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788-1021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 Le XIXe après, Le XXe siècle 788-1021
제2장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793
코울리즈(Coleridge, 1772-1834)와 칼라일(Carlyle, 1795-1881)이후에 시인과 분석가, 예견자와 반성자, 이 두 전형은 영국 사상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 특징들과 화해할 수 없는 대립으로 구별되었다.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은 아들 죤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에게 매우 논리적이고 연역적인 벤담주의의 엄격한 지적 훈련을 전달하고자 시도했다. 젊은 밀은 열정적으로 이 공리학파의 원리들을 채택하였고, 공리주의적 사회를 기초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신적 위기가 도래했다. 그것을 밀은 자서전(Autobiography of John Stuart Mill, 1873의 잘 알려진 페이지들 속에서 이야기 했다. 즉 그것은, 그에게 이전에는 열정적이게 했던 모든 일(임무)들에서 자신을 무관심[무차별]하게 내버려두게 했던, 무기력하게 힘든 감정이었다. 이 감정은, 아버지의 교육이 자신에게 주었던 배타적 분석 습관들을 정서적으로 무덤덤하게 그가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반성적이 아니라 무매개적 감정의 중요성을 보았다. “당신이 행복한 지를 자문해보라, 그러면 그때 당신은 행복하다는 것이 끝나게 될 것이다. 유일한 기회는 삶의 목표로서 행복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의 바깥에 있는 어떤 목적을 잡는 것이다.”그 당시 그는 “시적이지 않는 자연들에 대한 시인”, 즉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시를 읽었다. 1838년에 그는 밴덤의 방법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주목했다. “그의 방법은 경험적이다. 그러나 그 경험주의는 삶의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1840년에 그는 벤덤을 코울리즈와 대립시키면서, 공리주의자들이 아직 낌새를 차리지 못한 진리들로 나아가는 자기 사유를 밝히는 길을 가게 된다. (793)
만일 밀이 자신의 초기 교육으로부터 현명하고 명철하게 제시하는 방식이면서도 연설적이고 열정적인 어조로 제시할 방식을 간직하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이런 위기가 그에게 넓은 관점들을 부여했는데, 그 관점은 공리주의학파에서는 거의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793) (45SLB) (57TKJ)
제1절 논리학 La logique 794
사람들은 근대 철학의 전반에 걸쳐서 논리학개론의 작품 수가 적다거나 또는 무의미할 정도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가 이 과학(논리학)에 관해서 모든 것을 말했다고 하는 칸트(Kant, 1724-1804)의 확신을 사람들이 거의 보편적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과학(논리학)에 관한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의 능력있는 초벌 작업들은 시도의 상태로 남아있었다.그러고 나서 갑자기, 사람들은 19세 중반에 와서 특히 영국에서 방향전환을 주목하게 된다. 1826년에 영국 수학자이며 영국국교주교인 와틀리(Whately, 1787-1863)가 논리학개론(Elements of Logic, 1826)을 출판했다. 논리학과 인식론(l'épistémologie)을 분명하게 구별했다. 그리고 그는 논리학의 실천적 기능을 규정했다. 그 기능은 진리의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증의 오류를, 즉 예를 들어 불합리(귀류법)한 귀결에 의해 오류를 분간해내는 것이라 한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관계있는 역사적 의심(“Historic Doubts relative to Napoleon Bonaparte”, 1819)」을 쓸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크리스트교의 진리를 공격하는 논증들 자체가 나폴레옹의 현존에 대해 의심하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제시했다. 1830년에 영국 수학자 존 허셜(John Herschel, 1792–1871)은 1830년에 자연철학 연구에 관한 예비 담론(A preliminary discourse on the study of natural philosophy, 1831)을 발표했다. 그리고 영국의 박물학자인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은 1837년에 연역과학의 역사: 초기에서부터 현시대까지(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from the Earliest to the Present Times, 1837)을 썼는데, 이 책은 무엇보다도 과학적 발견에서 정신의 발명 역할을 돋보이게 했다. 감각기관에 의한 관찰은 자료들(les données)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험적 법칙들을 제공한다. 이 법칙들을 통일하고 또 인과적 설명들을 발견하게 되는 생각들(les idées)은 가설의 형식으로 정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 생각들은 어떤 규칙들도 덧붙일 필요 없는 천재의 지혜로부터 나온 산물들이다. 휴얼은 이런 생각들(관념들)의 역할을 칸트의 모델로부터 통합하려 생각했다. 칸트의 모델이란 오성의 개념이 생산하는 통일성(l'unité)의 모델이다. 이와는 아주 다른 측면에서 주의할 만한 방식들이 등장한다. 영국 수학자들로서 드 모르간(Augustus de Morgan 1806-1871)과 조지 불(George Boole, 1815-1864)이 있다. 전자는 형식논리 즉 추론계산(Formal Logic or The Calculus of Inference, 1847), 논리학의 제안된 체계에 관한 과목(Syllabus of a Proposed System of Logic, 1860)을 썼으며, 후자는 논리의 수학적 분석(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 1847), 논리와 확률의 수학적 기초를 이루는 사유 법칙 연구(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f Thought on Which are Founded the Mathematical Theories of Logic and Probabilities, 1854)을 써서 기여했다. (794)
전통적 논리학은 외연과 내포에 부여된 개념들로부터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개념들의 이론, 즉 류와 종의 이론은 밀이 흄(Hume 1711-1776)의 경험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우주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여건(le donné)이란, 그것은 개념들이 아니고, 오히려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 인상들의 먼지들(une poussière) 또는 무더기(un amas)이다. 밀의 논리학은 논리학의 전통적 문제들을 하나하나씩 되짚으면서 일상적 해결을 어떤 언어로번역하는 것이었다. 그 언어란 개념들의 현존[존재]을 더 이상 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상들 자체들 사이에서 분리되거나 또는 연합되는 인상들을 가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의 주어(un sujet, 주체), 즉 하나의 물체(un corps)는 어떤 방식으로 배열된 일정한 수의 감각들일 뿐이다. 그 주어(물체)는 우리들 밖에 현존한다(exister).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감각의 영속적 가능성이 있다(être)는 것이다. 마치 물체처럼, 정신(l’esprit)은 내적 상태들의 연결체이며, 즉 인상들, 감각들, 사유들, 감동들, 의지들의 계열이다. “추상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관대한 인물은 존경받을 만하다…, 이 명제는 감각적 사실들을 동반하는 또는 이들에 뒤따라 나오는 현상들, 즉 정신의 상태들만을 포함한다.” 정의(la définition)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편] 추상명제는 사물에 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단어의 의미만 진술하며, 또는 [다른 한편] 추상명제가 일상적 명제와 구별이 안 된다. (795)
삼단논법은 개념들의 이론에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냐하면 삼단논법은 보편자로부터 개별자로 결론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론에서 보면, 보편적인 대전제로서, ‘모든 인간들은 죽는다’가 있다. 이것은 (삐에르, 뽈, 등등이 죽는다는) 이미 규정된 경험들의 한정된 수와 동등하고, 또한 이 전제는 이러한 수의 비망록과 같다. 오직 편의를 위해서 우리는 개별적 경우들을 하나의 요약된 정식으로 통합하는데, 우리의 기억이 최상이라면 요약된 정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 개별적 경우들로부터 우리는 유사한 개별적 사실들에 이른다고 결론짓는다. 그 개별적 사실들이란, ‘따라서 쟈끄도 죽는다’는 것이다. 정신이 완수하는 이러한 실재적 연산(l'opération)에는 어떠한 보편적 공리도 개입하지 않는다. 게다가 공리들(les axiomes)이란, 이번에는 이것들의 차례가 되어서, 경험이 효과적이든 상상에 의해 연속되어 있든, 어떠한 경험도 넘어서지 못한다. 공리가 있다고 해보자. 즉 두 직선은 공간을 둘러쌀 수 없고,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선천성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사유 상으로 아무리 멀리까지 옮겨간다할지라도, [평행하는] 두 직선이 수렴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795)
따라서 생산성 있는 명제[들] 전체는 사실들 사이에 하나의[어떤] 연결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다른 종류의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 연결들 가운데서 자연의 법칙이라는 연결 또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이 분간[구별]될 수 있는가?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베이컨(Bacon, 1561-1626)은 유명한 일람표의 발명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베이컨의 일람표와 흄의 인과성의 경험적 이론은 아주 다른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일람표는 우리가 관찰하는 “자연”(une “nature”)과 우리가 찾고자 하는 “형식”(une “forme”)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일관성 있는 연결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우리는 이런 연결에게 우리 관찰과 더불어 함께하는 수많은 상황들에 의해서 너울[막]을 씌웠다. 일람표는 이 상황들을 제거하는 수단이다. 흄은 인상들의 세계(l'univers)에서 이러한 종류의 연결이 자연 속에 있는지를 무시한다. 그는 관념연합과 습관에 대한 반성 없는 놀이(le jeu)에 의해서 이 연결들을 믿는 우리의 믿음만을 고려한다. 베이컨의 일람표의 실천적 사용은 겉보기에는 흄의 이론적 경험주의와 독립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인과성의 원리에 경험주의적 기원을 부여하건 아니건, 비슷한 절차를 일람표의 절차에 사용하는 것은 인과성의 개별적인 연결을 분간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의 표면에서 이동에 따라 무게의 변화들이 있다는 것이 그 예이다. (796)
밀의 네 가지 방법은 법칙으로 형식화한 인과성의 관계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실천적 절차들의 일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방법은 그의 경험론에 부속되는 것이 아니며, 게다가 동일한 의도에서 흄에 의해 주어진 규칙들은 인과성의 원리에 관한 밀의 주제와 연관이 없다. 게다가 물리학자가 전혀 아니었던 밀은 인식의 기원에 관해서 휴얼(Whewell, 1794-1866)에서, 또 허셜(Herschel, 1792–1871)에서 그 자신의 탐구들의 모든 재료를 얻었다. 그런데 휴얼은 칸트주의자이고, 허셜은 인식 기원에 관해 어떤 특별한 주제의식도 갖지 않았다. 밀의 이 방법들의 사용은 경험주의자와 선천주의자가 일치할 수 있는 인과성의 개념을 가정한다. 인관성이란, 마치 전자는 후자가 나타남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이, 두 현상들 사이에 일관성 있고 무조건적인 연결이다. 따라서 이것은 관찰들 가운데서 이런 종류의 연결이 어떤 것인지를 분간하는 순수 기술적인 문제이며, 또한 그것은 네 가지 방식이 무엇에 쓰이냐에 달렸다. 일치의 방법(Direct method of agreement; méthode de concordance)은 관찰들을 모으는 것이다. 그 관찰들 속에서는 현상이 현재 있고, 그리고 그 현상이 다양한 관찰들에서 공통이지 않는 모든 상황들을 제거하게 해준다.차이의 방법(Method of difference: méthode des différences)은 현재하는 그룹과 부재하는 그룹이라는 관찰들의 두 그룹의 목록을 만든다. 이것은 두 그룹 사이에 공통하는 상황을 제거하게 해준다.공변의 방법(Method of concomitant variations; méthode des variation concomitantes)은 현상의 각 변화들 때문에, 변화하든 변화하지 않든 같이 동반하는 상황들이 어떤 것인지를 지적해준다. 고정되어 있는 상황들이 또한 제거된다. 마지막으로 잔여의 방법(Method of Residue: méthode des résidus)이다. 이것은 앞선 귀납추론들에 의하여, 찾아야 할 원인의 결과를 생산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현재 모든 상황들을 선천적으로 제거하게 한다.예를 들면, 르베리에가 알고 있는 어떤 물체의 인력에도 속할 수 없는 섭동의 원인을 찾고서 해왕성(Neptune)을 발견했다. 이것은 잔여의 방법이다. 이 방법들의 기술을 판단하는 자는 철학자라기보다 오히려 기술자이다. 밀이 믿었던 대로, 이 기술은 발견의 기술이라기보다 검증과 조절의 기술일 것 같다. 덧붙여서 이 기술은 연결된 두 현상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원인인지 어떤 것이 결과인지를 분간[구별]하게 해 주지 못한다. (797)
그러나 경험주의자밀에게는 철학적 영역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어떻게 이 연결을 관찰했던 일관성이 필연적인 인과성의 표시가 되는지를, 달리 말하면 모든 현상은 하나의 원인을 갖는지를, 우리가 확신할 수 있게 되는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한 흄의 심오한 대답을 알고 있다. 밀은 그 대답을 고려하지 않았고, 밀의 해결은 다른 종류의 것으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보편명제에 도달하는 귀납법과 동일한 질서의 귀납법론에 의해서, 우리는 인과성의 원리에 도달한다. 이 귀납법은 일관된 등위접속을 또는 제거에 의한 법칙을, 발견하는 방법의 기술적 절차가 전혀 아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 열거에 의한 귀납법이며, 우리가 삼단논법에서 기능한다고 알고 있는 귀납법이다. 우리는 다음을 귀납추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실이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가 예외 없이 확정했던 수많은 경우들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하나의 사실도 하나의 원인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추론한다. 게다가 이 귀납은 인과성의 원리에 어떤 절대적 가치도 부여하지 않고, 더군다나 어떤 다른 보편적 명제에도 그것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인 없는 사실들이 있는 공간과 시간의 영역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거기서 즉 2더하기 2는 5가 되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794) (45SLI)
제2절 도덕과학들과 도덕론 Les sciences morales et la morale 794
밀(Mill, 1806-1873)이 도덕과학들의 방법을 다루는 것은 공리주의 경험론자들의 학설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논리학 제4권 참조). 사람들도 알다시피, 경험주의자들의 학파에서 학설은 엄격히 연역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로크(1632-1704)에서도 마찬가지였다라고 기억한다. 거기서는 경험론자들에게는 아주 역설적일 수 있는 특징들이 있고, 그 특징은 그들이 무엇보다 먼저 응용과학들에게 물어본다는 생각을 할 때 설명될 수 있다. 사람들은 쾌락의 탐구와 같은 영속적인 행동의 동기들을 가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동기들로부터 행동의 규칙들을 연역한다. 밀은 자기 차례가 되어서, 도덕과학들의 본질적 방법을 연역론에서 보았고, 이 연역론은 수학의 연역론에 닮았고, 또 어떤 법칙에 따라 이미 알려진 결과의 원인들의 집합을 구성하는 동력학(la dynamique)의 연역론에 닮았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예를 들어 헌법의 개정에 의하여, 자기 행동의 결과들을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예견할 수 있다. 밀은 정부를 순수 인간적 발명품이고 적절한 제작품이라고 하는 주제도, 살아있고 자발적인 제도라고 하는 콜리즈(Coleridge 1772-1834)의 낭만적 이론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 행동에 관해, 특히 신념의 행동에 관해 강조했다. “신념을 갖는 한 인물은 이익들(des intérêts)만을 갖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동등한 사회적 힘을 갖는다.”밀 자신은 자유인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그에게 있어서 낭만주의자의 내적 해방도, 공리주의자의 임무들로부터 자유도 의미하지 않는다. 전자의 자유와 반대로, 밀이 말하기를 “나로서는, 괴테의 삶의 이상(l'idéal)만큼이나 근대정신에 낯설고 반감을 갖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그것은 조화가 아니고, 모든 방향들로 무모하게 자유로운 확장이다. 이 확장은 근대 삶의 필요들과 근대정신의 본능들에 의해 요구된 것들이다.” 행동의 자유는 여론들로부터 독립적인 성격의 힘에 근거한다. 후자의 자유에서, 그는 무제한적인 경제의 자유가 진실한 자유와 양립할 수 없음을 잘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노동의 열매들을 정당하게 분배하기를 허락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주의에는 약간의 공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협동제(la coopération)속에서 자유의 수단을 보았다. 또한 그는 여성의 정치적 해방을 지지했다. (798)
이성과 감정 사이의 이런 균형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 1863: L'utilitarisme)란 책에서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감각(des sens)의 쾌락이 아닌 모든 것에게, 즉 예술과 과학이라는 상위 쾌락에게,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라는 고발에 대하여, 공리주의자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런 옹호는 결국에는 좌절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주제[감각적 쾌락, 지적 예술적 쾌락] 사이에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품행의 유일한 동기는 이기주의이다. 만일 동기와 달리 나타날 수 있다면, 인간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 없이도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이타적 행위가 처음에는 이기주의를 만족하기 위한 수단인데, 그리고 자기 동기를 망각함으로써 어떤 수단으로 하여금 하나의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이(le transfert)이다. 이처럼, 탐욕의 경우에서, 부의 축적이 더 이상 향유의 수단이 아니고 오히려 목적 자체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밀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예술적이거나 또는 지적인 몇몇 쾌락은 감각의 쾌락보다 더 나은 질적인 것이다. 이 질적인 것을 고려한다는 것은 감각의 가치에는 속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 주제들 중의 첫째 주제에 따르면, 도덕적 삶은 매개적이고 획득적이지만, 둘째 주제에 따르면 도덕의 미묘함은 원초적이고 본질적이다.
마찬가지로 밀의 자연(본성)은 아주 단순한 공리주의 속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그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이 학파의 철저한 불가지론을 혐오했다. 어쨌거나 그는 초자연에 대한 독단적 부정을 원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무한하고 전능한 신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유고 작품, 종교의 세 가지 시론(On Essays on religion, 1874)에서, 그는 세계 안에서 불완전자들의 현존으로 보아, 보다 나중에 제임스(W. James 1842-1910)에서 결론처럼, 유한한 신의 현존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799)(5:31 45SMB) (6:11, 57TLF)
* 참고문헌 799
Collected Works of John Stuart Mill, Toronto, London, 1963.
John Stuart Mill(1773-1836), Oeuvres complètes, éd. J.-P. Mayer; L'utilitarisme, éd. G. Tanesse, 1965.; Collected Works, Toronto et Londres. Ont paru les tomes XII et XIII, The earlier Letters of J.S.Mill, 2 vol., 1963. Il reste à paraître 18 volumes (v. le c. r. in Revue philosophique, 1967, 3, p.407.) / (c.r.= compte rendu, 보고서)]
K. Britton(1909–1983), John Stuart Mill, London, 1953 [(K.Britton, s.d.)]
M. S. J. Packe(1916-1978), The life of John Stuart Mill, London, 1954
H. Jacobs(1933-?), Rechtsphilosophie und politische Philosophie bei John Stuart Mill, Bonn, 1965. [H. Jacobs s.d. ]
John Stuart Mill(1773-1836), On the Logic of the moral Sciences, Book VI, N-Y., 1965. (45SMB)
*
1806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 철학자. 귀납과 연역 논리체계(A System of Logic: Système de logique inductive et déductive, 1843; Système de logique inductive et déductive) 자서전(Autobiography of John Stuart Mill 1873
1903 메이어(Jacob-Peter Mayer, 1903–1992), 독일 편집인, 사회과학탐구자, 기자. 토크빌(Alexis Tocqueville, 1805–1859) 연구자. 그는 토크빌과 존 스튜어 밀 사이의 편지교환을 편집했다. 그리고 밀 전집을 루들러(Gustave Rudler)와 편집했다.
1909 브리턴(Karl William Britton, 1909–1983), 영국 철학자. 밀의 철학(the philosophy of John Stuart Mill)에 관심.
1916 미셸 팩(Michael St John Packe, 1916-1978) 영국역사가, 존 스튜어트 밀의 생애(The Life of John Stuart Mill (1954).
1933-? 제이콥스(Herbert Jacobs, 1933-?), Rechtsphilosophie und politische Philosophie bei John Stuart Mill, 1965. 이 작품이외 찾을 수 없다. - Herbert Jacob (1933-1996), 독일 태생, 나찌를 피해 가족이 미국이주, 미국서 활동, 정치학 교수: 그런데, 영.위키 속에 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s가 빠져있기도 하고). 이 인물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이름에 맞는 철학자는 없었다.
?-? 따네스(Georges Tanesse, s.d.) 프랑스 번역가, 밀 전문가. L'utilitarisme, éd. G. Tanesse, 1965. (57TKJ) (57TLF)
책브레이2409철7권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