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Ⅱ. 염불이란 행복한 삶의 길 1. 염불의 이유 2. 염불신앙의 연원 3. 염불의 개념과 종류 4. 염불이란 행복한 삶의 길 Ⅲ. 나아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싱그럽고 새로운 새 생명이 움트는 평화로운 봄의 문턱에서 짜증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괜스레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우리 한 번 시원한 생각을 한 번 해 봅시다. 이 이 인터넷 공간이 저 시원한 바닷가라고 생각해 봅시다. 마음이 좀 시원해지십니까?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서 오늘도 용광로의 산업 현장에서 불철주야 철을 녹이어 단련시키는 노동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우리의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새롭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사는 것임을 매일 자각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부처님 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빈자 일등이란 마음의 등불을 잘 밝히는 의미를 잘 알고 계시겠지요. 올해는 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서 더더욱 빈자 일등의 가피력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이제 일년 중에 가장 큰 불교 명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잘 이용하시어 불법(佛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께 다가가서 구원겁래(久遠劫來)로 이어져 내려 온 무명(無明)의 마음에 하나의 등을 밝히어 업(業)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도록 자비의 마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정진하려는 용맹심이 요구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찰에서는 빈자일등을 밝히도록 권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각기 원력을 세워 간경(看經)도 하고 참회도 하며 염불과 주력정진을 하도록 권장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행을 모두 다 신행할 수는 없고 각자 자기의 능력에 맞는 수행방편을 세워서 정진을 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 일반 불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 아마 염불과 기도일 복을 짓는 일도 권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가 일상으로 권장하는 염불에 대해서 생각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째 얼굴들이 모두 식상해 보입니다. 모두 염불정도는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겠죠. 뭐, 다 알고 계신다니 그냥 설법을 그만 둘까요..... 그래도 이 곳에 들어오셔서 보시는 값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전기 값도 해야하고요.
우선 불자형제여러분! 저 고려시대 스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스님 중에 한 분이신 보조지눌스님께서 갓 출가한 사미승들에게 내린 가르침 중에 하나인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무식(無識, 알음알이를 버리는 것)한 말씀이 있습니다. "약우종사승좌설법이어든 절부득어법에 작현애상하야 생퇴굴심하거나 혹작관문상하야 생용이심이니라(若遇宗師陞座說法 切不得於法 作縣崖想 生退屈心 或作慣聞想 生容易心)"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유식(有識, 알음알이를 내는 것)한 말로 해석을 해보면, "만약 종사(큰스님)가 법좌에 올라 설법하는 것을 만나거든 간절히 저 법문에 어렵다는 생각을 지어서 물러날 마음을 내거나 혹은 이전에 익히 들었다는 생각을 내어서 쉽다는 생각을 내지 말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설법을 들을 때 처음 들어 어려운 것도 있고 자주 들어 쉬운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법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천차만별의 근기와 욕구와 성질을 가진 분들이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왕 말씀을 드리려고 하였으니, 여러분께서 공을 들인 값은 해야하겠지요. 다른 곳으로 놀러 가는 것을 그만 두고 이 인터넷 공간에 참석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염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일단 '염불'이란 '행복한 삶의 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부처님만 생각하면 괜스레 입이 쩍 벌어지면서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이 뭉클해져서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는 "행복한 삶의 길"이 바로 '염불'이라고 먼저 감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알고 있는 염불에 대해서 그 이유와 염불의 연원에 중점을 두면서 역사와 염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Ⅱ. 염불이란 행복한 삶의 길
1. 염불의 이유
불자형제여러분! 모두 합장하시고 따라서 하십시다. 가장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10번 이상)
불자형제여러분!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처음 우리가 태어날 때에 부모님을 비롯한 불·보살님의 가피력과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들이 생존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은 우주적인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길도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죠. 여기서 자력(自力)이란 물론 자기의 역량과 노력을 말합니다. 아무리 다른 조건이 좋고 도움을 주더라도 자기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자타불이(自他不二)라고 합니다. 즉 자기의 주체적인 힘과 다른 모든 조건들의 조력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염불을 하는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째 머리가 찍은 거립니다. 그러니 쉬운 염불을 해야 합니다. 그냥 생각을 텅 비우고 오직 부처님만을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어떻습니까?..... 그래서 염불이 최고입니다. 우스운 말을 하는데도 심각하게 얼굴을 긴장시키고 웃지 않으면 바보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신행방법들, 즉 법계일심(法界一心)의 진리를 깨닫는 고상한 참선도 있고, 우주와 인생의 완전한 인식을 하는 철학적인 간경(看經)수행도 있으며, 우주적 힘이 결집된 주력수행 등 온갖 바라밀행도 있는데, 하필이면 '염불'을 말하느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불교의 많은 신행방법의 형태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행방법을 크게 대별하면 첫째 자력신앙을 중심으로 한 성도문(聖道門)으로서 난행도(難行道)가 있고, 둘째 타력신앙을 중심으로 한 정토문(淨土門)으로서 이행도(易行道)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저 인도의 유명한 용수보살께서 {십주비바사론}의 [이행품]에서 제불(諸佛)의 명호(名號)를 염하는 이행도(易行道)를 행함으로써 쉽고 빠르게 아유월치(阿惟越致), 즉 불퇴전(不退轉)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중국의 탁월한 저술과 선정일치(禪淨一致)를 주창한 영명연수지각선사의 {만선동귀집}에서, "대저 소리란 온갖 뜻을 간직하는 곳간이며, 말이란 것도 모든 해탈의 문이 되나니, 일체가 소리로서 나아가매 소리가 곧 법계(法界)가 되는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낱낱의 모든 법 가운데 낱낱이 모두 일체법을 포함하여 있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한마디의 언음(言音) 가운데도 둘러쌈이 제한이 없어서 시방세계가 다 구족하며, 또한 겸하여 공(空), 가(假), 중(中) 삼제(三諦)의 이치가 두루 원만한 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음성으로써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살아갑니다. 만약 소리가 없으면 의사를 소통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귀의함의 전달은 바로 그분의 명호를 칭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소리를 따라 우주 법계에 가득 차게 하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염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력이 이어지면 그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이는 우리가 강과 바다를 건널 때 자기 힘으로 수영을 해서 건너려면 지쳐서 빠져 죽거나 건너기 어려운 일이지만, 불·보살님의 가피력인 반야의 배를 빌어 건너면 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염불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중생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무한의 불·보살이 되는 첫 걸음이고,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과 여래의 십호(十號)를 구족하는 것이며, 가장 행복한 삶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대품반야경}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염불을 한다면 곧 고액이 없어지고 그 복이 다함이 없는데 이를 것이다."하였으며, {증일아함경}에서는 "한 염부제의 온갖 중생을 사사(四事)로 이바지한다면 공덕이 한량없으리라. 그러나 만일 어떤 이가 착한 마음이 계속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잠시동안만이라도 염한다면 그의 공덕됨은 위의 비유를 훨씬 지나서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불은 이와 같이 크나큰 공능(功能)이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은 아주 쉬우면서도 가장 큰 공능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염불신앙의 연원
정토신앙은 넓은 의미의 정토신앙과 좁은 의미의 정토신앙이 있습니다. 넓은 의미의 정토신앙은 모든 경전에 설해져 있는 타방정토(他方淨土)·유심정토(唯心淨土)·영장정토(靈場淨土)·범신론적 정토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의 정토는 극락국토란 타방정토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좁은 의미에 중점을 두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가봅시다.
이러한 정토신앙의 연원(淵源)은 학자에 따라서 각기 다르겠으나 서북인도 지역에서 이란이나 그 밖의 외래 사상이 첨가되어 아미타불 신앙이나 정토사상이 생긴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인도 내부의 고대 인도문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기도 합니다. 즉 기원 1세기경 성립된 "Bhagavad- gita"에서 비쉬누(visnu)의 권화신(勸化神)인 크리슈나(krsna)가 나오는데, 여기서 비쉬누는 태양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을 신앙하는 법에는 신애(信愛)의 요가와 지혜의 요가, 실천의 요가가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을 인식하고 신에게 헌신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신의 사랑이 내영(來永)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거(如去, tatha-gata)나 여래(如來, tatha-agata)가 의미하는 것처럼 부처와 중생이 서로 지혜로 비추어 보며 헌신적인 신앙을 하는 것이 조화가 되었을 때 왕생한다고 합니다. 조금 머리가 띵합니까?
다시 말하면 무량광(amitabha)이나 무량수(amitayus)와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Amrta)인 아미타불은 태양의 광채인 비쉬누와 같이 부처님의 지혜와 감로의 자비가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베다(veda)의 신화 속에 보이는 비쉬누신이 바가바드기타에서 크게 힘을 얻어 숭신의 대상이 되면서, 소마(Soma, 甘露)의 숭배사상이 불교에 수용되어 인간의 무한한 복락인 여래의 48원이라는 자비의 실천 내용이 되었고, 또한 태양숭배사상은 부처님의 무량한 지혜의 광채로서 수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태양과 감로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 무량광과 무량수는 지혜와 자비로서 상호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비쉬누의 권화(勸化)인 크리슈나는 정토사상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두 보살로 수용되어 삼신일체(三身一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가바드기타가 성립되는 기원 전후로 당시에 행해진 신앙체계를 불교로 수용하여 아미타불의 신앙체계로 승화시킨 것이라 불 수 있습니다. 이는 시기적으로나 문화의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또는 바가바드기타의 어의에서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여하튼 불교의 여러 경전에 정토나 염불수행이 설해져 있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증일아함경}과 {잡아함경}권1에서는 십념(十念)을 설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수행자는 마땅히 염불(念佛)·염법(念法)·염비구승(念比丘僧)·염계(念戒)·염시(念施)·염천(念天)·염휴식(念休息)·염안반(念安般)·염신(念身)·염사(念死) 등을 수행해야 하고, 이른바 비구가 이러한 십념을 수행하면 문득 큰 과보를 획득하여 감로의 법미(法味)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마친 수행자가 곧 바로 사천왕 중에 태어났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마경}에서는 유심정토와 불이(不二)의 입장에서 차방정토·타방정토·유심정토를 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차방정토는 긍정적 인간관의 입장에서 현세를 있는 그대로 불국토로 보면서 현세의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해 간다는 의미이고, 타방정토는 인간의 부정적 죄업중죄의 인식을 토대로 말세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방정토는 죄업중죄의 범부는 자력으로서 왕생하기보다는 아미타불이나 제불보살의 타력에 의해서 왕생이 가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고 보살행을 닦아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심정토는 이 양자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으면 현실의 평화도 사후의 비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유마경}에서는 [중생의 국토가 보살의 불국토]라고 하였습니다. 다음 {반주삼매경}에서는 아미타불을 현전(現前)케 하는 관상염불(觀相念佛)을 설하고, {문수반야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길 세존이시여! 무엇을 이름하여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하시기를 법계(法界)는 일상(一相)이다. 법계를 계연(繫緣)하는 이 이름이 일행삼매이다. 만약 어떤 선남자와 선녀인이 일행삼매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 설한 바와 같이 수학한 연후에 능히 일행삼매에 들어간다. 마치 법계의 불퇴불괴(不退不壞) 부사의(不思議) 무애무상(無碍無相)을 반연하는 것과 같다. 만약 선남자와 선녀인이 일행삼매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응당히 텅 빈 고요한 곳에서 모든 산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상모(相貌)를 취하지 말고 마음으로 일불(一佛)의 명자를 오로지 칭송하여 부처님의 방소에 따라서 단정히 앉아 똑바로 향하고 능히 한 부처님을 염염상속(念念相續)하면 곧 이러한 생각 중에 과거·미래·현재의 제불을 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불을 염한 무량무변의 공덕은 또한 무량한 제불의 공덕과 더불어 둘이 없는 부사의이며 불법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어 모두 한결 같이 올라 최정각을 이루며, 모두 무량공덕과 무량한 변재(辯才)를 갖추어 이와 같이 일행삼매에 들어가 모든 항하사 제불의 법계에 무차별상을 알게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 이 우주법계는 일상(一相)인데 법계와 연관지어 터득하는 수행법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이고, 이 일행삼매는 반야바라밀을 먼저 수학하고서 한 부처님을 향해서 바르게 앉아 전념(專念)하여 생각생각을 상속시키면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을 친견할 수 있고, 이 공덕으로 일체제불의 무량무변 공덕과 변재를 얻어 우주법계의 본래 무차별상(無差別相)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토에 관한 근본 소의경전은 당연히 정토삼부경입니다. 정토삼부경에서는 정토와 수행법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의 과거 원력의 내력과 수행력으로 구성된 극락을 설하고, 48대원 중에 중요한 십팔원과 십념왕생원의 성취를 설하여 아미타불에게 구제를 받는 삼배(三輩)왕생에 대해서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무량수경}은 자식으로부터 고통받는 위제희 부인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설하여 현실의 고통을 보이고 십육관법(十六觀法)을 설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80억겁의 중죄를 면하여 극락에 왕생한다는 소원이 설해져 있고, {아미타경}에서는 극락국토의 장엄(莊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칭명염불(稱名念佛) 수행으로 왕생을 신앙적으로 설하고 있습니다. 조금 아는 말이 나오니 쉬워집니다.
그리고 {오문선경요용법}에서는 좌선하는 방법에는 오문(五門)이 있는데, 첫째는 안반(安般)이요, 둘째는 부정(不淨)이며, 셋째는 자심(慈心)이요, 넷째는 관연(觀緣)이며, 다섯째는 염불(念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반·부정·관연 등은 안팎의 경계가 있고, 염불·자심은 바깥 경계를 반연(攀緣)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염불삼매와 사자분신삼매의 성취를 염불수행으로 성취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한편 마명보살(불멸 600경)은 공(空)과 상(相)을 융합하여 중도성종(中道性宗)을 제창하면서 [대승기신론}의 [수행신심분]에서,
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약(怯弱)한 이는 이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스스로 능히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두려워하여 이르기를 신심을 성취하지 못할까 어렵다 해서 뜻으로 물러가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섭호(攝護)하여 이르시기를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염(念)하는 인연으로 원력을 따라서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친견해서 길이 악도를 여읜다고 저 수다라(修多羅)에 설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이 오로지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염하여 닦은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태어나기를 구원하면 곧 왕생한다.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眞如法身)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태어나서 올바른 선정에 머무는 까닭이다.
라고 설하여 초학자가 신심이 미약하여 물러나고자 할 때 타방의 아미타불을 전염하면 그 선근으로 바른 선정을 얻는다 하여 염불을 권장하였고, 용수보살(150∼250경)은 {십주비파사론}[이행품]에서,
만약 보살이 이 몸으로 아유월치지를 얻어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응당히 이 시방제불을 염하고 그 명호를 칭송해야 한다…보월이 묻기를 다만 이 시방의 부처님 명호를 듣고 집지(執持)하여 마음에 두면 문득 물러나지 않는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하였습니다. 다시 나머지 부처님과 보살의 명호를 두게 되더라도 아유월치를 얻을 수 있습니까? 답하시기를 아미타불 등과 모든 대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염하여 칭송하면 또한 불퇴전을 얻는다. 다시 아미타불 등과 제불에게 또한 마땅히 공경하고 예배하여 그 명호를 칭송하라.…이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현재 시방의 청정한 세계에 계신다. 모두 명호를 칭송해서 억염(憶念)한다. 아미타불의 본원도 이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염하여 명호를 칭송해서 귀의하면 곧 반드시 선정에 들어가서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한다.
라고 설하여 모든 수행문 중에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가 있는데, 부처님을 믿는 인연에 의하여 제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 용이하게 불퇴위에 들어갈 수 있는데, 여기에는 염불수행이 가장 으뜸인 이행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방의 제불에 대해서 설하면서 아미타불과 제보살을 염하면 아유월치(阿惟越致)에 이르고 이러한 공덕으로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세친보살(400∼480경)은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에서 서방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으로서 오염문(五念門)을 밝히고 있는데, 1) 예배문(禮輩門), 2) 찬탄문(讚歎門), 3) 작원문(作願門), 4) 관찰문(觀察門), 5) 회향문(廻向門) 등입니다. 이는 후에 중국 정토종 선도류의 기초 수행문이 됩니다. 그리고 또 [염불품]에서 초지보살이 구경에 행할 행법으로 {반주삼매경}의 관상염불(觀相念佛)을 권장하여 행하라고 설합니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32상 80종호로 장엄된 불신을 오로지 전념(專念)하여 대비대원을 구족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염불의 개념과 종류
염불이란 범어로 Buddha-manasikara 또는 Buddha-anusmrti로 '불(佛)을 염(念)하는 것', 즉 부처님의 상호나 공덕, 실상과 명호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입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佛)은 불신(佛身)·불명(佛名)·각(覺)·진여(眞如)·여여(如如)·실상(實相)의 원리를 의미하며, 염(念)은 [상기하다], [기억하다], [집중하다]의 의미로 관념(觀念)·사념(思念)·심념(心念)·억념(憶念)·상념(想念)·칭념(稱念)·깨어있음·마음챙김·마음집중 등의 숙어입니다. 참 복잡하지요. 누가 염불을 쉽다고 했나요.
이러한 염불의 종류에는 1) 칭명염불(稱名念佛), 2) 관상염불(觀想念佛), 3) 관상염불(觀像念佛), 4) 실상염불(實相念佛)의 4종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이 가운데 관상염불(觀像念佛)을 제외한 3종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1) 칭명염불(稱名念佛)이란 구칭염불(口稱念佛)로서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말하는 것이며, 2) 관상염불(觀像念佛)은 부처님의 존상(尊像)을 관념(觀念)하는 것이고, 3) 관상염불(觀想念佛)은 부처님의 상호공덕을 관하여 염하는 것이며, 4)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이체(法身理體)를 관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 3종에 대하여 관상염불(觀像念佛)은 정업염불(定業念佛)이고, 칭명염불은 산업염불(散業念佛)이라 하기도 합니다. 또한 정업염불과 산업염불을 관상염불(觀相念佛)이라고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실상염불을 무상염불(無相念佛)이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칭명염불만이 산업(散業)이고 이외에는 모두 정업(定業)이며 정(定)은 선(禪)이기 때문에 일종의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염불선의 정의(定義)를 칭명염불을 제외한 관상염불(觀像念佛)·관상염불(觀想念佛)·실상염불(實相念佛)을 말합니다. 그래서 염불도 선의 일종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염불의 종류가 있지만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이러한 염불은 먼저 가장 기본적인 것이 마음속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위신력과 부처님의 본원력을 간절하게 생각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내어 입과 마음이 상응(相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염불행자가 입으로 소리만 지르고 마음은 다른 곳에 두게 되면 이것은 염불이 아니고 송불(誦佛)이라고 선산대사가 말씀하셨습니다. 즉 마음이 서로 응하지 않는 염불은 입만 극락이고 마음은 지옥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부처님시절부터 행해지던 기본적인 염불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스님들을 간절하게 생각하면서 모든 생각을 삼보에 집중하여 의지하는 것입니다.
4. 염불이란 행복한 삶의 길
행복*이란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만족한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물질적인 만족을 추구하기보다는 정신적인 만족을 우선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불자의 고민과 딜레마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생활에서는 물질이 요구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욕심을 버리라고 하니 말입니다. 참 난감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난감해 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설법을 해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중심적 가치판단을 개입시켜 어떠한 생각을 하거나 가르침을 받아들여 경험적 지식이나 이해를 한다면 가치 중립적이지 못하고 어떤 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경험해 온 지식이나 가치로서 행복의 기준을 설정해 놓고 살아간다면 결코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물질적인 만족과 정신적인 만족의 조화를 도모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과연 행복하셨을까?'라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부처님은 정말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부처님께서 행복하시지 않으셨으면 수행이나 중생교화 도중에 그만 두고 왕위를 계승하여 평범한 일반인의 길을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산야에서 행복의 길을 찾으셨고 행복의 길을 잘 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여실하게 아시고 그렇게 살다 가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고자 한다면 부처님을 따라서 가야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는 행복해 하셨던 부처님을 간절하게 생각하면서 그분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염불이란 "행복한 삶의 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범천의 권청문에 보이듯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법을 설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행복을 위하여 천신과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행복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셔야 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마음속에 계속해서 이어지게 하는 염불이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또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사셨던 부처님을 닮아 갑니다.
Ⅲ. 나아가는 말
이상과 같이 염불에 대해서 염불의 이유와 연원, 염불의 개념과 종류, 염불이란 행복한 삶의 길이고 열쇠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까 염불에 대해서 말씀드린다고 하니까 싱숭생숭하시던 분들이 어째 얼굴들이 시무룩합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심각해하실 것도 없습니다. 이상의 염불은 학자들이나 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아주 간단하고 아주 쉽습니다. 그냥 마음을 집중하여 간절하게 "나모아미타불" 또는 "나모관세음보살" 아니면 "나모지장보살"하시면 됩니다. 염불자의 집중된 마음과 간절한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불교에서는 인과법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즉 인연에 부림을 받으면 중생이요 인연을 부리면 부처라고 합니다. 인연의 소용돌이에 헤매 도는 내가 부처님이 되겠다는 마음을 내어 그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오직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여 집중된 의식 속에서 불·보살님을 친견하고 그 분과 하나되면 가피(加被)가 내려집니다. 염불자가 염불하는 가운데 빛이 내려질 때도 있고, 꿈속에서 마정수기를 받을 때도 있으며, 설법을 들을 때도 있으며, 염불자나 가족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미래가 환히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 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더한층 가행하면서 감사해하면서 정진하는 것입니다. 앞에 나타난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마군이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지 마시고 오직 염불을 합니다. 그리하여 무상(無相)과 무생(無生)과 무심(無心)의 이치를 터득하여 열반이란 행복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행복감으로 그득하여집니다. 현세가 행복하면 내세도 반드시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느끼는 기꺼움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염불함으로써 행복해 합니다. 가장 큰 소리로 따라서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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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幸福 happiness)이란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 갖가지 욕구를 가지며, 그것이 충족되기를 바라는데, 그러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는 상태 또는 그때에 생기는 만족감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욕구의 만족을 구하고 있는가에 따라 행복의 내용 또한 가지각색이다. 감성적 욕구의 만족에서만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쾌락주의자로 불린다. 이 경우 행복이란 감성적 쾌락으로,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가 이 종류의 쾌락주의를 주장했다고 하여 쾌락주의자를 에피큐리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자신은 반대로 참다운 행복은 어떤 욕구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있다고 보았다. 동양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라든가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경지라는 것이 여기에 가깝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감성적 욕구의 만족이 아니고 정신적 안정을 구하는 욕구의 만족이다. 스토아학파 사람들도 이성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고 극기금욕적(克己禁慾的)으로 사는 데에서 행복을 발견하였다. 스토아학파에 한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인격적 완성에 정신적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은 감성적 쾌락을 낮은 차원의 행복으로 여기며 그것을 부정하는 경향이다. 한편 인류 전체의 행복 촉진을 중시하는 윤리설도 있다. 예를 들어 공리주의에 따르면 윤리적으로 좋은 행위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하는 행위이다. 이 행복에는 감성적 쾌락 외에 여러 가지 정신적 쾌락도 포함되지만, 실제로 다종다양한 쾌락의 총화를 계산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며, 오늘날 공리주의 원칙은 쾌(不快)의 증대보다 불쾌(苦)의 감소에 적용되고 있다. 즉 지상에서 인류의 불행을 가능한 한 제거하는 것이 행복 증대로 이어진다는 견해로,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이런 종류의 견해가 모양을 바꾼 상태로 발견된다. 또한 칸트는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복주의 윤리를 물리치고, 도덕법칙에 따르는 유덕(有德)한 생활을 중시한다. 유덕한 생활은 당장에 행복하지는 않지만 '행복을 향유할 만한' 생활이므로, 덕과 행복의 일치도 유덕한 생활을 통해서만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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