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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53권
5. 변수면품 ⑨
3.3. 사(事, 소연의 경계)의 단(斷)과 이계(離繫)의 관계
‘수면은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소연의 경계[事]를 계박한다’는 사실을 분별함으로써 제기된 방론(傍論, 즉 삼세실유론)에 대해 이미 다 마쳤다.1)
이제 이에 대해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온갖 소연의 경계[事]로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면, 그것은 필시 계박되는 것인가? 만약 소연의 경계로서 계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필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인가?
만약 소연의 경계로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필시 계박된다. 그러나 소연의 경계로서 계박되는 것이면서도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아닌 경우가 있다.2)
계박된 것이면서도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 경우란 어떠한 것인가?3)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그 밖의 변행수면과,
아울러 전품(前品)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이를 반연하는 그 밖의 수면은 여전히 계박한다.
於見苦已斷 餘遍行隨眠
及前品已斷 餘緣此猶繫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견도위(見道位)에서 고지(苦智)가 이미 생겨났으나 집지(集智)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견고소단의 온갖 소연의 경계[事]는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견집소단의 변행수면으로서 만약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고 능히 이(견고소단의 소연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면 여전히 이것을 계박한다.
아울러 수도위(修道位)에서 어떠한 도가 생겨나 9품(品)의 소연의 경계 중에서 전품(前品)은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능히 이(이미 끊어진 소연의 경계)를 반연하는 그 밖의 아직 끊어지지 않은 품류의 수면은 여전히 이것을 계박한다.4)
그리고 여기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그 전전품(前前品)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그 후후품(後後品)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그것들도 모두 능히 계박한다는 사실을 함께 밝히는 말이다.
여기(본송)서 무슨 소용에서 ‘이를 반연하는’이라는 말을 설한 것인가? [왜냐하면] 수소단의 9품은 필시 서로를 반연[相緣]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느 때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인가? 따라서 ‘이를 반연하는’이라고 하는 말은 결정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이를 반연하지 않는 [품류의 수면도] 있다는 사실을 별도로 설한 것이다”고 한다면, 변행[수면]의 경우에도 역시 마땅히 그 차별을 분별해야 할 것이니, 견집소단의 변행에도 견고소단의 소연의 경계를 반연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주(經主)는 어떠한 뜻에서 이에 대해서는 분별하면서도 그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분별하지 않은 것인가?5)
이제 자세히 살펴보면, 경주는 혹 이같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말한 ‘전품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라고 함은, 세속도(즉 유루 세간도)에 근거하여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전체적으로 견ㆍ수소단의 번뇌로 나누고, 9품을 점차적으로 끊고 제거함으로써 전품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9품] 중에 아직 끊어지지 않은 그 밖의 품류의 수면이 있다는 [말로서], 변행의 수면도 역시 능히 [그것을] 계박하는 것이 된다. 즉 다른 지(地)를 반연하는 변행수면을 분별하여 ‘이를 반연하는’이라는 말을 설한 것이므로 쓸모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본송)에서 ‘그 밖의 변행……’이라고 설하는 중에 ‘이를 반연하는’이라는 말을 빠트려 그러한 뜻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마땅히 뒤에 설한 ‘아울러’라는 말로써 앞의 말(즉 그 밖의 변행수면)에도 ‘이를 반연하는’이라는 뜻이 포섭된다는 사실을 함께 나타내어야 하였다. 즉 앞에 설한 ‘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와 이러한 ‘전품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에 모두 ‘이를 반연하는 그 밖의 수면은 여전히 계박한다’는 뜻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6)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이를 반연하는 그 밖의 수면과,
아울러 전품(前品)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이를 반연하는 그 밖의 수면은 여전히 계박한다.
於見苦已斷 餘緣此隨眠
及前品已斷 餘緣此猶繫
[경주가 지은] [송]문(頌文)은 잡란되어 있다. 견도위 중의 ‘그 밖의[餘]’와 ‘변행(遍行)’ 중 어느 하나를 버려함에도 이를 번거롭게 설하였으면서,7) ‘이를 반연하는’이라는 말은 빠트렸으니, 마땅히 자애로운 그 분[慈尊, 즉 경주 세친]에게 스스로가 한 말의 뜻에 대해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3.4. 수면의 수증(隨增)
1) 법(法)과 식(識)의 반연 관계
어떠한 소연의 경계[事]에 몇 가지의 수면이 수증하는 것인가?
여기서는 다만 마땅히 소연의 상(相)에 대해서만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어떠한 법이 어떠한 식(識)의 소연이 되는가?’ 하는 점만 분별한다면, 이 같은 소계사(所繫事)에 결정코 그러한 정도의 수면이 수증함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8)
바야흐로 법(法)과 식(識)의 수(數)는 각기 몇 가지인가?
제법은 비록 다수일지라도 간략히 분별하면 열여섯 종류가 되니, 3계의 5부(部)와 온갖 무루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능히 그것을 반연하는 식(識)의 명칭과 수(數)도 역시 그러하다.
이 중의 어떠한 법이 몇 가지 식의 경계가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으로서
만약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것이라면
자계의 세 가지 식과 색계의 한 가지 식과
무루식에 의해 현행한다.
見苦集修斷 若欲界所繫
自界三色一 無漏識所行
색계의 그것은 자계와 하계의 각기 세 식과
상계의 한 가지 식과 정식(淨識)의 경계가 되며
무색계의 그것은 3계의
각기 세 가지 식과 정식에 의해 현행한다.
色自下各三 上一淨識境
無色通三界 各三淨識行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은 모두
여기에 자계ㆍ자부의 식을 더한 것의 경계가 되며
무루의 법은 3계 중의
뒤의 세 가지 식과 정식의 경계가 된다.
見滅道所斷 皆增自識行
無漏三界中 後三淨識境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이라면, 각기 다섯 가지 식(識)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자계(自界)의 세 가지 식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색계의 한 가지는 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다섯 번째인데, 이 모두에 소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9)
먼저 욕계에 계속되는 견고소단의 법이 자계의 세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고 함은, 이를테면 욕계 견고소단의 일체의 수면과 욕계 견집소단의 변행수면과 욕계 수소단의 선ㆍ무기의 식의 소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색계의 경우 수소단의 선한 식의 소연이 될 뿐 그 밖의 다른 식의 소연은 되지 않으며, 무루의 식 중에서는 오로지 법지품(法智品)의 소연이 될 뿐이다.
그리고 견집소단의 경우는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색계에 계속되는 앞에서 설한 3부(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제법이라면, 각기 여덟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즉 자계와 하계(즉 욕계)의 세 가지 식은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상계의 한 가지는 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이 여덟 번째인데, 이 모두에 소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10)
먼저 색계에 계속되는 견고소단의 법이 자계의 세 가지 식과 상계의 한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고 함은 앞서 논설한 것에 준하여 알아야 한다. 하계의 세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고 함은, 이를테면 욕계 견고ㆍ견집소단의 식으로서 상연혹(上緣惑, 상계를 반연하는 수면)과 수소단의 선한 식의 소연이 되는 것을 말하며, 무루의 식 중에서는 오로지 고류지품(苦類智品)의 소연이 될 뿐이다.
그리고 견집소단의 경우는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무색계에 계속되는 앞에서 설한 3부의 제법이라면, 각기 열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즉 3계 각각의 세 가지 식은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무루의 식은 열 번째인데, 이 모두에 소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색계에 계속되는 것에 준하여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견멸ㆍ견도소단의 제법은 [여기에] 각기 자식(自識, 자계ㆍ자부의 식)의 소연이 된다는 사실을 더해야 한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견멸소단의 법은 여섯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다섯 가지의 식은 앞(욕계 견고소단)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여기에 [욕계] 견멸소단의 식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견도소단의 경우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11)
색계와 무색계에 계속되는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홉 가지와 열한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여덟 가지와 열 가지 식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여기에 각기 자식(自識, 자계ㆍ자부의 식)이 더해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무루법의 경우라면 열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3계 중의 각기 뒤의 세 부(部), 즉 견멸ㆍ견도ㆍ수소단의 식이며, 무루의 식은 열 번째인데, 이 모두에 소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달리 해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12)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으로서
욕ㆍ색ㆍ무색계에 계속되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다섯ㆍ여덟ㆍ열 가지 식의 소연이 된다.
見苦集修斷 欲色無色繫
應知如次第 五八十識緣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은
각기 자식(自識)의 소연이 되는 것도 더하며
무루법의 경우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능히 열 가지 식의 경계가 된다.
見滅道所斷 各增自識緣
無漏法應知 能爲十識境
2) 사(事)의 수증관계: 안근의 경우
이제 마땅히 앞에서 간략히 건립한 열여섯 가지의 법(法)과 식(識)을 염두에 두고서 수면이 수증되는 소연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만,13) 문구(文句)가 번잡하게 늘어날 것을 염려하여 그것의 일부분만을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먼저 어떤 이가 “소계사(所繫事) 즉 계박되는 소연의 경계 가운데 안근에서는 몇 가지의 수면이 수증하는가?”라고 물으면, “마땅히 안근에서는 모두 오로지 두 종류의 수면이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하니, 이를테면 욕ㆍ색계 각각의 수소단이 바로 그것이다”고 [대답해야 한다].14) 즉 여기에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ㆍ색계의 수소단과, 아울러 그것의 변행수면이 수증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어떤 이가 “안근을 반연하는 식에서는 다시 몇 가지의 수면이 수증하는가?”라고 물으면, “마땅히 이 같은 식에서는 모두 여덟 종류의 수면이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한다”고 [대답해야 한다]. 즉 욕ㆍ색계에 각기 세 가지 식―견고ㆍ견집소단의 변행[수면]과 구기하는 식과 수소단의 식―이 있어 도합 여섯 가지가 되고, 무색계에는 수소단인 공무변처의 근분정에 포섭되는 선한 식 한 가지가 있으며, 무루의 식이 여덟 번째이니, 이 모두는 다 안근을 반연한다.
그렇지만 일체의 무루식에서는 결정코 수면이 수증하지 않으니, [이에 따라] 앞의 일곱 가지 식―욕ㆍ색계의 각 3부와 무색계의 수소단의 식―에서만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두루 수면이 수증함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견고소단의 변행수면과 구기하는 식에서는 욕계의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수면이 두루 수증하고, 견집소단[의 변행수면과 구기하는] 식의 경우는 이와 반대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수소단의 식에서는 욕계 수소단과 아울러 온갖 변행수면이 수증한다. 색계의 세 가지 식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색계의 선한 식은 능히 제4정려의 안근을 반연하는데, 거기에서는 무색계의 수소단과 아울러 그것의 변행수면이 수증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어떤 이가 “안근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하는 식에서는 다시 몇 가지 종류의 수면이 수증하는가?”라고 물으면, “마땅히 이 같은 식에서는 열세 종류의 수면이 수증한다고 관찰해야 한다”고 [대답해야 한다]. 즉 3계 각각에 네 가지 식―견멸소단을 제외한 [견고ㆍ견집ㆍ견도소단과 수소단의 식]―이 있어 도합 열두 가지가 되며, 아울러 온갖 무루의 식도 능히 안근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에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견멸소단을 제외한 3계의 4부의 수면이 수증한다.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견고소단의 변행수면과 구기하는 식은 능히 안근을 반연한다. 즉 이러한 식은 욕계 견고소단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견집소단의 변행과 수도소단의 선ㆍ무기의 식과, 색계에 계속되는 수소단의 선한 식과, 아울러 법지품의 무루의 식이 이를 반연하는 것이다. [그래서] 능히 안근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하는 온갖 식에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욕계의 견고ㆍ견집ㆍ수도소단과 색계의 수소단 및 그것의 변행수면이 수증한다고 한 것이다.
그 밖의 식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참답게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안근을 반연하는 무루식의 경우, 이러한 식도 3계에 계박되는 것으로 인정되는데, 견도소단의 무루연의 식과 수소단의 선과 무루의 식이 이를 반연한다. [따라서] 능히 안근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하는 온갖 [식]에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3계의 견도소단과, 수소단과 그것의 변행수면이 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개별적인 조목으로 나누어 보면, 앞의 열두 가지 종류에는 각기 그러한 정도의 수면이 수증하기에 마땅히 욕계 견고소단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하는 온갖 식에서는 욕계의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변행수면이 수증한다고 말해야 하며, 견집소단[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하는 온갖] 식의 경우는 이와 반대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수소단의 식에서는 욕계 수소단과 아울러 온갖 변행수면이 수증하며, 견도소단의 식에서는 욕계의 견도소단과 아울러 온갖 변행수면이 수증한다. 그렇지만 무루연은 오로지 상응박(相應縛)일 뿐이며, 그 밖의 식은 다만 소연수증할 뿐이다.
그리고 색ㆍ무색계에서의 차별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아가 견도소단[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하는] 식으로서 욕계와 상계[에 계속되는 것은] 순서대로 법지품(法智品)과 유지품(類智品)의 안근을 반연하는 식을 반연한다.
그 밖의 다른 소계사(所繫事)의 경우에 대해서는 안근의 예(例)에 따라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3.5. 유수면심(有隨眠心)
지금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이 그것(즉 수면)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유수면심(有隨眠心)’이라 이름한다.15) 그렇다면 그것은 이러한 마음, 즉 유수면심에서 반드시 수증하는 것인가, 수증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를테면 그러한 수면으로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은 수증하니, 이미 끊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것은 이러한 마음에서 혹은 수증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수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 수증하는 경우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그러한 수면이 이러한 마음과 상응하고, 아울러 이러한 마음을 반연하면서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이다.
무엇을 수증하지 않는 경우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그러한 수면이 이러한 마음과 상응하고 나서 영원히 끊어졌을 때이다.”16)
무엇을 일컬어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유수면’이라는 말은 어떠한 뜻에 의해 설정된 것이며, 또한 다시 무엇으로 말미암아 ‘유수면’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
바야흐로 앞서 언급한 3계의 각 5부인 열다섯 가지 종류의 식(識)을 ‘유수면심(有隨眠心)’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온갖 마음에는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변행과 비변행, 유루와 무루가 바로 그것으로, 염오와 불염오를 반연하는 마음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유수면’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에 근거하여 설정하였으니, 첫째는 바로 수면이 수증되는 곳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수면을 보조적으로 수반[助伴]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면으로 말미암아 ‘유수면’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상응수면의 경우에는 그것이 끊어졌거나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의 마음을 모두 ‘유수면심’이라고 하지만, 소연수면의 경우에는 오로지 그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의 마음만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한다.
어찌하여 마음과 상응하는 번뇌의 경우 [그것이 끊어졌거나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의 마음을 모두 ‘유수면심’이라고 하면서, 소연수면의 경우]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만 마음에서 수증한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그러한 [상응]수면은 능히 득(得)을 인기하여 마음의 상속을 능히 구속 장애하며, 또한 내세(來世)에 대해 동류인이 되어 상속 중에 마음의 등류과를 인기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마음에서 수증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끊어졌다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수증의 뜻이 없다. [그렇지만] 끊어졌기[斷] 때문에 그것이 마음에서 떠나게[離]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17) 비록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그것(수면)을 지닌 마음(즉 ‘유수면심’)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마음의] 보조적으로 수반하려는 성질[助伴性]은 괴멸될 수 없기 때문이다.18)
이를테면 대치도의 힘은 상속(相續) 중에서 능히 수면을 막아 현기하지 않게 하며, 아울러 능히 그것에 의해 인기된 득(得)을 차단하여 마음의 상속을 구속하거나 장애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이미 끊어진 상응수면은 수증할 리가 없지만, 대치도의 힘이 수면과 함께 현행[俱行]하려는 마음의 수반성은 능히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상응수면이]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그 때의 마음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마음을 반연하는 온갖 수면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마음이 끊어졌든 끊어지지 않았든 마음에서 수증하기 때문에 [그 때의] 마음도 항상 ‘유수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반연하는 그러한 수면이 이미 끊어졌다면, 마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으로 불리지 않을 것이니, [대치]도의 힘이 마음으로 하여금 수면에서 떠나게 하였기 때문이다.
즉 보조적으로 수반하려는 성질이든 능히 소연이 되는 성질이든, [대치]도의 힘이 능히 그러한 성질을 모두 [마음에서] 떠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조적으로 수반하려는 성질에 비해 능히 소연이 되는 성질은 간접적인 것[疎]이기 때문에 이것(소연수면)에 [의한] ‘유[수면심]’이라는 말은 오로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수면에 근거한 것이지만, 보조적으로 수반하려는 성질은 직접적인 것[親]이기 때문에 [상응수면이] 이미 끊어졌더라도 역시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유신견(오로지 견고소단임)과 상응하는 마음은 [유신견에] 상응되는 무명과 유신견의 수증(隨增)과 수반하려는 성질[伴性]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였다면, 자부(自部, 견고소단)와 그 밖의 견집소단의 변행의 [마음은] 오로지 수증의 성질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 밖의 마음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수면)을 갖는 마음(즉 유수면심)’이 아니다. [이에 따라] 그 밖의 다른 견고ㆍ견집소단의 변행ㆍ불변행의 마음에 대해서도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견멸소단의 사견과 구기하는 마음은 [사견에] 상응되는 무명과 사견의 수증과 수반하려는 성질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였다면, 자부에 포섭되는 유루연의 변행의 [마음은] 오로지 수증의 성질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 밖의 마음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갖는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 밖의 다른 견멸ㆍ견도소단으로서 무루를 반연하거나 유루를 반연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예(例)에 따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수도소단의 탐과 상응하는 마음은 [탐에] 상응되는 무명과 애(愛)의 수증과 수반하려는 성질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였다면, 자부에 [포섭되는] 그 밖의 번뇌와 온갖 변행의 [마음은] 오로지 수증의 성질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 밖의 마음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갖는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 밖의 수소단의 번뇌와 구기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예에 따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수소단의 온갖 불염오심으로서 자부에 포섭되는 수면과 변행의 [마음은] 오로지 수증의 성질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상과 같은 논의는 모두 아직 끊어지지 않은 수면에 근거한 것으로, 만약 그러한 수면이 이미 끊어져 수반하려는 성질[伴性]만을 갖는 마음이라면, 오로지 수반하려는 성질로 말미암아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뜻에 의거하여 마땅히 이같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수면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유염(有染)과 무염(無染)이 바로 그것으로
유염의 마음은 두 가지와 통하지만
무염의 마음은 수증에 국한된다.19)
有隨眠心二 謂有染無染
有染心通二 無染局隨增
논하여 말하겠다.
유수면의 마음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으니, 유염(有染)과 무염(無染)의 마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20)
이 중 유염의 마음에 존재하는 수면의 경우, 만약 그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때라면 상응수면은 두 가지 성질(수증과 수반되는 성질)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소연수면은 오로지 한 가지 성질(수증의 성질)만을 갖추고 있지만, 만약 이미 끊어졌을 때라면 상응수면은 한 가지 성질(수반되는 성질)을 가지며, 소연수면은 어떠한 성질도 갖지 않는다.
무염의 마음에 존재하는 번뇌의 경우, 오로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만 ‘유수면심’이라 이름하며, 이미 끊어졌으면 어떠한 성질도 갖지 않으니(다시 말해 ‘유수면’이라 이름하지 않으니), [마음에] 보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염의 마음을 반연하는 수면은 ‘[그것을] 갖는 마음[有心]’, 즉 유수면심 이전에 끊어지거나 혹은 동시에 끊어지며, 유염의 마음을 반연하는 수면은 [‘그것을 갖는 마음’] 이전에, 이후에, 동시에 끊어질 수 있지만, 상응수면은 반드시 동시에 끊어진다. 따라서 유염의 마음은 두 가지(상응ㆍ소연수면) 모두에 [의해] ‘유수면심’이라고 이름하지만, 무염의 마음은 수증의 성질을 갖는 한 가지(소연수면)에 국한하여 ‘유수면심’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3.6. 10수면의 생기순서
이상에서 분별한 바와 같은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이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무엇이 앞에 생겨나고 무엇이 뒤에 생겨나는 것인가?
온갖 수면이 일어나는 것에는 일정한 순서가 없으니, 일체의 수면이 생겨난 이후에 일체의 수면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한 종류의 번뇌가 현행할 경우, 전후의 수면이 서로 견인하기 때문에 순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바야흐로 그것에 대한 순서를 분별해 보면 [이러하다].
이를테면 어떤 부류들은 그릇된 견문의 힘[邪聞力]과 숙세 익힌 힘[宿習力]으로 말미암아 능히 잘 관찰하지 못하고서 인연에 의해 인기된 무아(無我)의 행(行)에 대해 제일 먼저 아(我)ㆍ아소견(我所見)을 문득 낳는다. 다음으로 이와 같이 헤아린 행에 대해 원인에 미혹하여 상주하는 것[常]이라 하고, 결과에 미혹하여 단멸하는 것[斷]이라고 한다. 그리고 단멸의 극단[斷邊]에 떨어진 자는 사견(邪見)을 증대시켜 그것을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니, 이것이 바로 견취(見取)이다.
그러나 상주의 극단[常邊]에 떨어진 자는 자아가 즐거움을 얻고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재천 등을 섬기고, 수승한 생인(生因, 예컨대 프라크리티 등의 자성)이나 해탈도를 닦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계금취를 일으키고 나서, 여러 그릇된 스승[邪師]들이 원인[因]과 도(道)에 대해 차별적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에, 결택으로 삼을만한 스승이 없었기에 마침내 다시 “온갖 주장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이며,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하는 의혹[疑]을 낳게 되는 것이다.21)
그리고는 그 중의 한 가지를 수승한 것이라고 여겨 그것에 대해 탐(貪)을 일으키며, 자기와 [견해를 함께 하는] 무리들과 벗하며 뻐기면서 만(慢)을 낳고, 다른 무리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능멸하며 진(瞋)을 일으킨다.
그러나 만약 그것(여러 그릇된 스승들의 주장)에 대해 진실과 거짓을 결택하지 못하면, 의혹에 어지럽혀지고 [진실과 거짓을] 관찰하는데 피로[勞]해져 싫어하고 게으른 마음[厭怠心]이 일어나 “끝내 결정짓기 어렵거늘 [내가] 어찌 관찰할 것인가? 이는 뛰어난 선인이라야 능히 알 수 있는 바로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스스로 충고하여 [관찰하기를] 그만둔다. 그는 이미 부지런히 관찰하려는 뜻을 스스로 꺾어 버리고, 관찰을 등지고서 무지(無知)를 애호하고 즐기게 되었으니, 이에 따라 [관찰하려는] 마음을 멈추고서 무명의 방[無明室]에서 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부류에서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을 서로 견인하여 현행시키는 전후의 순서인 것이다.22)
다시 어떤 부류들은 품성이 어리석어 온갖 사문 범지들이 설한 것에 대해 능히 수승하고 저열함의 차이를 살피지 못하여 마침내 다시 “이 중 누구의 설이 뛰어난 것인가?”라고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로 인해 아견(我見)에 떨어진 자는 아견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상주와 단멸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자아가 당래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로 거짓된 생각[妄計]으로 전도된 결과와 원인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관찰로 인해 무아(無我)에 떨어진 자는 진실 된 무아의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어떠한 경우에도 보시 등 [선행의] 결과도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며, 이러한 견해를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수승한 공덕이라 관찰하였기에 이에 대해 탐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견해를 달리하는 이에 대해서는 능멸하여 만(慢)을 일으키며, 그 밖의 다른 견취(見趣)에 대해서는 미워하고 등지며 진(瞋)을 일으킨다.23)
즉 저들은 이와 같이 [사견에] 따르고 [정견을] 어기며, 기뻐하고 근심함으로 말미암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번뇌 잡염(雜染)을 일으키고, 정등각(正等覺)께서 설하신 성교를 멀리하여,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듦으로써 거기로부터 구제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다시 [번뇌가 일어나는] 순서를 이와는 달리 설정하는 경우가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명과 의(疑)와 사견과 유신견과
변집견과 계금취와 견취와
탐(貪)과 만(慢)과 진(瞋)의 순서대로
앞의 것에 의해 뒤의 것이 인기되어 생겨난다.
無明疑邪身 邊見戒見取
貪慢瞋如次 由前引後生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번뇌가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먼저 ‘무명’으로 말미암아 진리[諦]를 알지 못하여 고제 내지 도제를 관찰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4제를] 관찰할 만한 능력이 없기에 이미 [진리를] 들었음에도 바로 ‘괴로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괴로움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하는 두 갈래의 유예(猶豫, 즉 의심)를 품게 된다. 만약 그 때 사설(邪說)을 만나게 되면, 바로 ‘사견’을 낳아 ‘고제는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5]취온에 대해 ‘괴로움이 없다’고 이미 부정하였으니, 이로 인해 바로 ‘살가야견(薩迦耶見)’을 일으키고,24) 이에 따라 다시 자아는 단멸한다거나 상주한다고 주장하며(즉 변집견),25) 그 중의 하나의 극단에 집착하여 그것을 능정(能淨, 청정도를 말함)으로 간주한다(즉 계금취).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생각을 제일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즉 견취), 자기 견해의 공덕을 관찰하고 그것을 반연하여 ‘탐(貪)’을 일으키고, ‘이는 다른 견해보다 뛰어나다’고 뻐기면서 ‘만(慢)’을 낳고, [자신의 견해에] 어긋나는 다른 이가 일으킨 견해에 대해서는 ‘진’을 낳으니, 이는 예컨대 자아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무아의 견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과 같다.26) 혹은 자신의 견해를 취사[선택]하는 상태에서는 필시 ‘진(瞋)’을 일으켜 버려지는 견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27)
이는 어떤 부류에 근거하여 열 가지 수면이 서로 인기하며 현행하는 전후의 순서를 분별한 것이지만,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번뇌의 행상(行相)은 무변(無邊)이니, 그것이 근거하는 인연에 따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번뇌는] 결정코 순서대로 생겨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앞에서 논설한 것은 간략히 [그 중의] 한두 가지의 예를 나타낸 것일 뿐이다.
3.7. 번뇌의 생기인연
[그렇다면]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 인연에 의해서인가?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인연에는 다수의 종류가 있다.
혹 어떤 경우 동분(同分)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한다. 즉 유정은 중동분(衆同分)에 따라 결정코 이러한 종류의 번뇌를 현행시키는 경우가 있음을 관찰할 수 있으니, 예컨대 비둘기와 원앙은 탐(貪)이 가장 강성하고, 도마뱀이나 독사 전갈은 진에(瞋恚)가 가장 드센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 밖의 종류의 유정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어떤 경우 부(富)와 즐거움[樂]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다수의 유정들은 선한 의요(意樂)를 갖추고서 능히 수승(殊勝, 즉 열반)에 이르려고 하지만, 부와 즐거움을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를 일으켜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게 된다. 요컨대 부와 즐거움을 버려야 능히 수승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혹 어떤 경우 방역(方域)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남방에 태어난 이는 대체로 탐이 강성하고, 북방에 태어난 이는 대체로 진에가 드세다. 이와 같이 다른 방역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어떤 경우 사론(邪論)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병서(兵書)를 익힌 이는 진에가 증대되고, 창일론(倡逸論)을 들은 이는 욕탐이 늘어나며, 외도서(外道書)를 배운 자는 우치가 더욱 치성한다. 그러나 만약 정법을 들은 이라면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니, 생사가 두려워 [그것을] 탐하는 일 따위가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들은 것이 적은 것[寡聞]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지한 이는 번뇌가 치성하지만, 많이 들은 이는 번뇌가 경미하니, 다문(多聞)을 익힘으로써 번뇌를 조복시켰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많은 잠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하니, 잠이 많으면 번뇌가 증장하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즐거움 등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하니, 이를테면 즐거움은 탐을 증장시키고 괴로움은 진에 등을 증장시키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음식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하니, 이를테면 술 등을 마시게 되면 번뇌가 치성하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나이[年位]가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하니, 이를테면 소년과 장년과 노년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자주 익힌 습관[數習]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하니, 이를테면 이를 익히면 이에 대한 혹(惑)함이 더욱 증장되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소의신의 경계[身境]가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하니, 이를테면 [자신의] 몸과 서로 어울리는 경계를 만나게 되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이러한 종류의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혹 어떤 경우 시간[時分]이 바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이 되기도 하니, 이를테면 어떤 유정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이러한 시간에는 이러한 종류의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종류로 보건대, [번뇌를 일으키는] 인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지만 그 중의 수승한 것만 언급하면 오로지 세 가지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수면을 끊지 않았고
아울러 그에 따른 경계대상이 현전하며
비리(非理)의 작의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것을 혹(惑)에 인연이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
由未斷隨眠 及隨應境現
非理作意起 說惑具因緣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가 일어난다.
바야흐로 장차 욕탐수면을 일으키려고 하는 때는 욕탐수면을 아직 끊지 않았고 아직 변지(遍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28)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대상이 현전(現前)하였기 때문이며, 그것을 반연하는 비리(非理)의 작의(作意, 올바르지 못한 주의 경각)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밖의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욕탐수면을 아직 끊지 않았고 변지하지 못하였다’고 함은, 세 가지 인연 때문에 ‘아직 끊지 않았고 변지하지 못하였다’고 설한 것으로, 말하자면 ‘아직 끊어지지 않음[未斷]’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며, 대치도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진리의] 경계(즉 4제 16행상)를 아직 변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끊어짐[斷]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한을 갖는 끊어짐[有分斷]이며, 둘째는 분한을 갖지 않는 끊어짐[無分斷]이다. 그래서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아직 변지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설한 것으로, 이는 바로 ‘수면은 원인의 힘[因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다.
‘욕탐에 따른 경계대상이 현전하였기 [때문에]’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먼저 따져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경계대상은 어떠한 것인가? 만약 욕탐의 계박[繫]이 존재하는 경계대상이라고 한다면, 역시 또한 진에에 의해 계박되는 것도 ‘진에의 경계대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진에에 수순하는 경계대상도 역시 욕탐에 수순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처럼 욕탐의 경계대상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대상이 현전하였기 [때문에]’라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29)
만약 마음에 드는 것[可意]을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대상이라고 하였다면, 이러한 마음에 드는 경계대상 역시 결정적인 것이 아니니, 어떤 이에게 애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다른 이는 애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동일한 상속에 두루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에 결정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동일한 색도 동일한 유정에게 어느 때에는 마음에 들지만[順] 어느 때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違] 경우를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상 譬喩部의 힐난)
그렇지만 필시 마땅히 “결정적인 경계대상이 존재하며, 그것을 반연하여 비로소 욕탐이 현전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이에 따라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가 현전하였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으니, 앞서 설한 힐난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두루 해석하게 될 것이다.30) 그리고 이는 바로 ‘수면은 경계대상의 힘[境界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다.
‘그것을 반연하는 비리의 작의가 일어났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나무에 비유[如]되는 경계대상이 현전하고, 아울러 그것을 문질러 불을 내려는 것에 비유되는 비리작의가 일어날 때, [비로소] 경계대상에 [비유되는] 나무를 마찰시켜 욕탐에 [비유되는] 불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욕탐수면)서는 무엇을 비리작의라고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매우 좋은 옷을 입고, 꽃다발로 장엄하고, 향수를 바르고, 화장을 하고, 곱게 장식하여 아리따운 모습으로 나타난 여인에 대해 분취(糞聚)라고 생각해야 함에도 유정상(想)을 일으켜, 거기에 주지(住持)하려는 마음과 구기하는 전도된 경각(警覺)을 비리작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는 바로 ‘수면은 가행의 힘[加行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다.
만약 온갖 수면이 일어날 때 모두 이 같은 세 가지 인연을 갖추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라한에게 물러남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31)
아라한은 수면을 아직 끊지 못한 이가 아니다. 바야흐로 결정코 번뇌가 현전한다고 인정해야 비로소 ‘아라한에게도 물러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바야흐로 이전의 번뇌로부터 무간에 인기되어 생겨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아라한에게도 물러남이 있다고] 설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즉 번뇌가 생겨나는 데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기 때문으로, 첫째는 [이전의] 번뇌로부터 무간에 인기되어 생겨나는 것이고, 둘째는 [이전의] 번뇌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순간의] 그 밖의 다른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선ㆍ무기심과 무간에 번뇌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여기(아라한 有退論)서는 다음 [순간의] 그 밖의 다른 원인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과에서의] 물러남을 들어 [번뇌의 세 가지 인연을] 힐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은 여기서는 바야흐로 [세 가지] 인연을 모두 갖춘 번뇌에 근거하여 설하였지만, 실로 오로지 경계대상의 힘에만 의탁하여 번뇌가 생겨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32)
(1) ‘경계대상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비유부(譬喩部)의 힐난에 대한 해명
비유부(譬喩部)의 논사는 이와 같이 설하였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분별하는 힘[分別力]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에 모든 경계대상 자체는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成實]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 부처님께서도 저 『마건지가계경(摩建地迦契經)』에서 ‘모든 나병환자는 고통스럽게 불로 지질 때를 즐거움으로 여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동일한 색이라도 어떤 유정에게는 마음에 드는 경계대상이 되지만, 다른 유정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예컨대 깨끗함과 더러움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생(生)과 취(趣)와 동분(同分)을 달리하는 유정은 동일한 사물을 깨끗하다 하고 더럽다 하여 취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33) 이렇듯 깨끗함과 더러움의 상(相)은 결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유로서 성취되는 깨끗하고 더러운 두 가지 경계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정리론자(正理論者)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일체의 경계대상으로서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은 없으니, 경에서 ‘낙수행(樂受行)의 색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참으로 애호할만한 색에 탐착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안식에 의해 알려지는 참으로 애호할만한 색이 존재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의근행(意近行)의 경계는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이와 같은 색 중에 청정 미묘한 상(相)이 몰하면, 과환(過患)의 상이 나타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탐 [등]을 끊게 하기 위해 참으로 애호할만하고 참으로 미워할 만하며 어리석을만한 소연의 경계[事]에 대해 설한 것으로, 마땅히 탐을 끊은 자는 부정(不淨)한 것에 근거하여 청정한 세계[淨界]를 알게 된다. 즉 여기에 청정한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저들은] 온갖 모읍(母邑)을 참으로 애호할만한 경계로 삼는다’고 설하였던 것이다.34)
또한 이탐자(離貪者)는 그것(참으로 애호할만한 경계)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계경에서 ‘온갖 색취 중에는 모두 애미(愛味)와 과환(過患)의 상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니, 온갖 소연의 경계[事] 중에서 온갖 번뇌가 생겨나는데 차별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음에 드는 온갖 경계에 대해 비록 진에가 생겨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탐욕처럼 무거운 것은 아니다. 즉 아직 탐욕을 떠나지 못한 자가 마음에 드는 소연의 경계를 만날 때, 탐욕은 저절로 생겨나지만[任運生] 진에는 분별하여 일으키기[分別起] 때문이다.
원인과 가행에 차별이 없을지라도35) 현행하는 번뇌에 차별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경계대상 자체는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경계대상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같이 [번뇌가] 차별되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계대상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이미 밝히지 않았던가? 동일한 소연의 경계[一事] 중에서 탐과 진에를 일으킨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비유부)36)
그렇지 않으니, 동일한 [색]취 중에 두 가지 경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음에 드는 [색]취 중에는 [애호할만한 특성뿐만 아니라] 일부 미워할 만한 특성[瞋相]이 존재하니, 좋은 의복에 똥이 조금 묻어있으면, 청정한 것을 즐기는 모든 이는 그 전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과 같다. 혹은 마늘 냄새를 싫어하는 자는 그러한 맛 등을 내는 [음식도] 역시 모두 싫어하지만, 그러한 맛을 탐하는 자라면 그러한 냄새가 나는 [음식] 등에 대해서도 역시 모두 애호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제법은 동일한 취집(聚集)으로 구생(俱生)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동일한 취집 중에 참으로 탐할만한 법 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동일한 [색]취에 대해 탐ㆍ진ㆍ치를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탐을 일으키는 경계대상에서 바로 다른 두 가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37) 따라서 온갖 경계대상으로서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은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진실로 청정한 상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경우, 청정한 것을 따라 관찰[隨觀]하는 견해는 마땅히 모두 다 참다운 견해[如實]라고 해야 할 것이며, 참다운 견해에 편승하여서는 탐을 내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경계대상 중에는 진실로 청정한 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거짓되게 청정한 것이라고 계탁하고 이에 편승하여 탐을 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온갖 경계대상은 모두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님임을 알아야 한다.”(비유부)
그렇지 않으니, 경계대상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할 경우, 부정한 것을 취한다는 견해에도 이러한 과실이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즉 실유의 부정한 상도 성취되는 일이 없기에, 부정한 것을 따라 관찰하는 것도 마땅히 참다운 견해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능히 번뇌를 조복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번뇌를 조복하는 것은 승해(勝解)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요컨대 참다운 견해라야 비로소 탐을 떠날 수 있으며, 탐을 일으키는 것은 요컨대 참답지 못한 견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38)
그렇지만 경계대상에 따라 비록 일부 청정한 상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승해의 힘에 의해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함으로써 능히 번뇌를 조복시킬 수 있으며, 역시 또한 일부 부정한 상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증익(增益)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39)
또한 만약 제법으로 실유의 자성[實性]이 성취되는 것은 없으며, 다만 분별하는 힘[分別力]으로 말미암아 탐을 일으키거나 혹은 탐을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면,40) 성교에서 어떻게 “이것은 참으로 싫어할 만한 것이며, 이것은 참으로 좋아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번뇌[結]에 수순하는 것이며, 이것은 번뇌에 수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닦아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닦아서는 안 될 것이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인가?
또한 만약 “동일한 소연의 경계[一事]에 대해 애[탐]을 일으키기도 하고, 진에를 일으키기도 하며, 우치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즉 경계대상 중의 참으로 애호할만한 상(相) 등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찌 일찍이 어떤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僻見]를 품은 이가 지은 게송도 듣지 못하였던가?41) [그럴 경우] 그 같은 게송의 이치도 역시 마땅히 성립되어야 하는 것으로, 그의 논(論)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전하고] 있다.
동일한 소연의 경계[一事]에 대해
상주하는 것이라 관찰하고 무상한 것이라 관찰하며
두 가지 모두로, 두 가지 모두가 아니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제법은 모두 자성을 갖지 않는 것이다.4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4]전도(顚倒)도 역시 마땅히 성취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진실로 존재하는 청정한 상에 대해 청정한 것이라고 취(관찰)하였기 때문이다.”43)(비유부)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4전도] 중에서는 일부 청정한 종류[淨種]를 작의의 힘으로써 증익시켜 일으켰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경계대상에 대해 작의(주의 경각)하여 부정한 상이나 청정한 상으로 증익한 것이니, 이러한 전도로 말미암아 진에를 일으키고 탐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증익의 근거 역시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취한 것은] 일부 [청정한] 종류를 작의의 힘으로써 증익시켜 관찰한 것이기에 전도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또한 탐 등과 즐거움 등도 [실유의] 경계대상에서 생겨난 것으로, 결정코 [그 자체로서는] 생겨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계대상이 비록 실유의 그것이 성취된다고 할지라도 전도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선심도 역시 전도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마음의 드는 경계를 취(관찰)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비유부)44)
그렇지 않으니, 이와 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승해와 작의는 능히 번뇌를 끊기 때문에 전도된 것이 아니다.
“선의 작의도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경계대상 중에서 오로지 청정한 상만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전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 즉 이러한 승해는 온갖 번뇌에 대해 끊는 힘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탐이 이미 끊어진 것에 대해 세력을 갖는 것인지, 갖지 않는 것인지를 스스로 관찰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경계대상에 대해 청정한 상만을 취하며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전도된 것이 아니다. 혹은 지금은 다만 옛날의 염오심에 의해 취해진(관찰된) 경계대상의 상을 기억[念]하여, 획득하려던 수행의 결과[修果]가 성취되었는지, 성취되지 않았는지를 스스로 관찰하려는 것으로, [청정한 것이라고] 별도로 증익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전도된 것이 아니다. 혹은 선한 작의는 온갖 경계대상[事]에 대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단지 [일부] 청정하고 부정한 상만을 반연하기 때문에 전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탐 등의 작의는 온갖 경계대상에 대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를 반연하여 [마음에 드는 것은] 청정한 것이라고 여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선[의 작의]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2) ‘경계대상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비유부의 논증 비판
그런데45) 그가 말한 “괴로움과 즐거움은 분별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에 경계대상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는 주장과 『마건지가계경』을 증인(證因)으로 삼은 것은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현견(現見)하건대 원하지 않는 경계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탐을 낳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바로 [번뇌가 생겨나는 인연으로서] 경계대상의 힘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46)
또한 현견하건대, 감관[根]의 과실(손상)로 말미암아 단맛 등을 뒤바꾸어 취하는 경우가 있으며, 차갑고 따뜻한 감촉을 뒤바꾸어 취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고] 그는 이 같은 사실에 대해 “경계대상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침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47)
또한 “동일한 색이라도 어떤 유정에게는 마음에 드는 경계대상이 되지만, 다른 유정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온갖 경계는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으로, 앞에서 “동일한 [색]취 중에 두 가지 경계가 있을 수 있다”고 논설하였다. 즉 동일한 [색]취 중에 마음에 드는 종류[可意種]와 마음에 들지 않는 종류가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증익하여 마침내 그 모두를 ‘마음에 드는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경계대상 자체는 상태[位]에 근거하여 실유의 그것이 성취된다. 즉 이때 경계대상은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성취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는 성취되지 않으며, 다른 상태에서는 이와 서로 반대된다48)”고 하였다.
또한 “예컨대 깨끗함과 더러움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진실로 깨끗하고 더러운 경계대상을 성취하는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도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럴 경우]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전도는 마땅히 성취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로 부정한 것(즉 實有의 不淨性)을 성취하는 일이 없다면, 설혹 그것을 청정한 것으로 간주하였을지라도 이것을 어떻게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전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대는] 이미 동일한 경계대상이라도 [분별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청정하거나 부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하였는데, 이에 대해 상(想)을 일으키는 경우, 무엇을 전도된 것이라 하고, 무엇을 전도되지 않은 것이라 하겠는가? 또한 상주하지 않는 것[非常]을 상주하는 것[常]이라고 생각하여 성취하는 전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부정성(不淨性)은 결정적인 것으로서, 실유의 그것을 성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분별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유루행에 대해서도 상주한다는 생각과 상주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모두 취할 수 있으니, 마땅히 비상성(非常性)도 역시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혹은 비상성과 마찬가지로 부정성(不淨性)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49) 따라서 청정한 것과 부정한 것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생(生)과 취(趣)와 동분(同分)을 달리하는 유정은 동일한 사물을 깨끗하다 하고 더럽다고 하여 취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실유의 깨끗하고 더러운 경계대상을 성취하는 일은 없다”고 말하였지만,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앞에서 “동일한 [색]취 중에 두 가지 경계가 있을 수 있다”고 해석하여 그 뜻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깨끗함과 더러움의 상(相)은 결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유로서 성취되는 깨끗하고 더러운 경계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지만,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앞의 경우에 준하여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상으로서 깨끗함과 더러움의 성[류](性類)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성[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전도(顚倒)도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함과 더러움의] 상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깨끗함과 더러움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는 [주장]의 논거가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불(佛)세존께서도 결정코 유루법에 부정성(不淨性)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성립시켰다.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유루법으로서 번뇌에 더럽혀진 것을 승의부정(勝義不淨)이라 이름하였기 때문에, 깨끗함과 더러움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50)
만약 그렇다면, 어찌 모든 유루법은 다 부정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 그것에 대해 청정 미묘한 것이라는 앎[覺]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앎의 경계는 이미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그 밖의 다른 예(例, 즉 상주하고 자아이며 즐거운 것이라는 앎)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즉 이러한 앎에 의해 증성된 법은 비록 실유의 그것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부정(不淨)한 경계는 바로 실유의 그것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청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전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청정한 것’이라고 여긴] 후 탐이 일어날 때, 그것은 이러한 청정하다는 견해[淨見, 즉 淨倒]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비록 증성된 상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탐의] 소연도 실유의 그것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허물은 없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이미 부정한 [색]취 중에도 일부 청정한 종류[淨種]가 존재한다고 논설하였는데, 청정한 종류와 청정성은 다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정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부가 아니라] 그 같은 [색취] 모두가 그러한 것이라고 증성함으로 말미암아 전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색법 등에도 청정함 자체가 존재하지만, 다만 유루(有漏)로 말미암아51) ‘부정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체의 경계대상은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5식신(識身)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의 경계는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니, 하나의 경계대상에 대해 두 마음(전5식과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5식은 오로지 현재의 경계대상만을 취하기 때문이며, 취해진(인식된) 색 등은 찰나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번뇌(의식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의 경계는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니, [현재] 일 찰나에 색 등을 취하고 난 후의 상속(相續)이 다른 분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52)
이 역시 마땅히 총체적으로 [색]취(聚)에 근거하여 비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 애호할만한 [색]취 중에 미워할 만한 경계가 존재하였다면, 능히 진에를 일으킬 수 있다. 즉 일찍이 애호할만한 경계를 반연하여 그러한 [색]취에 대해 탐을 낳았지만, 이후 미워할 만한 경계를 기억하였다가 그러한 [색]취에 대해 진에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意地,제6 의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의 소연이 되는 경계대상도 실유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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