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의 얼굴, 동물의 몸짓’. 석창우 화백의 얼굴,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언뜻 떠오르는 단어이다. 아산방조제 인근의 조개구이집이었다. 약주를 좋아하던 화백이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쉴 새 없이 안주를 집어주던 여자배우에게 석화백이 화를 낸다. 숨쉴 틈을 달라고. 그래도 난 화를 내는 석화백의 얼굴에서 까다로운 어른의 그것이 아닌 응석부리는 아가의 얼굴을 본다. 한 여름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한 참을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석화백이 먹이를 발견한 암사자 마냥 붓을 내갈긴다. 그림에는 배우들의 화려한 몸짓, 얼굴 표정의 디테일은 오간데 없이 뼈와 살만이 남아 뒹군다. 아직은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글의 동물들이다. 화려한 의상이 아닌 땀과 피가 뒤범벅이 된 몸짓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이후 난 석창우 화백이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그의 몸짓을 보면 동물의 섬뜩이는 본능을 본다. 그림은 그 본능을 그대로 드러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척이 없다. 잘난 척도 못난 척도 없다. 그의 그림은 알몸이다. 그의 그림은 가장 동물적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본능을 일깨워준다. 그의 그림은 순간이다. 순간이기에 장식을 할 시간이 없다. 그저 순간이기에 진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흔적이다. 그 흔적에는 세월과 아픔을 이겨 낸 그의 고뇌가 긍정의 힘으로 서려 있다. 그래서 석화백에게 막 시작하려던 우리 연극만들기 집단의 이름을 써주길 부탁했다. ‘극단 서울공장’ 화려한 장식을 걷어 내고 알몸과 날소리의 진실만이 존재하는 연극만들기를 염원하였기에... 그리고 석화백에게 또 부탁하였다. 극단 서울공장이 연극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중섭 화백의 <길 떠나는 가족>을 그려줍사하고. 중섭의 눈에 비친 소가 하얀 뼈였듯이 석창우의 눈과 몸은 소가 걸친 가죽, 털, 인상 등을 그릴 여유가 없다. 그에게 남는 것은 소의 자국, 흔적일 뿐... 혼이 남아있을 뿐 절규의 소리만이 들릴 뿐
석창우 화백과 인연을 맺은 게 그럭저럭 7년이 넘어간다. 극단 서울공장의 창단 공연을 준비하면서 만났으니 극단의 삶을 온통 같이 한 셈이다. 언제부터인가 석화백의 흑백 그림에 색깔을 추가하기 시작했을 때 적지않이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수식인가? 설명인가? 그건 우려였다. 그의 그림에 덧입혀지는 색깔은 수사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획득한 우리 맘의 색깔이라는 것을...그가 이제는 올림픽도 그리고 김연아도 담고 자전거 바퀴도 담고... 세상을 주유한다. 옛 선비들은 나비가 노닐고 학이 뛰노는 모양새를 붓을 놀려 그림에 담고 글에 담았다. 그러고 보면 석창우 화백의 그림은 그림을 귀로 듣고 말을 움직임으로 볼 줄 알았던 시인이자 가객의 그림이다. ‘그림은 손의 잔재주가 아닌 혼의 흔적이요. 그림은 보는게 아니라 듣는거요.’라고 외치는 선생이 우리의 연인, 시인, 광인으로 늘 잔잔히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