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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언(是無言),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 이용도 목사
Victor Wellington Peters목사 저/박종수 역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며
지금 이용도 목사가 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조용히, 그리고 겸손하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오고 있다. 간소한 복장이지만 깨끗한 차림을 하고 있다.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인사를 하며 우리가 먼저 말을 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점잖은 미소로 응답하자 우리는 이내 그를 좋아하게 된다. 우리가 그의 사역에 대해 더 질문하고자 하면, 그는 우리의 생각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 놓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 일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잘 듣는다면,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아마 어떻게 성령이 신자들에게 강림하시며, 또 어떻게 완악한 죄인들이 영화롭게 구원받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한 불꽃이 그의 영혼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사역을 바라보는 구경꾼에 불과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왔는지 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알아차리질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슴 안에서 활동하신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이 목사는 우리를 정죄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면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무언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이 목사가 이미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헌신이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다. 마치 그가 죄인인 것처럼.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비하게 할 때 몇 시간이 흘러간다. 새로움이 온다. 이전 것은 지나갔음을 느낀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에 대해 증거하기를 갈망한다.
이용도와 나는 1930년 같은 해에 서울에서 감리교단에서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30년 연회에서 그는 서울에서 주일학교 협의회의 일을 보도록 파송받았다. 그가 서울에서 기거할 방이 없었기에 나는 그를 초대해서 함께 살았다. 나는 사직동에 있는 다섯 칸의 방이 있는 한국식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거처할 곳을 찾아 가족들을 동해안에서 서울로 옮길 때까지 3-4개월을 함께 살았다. 우리 집 옆에는 영어교사였던 한인수 목사가 그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이용도는 나에게 참으로 정다운 친구요 형제였다. 나는 내가 한 성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를 생각나게 했다. 그는 가끔 티벳에서 그리스도를 전했던 인도의 성자 선다싱을 찬양했다.
나는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이용도가 방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그의 설교를 들었다. 나는 그로부터 그의 생애에 대한 나의 글 "시무언"을 위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글은 1935년에 서울에서 발간된 기독교문학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 회지에 실린 것이다.
나는 그가 자기 집으로 옮기자 못내 서운했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이용도는 예민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는 그가 한국 주일학교 협의회를 위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그 직책을 맡기에는 너무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처럼 설교할 수는 없었다.
다음 연회에서 감독께서 이용도로 하여금 대중 전도사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아무런 봉급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스톡스(M. B. Stokes; 도마련) 박사와 나는 그를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이용도는 나라 전역에 걸쳐 유명해졌다. 부흥회에 초청하는 부탁이 전국 각지에서 쇄도했다.
우리 대부분은 일상적인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하루의 시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잠자는 동안에 밤새도록 기도하고, 감독(bishop)보다는 거지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예수께서 에 있는 환전상들을 몰아 내셨을 때, 주님께서는 오해를 받았다. 예수께서는 사욕으로 가득 찬 거래행위와 큰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사려 깊지 못한 행동들을 보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잠잠할 수 없었다. 그런 경우에 그는 개인의 인기에 집착할 수 없었다.
이용도는 그런 예수와 거의 닮았다. 그는 자주 다음의 성구를 인용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요 2:17). 그는 결코 냉담하거나 차갑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 안에서 행해진 자기들의 일상적인 행위를 비판한 예수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이용도와 같은 사람의 열심은 필연코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게 마련이다. 생각컨데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현재위치에서 부적절하게 느낀다. 나도 역시 그렇다. 그는 어떤 목회자에게도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저울질 당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몇 가지 점을 지적하신다. 아마도 많은 목회자들은 냉정함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며 집으로 갔다. 한 소문이 돌았다. 그것은 이용도가 공개적으로 목사들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용도가 여인들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는 여인에 대한 남자의 공개적인 관심은 금지되어 있었다. 영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마 이용도로 하여금 당시에 통용되었던 몇몇 제한사항들을 무시하게 하였다.
1932년 경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이용도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다. 젊은 여인들이 성령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그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이것은 마치 그가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본능적으로 어디라도 가려는 것과 같았다. 그 여인들 가운데 한 여자는 "계시"를 받은 것처럼 이 목사를 비난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설교하느냐?" 그녀는 이 목사를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는 기양(Kiyang)에서 실패하지 않았느냐? 계시 없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자 보라. 나는 이 시대의 마지막에 새로운 일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언젠가 분명히 성령의 영향을 받아 말하는 다른 한 여자는 사랑에 대해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
감리교의 동역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이 목사는 당시 비난의 화살을 받기에 용이한 상태에 있었다. 시무언은 성령을 위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 모임에서 그는 성령께 물었다. "당신은 어찌하여 무식한 여인을 통해 말씀하시려 하십니까?" "내가 만약 지식층 남자를 통해 말한다면, 너는 그가 자기 자신의 지식을 통해 말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여인에게서 나온 대답이었다.
이용도는 다시 한번 그 영에게 말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여인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진정 성령의 역사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 여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도마여. 네가 만약 내 몸을 만지지 않고 믿을 수 있었다면, 너는 더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너의 믿음이 어찌하여 그렇게 약한가?"
그 순간 이용도는 확신했다. "이것은 사탄의 말일 수 없다. 이 말은 성령의 말씀이 분명하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원산에 있는 청년들의 모임을 방문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처럼 날마다 한 마음으로 모여서 이 집 저 집 방문하면서 떡을 나누고, 한 마음으로 즐거움을 나누면서 식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행 2:46). 그들은 나를 그들 한가운데로 청하면서 환영했다. 나는 신기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들 가운데 계시를 받은 듯한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성령의 계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진부한 것들이었다. 더구나 나중에 전한 예언까지도 거짓으로 판명났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이야말로 "빛의 천사"로 나타나기를 좋아하는 가장 큰 사기꾼임을 알아야 한다(고후 11:14).
나는 이용도가 이 점에 있어 미혹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비방할 수 없다. 그의 감리교 동역자들은 그를 떠났지만, 이 새로운 모임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가 필요한 따뜻한 애정을 주었다. 1933년 감리교 연회에서는 그를 의문시하여 그에게 목회사역을 중단할 것을 공식화했다. 그를 중심으로 모인 친구들은 예수교회를 설립하고 이용도를 초대 선도감으로 선출했다.
전형적인 겸손함으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오 주님, 내가 이 가시면류관인 선도감직을 수락해야 합니까? 가능하다면 이 잔과 가시관이 나를 빗겨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오! 주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그 당시 이용도는 육체적으로 매우 연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요양하는 것 외에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은 점점 분명해졌다. 주님께서는 1933년 10월 2일에 그를 불러가셨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오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자여. ... 내가 굶주렸을 때 너는 나에게 빵을 주었고, 내가 방황할 때 너는 나를 안으로 맞아들였다"(마 25:34).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바르게 행함이니, 자비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으라"(미 6:8).
나는 예수교회 사람들이 이용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일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1933년 3월에 한국을 떠나야 했다. 감리교 선교국은 병중에 있는 한 미국인 선교사가 귀국하는 길에 나로 하여금 그와 동행하도록 주선했다.
나는 1934년 8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 후 1-2년 동안 이용도의 부인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4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졸업하기 석 달 전에 나는 여전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1928년 2월 10일 금요일 저녁, 나는 중국 본토 선교회의 미국담당자를 만나보러 갔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살고 있으면서 학생부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선교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반가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셨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중국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갈 생각을 마시오." 그는 계속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움직일 분비가 되셨다면,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이오. 마치 중국인이 손님에게 안녕인사를 하듯이, 만만소(천천히 가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주는 내 충고요."
이틀 후, 2월 12일 일요일 밤에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조선(Korea)에 복음전도자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살고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들은 답장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네가 조선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한 달이 지나 감리교 선교국에서 전보가 왔다. "청원이 받아들여짐-일하시오-조선(한국)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나의 모교회(母敎會)에서 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문은 활짝 열렸다.
1928년 7월 31일, 나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조선으로 갈 배 위에 있었다. 나는 8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나는 조선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고 생각했다.
한인수 목사는 나에게 조선어를 가르칠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양주삼과 함께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제 일반에 속해있었다. 약 두 달 후에 나는 처음으로 조선어로 설교를 했다. 마태복음 2:10을 본문으로 나는 용산 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양주삼 박사는 나에게 조선 이름을 선사했다. 나의 한국이름은 피도수(皮道秀)였다.
12월에 나는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솜이 든 조선옷을 입기 시작했다. 1년 동안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일한 후에 나는 사직동에 있는 조선인 집으로 이사갔다. 서울 지역의 선교를 위한 내 일자리는 종로 근처에 있었고, 서울 동부 지역의 선교를 위해 의정부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나는 신설리와 성북동에서 천막집회를 가졌고 그 두 곳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1934년에 미국에 돌아 온 후에, 감독은 나를 1년간 개성 선교사로 파송했다. 한 시골교회에서 부흥회가 있는 동안 나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열로 심하게 앓았다. 1935년에 나는 철원지역으로 파송받았다. 김화교회에 담임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살기 위해 갔다. 그러나 나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대구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국의 북경까지 돌아 다녔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나는 많은 교회를 세웠다. 우리는 그 당시 약 200불 정도면 시골에서 조그만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김화에 돌과 타일로 된 지붕이 있는 조선식 교회를 지었다.
한흥복은 한 달에 두 번씩 한 여자 선교사를 대동하고 김화를 방문했다. 금요일 저녁, 그녀는 청년부 모임을 인도했고 토요일에는 여자들을 위한 모임을 인도했다. 내가 그녀에게 일요일에 독창을 해주기를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기타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정남수는 김화에서 천막모임을 인도하였다. 그 때 그는 내가 한 젊은 여인을 좋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중에 한흥복이 아직 미혼이라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몇 몇 남자들이 그 당시 그녀와 결혼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그 후 짧은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단순히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그 편지 내용의 전부였다. 나중에 그녀는,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김화에서 1938년 2월 12일에 결혼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조선에 보낸 지 만 10년 후의 일이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호화로운 결혼식으로 인해 빚을 지지 말 것을 충고하였기 때문에, 국수와 보리차로 결혼식을 치렀는데 단 10원이 들었을 뿐이었다.
흥복의 한 친구가 이화여대에서 우리를 찾아와서 조선잡지(Korean magazine)에 우리에 관한 기사를 잘 써주었다. 우리의 첫 딸이 1939년 8월 28일에 태어났다. 우리는 시편 84:11의 말씀에 따라 그 애의 이름을 영은이라고 지었다.
나는 항상 한국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1940년에 미국 정부는 임박한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고 곧 한국을 떠날 것을 충고했다. 당시 경찰들은 조선 사람들이 미국인과 같이 있는 것에 의심을 품었다. 미국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병석에 있었기에 우리가 미국에 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1941년에 우리는 슬픈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곧 다시 돌아오게 되기를 희망했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우리의 귀환은 지연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아내 흥복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동란이 일어났다. 김화는 폐허가 되었다. 1955년까지 어떤 가족도 되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나는 어떤 선교단체와도 연락이 되질 않고 있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교회와 더불어 교회사역을 하고 있었다. 우리 자녀들은 이미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1976년 이화여대에서 개교 90주년 기념을 위해 우리를 초청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즐거움을 만끽했다. 맹기영, 이호빈, 김광우, 한영선, 박창혁 박사, 그리고 김옥길과 같은 친구들이 우리를 왕과 왕비처럼 맞아 주었다. 장미꽃이 만발했고 한국의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국은 이전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1941년에 서울에는 14개의 교회가 있었다. 이제 400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한국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면서 이용도 목사의 자부와 손자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1996년 가을에
피도수(皮道秀)
Victor Wellington Peters
<출처: 이용도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 편, 성서연구사, 1998. 1-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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