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의 금강경 강설 - 72
정법을 닦는 인천도사(人天導師)
바른 법이 들어 있는 경책(經冊)을
마땅히 소중(所重)하게 여기고
이 법을 설명하는 법사(法師)도 역시
다시 없이 공경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탑이나 부처님 모셔 놓은 법당이나 같이
할 것이니 그렇게 해야 할 귀중한 존재라 그런 뜻입니다.
하물며 또한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 전체를 받아 가지고
또 읽기도 하고 끝까지 외우기도 하고 그랬다면
얼마나 그 사람을 우리가 받들어야 하겠는가.
천자도 꿇어 엎드려서 어깨나 허리를 밟고 법상에 올라가도록
받들고 하는 것은 복 지으려고 그렇게 합니다만
양무제(梁武帝) 같은 그런 굉장한 영웅호걸도 그런 짓을 했습니다.
이런 금강경 . 화엄경(華嚴經) 같은 법을 잘 알고 보니
우리 속인은 아무리 국왕이 아니라 천자가 된다 해도
죄악투성이니 수도하는 도인을 한번
존경하여 받들어야 하겠고 큰 인연을 맺자는 뜻입니다.
신라 . 고려때만 해도 스님은 누구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정도로 존중되는 불교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이백오십계(戒)를 받아서 비구승이 되기 전에
십계를 받아서 시미승(沙彌僧)만 되어도
그 날부터 이런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승려가 될 재질(才質)을 검사(檢査)하는데
신체검사(身體檢査)도 하여 몸이 어디 병신(病身)이 아닌가도 조사하고
확실히 도를 통할만한 소질이나 중생구제(衆生救濟)를 할 수 있는
기개(氣槪)가 있는가를 보아서 엄격한 선발(選拔)을 해서
득도식(得度式)이라고 스님 만드는 의식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부모가 다 와서 앉아야 하고
국왕이 앉고 대신도 앉고 그 때는 수천명 국민이 옵니다.
경을 잘 설법하는 이가 나오고 계사(戒師)가 나오고
이래 가지고 행렬을 갖추어서 장엄한 형식을 갖춘 뒤에
사미승 견습생(見習生)이 됩니다.
처음에는 부모도 사랑해서 키우던 자식을
남산 바윗돌만 쳐다보는 건건무미(乾乾無味)하고
적적한 산 중에 들여보내니까 아무리 성불이 좋아서
가기는 가고 보내긴 하지만 세상에 살면 가끔 떡도 먹고
불고기도 먹고 곰탕도 먹고 냉면도 먹고 할건대
그것저것 다 못먹고 파 . 마늘 들은 음식까지도 못 먹고
매일 시레기죽이나 먹고 시달리며
재미 없는 세상이나 보낼테니 참 서러운 일입니다.
이런 세상으로 보내니까 부모들도 울고
아들도 역시 부모 눈물에 같이 울면서
청하면 나중에야 정식으로 승낙합니다.
그러면 또 국왕한테 가서 정부에 대해 내가 중 노릇 하게 되어
국민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됐으니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청합니다.
내가 이제 중 노릇 잘 해 가지고 국가은혜를 갚을 것이고,
부모은혜 세상은혜를 갚을 것이고 스승의 은혜를 갚고
사대은혜(四大恩惠)를 갚을 터이니
호적을 제적(除籍)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호적을 정식으로 제적하고
비국민(非國民)이기 때문에 국민으로 취급을 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령 국법을 위반하더라도 내나라 백성이 아니니까
승단(僧團)에서 처벌하는데,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고 하여
이 네가지 죄를 범하면 승단(僧團)에서 축출(逐出)한 뒤에야
국법으로 구속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출가하면 맨 먼저 사미(沙彌)의 십계를 받습니다.
열 가지 계는 살생(殺生) . 도둑질(偸盜) . 사음(邪婬) . 거짓말(妄語) .
때아닌 때 밥먹는것(非時食) 등의 열 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계만 받으면, 사미승(沙彌僧)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벌써 국왕한테 절 안하고 부모한테 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님들 자리에는 임금이나 천자가 와도
맨 나중에 된 사미승 끝에 앉게 합니다.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와도 역시 끝에 앉힙니다.
왕이나 옥황상제라 해도 오욕락(五欲樂)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인들이고 범부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태국에서는 스님이 되면 사미십계 받는 그날부터
그 나라 국왕이 절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그에게 절합니다.
이제는 자식이 아니고 국민도 아니고 십계를 받은 그 시간부터
천상(天上) . 인간(人間)에 제일 귀중한 존재고 가장 죄없는 존재이고
가장 깨끗한 인물이 되었음을 존중하려는 것입니다.
부모 . 국왕도 이제는 내가 제도하는 중생이란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성불하신 뒤에 인도 천지를 다 돌고
맨 마지막으로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이 아들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싣달다태자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부룰 수가 없어서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세존이시여」하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신라 고려시대만 해도
승려가 이렇게 존중되었는데 십계는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사음(邪婬)이라는 것은 성욕에 대한
생각만 해도 파계(破戒)라고 그럽니다.
여자의 근처에 몸뚱이만 대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태국국사(泰國國師)가
작년에 태국부대 위문차 왔다가 갔는데
그 태국부대 지휘관들이 하는 소리가
「우리가 본국에 있으면 국사스님 얼굴 한 평생
한 번도 뵙기 힘드는데 우리가 한국에 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보고 종일 모시고 다니기도 하고
우리 먹는 것 가지고 공양도 올리고 그랬으니
참 우리는 복이 많습니다.」하며
기뻐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칠십이 넘은 노장들이 돌아갈 때는
비행기 회사에 요구하기를 「내가 지금 태국에 돌아갈텐데
젊으나 늙으나 여성과 한 자리에 앉히면 비행기를 안 탄다.
또 차장 같은 여자들이 우리한테 음식을 가져와도 안 된다.
그러니 이런 비행기가 어디에 있느냐.」고 고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이 벌써 십계 받을 때 받은 것입니다.
늙어 죽어도 그렇고 내생에도 그럴 것이고
성불 다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될 게 아닙니까.
부처님 말씀에 성욕 같은 것이 두가지만 더 있어도
성불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은
한 번 결심하고 내던지면 돈을 봐도 욕심니 안 생기고
또 좋은 부귀 공명, 높은 지위 그까짓 것 헌신짝처럼 볼 수 있지만
비구니가 미남자를 볼 때 생각이 아무래도 흔들리고
또 이제 비구가 미녀를 볼 때 아무래도 한 번 더 쳐다보고
안 보는체 해도 옆눈으로라도 한 번 슬쩍 봅니다.
그러니까 끊기가 참 어려운 것이어서
이놈 같은 것이 두 가지만 있다면
성불할 사람 하나도 없다고 석가여래께서 고백하신 겁니다.
비구니는 평생 인사도 못합니다.
같이 있지도 못하고 또 큰 수도원 같은 데서
비구니들이 설법듣는데도 따로따로하고
비구승들과 한데 앉히지 않습니다.
그래 이제 도승들이나 법에 따라 비구니들을 교화하지
그렇지 않고는 비구와 비구니는 서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설사 배를 타도 한배를 타지 않아야 원칙입니다.
이것이 다 부처님의 바른 법을
깨달아 온 중생을 바르게 지도하고
국가사회에 정신적 기둥이 될 인천(人天)의
대도사(大導師)를 높이
존중하여 많이 배출(輩出)하자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을 짓는 일반 대중이 많이 생기면
자연히 나라의 복이 되어서 나쁜 업은 사라지고
부강(富强)하게 되리라는 신념(信念)입니다.
한국 선지식(善知識) 세계에서 으뜸
이렇게 정법(正法)을 존중하여 많은 선지식(善知識)과
인천도사(人天導師)가 나왔지만
그 가운데 특히 석가여래 가신 뒤
삼천년 동안에 부처님을 완전히 대신해서
성도한 이는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인도에도 없고
오직 한국의 원효대사(元曉大師)밖에 없다고
일본사람들이 저희끼리 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도 선지식이나 도인이 나왔지만
어느 누구도 원효대사에 비하면 반쪽도 안된다는 겁니다.
한국에는 사명대사(四溟大邪)도 있고
아무 지도 없이 대각(大覺)을 해서
성불한 이가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불교 유학생(留學生)이
중국으로 갔었는데 중국사람들이 못 당합니다.
저번에 말한 왕화산(王火山) 스님의 경우처럼
중국 중은 그렇게까지 다부지게 하지 못합니다.
중국에 건너가기만 하면 우리가 항상 일 등을 했고
우승을 했으며 인도까지 건너갔다가 오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훌륭한 분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단합만 되면 세계 제일의 민족이 되고
우리 삼천만이 불법으로 무장해서 나서면
삼십억 되는 인류는 하루아침거리 밖에 안됩니다.
유엔총회니 연합총회니 하지만 지금 모양으로
도둑놈만 몰아 놓은 총회 만날 있어 봐야 소용 없습니다.
우리 한국이 불교의 진리로 뭉쳐서 세계를 교화해야 평화가 올 것입니다.
청담스님이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스님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스님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스님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스님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스님이었다.”
출처::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첫댓글 -((()))-
조은아침 입니다
오늘도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