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스쿠스 방문기” 이관수 목사
지금 중동에서 부는 바람은 따뜻하고 평온한 바람이 아니다. 계절과는 상관없이 뭇 생명을 위협하고
메마르게 하는 마치 ‘함신’과 같은 바람이다. 비록 보도매체를 통해 듣는 소식이지만 안타깝기 그지없다.
* (함신: 약 50일 간 불어오는 뜨거운 동풍)
수년전까지만 해도 요르단에서 시리아까지 자유롭게 방문하고 여러 유적지를 탐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전과 IS(이슬람국가)의 발흥으로 불가능해졌다고 하는 것이다.
수많은 시리아 국민들이 정부 측과 반정부 측으로 나뉘어 싸우고 이라크에서 시작된 IS의 세력확장으로
난민이 속출하여 주변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르단으로 가던 첫해는 2001년도였다. 요르단에서 딸과 함께 시리아와 레바논 탐방에 나섰다.
압델리 주차장에서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을 넘나드는 차량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찍 나서면 단독으로 대절하거나 합승으로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까지 쉽게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리아인 운전사 '화켈'의 현대9인승 승용차를 불러 들였다.
암만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위의 배려였다. 안사람과 딸과 외손자 이렇게 4식구는
새벽에 암만의 타북(Tabouk street) 14번지를 출발했다. 시리아방향의 도로에는 벌써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으로 오가고 있었다. 요르단의 북동부도시인 알 마푸락(Al-Mafraq)을 지나
자비르(Jabir)에서 출국수속을 하고 이내 시리아의 나지브(Nasib)에서 화켈이 나서서 쉽게 입국수속을 마쳤다.
시리아의 국경도시인 다라(Dara)를 지나간다. 이어 비옥하고 드넓은 농경지인 하우란(Hauran) 지역을 통과하여
마치 이웃집 마당에 들어서듯 약 3시간 만에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의 중심가에 도착했다.
요르단의 신시가지 같은 밝은 모습은 볼 수 없고 오래된 다마스쿠스는 회색의 도시였다.
다마스쿠스(Damascus)는 성경에 다메섹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고대도시다.
먼저 창세기 14장에 아브람과 관련되어 나온다. 소돔에 살던 조카 롯이 전쟁포로가 되고
재물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가신 318명을 거느리고 다메섹의 좌편 호바까지 추격했다.
그리고 조카 롯은 물론 그 가족들과 재산을 다시 되찾았다. 호바가 현재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다메섹 근처라면 아브람이 추적한 거리는 적어도 300킬로미터 이상 될 것이었다.
아브람이 비포장도로를 말이나 낙타를 타고 달렸다면 우리는 최신형 한국산 승합차를 타고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달려 다메섹을 방문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은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기도 한 다메섹은 1945년에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다고 한다.
다마스쿠스 성채(Damascus Citadel)는 중심 시가지와 맞닿아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 고대도시 입구에는 회교도의 영웅이며 쿠르드족이라고도 하는
‘살라딘’의 승마상이 입구에 버티고 서있다.
유적지 안의 하미디예 전통시장(Souq)에는 카페트, 낙타가죽제품, 전통의상이나 각종주물 그리고 수제 다과류와 수공예품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지나가는 길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시장골목의 중간쯤엔 요르단의 압둘라2세 국왕도 들려갔다는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우마야드 회교사원(Omayad Mosque)에는 잘 꾸며진 살라딘의 무덤과 세례요한의 머리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이 사원은 아람제국 시대엔 하다드신전이었다가 로마시대엔 쥬피터신저으로 전용되었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 비잔틴시대엔 세례요한의 머리를 안치한 세례교회당이었지만
이슬람에 의하여 정복된 후엔 동쪽은 이슬람사원으로, 서쪽은 교회로 나누오 사용하다가
움마야드 칼리프인 알 왈리드(Al-Walid)에 의하여 회교사원으로 바꼈다.
이 사원의 남동쪽에 예수첨탑이 서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심판의 날에 예수가 그곳으로 강림한다는 것이다.
다마스쿠스는 적어도 5천년을 뛰어넘는 역사와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문명과 어울려 공존하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리이다. 최신형 자동차가 거리를 질주하는가 하면 한 옆으로는 당나귀나 마차가
조심스레 거리를 누비고 있다.
다마스쿠스의 주민들은 매우 친절했다. 길안내를 부탁할 때 한 번도 외면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세히 일러주거나 어떤 이는 아예 목적지까지 안내를 해 주었다.
그 고대도시 안에는 기독교인지역, 유대인 지역과 모슬렘 거주지역이 구분되어 있다고 했다.
이어 성서에 나오는 직가와 아나니야(Hanania) 생가 터에 세웠다는 기념교회를 답사할 수 있다.
교회라고 해서 십자가가 높이 세워진 한국의 교회를 상상한다면 금방 실망을 할 것이다.
일반 주택과 다름없는 허술한 대문을 들어서면 그곳이 바로 기념교회이기 때문이다.
기념품 판매소가 있고 몇 발짝 앞에 지하로 들어가는 돌계단을 내려가면
불과 10여평도 안돼 보이는 동굴로 된 예배 실이다. 수차례의 지진으로 묻혀있던 곳을 발굴 보존하고 있다.
입구에 놓여있는 방명록에 한글로 이름을 적고,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조용히 묵상을 하면,
환상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바울을 찾아간 아나니야를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당대의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직가에서 성문 밖으로 나서서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잠시 더 가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11:32-33)고 한
역사적인 장소를 확인할 수 있으며, 성 바울 기념교회(Bab Kissan)를 어렵지 않게 돌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시리아는 박물관이나 여러 유적지에서
대부분 아랍어와 프랑스어로 안내표지가 병기되어 있었다.
다마스쿠스는 유서(遺緖)깊은 도시답다. 좁은 도로망에 일방통행이 많아서
초보운전자는라면 매우 힘겨운 눈치작전을 해야 할 것이다.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여인들의 옷차림은 매우 다양하다.
얼굴 전체를 까만 천으로 가리고 눈만 반짝거리는 전통 복식도 있으며,
얼굴은 내놓았지만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올세라 희거나 검은 스카프로 머리를 싸매고 다니는 여인도 있고,
간혹 대담하고 개방적인 서구풍 복식도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모슬렘의 나라답게 비교적 모슬렘의 전통을 지키려는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현재 시리아를 어둡게 하는 전운이 속히 사라지고 자유와 평온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전처럼 자유롭고 안전하게 시리아를 방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관-
덧글 : 시리아 방문기를 계속하고자 끄저거리고 있다.
카시운산에서 내려다본 다마스쿠스
숙 알 하미디예 (하미디예 전통시장)
시내버스들
이란의 시아파 여인들 (우마야드 사원 순례중)
우마야드 사원 내의 세례요한의 무덤 (녹색 등 건축물)
낙타가죽 수공예품
사도바울의 광주리교회 (밥 키싼)
사도바울의 탈출 부조
다마스쿠스 야경 (밤이 속히 지나가기를!!!)
고성 입구에 세워진 살라딘 장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