전을 설해서 무위 열반의 큰 도에 나가게 하시며,
다할 바를 다함으로써 다시 다할 바가 없으시고,
제도할 바를 제도함으로써 다시 제도할 바가 없으시다.
불사를 베풀어서 널리 제도함이 한량없으시다.
다시 성스러운 슬기로써 점점 저 언덕으로 건네시고,
홀로 선하여서 짝이 없고 또한 같이 짝할 이[儔匹]도 없으며,
정각의 율(正覺律)에 응하여 익히면서도 익힌 바 없고,
마음에 시끄러움이 없어서 오로지 한뜻[一意]으로 전일하고,
항상 참괴(慙愧)를 품어서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부끄러워하며,
안팎이 청정하여 물의 청정함과 같고,
거룩한 슬기와 도덕이 바다와 같아서 싫증내지 않고,
정의삼매(定意三昧)로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며,
성현은 침묵을 지키면서 스스로 즐겨하시고,
진제(眞諦)의 수증(受證)으로 끝내 의심이 있지 않기 때문이나이다.
이제 문수사리께서 이 측량하기 어려운 이 덕을 내려주어서 부사의 총지법문(不思總持法門)을 나타내고, 또한 비천(鄙賤)한 이로 하여금 이 깊은 곳간[藏]에 이르게 해서 많이 이롭게 하여 일체를 감동시키나이다.”
그때 문수사리가 이 법을 설할 때에 7만 2천의 행을 세운[立行] 보살이 불퇴전의 경지에 머물러서 모두 깊은 법장(法藏)에 이르렀고,
다시 한량없는 중생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발하였고,
범(梵)ㆍ석(釋)ㆍ사천왕ㆍ하늘ㆍ용ㆍ귀신이 모두 공양을 일으켜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면서 공경을 더한 그윽한 뜻[微意]을 문수사리 보살에게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