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신심명』④
진리 추구 말고 다만 분별을 끊어라
마음이 움직임에서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은 다시 미동한다.
(心動歸止 止更彌動)
오직 양변에 걸려 있으니 어찌 한 모양을 알까.
(唯滯兩邊 寧知一種)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본심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우두법융은 『심명』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하면 도리어 흩어진다”고 하였고, 『종경록』에서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깨달음이 늦어지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움직임·그침, 진·망, 유·무의 양변의 세계에 걸려 있다면 일종(一種)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모양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모두 공력을 잃고
(一種不通 兩處失功),
있음을 버리려 하면 있음에 떨어지고 공에 따르려 하면 공과 등진다.
(遣有沒有 從空背空)
일종을 통달하지 못하면 양변 자체의 공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지도를 위해 유[緣]를 버리게 되면 일상의 모든 중요한 것을 잃게 되고 공[忍]에 따르면 공이 대상화 실체화되어 참된 공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말이 많고 분별이 많으면 더욱 상응하지 못한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어디에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絶言絶慮 無處不通)
‘다언다려’하면 지도(일심)와 상응하지 않다는 것. ‘상응’은 ‘반응’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말과 분별이 잡다하면 지도와 서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언절려’하면 지도에 통달한다는 것이다. 바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된다. 자아의 분별마저 없으면 무애자재함을 보인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종지를 얻고 비춰진 것(대상)에 따르면 진리를 놓친다.
(歸根得旨 隨照失宗)
잠깐이라도 반조하면 비춰진(눈앞에 전개된) 공보다 훌륭하다.
(須臾返照 勝脚前空)
‘귀근’이란 노자에 의하면 ‘정(靜)’이며 ‘목숨이 돌아가는 곳’이다. 『조주록』에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위근득지 수조실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스님은 “나는 이말에 대답할 것이 없네”
납자는 “제발 말씀해 주시오”
스님은 “답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네” 그리고
“비춰진 것(공)에 따르기만 하면 종지를 잃어” 라고 하면서
“그대에게 대답하게 되면 바로 어긋나!”라고 한 것이다.
‘반조’의 중요성을 선사는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반조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이다. 스스로를 비추는 것이다.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종지’를 파악하게 되지만 ‘본래의 자아’가 아닌 ‘관념의 자아’를 좇게 되면 종지를 잃게 된다는 것. 따라서 찰라에 반조하는 것이 ‘수조’의 공에 정체하는 것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눈앞의 공의 세계가 변하는 것은 모두 망견 때문이다.
(前空轉變 皆由妄見)
참됨을 구한다는 것은 소용없으며 다만 (분별의)견해를 쉴 뿐이다.
(不用求眞 唯須息見)
유도 공도 대상화된 ‘전공(前空)’이 이에 해당한다. ‘전공전변’은 자아의 망견에서 생겨나는데 수고로이 참됨을 구해야 할까? 다만 자아의 견(二見)을 쉬는 것만이 필요하다고 신심명은 가르친다. 우리들 눈앞에 변해가는 모든 것은 ‘실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아의 망견에 의한 것, 그래서 망견을 쉬는 것이 바로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며 이는 외경(外境) 즉 이원적 세계를 승각(초월)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조고각하하여 ‘본래의 자기’를 반조하는 것이 참된 수행이다. 임제록에 ‘삼계유심 만법유식’이라고 임제스님은 설했다. ‘자아가 없을 때 모든 것이 자아가 된다’는 즉비(卽非)의 반야세계는 신심명의 현지이며 오직 ‘식견’일 때 그것이 드러난다고 가르친다.
혜원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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