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에세이연재)이희재/삶에서 우러나는 맛

[chandra]

삶에서 우러나는 맛

󰠐 이희재 󰠐

다선일미(茶禪一味)
언제부터 늘 갖고 싶었던 글귀가 있었다. ‘다선일미(茶禪一味)’―하나의 물질인 녹차의 맛과 정신적경지인 선(禪)의 맛이 같다는 뜻이다. 죽봉선생에게서 드디어 ‘다선일미’라는 글귀를 받았을 때는 담담했지만 거실에 걸어놓고 보니 점점 산뜻하고 푸근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 고요하고 한가한 기분을 붓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손재주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마음을 쉴 줄 아는 정신적 여유와 미적인 감각에 대한 조화가 숨어있다. 세상이 바빠질수록 붓보다는 볼펜으로, 차(茶)보다는 신속한 커피로 대치되어 가고 있지만, 그런 신속한 사회에 따르다보면 우리는 정신적 빈곤, 스트레스 등을 느끼게 된다.

옛 어른들은, 특히 동양의 어른들은 정열보다는 중용을 높은 덕으로 삼았다. 사람 사이의 사귐도 꿀맛처럼 달콤한 것이 아닌 물맛처럼 담담한 것을 높이 샀다. 음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극적인 음식은 사미(邪味)라고 하여 경계했다.
오늘날 우리문화는 전반적으로 자극적이다. 커피, 선정적인 영화, 책, 허심탄회한 감정표현 등등… 소위 군자다운 중용의 문화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차의 맛은 현대인에게 난해하다. 왜 그렇게 기다려서 맛을 우려내야 하고, 설탕을 넣지 않은 덤덤한 맛을 즐겨야하고, 가능하면 조용하고 한가한 분위기에서 마셔야 하는지 난해할 것이다.
1분라면, 번개탄, 전기세탁기 등등 가능하면 신속히 일을 처리해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덩달아 바빠 허둥대고 있다. 왜 바쁜가? 그냥 바쁘다. 남들이 바쁘니까 나도 당연히 바빠야 하고.… 그래서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되고.… 이렇게 가다가는 밥도 성가시게 먹지 않고 알약으로 대치될 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절약해 일하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풍부하게 소유했다고 치자. 그런 사람이 풍부한 인간일까? 아마 그는 더 높은 욕망 때문에 더더욱 빈곤한 인간이기 십상이다. 현대인들은 옛사람보다도 불안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것도 우리사회의 자극적인 선전, 끝없는 욕망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차(茶)의 맛에 나는 더 익숙하려고 노력한다. 간혹 투박한 다기(茶器)처럼 무심히 시간을 뛰어넘어 있고 싶다. 그리고 행복을 그가 가진 소유물에서 평가하지 않고 그 소유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가한 이들과 살고 싶다.
꽃이 아름답다고 그것을 캐어 가면, 꽃은 이미 그 본래적 아름다움을 상실한다. 그리고 보는 이의 눈도 달라진다. 꽃이 있으니 참 아름답다는 느낌, 멀리서 소유하지 않고 바라볼 줄 알면 꽃은 꽃으로 아름답고, 보는 이의 느낌도 그대로이다.
이것이 선적(禪的)인 태도이다. 사물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본래의 깨끗한 심성으로 관조하는 생활 말이다.

요사이 여고생들 사이에서 소위 “로맨스”소설이 인기라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서양 상류사회의 호화로운 삶과 그 젊은이들의 애정 행각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런 소설을 보면 순수소설은 심심해서 못 보는 경지가 되는 모양이다.
심심함을 못 참는 것은 자기 소외 현상이다.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만나기가 싫은 것이다. 가능하면 시장(市場)속의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순천 송광사에서 미국 출신의 승려와 만날 수 있었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주립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그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이 땅에 왔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선원에서 선을 닦는 수좌가 되었는데, 이미 중국은 공산화되어 전통적인 선이 부재(不在)하고, 일본은 승려들이 결혼하기 때문에 여실한 선이 없고, 오직 한국에 동양의 선이 남아있다는 주장을 했다.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르는 기술 폭발 시대에, 우리의 젊은 소녀들이 동경하는 서양은 동양의 문화를 기대하고 있다.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의 조화, 격렬함보다는 중용, 그리고 소외된 인간이 아닌 본질적 인간으로의 전환, 이 얼마나 소중한 정신인가.
서양의 마르크스같은 이들은 인간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노동이 이미 자기실현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노동 그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노동을 통한 제몫 찾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거기서는 투쟁과 혁명의 이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긴장은 이런 서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스위치를 누르면 금방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세상은 정말 편리해서 좋다. 그러나 물을 끓여서 다시 물을 식히고, 알맞는 차를 다기(茶器)에 넣어 그 맛이 우러나기를 기다려서, 마음을 텅 비우고 마시는 그 맛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바빠지고 사회가 시름시름 욕심 사나운 병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작설차의 적정(寂靜)의 의미는 더욱 새롭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깊은 산골 강원도의 오두막에서 청빈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무소유”라는 수필집을 통해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상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다. 장기 베스트셀러인 스님의 저술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일종의 여유를 주고 있다.
법정스님이 많은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샘터’라는 잡지에 연재한 ‘산방한담(山房閑談)’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가 전통 농업사회에서 벗어나 급격하게 도시화. 산업화되어 가면서 생긴 물질만능의 세태와 정신적 혼돈에서 그의 청빈과 유유자적한 자연에서의 호젓한 삶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정신적 위로를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불교의 진수를 ‘무소유’라는 간략한 언어로 농축하고, 기존의 인습이나 권위를 벗어나 쉬운 언어를 사용한 것은, 산에 있으면서도 대중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가령 ‘중생’이라는 말을 ‘이웃’으로, ‘초파일’을 ‘부처님 오신날’로 혹은 ‘맑고 향기롭게’ 등의 쉬운 한글사용을 통해 시대의 정신과 부합했다.

권위주의적이었던 군사정권과 맞서 ‘씨알의 소리’를 통해 함석헌 선생등과 함께 보여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그의 사회참여는 당시 침묵하던 불교계에서 보기 힘들었던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다. 1975년 이래로 그는 송광사의 불일암에 거처하면서 철저히 은둔하지만, 그 산방한담을 통한 담담하고 맑은 삶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전해지고 사랑을 받게 된다.
1970년대 대학시절 ‘영혼의 모음’이라는 수필집을 통해 스님을 접했던 나는 친구와 함께 송광사의 불일암을 찾은 적이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은 불청객에게 스님은 친절하게 차를 대접해 주었으며 도시의 수돗물과 ‘촌수’가 다른 샘물을 마시고 가라고 했다. 불쑥 찾은 젊은이들에게 연장자로서 근엄한 권위를 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존중해 주었던 일이 짧은 만남이었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세상이 빌딩숲으로 변하고 가파르게 속도가 빨라져가고 있음에도 그가 전해 주는 메시지는 꽃, 새, 차(茶), 바람소리, 물소리, 침묵 등 자연에 대한 찬탄이었다. 그것은 그저 아는 것을 전달한다거나, 그저 좋아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의 일상에서의 누리는 조용한 즐거움이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종교 간의 벽을 넘어 보여준 우정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종교간 화합과 보편적 진리에 대한 상호존중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가 창건한 길상사의 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고 또 스님이 명동성당의 미사에 참여하는 등의 일련의 벽 허물기는 이웃 종교 간의 화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좋은 선례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죽음을 앞두고 이제까지 간행한 자신의 출판물을 절판하도록 당부했고, 사리를 수습하거나 탑을 세우지 말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보여준 무소유와 무집착의 정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당부이기도 하려니와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명예와 소유 등의 타인에 의한 평가에서 찾지 않고 외롭지만 자기답게 살아가는 자주적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무소유에 대한 개념은 갖지 않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사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충실하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진 것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더 갖기 위해 집착한다. 그로 인해 지금 내가 이 순간 향유해야 될 행복을 방치해 버릴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무소유란 소유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주위에 항상 가까이 있는 ‘꽃이 피고 물이 흐르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여유를 갖자는 것이 아닐까!

일하자, 더 일하자, 한없이 일하자.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동한다는 경칩(驚蟄)이 지나고 봄비가 내린다. 머지않아 겨우내 움츠렸던 나무에서 새싹이 움트고 또 화사한 봄꽃들도 필 것이다. 대학의 캠퍼스도 겨울방학을 끝내고 개학한 학생들로 북적거린다.
학생들의 일은 학업에 충실해서 학점을 따고 공부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요,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열심히 연구해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가르치는 것이 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직분에 따라 일을 한다. 오늘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즐거움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아는 은퇴 교수(1915생) 가운데 한 분은 평생 연구하고 교수하는 일에 종사하신 분인데 사고로 시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직업이자 취미였던 이 분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다가 80대 이후 새롭게 얻은 일과가 맹인을 위해 만들어 놓은 녹음테이프를 빌려다가 듣는 일로 일과를 보냈다. 이 분은 그것을 귀로 읽는 독서 곧 이독(耳讀)이라고 했다. 제자들을 만나면 자신의 귀로 들은 책 이야기를 했고, 또 관심 있는 책은 그 도서관에 부탁하여 녹음을 해서 들었다. 살아있는 한, 소년과 같은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이 분은 노후를 외롭지 않게 보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사회에 평생직장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정년을 보장해 주었고 연금을 주어서 젊어서 일한 보답을 했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정년을 보장해 주지도 않고 연금을 주지도 않는다.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으로 채용을 하며 소속감을 가질 수 없도록 한다.
이런 시대에는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한다. 평생직장은 이제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생직업은 평생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개발해서 경쟁력을 기르는 것이므로 한 직장에만 얽매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일하는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는가? 물론이다. 일하지 않으면 단란한 가정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면 나의 일은 그렇게 즐겁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힘들지만 참고 견디며 해야 하는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돈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나의 영혼과 에너지가 투입되고, 그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성과를 낼 때는,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인생의 기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돈을 목표로 한 일이 아니지만 그가 하는 일이 정성과 열의가 들어있고 일하는 자의 기쁨과 몰입의 즐거움이 베여있을 때 사람들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더 신뢰하고 감사할 것이다.
할 일이 없이 이리저리 다니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는 사람은 그렇게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일에 몰입해 있는 사람, 그것이 하잘 것 없는 청소이건 운전이건 혹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건 일에 몰입해 있는 자는 아름답다.
그래서 늘 하고 싶은 말은 ‘일하자, 더 일하자, 한없이 일하자.’이다.

 
이희재(李曦載) 1977년 졸업. 광주대학교 국제언어문화학부 교수로 인문사회대학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박세당―탈주자학적 실학의 선구자󰡕, 󰡔한국의 예와 윤리󰡕, 󰡔동아시아문화론󰡕, 󰡔한국불교의 회통적 전통󰡕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