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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평화조약에 관한 사유의 출발선 II. 전후 미국이 관련된 평화조약들의 형태 III. 2.13합의와 그 배경 1. 2007년 2.13합의 2.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2.13합의까지 IV. 2.13합의와 한반도 평화조약의 위치 설정 1. 2.13합의의 취지에 따른 평화조약의 위상과 두 가지 연계방식 2. 평화협정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국내 논의의 문제점 V. 평화협정인가, 평화조약인가 VI. 당사국 문제 VII.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한 안전보장의 균형 1. 평화조약에 반영해야 할 핵심적 분야 2.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 안전보장의 문제 VIII. 한반도비핵화와 동북아비핵지대 지향의 규범 1. 동북아 핵군비경쟁 구조: 동북아 비핵지대 근거마련의 절실성 2. 동북아비핵지대화에의 규범을 전제하는 한반도비핵화 IX. 한반도 유사시 미국과 중국의 무력개입 차단 문제 1. 반세기만에 반복된 한반도 역사의 비극 2. 한반도 평화조약에서 외세 무력 개입 가능성을 통제하는 문제 X. 고농축우라늄 핵프로그램 문제 XI. 평화조약체제와 한미동맹/주한미군 문제 XII.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질서 |
I. 평화조약에 관한 사유의 출발선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평화조약(평화협정)의 의미와 역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리고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서 이 글은 출발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평화체제의 구축과 떼어 논할 수 없으며, 평화체제의 구축에는 관련 당사국들이 다 함께 실천의 의무를 지는 청사진 또는 이른바 로드맵을 공유하는 수단으로서 평화조약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평화체제란 무엇인가. 남북한이 서로에 대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상하고 가급적 최대한의 무력을 준비하는 것을 최선의 안보정책으로 삼는 것에서 남북한이 다 같이 일정한 일련의 구체적인 원칙과 규범, 규칙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고 이를 이행함으로써 ‘위협과 공포의 균형’이 아닌 공동안보(common security)의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 질서의 창조에는 우리 한반도의 경우 그 운명에 지난 수십 년간 함께 깊이 개입해있었던 미국과 중국과 같은 외세들의 행동과 정책 역시 그 규범의 틀에 동참시키는 과정을 필수적 요소로 한다고 필자는 믿어왔다. 그래서 한반도의 공동안보의 질서, 즉 한반도 평화체제는 남북한의 관계양식의 변화인 동시에 미국과 중국 같이 남북한과 전쟁으로 그리고 군사동맹으로 연결된 영향력의 실체들의 행동양식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를 위해 우리가 합의하여 공유할 수 있는 일련의 원칙, 규범,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평화조약이다. 역사상 모든 평화조약은 추상적이지 않다. 관련된 당사국들의 첨예한 안보와 생존 및 사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공통의 원칙과 규칙을 찾아내는 일은 몇몇 추상적인 개념들을 나열하고 모든 당사자들이 별 반대할 것이 없는 좋은 말들로, 그러나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내용이 없는 그런 문서를 써내는 일과는 다르다. 전쟁이 끝난 후의 전후처리용이든, 갈등을 극복하는 새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든, 평화조약은 당사자들이 각자 구체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행동의 일정과 규칙을 담았으며 대체로 많은 구체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글의 의도는 한반도 평화조약이 담아야 할 내용들에 대한 구체적인 문안을 작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부 그러한 시도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도들이다. 어떤 형태와 내용이든 우리 시민사회와 학계가 정부에 앞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에 평화조약의 역할을 주목하고 고민하는 증거들이다. 다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서 평화조약이 담당해야 할 근본적인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더 충실한 고민들이 필요해 보인다.
2003년 박명림 교수가 발표한 사실상의 남북평화협정안의 경우처럼, 당사자를 어떤 범위로 할 것인가와 같은 초보적인 개념에서부터 남북당사자주의라는 그릇된 전제를 끌어들인 가운데, 「남북기본합의서」 문안들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추상적인 원칙들을 재배열하는 수준에서 머물 때, 평화조약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오히려 크게 제한되고 왜곡될 수 있다. 아울러 남북당사자주의를 “자주”(自主)의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명확하게 정의되지도 통제되지도 않는 ‘강대국 보장’의 개념을 한반도 평화협정에 이끌어 들임으로서 국제관계적 개념에서나 현실적인 제도적 결과에서나 어쩌면 가장 비자주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중요한 오류를 담고 말았다.
또한 2007년 4월 평화재단이 마련하여 윤영환 변호사가 대표 발제한 한반도평화협정안은 당사자문제에서는 한 걸음 진전된 방향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평화협정을 여전히 북한 핵문제가 사실상 다 해결된 뒤에 체결가능한 일종의 요식행위 수준의 문서로 이해하는 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별다른 알맹이가 없어 보이는 추상적인 문안들의 재배치라는 수준에서 머물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 지식인 사회가 평화협정에 대해 갖고 있는 사유 틀의 범위이며 그 표현이다. 한반도의 여전한 긴장과 미국의 대한정책의 실존하는 결정력, 그리고 남북한관계의 현실이 평화조약에 대한 우리의 사유범위를 제한하고, 그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발상의 전환을 한계 짓는 이념적 스펙트럼 양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의 논의 수준 역시 추상적 차원에서 머물고 있는 부분이 많으며 보다 구체화된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많은 숙제를 담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답에 대한 추구를 자극하고 추동하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차원에서 다소 추상적인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답안들을 우리는 함께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의 논의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반도 평화조약을 사유함에 있어서「남북기본합의서」의 틀 안팎에서 맴도는 문제의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다. 평화조약을 통해 한반도의 운명에 개입해 있는 당사자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더 고민하고 새로운 차원의 문제의식도 개발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협정안을 작성하는 데 있어 기술적인 차원의 작업은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방부 등 우리 정부의 관련부서들이 충분히 갖고 있다. 이미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이 글에서 평화조약에 대해 하고자 하는 얘기는 우리가 이 조약을 통해 추구할 원칙과 규범들이 어떤 것이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평화조약이 평화체제의 로드맵이나 청사진으로 자리매김될 경우 그것이 포함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 것을 이 글이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필자의 전공의 범위와 능력을 많이 넘어선다. 특히 군비통제의 수준과 방식에 대한 원칙적 규범들과 가능한 일정에 대한 논의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는데, 분야별로 더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정부와 시민단체 및 학계 안팎의 전문가들이 담당해줄 것으로 믿는다. 다만 이 글에서 던지고 논의하는 질문들과 문제제기들과 종적 횡적으로 연결된 것들이므로 이에 비추어 그 분야별 문제들이 어떻게 접근되고 사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설정에 새로운 각도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이 글의 제한적 사명은 충족된다고 믿고 싶다.
II. 전후 미국이 관련된 평화조약들의 형태
전후 미국이 개입하여 만들어낸 평화조약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후처리(post-war arrangement)의 일환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그 첫째 유형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Allied Powers)이 일본과 체결하여 48개국이 1951년 9월 8일에 서명한 「일본과의 평화조약」(The Treaty of Peace with Japan)이 그것이다. 1952년 4월 28일 발효된 이 조약은 일반적으로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불린다. 대만은 1952년 일본과 별도로「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제1장 제1조에서 일본과 연합국 각자 사이의 전쟁이 이 조약이 발효되는 순간부터 종료된다고 선언하고, 연합국은 (패전국인) 일본 국민이 일본과 그 영해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가짐을 인정한다고 밝히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승전국으로서의 미국을 중심한 연합국과 패전국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답게 제2장의 “영토”(Territory)란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포함하여, 대만과 대만 서쪽의 군도인 팽호(澎湖)열도(Pescadores)에 대한 모든 권리, 쿠릴 열도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의 결과로 일본이 확보했던 사할린과 그 인근 섬들에 대한 권리, 또 난사군도(Spratly Islands)와 파라셀 군도(Paracel Islands) 등 과거 일본이 군국주의 제국으로서 무력으로 확보한 해외 영토들에 대한 권리를 일본이 포기(renounce)할 것 등을 규정하는 내용들이 맨 앞에 들어서 있다. 또한 일본을 보편적인 국제법적 규범 속에 확고히 위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유엔헌장(UN Charter)과 보편적 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등을 광범하게 인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승전국이 패전국의 위상을 구속하는 항구적인 법적 규범을 부과하는 법적 문서로서의 평화조약이다.
두 번째는 미국이 어떤 지역의 전쟁에 개입한 후 군사정치적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물러나면서 맺은 조약이다. 1973년 1월 17일 미국이 북베트남(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남베트남(Republic of Vietnam), 그리고 남베트남의 잠정혁명정부(Provisional Revolutionary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South Vietnam)와 체결하여 서명하고 발효된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이 그것이다. 미국은 남베트남정권을 무력으로 뒷받침하여 지탱하던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북베트남의 궁극적인 승리를 받아들여야 했다. 다만 인도차이나로부터의 명예로운 철수가 필요했다. 파리평화협정에 임한 미국의 목적은 그런 것이었지만, 베트남민족으로서는 민족자결권을 확보하는 역사적 문서이기도 했다.
이 협정의 핵심은 제2장 제5조의 “미국은 남베트남으로부터 이 협정의 서명후 60일 이내에 완전 철수(total withdrawal)한다”는 규정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의 철수는 실제 1973년 3월 29일에 완료되게 된다. 북베트남이 궁극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그리고 미국은 현실에서 이미 패배한 전쟁의 전후처리용으로 맺은 협정답게, 이 협정의 제1장 제1조는“1954년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협정이 인정한 베트남의 독립, 주권, 통일성(unity), 그리고 영토적 존엄성을 미국과 모든 다른 나라들은 존중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하였다. 미국으로서는 불리한 위치에서 이미 진행된 패배의 명예로운 수습용이었던 만큼 ‘조약’의 위상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행정협정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었다.
세 번째 형태는 승리든 패배든 사실상 이미 결정된 어떤 전쟁의 뒤처리용이 아니라 전쟁에 관여했던 나라들이 오랫동안 지속된 군사적 긴장과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다 같이 보다 항구적인 평화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합의하는 협정이나 조약이다. 미국이 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경우로서 그러한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평화협정을 맺은 경우는 없다. 다만 미국이 분쟁의 당사자가 아니지만 미국이 외교적/현실적으로 깊은 이해관계와 영향력을 가진 제3의 국가들이 분쟁하는 지역에서 미국이 중재역할을 하고 동시에 협정에는 ‘증인’으로서 서명하는 경우다.
1993년 8월 2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합의되고 이어 1993년 9월 13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서명된 「오슬로협정」(Oslo Accords: 공식명칭은 Declaration of Principles on Interim Self-Government Arrangements)에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마무드 압바스와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가 서명 당사자가 되고, 미국의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장관과 러시아의 안드레이 코지레프가 증인(witness)으로 참여하였다. 1994년 10월 26일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요르단 하세미트 왕국과 이스라엘 간 평화조약」(Treaty of Peace Between 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 And The State of Israel)은 요르단 수당 압둘 살람 마잘리와 이스라엘 수상 이스작 라빈이 서명했고, 미국은 분쟁 당사자가 아니었던 만큼 클린턴대통령이 “증인”으로서 서명했다.
만일 한반도에서 평화조약이 성립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즉 네 번째의 새로운 유형이 될 것이다. 첫째, 승전이냐 패전이냐의 여부를 떠나 전쟁의 당사자였던 미국이 단순히 전쟁의 전후처리를 하기 위한 조약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조약은 미국에게는 북한의 비핵화라는 중대한 안보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또 북한에게는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과거 전쟁의 당사자였으며 현재와 미래에도 북한의 군사적 경제적 안전과 안정 여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을 확보하는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의미가 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한 호혜적 협정이 되는 것이다.
둘째, 위의 세 번째 유형인 오슬로협정이나 요르단-이스라엘 평화조약의 경우와 달리 미국은 한국전쟁의 당사자이며, 또한 현재 한반도에서 자신의 중대한 안보관심사를 달성하고자 하는 직접 당사자다. 그런 만큼 단순한 증인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의 직접 당사자로서 참여할 수밖에 없다.
III. 2.13합의와 그 배경
1. 2007년 2.13합의
북경에서 제5차 6자회담이 시작된 것은 2007년 2월 8일이었다. 닷새만인 2월 13일 도출된 합의문은 제1항에서부터 2005년 가을에 성립한 9.19공동성명(Joint Statement of 19 September 2005)의 이행을 위한 초기단계의 행동을 논의했음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한반도의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달성하는 것이 6자 모두의 공동의 목표임과 또한 9.19공동성명의 약속들을 재확인했다. 이를 위해 6자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principle of "action for action")에 따라 단계적인 방식으로 9.19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로 합의했음을 밝혔다.
이른바 “초기단계”(initial phase)에서 6자가 병렬적으로(in parallel) 취하기로 합의한 행동들, 이른바 ‘초기행동들’(initial actions)은 다음 다섯 가지였다.
첫째, 북한은 재처리시설을 포함한 영변의 핵시설들을, 궁극적으로 폐기하는 것을 목표로(for the purpose of eventual abandonment), 폐쇄하고 봉인한다. 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을 다시 초빙하여 국제원자력기구와 북한 사이에 합의된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작업을 수행하도록 한다.
둘째, 북한은 사용 후 연료봉에서 추출된 플루토늄을 포함하여 공동성명에 따라 폐기될 모든 핵프로그램의 목록을 다른 5개국과 논의한다.
셋째, 북한과 미국은 두 나라 사이의 현안들(pending bilateral issues)을 해결하고 완전한 외교관계(full diplomatic relations)로 나가기 위한 양자회담(bilateral talks)을 시작한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규정(designation of the DPRK as a state-sponsor of terrorism)을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또한 적성국무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의 북한 적용을 중지시키는 과정을 진전(advance)시킨다.
넷째, 북한과 일본은 불행한 과거(unfortunate past)와 주요한 관심 문제들의 해결을 기초로 평양선언(Pyongyang Declaration)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들을 목표로 양자회담을 시작한다.
다섯째, 2005년 9월 19일의 공동성명 1항과 3항을 상기하면서, 6자는 북한에 대한 경제, 에너지, 및 인도적 지원에 합의하였다. 이에 관련해, 6자는 초기단계(initial phase)에서 북한에 비상에너지지원을 제공할 것을 합의했다. 중유 5만 톤에 해당하는 비상 에너지 지원의 초기 수송이 향후 60일 이내에 시작될 것이다.
참가국들은 이상의 초기조치들을 60일 이내에 이행하기로 하였다. 이어 3조에서 6자는 초기조치들의 완전한 이행을 위해 5개 분야의 실무그룹(working groups)을 구성하기로 했다. (1) 한반도 비핵화; (2) 북미관계 정상화; (3) 북일관계 정상화; (4) 경제 및 에너지 협력; (5) 동북아 평화/안보체제가 그것이다. 각 실무그룹은 9.19공동성명의 구체적 이행을 위한 계획을 협의하고 수립한다. 각각의 실무그룹의 진전은 다른 그룹들의 진전 여부에 영향 받지 않도록 하되, 이들 실무그룹에서 만들어진 계획은 상호 조율된 방식으로 전체적인 차원에서 이행한다고 이 합의문은 밝히고 있다. 참가국들은 이 실무그룹을 합의문 작성 후 30일 이내에 구성한다고 하였다.
이어 이 합의문은 4조에서 “다음 단계”를 정의하였다. 그것은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와 흑연감속로 및 재처리시설을 포함하는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의 불능화(disablement)”로 규정되었다. 초기조치 기간과 이 “다음 단계” 기간 중에 최초 선적분인 중유 5만톤 상당의 지원을 포함한 중유 100만톤 상당의 경제, 에너지 및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북한 핵문제 해결에 직결된 행동 대 행동의 이행 일정에 관한 합의다. 이어 5조에서는 초기조치가 이행 되는대로 6자는 9.19공동성명의 이행을 확인하고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장관급 회담을 신속하게 개최한다고 하였다. 6조에서는 참가국들이 상호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고 동북아에서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증진시키기 위한 공동노력을 재확인하면서,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위한 협상을 갖는다”는 9.19공동성명의 언급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끝으로 7조에서 참가국들은 실무그룹의 보고를 받은 후 다음 단계 행동을 협의하기 위해 207년 3월 19일 제6차 6자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2.13 합의를 보면 이 문서가 2005년의 9.19공동성명의 재확인을 핵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먼저 9.19공동성명의 내용을 다시 확인해보자. 「제4차 6자회담 공동성명」(Joint Statement of the Fourth Round of the Six-Party Talks; Beijing, September 19, 205)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6개 항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참가국들은 6자회담의 목적이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룩하는 것임을 만장일치로 재확인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기존의 핵프로그램들을 폐기할 것(abandoning all nuclear weapons and existing nuclear programs)과, 빠른 시일 안에 핵무기확산금지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 안전협정(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and IAEA safeguards)에 복귀할 것을 약속했다.
미국은 한반도에 어떤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으며, 북한을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도가 없음을 확인했다.
한국은 한국 영토 안에 어떤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1992 Joint Declaration of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에 따라 핵무기를 접수하거나 배치하지 않는다는 약속(commitment not to receive or deploy)을 재확인했다.
(2) 참가국들은 그들 간의 관계에서 유엔헌장(Charter of the United Nations)의 목적 및 원칙과 국제관계의 공인된 규범(recognized norms of international relations)을 준수하기로 하였다.
북한과 미국은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며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각자의 양자 정책에 따른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북한과 일본은 불행한 과거와 중요한 현안들의 해결에 기초하여 평양선언에 따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로 하였다.
(3) 참가국들은 에너지, 무역 및 투자 분야에서 쌍무적 및 다자적인 경제협력을 촉진하기로 하였다.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 및 미국은 북한에 에너지 원조를 제공할 의사를 밝혔다.
한국은 북한에 2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공급하는 것에 관한 2005년 7월 12일의 제안을 재확인했다.
(4) 참가국들은 동북아시아에서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노력을 약속했다.
직접 관련된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협상할 것이다(The directly related parties will negotiate a permanent peace regime on the Korean Peninsula at an appropriate separate forum).
6자는 동북아시아에서 안보협력(security cooperation)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과 수단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5) 참가국들은 앞서 언급한 합의를 “약속 대 약속, 행동 대 행동”의 원칙(principle of "commitment for commitment, action for action)에 따라 단계적인 방식으로(in a phased manner) 이행하기 위한 상호 조율된 조치들(coordinated steps)을 취하기로 합의했다.
(6) 참가국들은 2005년 11월 초 협의를 거쳐 결정된 날짜에 제5차 6자 회담을 북경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관통하는 큰 원칙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둘째, 북한 핵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되풀이 확인하였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북한의 대외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대북한 안전보장과 경제 및 에너지 지원의 문제를 연결시켜 동시적으로 진행하게 하였다. 부시행정부의 애당초 원칙이었던 북한의 핵폐기가 먼저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 대화와 보상이라는 정책을 벗어난 것이다.
셋째, 북한 핵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모색을 위한 적절한 별도의 포럼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9.19공동성명에서 명문화되어 2.13합의에서 구체화되었다. 2.13합의가 그 원칙들을 구체화한 양태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초기조치와 다음 단계를 구분하고 각 단계에서 북한과 미국이 서로 합의 가능한 수준에서 상호대응적인 행동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 중에서 초기조치는 일종의 북미간 상호신뢰구축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북한의 핵프로그램의 이른바 “불능화”를 실제 집행하는 단계는 “다음 단계”로 정의되고 있다.
“초기단계”에서는 북한의 핵문제 관련 의무는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고 봉인하는 것,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입국과 그들에 의한 핵시설 감시작업의 재개를 허용하는 것, 그리고 북한이 자신의 핵프로그램들의 목록을 다른 나라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 초기 단계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취해야 하는 신뢰구축 조치는 북한과의 양자회담을 열어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치들을 시작하는 것이다. 테러지원국 지정해제와 적성국교역법의 북한에 대한 적용 중지 등을 위해 미국정부가 노력하는 것 등이 그 내용으로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이 영변의 핵시설을 폐쇄하고 봉인하며 현존하는 핵프로그램들의 목록을 참가국들과 협의하는 수준을 넘어서,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신고”하고 그것들의 “불능화”를 진행시키는 것은 다음 단계의 의무사항으로 넘겨져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일본이 북한에 대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구체적인 대북한 군사적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조치들 또한 다음 단계의 일로 미루어진 셈이다. 북한의 핵 불능화와 미국 및 일본의 대북한 외교 경제 관계 정상화를 통한 안전보장 제공 문제는 다 같이 초기조치라는 신뢰구축 단계의 이행을 거친 다음 단계의 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든 그 핵심은 북한이 주장해온 행동 대 행동의 병렬적 진행이라는 원칙에 따라, 미국이 북한의 선핵폐기 후 대화라는 원칙을 포기한 대신, 북한은 궁극적인 핵폐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2.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2.13합의까지
2.13합의는 이른바 행동 대 행동이라는 상호주의 원칙에 바탕한 것이다. 이 합의는 부시행정부의 애당초 대북한 정책의 기조와 근본적으로 다른 원칙을 반영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합의는 이미 2005년의 9.19공동성명에서 도달한 바 있었다. 약 1년 반의 우회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신보수주의적 일방주의의 과잉이 초래한 역설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부시행정부는 이른바 ‘악의 축들’에 의한 대량살상무기 확산의 문제를 외교적인 대화와 협상이 아니라 군사/경제적 제재를 통한 압박전략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특히 9.11 이후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러시아와 중국까지도 기꺼이 동참하는 것처럼 보였던 전 지구적 대테러 전선을 통해 북한과 이란 등을 압박하여 그들의 일방적인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는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의 동의와 순응을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탈레반의 저항은 군사적으로 관리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행정부가 강행한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신보수주의적 일방주의의 절정으로 간주된다. 이 전쟁은 2003년 여름 미국의 신속한 승리로 끝났고, 그 해 12월 사담 후세인의 생포로 이어졌다. 더욱이 2003년 말 리비아의 행동은 부시행정부의 그러한 전략에 힘을 실어주었다.
2003년 12월 19일 리비아의 무아말 카다피대통령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핵무기프로그램을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 개발계획을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미국이 이라크 소도시의 한 지하토굴에서 사담 후세인을 생포한지 불과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다. 카다피는 1980년대 이후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추구했다. 그 노력은 1990년대에 더 본격화했다. 1998년에는 1980년대에 이미 구입해 두었던 우라늄전환시설(modular uranium conversion facility)을 조립하였고, 1999년 말 또는 2000년 초에는 두 개의 새로운 대규모 분광계(分光計: mass spectrometer)를 획득했다. 2000년 9월에는 두개의 최신식 설계의 L-2 원심분리기(centrifuge)를 확보하고 이어 1만개의 원심분리기를 주문했으며, 그해 12월 주문된 물량의 일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또한 우라늄육(六)플루오르화물 실린더(cylinders of uranium hexafluoride) 여러 개와 우라늄합성물질(uranium compounds) 16킬로그램을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확보했다. 2001년 말과 2002년 초에는 파키스탄의 A.Q. Khan이 핵분열 무기(a fission weapon)의 설계도와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우라늄농축계획을 리비아에 제공했다.
그러던 리비아가 2003년 12월의 발표에서, 화학무기와 핵무기 프로그램 전체를 제거하겠다고 하였다. 모든 핵 활동의 국제원자력기구에의 신고, 500킬로그램 탑재 가능한 300킬로미터 사정거리 이상의 탄도미사일의 제거, NPT 준수를 보장하기 위한 국제사찰의 수용, 모든 화학무기 제거와 「화학무기협정」(Chemical Weapons Convention) 가입을 약속하고, 이 조치들을 검증하기 위한 즉각적인 사찰과 감시를 허용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곧 이어서 리비아는 2004년 1월 6일 「화학무기협정」에 대한 가입동의서를 제출함으로서 그 30일 후 이 협정의 159번째 가입국이 되었다. 같은 해 1월 14일에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Test Ban Treaty: CTBT)을 비준했다. 또 3월 10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권한을 확대한 「NPT 추가의정서」에도 서명했다. 이후 사찰, 해체, 및 군축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부시행정부의 핵심 인물들은 당시 세계를 놀라게 했던 리비아의 행동변화를 미국이 전개한 대테러전쟁이라는 군사적 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그렇게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클린턴행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에 기초해 성립시킨 제네바합의를 폐기하고 대북 협상을 배제하는 강압외교를 통해 북한의 일방적 양보를 요구하고 나아가 북한의 체제변화(regime change)를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대북정책을 부시행정부가 장기간 지속한 중요한 배경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은 리비아의 양보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일의 위대한 부산물 중의 하나”라고 인식했다. 그는 “우리가 사담 후세인을 사로잡은 지 닷새 만에 무아마르 카다피가 나서서 모든 핵물질을 미국에 넘기겠다고 발표했다”고 강조했다. 부시대통령도 “리비아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제 리비아는 무기프로그램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고 있다. 리비아는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예방전쟁과 선제공격을 천명한 부시의) 독트린을 실행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부시행정부 최고 지도자들의 인식은 리비아의 정책전환의 원인을 자신들의 전쟁과 무력위협에서 찾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클린턴행정부 말기에 본격화하고 부시행정부에서도 지속한 막후의 외교적 교섭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이 논란을 떠나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이 다 같이 전쟁불사의 위협이라는 강압외교(coercive diplomacy)가 효과를 본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이끄는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서도 견지했던 압박 중심의 정책을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측면이다.
부시행정부가 북미간 양자대화를 상징하는 1994년 제네바합의와 함께 일체의 양자대화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면서 2003년 이후 대안으로 제시한 6자회담은 그 출발은 북한에 대한 일종의 대테러동맹의 다자적 압박 수단으로서였다. 그것은 다자주의가 아니라 미국의 일방주의가 클린턴행정부의 대북한외교의 결과인 제네바합의를 부정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기 위한 외교적 명분, 그러니까 변형된 일방주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6자회담은 점차로 미국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동북아의 다른 나라들, 특히 중국과 한국에게 미국을 북한과의 외교적 접촉으로 이끌어 들이는 통로로 변하기 시작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미국이 북한과의 제네바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선언한 명분이었던 북한의 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한 비밀 핵무기프로그램의 존재에 대해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동북아의 다른 나라들을 설득하는데 사실상 실패했다.
둘째, 이라크전쟁에서 전쟁 자체의 수행과 사담 후세인의 생포에 이르기까지는 그런대로 미국의 계획대로 사태가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이라크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그 시작에서부터 세계의 동의를 확보하는데 실패했었지만, 전후 이라크는 제2의 베트남이 되어갔다. 이라크전쟁에서 신속한 승리를 바탕으로 전 지구적 대테러 동맹을 북한 같은 다른 불량국가들에 대한 압박으로 연결시키려던 부시행정부의 세계전략은 암초에 걸렸다. 그 사이 미국이 대화를 거부하였던 북한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고 핵무기보유선언을 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적극적인 외교적 개입과 한국 외교의 저항에 부딪쳤다. 더욱이 이라크의 수렁에 발목이 잡힌 미국의 신보수주의적 일방주의는 북한에 대해 9.11 직후와 같은 대테러 동맹의 동원을 통한 효과적인 군사 경제적 압박의 전선을 펼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라크의 상황은 미국에게 더 이상 전지구적인 대테러 동맹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미국의 대북한 외교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하게 띤 신보수주의적 일방주의에서 실용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한 배경이었다.
그 결과가 2005년 가을의 9.19공동성명이었다. 그 시점에서 미국의 대북한 외교전략은 필립 젤리코의 표현대로라면 양면 전략(two tracks diplomacy)이었지만, 그것은 당시 미국의 대북한 전략의 이중성, 또는 부시행정부 내부의 일방주의 세력과 실용주의파 간의 어정쩡한 균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 등 국무부가 주도하는 가운데 제4차 6자회담이 포괄적인 외교적 행동의 틀인 공동성명을 만들어내었다면, 다른 한편에서 부시행정부는 마카오의 BDA(Banco Delta Asia) 등을 통한 북한의 돈세탁 문제를 수단으로 북한과의 실질적인 대화를 거부하는 행동이 공존했다.
2007년 2월 미국은 1년 반 전의 합의를 재확인하고 그것을 다소 구체화하는 수준의 새로운 외교적 합의로 되돌아온다. 9.19공동성명을 사실상 부정하고 있던 기간에 부시행정부가 맞닥뜨린 두 가지의 사태 때문이었다. 하나는 이라크의 수렁이 더욱 깊어져가면서 미국내 여론이 더욱 부시행정부에서 멀어져 간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북한의 핵무기실험이 가져온 충격이었다. 구체적으로 북한과 관련해서는 효과적인 외교도 적절한 행동의 전략도 보여주지 못한 가운데 북한은 실질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을 어리석고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흔히 ‘벼랑 끝 전략’(brinkmanship strategy)을 북한만의 전매특허로 거론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 정책은 “네가 할 테면 해보라.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하는 마찬가지의 벼랑 끝 전략이었고, 그 결과는 불행한 것이었다. 다만 차이는 북한의 그것이 체제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활적 선택이었다면, 미국에게 벼랑 끝 자세는 강자의 위치에서 느긋하게 동원할 수 있는 옵션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2006년 11월 초 미 의회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양원(兩院) 장악은 부시행정부 외교의 실패를 정치적으로 확인해주었다. 2006년 11월 중간선거에서의 공화당의 참패와 의회 다수당 위치의 상실은 부시행정부의 외교 전반을 지배하였던 신보수주의 노선의 과잉이 부시행정부에 가져다준 외교적 실패와 딜레마의 정치적 결과였다. 부시행정부의 전쟁의 기획자이자 행동대장 격이었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중간 선거가 끝난 지 얼마 후 퇴진했다. 그 후임으로 국방부 수장이 된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는 럼스펠드가 주도하고 또 수렁으로 치달은 이라크 전략을 검토하는 「이라크 연구그룹」(Iraq Study Group)의 멤버로서 이라크에서 전쟁의 수행과 외교 전략에 근본적인 변화를 권고한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이라크에서 미국이 지고 있음을 인정한 인물이었다. 이른바 ‘확산방지구상’(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 PSI)의 구상을 주도한 인물이자 유엔에서 미국의 강경외교를 대변하던 존 볼턴도 특히 민주당으로 세력균형이 변화한 미 의회의 비판에 직면하여 2006년 12월 초 퇴진했다. 부시행정부의 신보수주의 노선을 주도한 인물들이 퇴진하고 딕 체니 부통령의 대외정책 영향력도 손발을 잃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미국외교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국무부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2007년 초 부시대통령의 외교노선의 변화는 뚜렷해보였으며, 미국의 보수파들은 부시의 변화에 당혹해 했다.
이것은 마치 1980년대 초 마찬가지로 신보수주의자들이 장악했던 레이건행정부의 신냉전주의 외교가 겪게 된 운명과 지극히 닮았다. 소련과 제3세계에 대해 전개한 레이건행정부의 신냉전정책과 신보수주의 외교는 과잉했다. 그 과잉의 표현이 1986년에 폭로된 이란-콘트라스캔들이었다. 레이건대통령 최측근들과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 등 그 주역들은 1987년에 들어서면서 의회 청문회에 서게 된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그 공백을 조지 슐츠 국무장관 등 상대적인 대소 협상파 인물들이 레이건행정부의 대외정책의 조타수를 맡았다. 그 결과 미국외교는 1985년에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소련의 신사고 외교에 조응하기 시작했다. 1987년 중거리핵폐기협정의 합의가 그 결과였고, 그것은 곧 냉전 해체의 서막이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인 2006년 5월, 라이스가 이끄는 미 국무부는 2005년의 9.19공동성명의 취지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다시 기울였다. 라이스국무장관의 보좌관으로 일하는 필립 젤리코가 작성한 두 건의보고서에 압축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 핵문제는 그것 자체만으로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한반도에서의 53년간에 걸친 전쟁 상태를 종결하는 것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한반도에서 “평화조약”(peace treaty)이 검토되고 있으며, 그 조약 당사자로는 정전협정 당사자들인 중국, 북한, 미국과 함께 남한을 지목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배제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것을 “북한에 대한 폭넓은 새 접근”(a broad new approach to dealing with North Korea"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을 “북한의 핵무기프로그램을 해체하는 과정이 진행중인 것과 동시에 평화조약에 대한 협상을 시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국무부 주도의 건의는 부시행정부 안에서 열띤 논쟁을 유발했다. 그러나 이 행정부 내부의 논쟁의 결과는 불투명했으며, 적어도 2006년 가을까지 미국외교에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이라크의 수렁이 깊어지는 가운데,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핵무기실험은 부시행정부의 대북한 정책의 총체적 실패로 규정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정황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북한과 대화를 추진했던 클린턴정부와 북한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은 부시행정부의 ‘북핵 성적표’를 비교하면서, “북한이 얻은 플루토늄이 성적표”라며 “클린턴 시절 북한이 확보한 (플루토늄) 양은 전무하나, 부시가 들어선 뒤 확보한 양은 8기의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비판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2006년 말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와 분명 무관하지 않았다.
2005년 2월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의 역효과는 부시행정부의 전략수정을 촉진하면서 2005년 9.19공동성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의 실질적인 정책전환에는 그 충격만으로는 부족했다. 2006년 10월의 북한 핵무기실험이 갈수록 심각해져간 이라크문제와 함께 대외정책과 관련한 미국의 국내정치적 지형 변화를 초래했다. 그것이 2007년 2.13합의로 귀결되는 사태전개의 촉매제가 되었다.
IV. 2.13합의와 한반도 평화조약의 위치 설정
1. 2.13합의의 취지에 따른 평화조약의 위상과 두 가지 연계방식
그간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한반도 평화조약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서 어떤 의미와 기능을 부여받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2.13합의의 문맥에서 평화조약은 북한 핵문제 해결과 나아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보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2.13합의의 틀에 비추어 평화조약의 위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1) 북미관계정상화와 평화조약을 분리하는 방식: 이것은 ‘초기단계’와 ‘다음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북미간 외교관계 정상화의 과정과 별개의 협상문제로 평화조약을 생각하는 방법이다. 이 방안은 평화협정은 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여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장기적 문제이므로, 그와 별개로 북미 외교관계 정상화를 북핵 불능화와 연계하여 더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안은 몇 가지 문제에 부딪친다. 첫째, 북미 외교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는 정전협정체제의 평화조약체제로의 전환과 맞물린 사안이라는 점이다. 둘째, 정전협정의 평화조약체제로의 법적/제도적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북미관계에 일정한 정상화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불완전한 관계정상화를 전제로 북한이 핵불능화를 실행하도록 실질적으로 이끌어낼 조건이 될 것인가 의문이라는 점이다.
(2) 평화조약을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대북 안전보장의 제도화의 문제로 생각하는 방안: 평화조약 타결이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과제라면 북한 대량살상무기 또는 그 계획의 진정한 포기를 이끌어내는 일은 그 못지않게 어려운 과제이다. 또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 미국에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역시 북한과의 진정한 관계정상화와 대북한 안전보장 제공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평화조약, 북한 핵문제 해결, 그리고 북미관계 정상화문제는 상호 뗄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조약은 그러한 관점에서는 지속가능한 북미관계 정상화의 조건이며 대북한 안전보장을 국제사회가 제공하는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서 간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평화조약을 정상적 북미관계의 제도화라는 차원에서 보는 경우에도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겠다. 하나는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와 미시적으로 연결시켜 북미관계 정상화의 일정을 명시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 핵시설 불능화의 진전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비교적 느슨하게 연계시키는 방안이다. 이 경우에는 북미관계 정상화를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의 실질적 진전에 맞추어 현실에서 진행시키되, 평화협정의 협상을 별도로 진행시키면서 협정의 내용을 통해 북미관계 정상화에 지속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갖추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북미관계의 정상화라는 현실의 외교적 작업은 그것대로 북한 불능화 수준에 적절히 맞추어 진행하되, 평화조약의 협상은 다소간에 그것과 시차가 있더라도 북한의 국제사회와의 정상적 관계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틀을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 경우 북미관계 정상화는 평화조약의 협상과정과 별도로 진행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평화조약을 통해 지속가능한 북미관계 정상화가 완성되는 것이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의 단점은 평화조약 체결이 시간적으로 늦어져서 평화체제를 현실에서 견인하는 촉매로서의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서 보다 포괄적인 평화체제 구축의 제도적 틀로서 평화조약의 기능에 내실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장점이 될 수 있다.
이상의 방식들은 (1)과 (2)의 경우 모두 북한 핵의 불능화와 북미관계정상화 및 평화조약 체결이 병렬적으로, 즉 행동 대 행동의 방식으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2.13합의 자체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평화조약은 북한의 핵불능화를 핵심적인 것으로 포함하게 될 평화체제가 이루어지고 난 연후에 그 결과로서 사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진정한 핵불능화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조치들을 명시하는 것으로서의 기능과 의미를 갖는 것으로 사유되어야 함을 말한다.
2. 평화협정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국내 논의의 문제점
2.13합의 이후에도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반도 평화협정 관련 논의들은 여전히 평화협정을 북한 핵불능화가 사실상 완료된 시점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문서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화재단이 주관하여 작성한 이른바 ‘한반도 평화협정(안)’이라는 논문은 한반도 평화협정의 4가지 방식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을 평화협정 수단론과 평화협정 결과론으로 분류하였다. 이 논문의 작성자들은 그 네 가지 중에서 최선으로 선택한 제1안이 평화협정 수단론을 취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기실은 그 방안 역시 평화협정 결과론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남북미중 4국 당사자가 2.13합의에 따른 핵불능화 조치가 완료되는 시점에 종전선언을 포함하는 포괄적 평화협정을 체결, 부속협정으로 남북, 북미간의 관계를 별도 규율”한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즉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것이 완료되어 이를 검증한 다음에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평화협정은 북한 핵폐기로 인한 평화체제의 결과로 주어질 수 있다는 논리에 다름아니다.
평화재단이 제시한 ‘한반도 평화협정안’의 분문에서도 그러한 원칙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미 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의 부속협정서”라는 제목 하의 제5조(국교정상화 등)에서 먼저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 협정 체결 전에 6자 회담 참가국간에 합의된 비핵화 조치를 완료하였음을 확인한다”고 하고 있고, 이어서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의 정책에 따라 조속한 시일 내에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이 핵불능화의 조치를 완료하고 난 시점에서 비로소 북미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하는 것을 뜻한다. 평화협정을 북한의 핵불능화를 포함한 실질적인 평화체제 구축의 결과로서, 특히 북미간 국교정상화를 그에 대한 대가 내지는 선물로서 제공한다는 개념에 바탕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협정안이 제시한 ‘한반도 기본협정’에서도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완료하는 시점에서야 나머지 당사국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포기 절차 진행에 상응하여 6자회담에서 합의된 에너지, 경제지원을 신속하게 제공”한다고 함으로써, 마찬가지의 인식을 재확인하고 있다.
조성렬의 논문 역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한 뒤에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가는 것이 ‘정상적 경로’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완화라는 것은 “정치적/군사적 신뢰구축과 운용적/구조적 군비통제(군축) 등을 추진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의 정상적 경로는 군축을 포함하는 평화체제의 틀이 상당부분 진행된 뒤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는 ”남북한이 처한 특수한 정치상황으로 볼 때, 무조건 정상적인 경로만이 최선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기회가 닿는다면 평화선언을 발표하거나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에, 점진적 군사적 긴장완화로 나아가는 ‘예외적 경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든 국내의 논의에서 주된 흐름은 대체로 평화협정을 상당한 수준의 평화체제 구축의 결과로서 상정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국내 학계에서 이루어져온 학술적인 논의들도 대체로 같은 경향을 보인다. 한 예로 전재성은 향후 평화체제에 관한 논의에서 한국이 유의해야 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향후 평화체제 수립을 추진함에 있어 북한이 제기할지도 모르는 “선 평화체제 수립, 후 북핵 해결”의 구도에 말려들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평화체제는 북핵폐기의 실질적 진전을 선행조건으로 논의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변국들의 합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개방과 점진적 체제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런데 전재성은 같은 논문에서 한국정부가 유의할 셋째 요건으로 “북한이 정권안보위협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개혁개방과 북핵포기를 추진할 수 있는 다자적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국은 “북한에 대해 안보불안감을 느끼는 주된 적대 대상인 미국으로부터의 위협을 완화시키는 노력”을 주문한다. 이런 맥락의 연장에서 전재성은 “북한이 평화와 체제 생존을 위해 진지한 자세로 평화체제의 틀 속에서 북핵 포기의 노력을 기울이고 체제변화를 추구하도록” 한국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이 북핵 문제를 북한의 생존문제로 인식하여 평화체제의 틀 속에서 함께 논의할 자세를 갖추도록 설득해야 할 것”도 함께 주문했다.
한편으로는 평화체제의 틀 안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체제변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북핵 포기 이전의 평화체제 형성 또는 그 논의까지도 사실상 비판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 논리적 모순이 있지 않은가?
V. 평화협정인가, 평화조약인가
평화협정을 북미관계정상화와 북한의 핵무기프로그램의 진정한 불능화를 포함한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평화협정은 그 참가국들 모두에게 법적 제도적으로 보다 구속력있는 장치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협정은 미국의 관점에서 ‘협정’(agreement)인가, ‘조약’(treaty)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협정’이라고 할 때, 그것을 넓은 의미로 쓰는 경우엔 조약까지도 포함한다. 인터넷 무료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는 국제협정(international agreements), 의정서(protocols), 협약(covenants), 그리고 그 외에도 exchanges of letters, exchanges of notes 등이 조약(treaties)과 같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어떤 용어를 선택하든 국제법상 이들 모든 국제협정은 동등하게 조약(treaties)에 해당하며 똑같은 규범력을 갖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에 위키피디아가 덧붙이고 있듯이, 미국 헌법 안에서는 상원에서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조약은 정확하게 ‘조약’(treaty)이라고 불린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 대통령이 의회 전체(상원 및 하원)에 상정하여 과반수의 동의를 획득하고자 할 때, 그 협정은 “의회 및 행정협정”(congressional-executive agreement: 정부가 추진하고 의회가 동의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라고 한다. 이 경우 줄여서 그냥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s)이라고 하면, 의회에서 과반수의 동의를 확보한 “의회행정협정”의 지위를 가진 것과 함께, 의회의 동의와 무관하게 행정부가 맺은 행정협정에 불과한 것 두 가지로 나누어지게 된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포함한 미국의 대부분의 무역협정들은 행정협정들로 분류되는데, 이 경우의 행정협정이란 의회에서 과반수의 동의절차를 거친 행정협정을 말한다.
사실 우리 언어에서도 사적 행위자들 사이의 약속을 포함하여 ‘협정’이란 개념은 광범하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반면에 ‘조약’은 국가들 사이의 보다 구속력 있는 공식화된 약속을 가리키는데 한정하여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한반도 평화협정”이라고 할 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미국이 상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확보하는 “조약”의 지위를 갖는 것일 것이다. 그만큼 법적, 제도적 장치로서의 안정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어렵다고 하면, 적어도 미 의회의 과반수의 동의를 확보함으로써 미국 국내법상 입법(legislation)에 상당하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 행정협정(즉 정확하게는 “의회행정협정”)의 수준이 되는 것이 차선일 것이다.
조약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그것이 미국에서 초당적 합의에 바탕하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행정부의 교체에 따른 정치적 풍향의 영향을 덜 받아 제도적 안정성이 보장된다.
그렇다면, 미 상원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요하는 조약도 아니고, 의회 과반수의 동의를 확보하는 의회행정협정도 아닌 그냥 행정부만의 행정협정 수준의 협정을 지칭하기 위해서 “한반도 평화협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명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조약” 내지는 적어도 미 의회의 과반수의 동의절차를 거치는 의회행정협정 수준의 “한반도 평화협정”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격을 낮추어 평화협정이라는 용어나 개념을 당연시할 필요는 없다.
VI. 당사국 문제
6자 회담이 2005년 9.19공동성명, 그리고 이어서 2007년 2.13합의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별도의 포럼을 구성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기 전까지, 한국정부와 학계 및 시민사회에서 한반도 평화협정에 관한 논의는 대체로 남북한이 당사자로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중국은 ‘보장’을 하면 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전통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부터 미국을 평화협정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는 북한의 주장을 배제하는 명분으로서 한국이 내세워온 남북 당사자주의를 1990년대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어 김대중 정부와 현재의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정책으로 삼아왔던 데에 기인한다.
북한이 남북한 평화협정을 제안하는 시기에도 남한이 미국과 함께 그 협정을 반대한 이유는, 북한에서는 오래 전에 이루어진 중국군 철수에 상응하여 남한에서도 미군이 철수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울 것 등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문제를 포함하여 한반도 군사적 긴장 문제를 남북간이 주체가 되어 풀어내기 위한 수단임을 명분으로 북한이 내세워온 남북평화협정 논의를 남한은 일관되게 거부했고, 이에 따라, 북한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남한의 박정희정권이 10월 유신으로 뒤집어버린 그해 가을을 분수령으로 하여 평화협정 대상을 미국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북한의 평화협정 논의가 남한을 배제하는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그 당사자는 미국이 아니라 남북한으로 제한해야 하고 미국과 중국 등은 단순히 보장자로 하면 된다는 이른바 2+2의 논리가 개발되었다. 이 방안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편리하였다. 미국이 북한과 마주앉아 미국의 한반도 군사정책을 협상테이블에 올려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 저변의 근본이유였다. 한국정부 역시 명목상으로는 북한이 남한을 협정 당사자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줄곧 남북이산가족 문제 등 비정치적이고 비군사적인 이슈들의 선결, 즉 인도적 문제의 선결을 내세우면서 근본적으로 군사문제 해결을 핵심으로 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반대하는 구실로 삼았다. 그래서 북한이 거부할 것이 뻔한 남북 당사자론을 내세우며 미국을 포함하는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를 거부했던 것이다.
노무현정부도 『참여정부 국정비전과 국정과제』라는 문건에서 “남북이 당사자로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변 2국(4국)이 이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여 정전협정을 대체”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특히 2006년 이후 미국 부시행정부조차 남북미중 모두를 당사자로 하는 한반도 평화조약 논의가 흘러나오면서 당사국문제에 관한 한 그 유서깊은 독재정권 시대로부터의 남북 당사자 플러스 미중보장이라는 틀에서 비로소 벗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2004년의 논문과 이어 2005년의 논문에서 남북한과 함께 미국과 중국이 정식 당사자로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협정」이 형식과 내용에서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는 의견을 개진하면서, 아울러 2+2의 공식이 갖는 허구성을 비판하였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하였으나, 몇 가지 핵심적인 포인트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한국전쟁의 당사자는 남북한과 미국 및 중국 네 나라다. 정전협정의 당사자도 사실은 한국을 포함한 네 나라다. 한국은 정전협정에 서명을 거부했지만, 응당 서명을 했어야 하는 나라다. 그 내용상으로는 미국이 한국 몫까지 함께 서명한 꼴이었다. 전쟁상태와 이어 정전상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당사자로서의 책임 역시 이 네 나라가 다 같이 공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둘째, 미국과 중국은 과거 전쟁의 당사자일 뿐 아니라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 예측가능한 먼 미래에까지도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 구조적인 이해관계와 결정력을 가진 세력들이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남한과 북한과 군사동맹으로 한반도에 깊이 개입해 있다. 이들의 군사전략과 정책은 곧바로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한반도의 운명에 이미 개입해 있는 이들 외세의 행동양식을 한반도 평화체제에 걸맞은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국제적 규범으로서 한반도평화협정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평화협정은 응당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과 함께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의 유지가 아닌 평화지향의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규범과 규칙을 담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협정의 당사자로서 이들 두 나라도 당연히 포함해야 한다.
셋째, 남북한이 당사자가 되는 것이 자주적이라는 남북당사자 논리는 기실은 가장 비자주적인 주장이다. 우선 미국과 중국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직접적인 책임을 진 당사자로서 그들의 핵전략, 군사전략, 남북한 각자의 주권 인정 등 그들의 대한반도 정책의 여러 측면들을 전환시키도록 그들의 책임 있는 약속을 받아내고 그 약속을 가급적 확고한 법적 구속력을 가진 협정으로 제도화해내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남북한이 전개해야 할 자주적인 외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넷째, 남북한만이 평화협정 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중국은 ‘보장’만 하면 된다는 논리는 한반도에서 평화지향의 행동을 할 의무들을 국제법적으로 지우는 대상에 남북한만 포함시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그 의무에서 면제해주는 꼴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미국과 중국에게 사실상 불특정의 ‘보장’하는 세력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에게 구체적인 평화지향의 행동의 의무는 면제하면서 이들 외세에게 자의적일 수 있는 감독자의 권위만을 부여하는 결과가 된다. 이보다 비자주적인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다섯째, 남북한만이 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중국은 보장만 한다는 발상은 유엔과 같은 보편적인 집단안전보장(collective security) 개념이 국제적 규범으로 정립되기 이전에 존재할 수 있었던 ‘강대국 보장’의 사고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적인 국제관계 관념에 은연중 함몰되어 있는 패배주의적인 약소국 멘털리티의 잔존물이다. 크고 작은 모든 나라의 주권적 평등을 전제한 현대적인 보편주의적 국제적 규범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여섯째, 미국이 자국의 이해관계가 깊이 얽힌 지역에서 제3국들의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그 협정의 이행을 ‘보장’하는 감독자로서 서명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증인’(witness)으로서 서명할 뿐이다.
이 경우 유의할 것은 특히 두 가지이다. (1)미국은 이런 협정들에서 이 협정들을 ‘보장’한다는 문구를 결코 삽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협정의 일반적 양식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발상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장한다는 것인가에 대한 어떠한 내용도 없이, 박명림이 제안한 협정안처럼 “이상의 평화협정 합의에 남과 북의 충실한 이행을 확인하고 국제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미국과 중국은 본 평화협정에 하기서명(postscript)한다”는 조항을 넣고 서명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형식의 협정은 성립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또한 만일 미국과 중국이 그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시 취할 수 있는 행동과 절차, 수단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면 그 협정은 남북 당사자간 협정이 아니라 4국이 모두 당사자로 변하는 4국 협정이 된다. 물론 이런 종류의 협정을 북한이 받아들일 것이며, 또 남한이 그런 종류의, 의무는 남북한만 지고 미국과 중국은 감독만 하는 협정을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이러한 문제점은 2007년 4월 평화재단이 전문가포럼을 통해 제시한 평화협정안의 제2안의 경우에도 다소 변형된 형태지만 기본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 협정안은 남북이 당사자이고 미국과 중국은 보장을 한다는 2+2의 형식을 의도한 것이다. 제14조에 규정하기를, “1) 이 협정의 이행, 준수, 보장과 관련된 한반도에서의 분쟁 해결 및 평화관리를 보조, 지원, 조정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관리 국제보장위원회를 둔다. 2) 분쟁 해결 및 평화관리와 관련하여 남과 북 사이에 이견이 있을 경우 일방은 동 위원회에 조정을 의뢰할 수 있다. 3) 동 위원회는 미합중국 대표자, 중화인민공화국 대표자, 남이 추천한 제3국 대표자, 북이 추천한 제3국 대표자 각 1인으로 구성한다. 4) 기타 동 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은 이 협정에 근거하여 남과 북 사이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한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미국과 중국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장하라고 할 것인가라며 2005년의 논문에서 필자가 제기한 의문에 따른 보완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국과 중국이 남북간의 평화협정에 남북한이 이행을 감시하고 필요시 조정에 나설 것을 약속하는 중요한 약속이 담겨있다. 미국과 중국이 “하기서명”이라는 정체불명의 양식으로 서명하는 것으로 그 약속에 참여하는 것 역시 궁색하고 이상한 타협책이다. 미국과 중국을 협정의 당사자로는 만들지 않으면서도 이들을 어떻게든 그 협정의 보장자로 끌어들이겠다는 발상인데, 그것은 불가피하게 미국과 중국의 협정 안에서의 법적 지위를 당사자적 지위와 비당사자적 지위의 불투명한 중간지대에 끼워놓는 비정상적인 모양새로 귀결된다. 왜 애써 그러한 비정상적인 협정 양식을 새로 개발하려는 것인가. 그것도 19세기 식의 강대국 보장의 논리에 따라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직접적인 적극적 정책변화의 책임과 의무는 한국이 앞장서서 미국과 중국에 면제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작 중요한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주변 강국들이 이 협정에 따른 보장자/감독자로서의 법적 지위와 권위를 갖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해결방식에 따라 한반도에 개입하고 또 한반도에서 서로 투쟁하고 갈등할 법적 공간을 보장해주는 꼴이 된다. 한편으로 공허하고 다른 한편으로 위험한 그러한 이상한 협정 형식을 왜 애써 일부러 개발해야 한다는 것인가.
(2) 미국이 ‘증인’으로서 서명하되 당사자로서 참여하지는 않는 평화협정의 경우는 미국이 책임질 행동규정은 없으면서 자국이 유지하고자 하는 깊은 이해관계가 있되, 미국이 그 지역 분쟁의 직접 당사자인 사실이 과거에도 현재도 없는 경우들뿐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동에서의 이스라엘-이집트간 평화협정, 이스라엘-요르단 간 평화협정,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오슬로협정의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이들의 경우에도 미국은 결코 ‘보장’의 역할로 서명하는 오만을 부리지도 않았고, 그 어떤 나라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들은 한반도의 경우들과 또한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이었으며, 또한 우리가 평화협정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정전협정의 당사자 서명국들이었기 때문이다.
일곱째, 마지막으로 남북이 당사자가 되고 미중은 보장만 하면 된다는 이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또 하나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싶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서 미국과 중국이 할 일이 특별히 없고 주로 남북한이 할 일들 뿐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며,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북한으로 하여금 핵불능화를 포함하여 대량살상무기 유지와 추가개발에의 유혹을 떨쳐내도록 할 수 있으려면, 즉 북한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진정한 참여자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의 안전보장 제공의 제도화가 필수적이다. 그 안전보장 제공의 주요 당사자로 북한이 지목하고 있는 것은 특히 1990년대 초 이래 현재까지 북한 핵문제의 국제화를 주도해온 미국이다. 미국은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반도에서 안정과 안보의 제공자이다. 하지만, 평화협정이란 상대방인 북한의 관점과 관심사를 포용하는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북한의 관점에서 미국은 군사적 위협이며 전쟁을 불사하는 공격적 군사전략을 주도하는 실체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과 위협의 유지자가 아닌 건설적인 평화구축의 참여자로 행동을 변화할 의무를 진 핵심적인 당사자이다.
둘째, 중국 또한 한반도에서 유사시 미국 못지않게 군사적 개입에의 의지를 가진 세력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중국의 핵전략 또한 한반도에 대한 위협인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이 미국과 함께 평화협정에 참여하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미국과 함께 중국도 한반도에서 유사시 북한과의 군사동맹을 명분으로 자의적인 군사적 개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만큼,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규범을 평화협정에 담아내는 것이 일단은 우리의 목표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평화협정에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은 두 나라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외교적 행태가 분단과 긴장의 유지자가 아닌 평화구축의 참여자로 행동하도록 규범화하는 규정을 개발하여 포함시킬 때, 그 규범에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서로에게도 구속력을 갖는 약속을 하는 결과가 된다. 그만큼 한반도 평화협정의 국제적 구속력을 보다 견고하게 제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국이 한반도 평화협정에 당사자로 나서는 문제는 이상의 사실들에 비추어 예상될 수 있는 문제였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평화협정에 나설 것이냐 하는 것은 명백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필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온 것은 미국이 실제로 북한 핵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 평화협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면 그것은 2+2와 같은 비정상적인 전례 없는 형식이 아니라, 미국이 중국과 함께든 아니든 남북한과 함께 심플하게 당사자로 참여하는 협정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2005년과 2006년 사이 미국 정부 안팎에서 북한 핵문제 해결의 근본적 방편의 일환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평화협정, 특히 2006년 5월에 미 언론에 보도된 ‘젤리코 보고서’(Zelikow reports)들은 그런 점에서 응당 미국이 남북한과 중국과 함께 참여하는 4자 협정의 형식을 상정하고 있다. 2007년 봄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은 남북한과 미국 및 중국이 평화협정의 기본조약을 맺고, 남북간 부속협정과 북미간 부속협정을 맺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고 했다. 아마도 평화재단의 한반도평화협정안이 위에서 언급한 2+2 형식의 제2안과 함께 제1안으로서 미국이 검토하는 형식의 4자 협정을 제시한 것은 그 점을 고려한 터일 것이다.
어떻든 한반도에 평화협정이 고려된다고 할 때,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미국이 현실적으로 말이 된다고 판단하는 협정 또는 조약의 양식은 남북한과 미국 및 중국이 함께 하는 4국간 조약 내지는 협정이 될 것이다.
이것은 미국 기업인들의 후원하에 안보외교 관련 전직 행정부 인사들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국 대서양 협의회」(The Atlantic Council)가 2007년 4월에 작성해 발표한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한 기본틀”이라는 보고서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북한 핵문제를 핵문제 그 자체의 문제로만 몰두해서는 근본해결이 불가능한, 전쟁 이후 정전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오늘에 이르는 한반도의 비정상적 상황의 한 징후일 뿐이며, 따라서 북한 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한반도 상황의 근본적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것, 또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협정을 포함하여 한국전 상황의 공식적인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이 필요하다는 실용주의적 인식이 미국정부 한 켠에서 조심스럽게 자리잡아가고 있는 결과이다.
VII.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한 안전보장의 균형
1. 평화조약에 반영해야 할 핵심적 분야
한반도 평화조약에서 전문(preamble)이나 전쟁종결 선언 등은 다소 기술적인 부분들이다. 핵심은 다음 네 가지 요소로 압축할 수 있고, 평화조약의 성격과 내용의 내실 여부는 이 세 가지를 어떻게 구체화하여 당사국들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에 있다.
첫째, 북한의 비핵화의 진행과 북한의 대외관계 정상화 및 대북한 안전보장의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북 안전보장의 문제는 미국의 대북한 관계정상화와 함께 남북한의 군비통제 및 군축이라는 과제와 불가분하에 연결되어 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대체목적(replacement purposes)을 제외하고는 어떤 새로운 무기의 한반도내 반입을 금지했던 정전협정을 위반하면서,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 지속해온 한반도 안에서의 무력증강의 현실을 제한하고 되돌리는 문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남북한 모두의 미사일개발 문제와 미국 및 일본의 미사일방어체제 및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어떤 내용을 한반도평화조약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는 실제 어떤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합의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떠나서, 적어도 우리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연계된 평화조약을 논함에 있어 진지하고 본격적인 고민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둘째,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이어 남북한만의 비핵화를 재삼 더 견고하게 못박게 될 한반도평화조약은 동북아에서 미국, 중국의 핵전략과 함께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통제하는 규범을 함께 포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2.13합의의 제6항에서 “참가국들이 상호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한 긍정적 조치들을 취하고 동북아에서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노력(joint efforts for lasting peace and stability in Northeast Asia)을 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 그 법적 근거의 출발이 될 수 있다.
셋째, 유사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는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통제할 수 있는 규범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외세의 무력 개입 가능성을 최대한 억지하면서 한반도 유사시를 남북한이 주체적으로 평화적으로 관리해내는 장치의 국제법적 근거를 평화조약에 어떻게 마련해낼 것이냐 하는 것이다.
2.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 안전보장의 문제
2.13합의는 북한의 비핵화를 초기행동단계(Initial Actions phase)와 다음 단계(next phase)의 두 국면으로 나누었다. 초기행동단계에서의 북한의 조치들에 상응하여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들을 ‘시작’(begin)하고 ‘진전’(advance)시키는 것으로 하였다. 구체적으로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과정의 시작 등을 언급했다.
다음 단계인 2단계에서 북한이 취할 조치는 “모든 핵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a complete declaration of all nuclear programs)와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들의 불능화”(disablement of all existing nuclear facilities)로 규정했다. 북한이 실제로 핵불능화를 진행하는 이 단계에서 미국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및 경제제재의 완전한 해제, 그리고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별도의 포럼을 본격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핵심 문제는 북한의 핵불능화를 실행하는 것과 미국의 대북한 외교 및 경제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 협상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다.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이 관련 당사국들이 충분히 수긍할 만큼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들을 폐기(불능화)하기 이전에, 모든 핵프로그램을 “완전히 신고”하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자신의 체제 안전보장과 경제적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매우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북한에 대해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외교적 군사적 압박과 경제적 제재의 가능성이 엄존한다고 북한이 판단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진실하고 완전한 신고를 북한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실질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북한이 진실한 완전한 신고를 주저할 때, 또는 그 신고가 완전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2.13합의의 불이행자로 언제라도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 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존재를 둘러싼 북미 사이의 논란은 그 대표적인 예로 남아있다. 북한도 당연히 이것을 인식하고 있다. 1994년의 제네바합의가 부시행정부에 의해 하루아침에 폐기된 상황을 북한은 경험하였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 미국과 일본이 안전보장의 제도화에 소극적인 단계에서는 북한은 여러 가지 방식의 지연 전략을 동원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이의 선택에 직면한다. 하나는 북한의 신고가 완전하고 진실한가에 대한 완전한 검증을 전제로 그 후에 북한에 대한 미국의 관계정상화와 평화조약체제 구축을 진행하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은 자신의 핵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를 이행할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신고 자체를 지연시킬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북한 핵문제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은 언제라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른 두 번째 선택은 다양한 채널로 북한과 대화하여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신고에 대해 잠정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전제로 북미관계정상화를 포함한 대북 안전보장 조치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평화조약 체결을 진행한다. 그 평화조약에는 북한이 납득할 수 있는 대북한 안전보장 조치들을 명기하고, 그 조약에 따른 북한의 이행의무의 일환으로서 검증가능한 방식의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선택은 북한이 기존 핵시설의 동결을 의미하는 초기행동(initial actions)으로 규정된 조치들, 즉 플루토늄을 만들어내는 재처리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들의 검증 가능한 폐쇄와 봉인을 확인하는 즉시, 평화조약 협상을 시작하여 조속한 시일 안에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미국을 포함한 당사국들이 다 같이 진지하고 성실한 협상에 임함으로써 북한의 핵시설의 완전한 신고가 조약 협상 과정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평화조약의 내용에는 북한 핵시설의 완전한 신고를 확인하고 또 그 시설들의 불능화 이행과 연계한 대북 안전보장 조치들을 명시하는 것이다.
대북한 평화조약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북한에게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조항은 크게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1) 외교관계 정상화와 대북한 경제제재 완전 해제에 관한 명확한 일정제시가 그 첫째 요소다.
1994년 제네바합의에서 이와 관련해 미국은 그 정상화를 약속했었다. 이 합의의 제2항[2)]는 “쌍방은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로 나아간다”(The two sides will move toward full normalization of political and economic relations)고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1. “합의후 3개월 내 쌍방은 통신 및 금융거래에 대한 제한을 포함한 무역 및 투자제한을 완화시켜 나간다; 2. 쌍방은 전문가급 토의를 통해 여타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한 뒤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한다; 3. 미국과 북한은 상호 관심사항에 대한 진전이 이루어지는데 맞추어 양국관계를 대사급으로까지 격상시킨다(...the U.S. and the DPRK will upgrade bilateral relations to ambassadorial level).
이 제네바합의는 합의후 3개월 안에 무역 및 투자제한을 완화시켜나간다라고 한 점에서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will reduce(줄여나간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명확한 일정을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2.13합의에서 초기조치의 일환으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적성국교역법의 북한 적용을 중지하는 과정을 “진전시킨다”고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제네바합의가 북한과의 대사급 수교를 약속하였으나, 문제는 “쌍방의 관심문제들(issues of concern to each side)에서 진전이 이루어지는 대로” 그렇게 한다고 함으로써, 어떤 문제들에 어떤 수준의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북미관계정상화의 충분조건으로 볼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중에 미국이 북한의 핵동결 문제 뿐 아니라 추가로 미사일문제를 빌미로 관계정상화 약속을 이행하지 않게 되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평화조약을 체결할 경우 보다 북한의 대외 경제관계 및 외교관계가 완료될 시점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일정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북한에 대한 불가침 및 핵불사용에 대한 보다 확고한 약속이 두 번째 요소다.
제네바합의의 제3항[3)]은 “쌍방은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고, 구체적으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식보장을 할 것이다(The U.S. will provide formal assurance to the DPRK against the threat of use of nuclear weapons by the U.S.)”라고 하였다.
이 경우의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핵무기의 사용과 위협에 대한 공식보장 제공이 미래형으로 되어있고, 실제 공식보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불사용 약속을 북한이 미국이 만족하는 수준의 핵동결 이행을 전제로 미래에 제공할 것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미국은 불량국가로 지목한 나라들에 대해 핵무기사용 위협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2002년 3월에 미 언론에 일부 보도된 「핵전략 검토」(Nuclear Posture Review: NPR)를 통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사용을 거론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점은 부시행정부가 제네바합의에 대한 공식적인 파기선언을 하기도 전이며, 당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2002년 2월 5일 “평양은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를 계속 지키고 있으며, 또한 케도협정(제네바합의)을 계속 준수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던 시점임에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이전에 작성된 미국의 「2001 방위정책검토」(QDR 2001)가 “정권의 변동 및 점령”(regime change or occupation)과 같은 지극히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정치군사전략을 노골적으로 명시한 것도 빠뜨릴 수 없다.
평화조약을 통해 북한에 대한 핵불사용을 약속하는 것은 그만큼 보다 공식적이고 확고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이 미래형이 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약속이어야 한다. 핵불사용에 관한 한 북한측의 약속이행여부에 대한 미국의 판단 여하를 떠난 절대적인 것이 되도록 문안이 작성되어야 한다.
이와 직접 관련되는 문제가 이른바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 NSA), 그리고 보통 핵우산(nuclear umbrella) 이라 불리는 연장억지(extended deterrence) 정책이다. 미국은 1990년대 초 북한 핵문제 부각 이후 북한이 미국의 요구에 응하면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소극적 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은 미국이 1978년에 처음 언급한 것이다. 이 개념은 말 그대로 소극적인 것이다. 즉 조건이 붙는다. 어떤 비핵국가가 미국이나 그 동맹국에 무장공격을 감행하지 않는 한 그 비핵국가에 대해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미국정부는 이러한 원칙이 북한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것을 서면으로 작성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1990년대 초 북한 핵문제를 미국이 부각시키는 순간부터 말해왔다.
소극적 안전보장의 개념은 1995년 4월 초, 5개 핵보유국가들이 NPT 회원국들에게는 자발적인 소극적 안전보장(voluntary NSAs)을 제공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명들은 단지 정치적 구속력만을 가질 뿐이며, 특히 어떤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중요한 단서들을 내포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제네바합의에서 미국이 약속한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식보장” 역시 이 소극적 안전보장의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소극적 안전보장은 북한의 공격적인 도발이 없다는 조건을 전제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의 분쟁 발생시 도발자가 어느 쪽이냐에 대한 미국의 판단 여하에 따라 북한의 방어적 행동이 도발적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 경우 미국은 북한에 대한 어떤 안전보장의 의무도 철회하는 명분을 주장하게 된다. 핵무기 사용까지도 정당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소극적 안전보장은 실제는 공허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2005년의 9.19공동성명에서 미국은 다시 북한에 핵무기 불사용에 관한 대북한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미국은 한반도에 어떤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으며, 북한을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도가 없음을 확인”하고 아울러, “한국은 한국 영토 안에 어떤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1992 Joint Declaration of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에 따라 핵무기를 접수하거나 배치하지 않는다는 약속(commitment not to receive or deploy)을 재확인”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정부가 미국 핵무기의 한반도 반입, 즉 접수를 불허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역시 소극적 안전보장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즉 미국의 판단기준에서 북한의 도발적 행동이 없을 때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붙어있다.
유사시 미국이 북한의 도발적 행동으로 한반도에서 분쟁이 발생하였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한국 정부의 의사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핵전략의 기본원칙에 따라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은 역사상 한번도 ‘핵선제사용 옵션’(nuclear first strike option)을 포기한 일이 없었다. 미국이 말하는 소극적 안전보장은 그 같은 미국의 관점과 전략에서는 핵선제사용 옵션의 유지와 전적으로 양립 가능한 것이다.
이 문제는 현재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 완전한 폐기가 검증될 때까지는 핵무기보유국가를 자임하고 있기에 더 큰 딜레마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북한이 실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반도에서 군사정보획득과 전략적 판단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북한에 의한 핵공격의 징후가 포착되었다”는 판단을 내릴 때, 또는 심지어 북한이 테러집단에 핵무기를 제공하는 징후가 포착되었다고 판단할 경우에도, 미국의 대북한 핵무기 불사용 선언은 미국의 핵선제사용 옵션을 제한하기 어렵게 된다. 미국이나 그 동맹국에 대한 재래식 공격 징후가 포착되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핵선제사용옵션을 가진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전략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결국 한반도 유사시 미국과 중국 어느 쪽이든, 또는 그 둘에 의한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보다 구속력 있는 국제법적 근거를 어떻게 한반도 평화조약에 담아낼 것인가의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 필자의 의견으로는, 9.19공동성명에서 미국이 밝힌 핵불사용 천명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최선은 “미국과 중국(또는 핵무기보유국들)은 한반도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under any circumstances)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핵불사용 천명이다. 차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라는 표현을 넣지 않는 대신 기존의 핵불사용 천명에 덧붙여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핵선제사용 옵션(nuclear first strike option)을 포기(renounce)한다”는 취지의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에 약속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은 중국에 대해, 그리고 중국은 미국에 대해 적어도 한반도에서 핵선제사용 옵션을 배제하는 데 동의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 문제는 한반도비핵화를 동북아 비핵지대 구축 문제와 연결시키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점은 후술(後述)할 것이다. 만일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보다 강력한 핵선제사용 옵션 포기 약속을 미국과 중국이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런 경우에 특히 한반도비핵화를 동북아비핵지대 구축 노력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약속을 전제로 하는 규범을 우리의 평화조약에 포함시키는 것은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될 것이다.
(3) 남북한과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전략 수정과 군비통제에 대한 일정하게 명확한 일정이 제시되어야 한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한이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즉 남북기본합의서는 제2장에서 ‘남북 불가침’이라는 제목 아래 6개 항을 규정했다.
제9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제10조: 남과 북은 의견대립과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제11조: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제12조: 남과 북은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는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및 통제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문제, 군인사 교류 및 정보교환 문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 문제, 검증문제 등 군사적 신뢰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추진한다.
제13조: 남과 북은 우발적인 무력충돌과 그 확대를 방지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당국자 사이에 직통전화를 설치/운영한다.
제14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후 1개월 안에 본회담 테두리 안에서 남북군사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불가침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 및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다.
이 불가침 관련 합의에서 일반적인 선언적 약속들 및 위원회 구성 등의 문제들을 떠나 핵심을 짚는다면, 군사연습의 통제, 그리고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 문제를 지적한 제12조의 내용이다.
평화조약에서는 이 내용을 선언적으로 되풀이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내용을 구체화하고 그에 관한 일정을 제시하는 데까지 일정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대상에 미국과 주한미군이 관련되는 군사연습과 공격적 능력의 제거를 위한 단계적 군축 실현의 문제가 포함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공격적 전쟁계획의 배제를 규정한 조항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크게 보아 다음 세 가지를 구체화한다. 1) 모든 전쟁연습, 또는 일정한 규모 이상의 군사훈련을 배제하는 원칙을 구체화한다. 남북한과 외국군의 연합 군사훈련을 모두 포함한다. 여기에는 남북한이 해외에서 타국 군대들과 광역 군사훈련에 참가하는 것의 금지도 포함시킨다; 2) 남북한간 공격적 무기의 개념과 범위를 정하고 이를 배제하는 방향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 합의를 담는다. 이것은 물론 새로운 공격적 무기의 한반도 내 반입을 배제하는 내용도 포함한다. 3) 현재까지의 남북한의 군사력 배치방식을 현재의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평화지대의 확장의 개념과 연계하여 후퇴 조정하는 내용을 고려한다.
이러한 합의를 조약에 포함시키는 한편, 이런 군사문제 합의의 이행을 주관하고 관리하며 추가적인 문제들을 협의하고 결정하기 위한 남북한과 미국이 참여하는 군사공동기구에 관한 조항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평화조약 체결 이후의 한반도 군사문제에 대한 남북한의 주도적 역할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이 군사공동기구의 설치 조항을 주의 깊게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본다. 즉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구성하기로 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의 구성을 평화조약에서 재확인하고 미국과 중국은 그 위원회의 활동과 결정을 존중하고 준수하도록 하는 조항을 넣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은 1996년 2월 미국에 대해 비무장지대의 관리, 돌발사건 발생시 해결방안,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조미공동군사기구 구성 등에 관한 잠정협정 체결을 제안한 바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설치하기로 합의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은 북한 핵문제에 대한 북미간의 일정한 합의(1994년 10월 제네바합의로 공식화되기 전인 1994년 7월 11일의 북미합의) 이후에도 김일성 주석 사후 대북 강경론을 유지한 김영삼 정부 아래에서 남북간에 이행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은 조미공동군사기구를 제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남한의 경우 휴전선 방위업무를 한국군이 전담하고 평시작전권 뿐 아니라 전시작전권 역시 2012년 3월까지 한국에 반환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의 관리와 돌발사건 발생시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조미군사공동기구는 명분이 더 약화되었다. 비무장지대의 관리와 돌발사건 발생시 해결방안 등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제시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을 통해 다루도록 하고, 남북한과 함께 미국과 중국이 다 같이 이 문제들에 대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준수하도록 하는 내용을 평화조약에 담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된다.
평화조약 체결 이후의 평화체제에서 한반도 군사문제의 일상적 관리의 주체는 남북한이 담당하도록 하며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술적 차원의 군사적 역할은 한미동맹의 유연화와 함께 축소시켜 나간다는 취지다. 한반도에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북미 사이의 군사전략적 대화는 정상적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가 되는 평화체제 하에서는 북미간의 다양한 고위급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VIII. 한반도비핵화와 동북아비핵지대 지향의 규범
1. 동북아 핵군비경쟁 구조: 동북아 비핵지대 근거마련의 절실성
한반도 비핵화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전 지구적 차원의 핵무기 질서의 현황을 짚어둘 필요를 느낀다. 탈냉전 이후 외관상으로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여러 차례의 핵무기감축협상이 진행되고 또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에 또한 주목해야 한다.
미국 상원이 1992년 10월에 비준한 제1차 전략무기감축협상(Strategic Arms Reduction Talks: START I)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할 수 있는 전략핵탄두의 상한선은 각각 6,000기로 제한되었다. 미국 상원이 1996년 1월에 비준한 제2차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II)은 두 나라 각각의 전략핵탄두 보유상한을 3,000 내지 3,500기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건설을 둘러싼 논란으로 러시아 의회의 비준이 늦어져 2000년 4월에야 이루어졌다. 러시아의 비준이 늦어지자 1997년 9월 미국과 러시아는 START II에 따른 전략 핵무기 감축 완료 시한을 2007년 말로 연기하는 의정서를 체결했다.
1997년 3월 클린턴행정부와 러시아의 옐친정부는 START II가 발효 되는대로 전략핵무기 보유상한을 2,000 내지 2,500기로 낮추는 제3차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III)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2001년 출범한 부시행정부는 START II를 실행에 옮기는 대신, 미러의 전략핵탄두 보유상한을 1,700-2,200기로 감축하는 「전략적 공격무기 감축조약」(Strategic Offensive Reductions Treaty), 일명 모스크바조약(Moscow Treaty)을 추진하였으며 미러는 2002년에 이 조약에 서명했다. 미 상원은 이 조약에 2003년 3월 비준 동의했다
부시행정부가 모스크바조약을 추진한 것은 실전 배치된 전략핵탄두(operationally deployed strategic warheads)의 숫자를 제한하되, 유사시 저장고에서 다시 꺼내 사용할 수 있는 예비용 전략핵탄두(reserve strategic warheads)의 보유를 제한하지 않고, 또한 다양한 상황에서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전술핵무기의 개발을 제한받지 않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START II는 모든 다탄두미사일체계로 된 대륙간탄도미사일들(MIRVed ICBMs)을 제거하도록 하였고, 미국이 강점으로 있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체계(SLBM)의 핵탄두 상한을 1,750기로 제한하는 등, 질적인 감축을 규정하고 있었다.
반면에 부시행정부가 주도하여 체결한 모스크바조약은 실전 배치될 수 있는 전략핵무기의 총 숫자에 대해서만 상한선을 두는 것으로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띠었다. 그만큼 질적으로 핵무기체계를 개선하고 미국의 강점을 보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다탄두미사일체계도 계속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미국은 자신의 강점인 SLBM의 주력인 Trident II를 미사일 하나에 4개의 핵탄두를 장착하는 다탄두체제로 유지할 계획이다.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SLBM은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기 쉽고 또한 오대양을 주유할 수 있으므로 미국의 권력투사능력을 극대화하는 핵무기운반체계라고 할 수 있다. 상원 외교위원회는 이 조약이 단순하다는 것과 함께 미국이 융통성을 보존(preservation of U.S. flexibility)할 수 있게 된 점을 들어 그 조약을 크게 칭찬하였다. 2003년 3월 상원은 95 대 0의 만장일치로 이 조약의 비준에 동의했다.
모스크바조약에 따라 미러가 전략핵탄두를 감축하는 것은 조약 발효후 10년간에 걸쳐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2004년 현재 미국과 러시아의 전략핵무기는 여전히 6천기 수준에 가까웠다. 또한 수천기의 전술핵과 예비용 전략핵탄두의 보유는 사실상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미국은 예비용 핵탄두들을 “조건이 변화하면 실전에 복귀시켜 배치할 수 있는 ”탄력적 핵무기“(responsive force)의 일환으로 유지하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2004년 3월 미국 「국가핵안보청」(National Nuclear Security Administration: NNSA) 청장인 린튼 브룩스(Linton Brooks)는 미국이 실제 보유할 핵무기고는 1,700-2,200기의 실전배치 핵탄두의 숫자를 능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술핵무기뿐 아니라 전략핵탄두 역시 국제안보환경이 변할 경우 다시 배치할 수 있는 헷지(hedge)용으로 다량을 보유할 것임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2004년 1월 31일 미국과 소련이 신고한 핵무기 보유상황을 보면, 미국은 전략핵탄두 5,968기와 함께 1천기 이상의 전술핵무기에 더하여 약 3천기의 예비용 전략핵 및 전술핵탄두들(reserve strategic and tactical warheads)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4,978기의 전략핵탄두와 약 3천5백기의 전술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배치된 상태는 아니나 유사시 사용가능하게 보관된 예비용 전략핵 및 전술핵탄두(stockpiled strategic and tactical warheads)는 11,000기에 달한다.
미국 등이 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냉전시대의 핵무기 운용체계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있는 것도 역시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냉전시대에 구축된 핵무기 운용구조가 여전히 적실한가(Is the Cold War Architecture Still Relevant?)”라는 질문이 미국의 핵전략 및 핵무기지휘통제체제에 관련한 미국 의회 문건에서 아직도 논의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웅변한다.
미국과 러시아는 2001년 11월 서로를 적이나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핵전략검토 2001」에서 확인되듯이 미국의 전략핵무기 배치구조와 ‘즉응발사체제’(ready-to-launch, operationally deployed nuclear forces)가 유지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와 함께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모두 국가안보정책의 주춧돌(cornerstone)로 간주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경보가 있으면 즉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뜻하는 ‘경보즉시발사’(launch on warning)의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경보착오로 인한 핵전쟁 발발의 위험성을 내포한 지극히 위험한 정책이다. 국제사회는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그 전략의 수정을 요구해왔다. 미국과 러시아 모두 그러한 요구를 묵살해오고 있다.
미국은 2007년에 들어서도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유럽의 체코와 폴란드에 각각 레이더기지와 요격미사일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란과 북한 같은 나라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지만, 러시아는 자신의 국경에 가까운 유럽국가들에 미국의 미사일방어기지 건설은 자신을 겨냥한 것으로서 러시아에 대한 중대한 군사적 위협으로 본다. 유럽의 관찰자들은 이를 보면서 미국과 러시아 관계에서 장차 냉전의 부활까지도 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의 핵무기 즉응발사체제의 타격대상에 중국의 목표물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미국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래 대만에서의 분쟁 발생시 핵무기 사용을 위협한 일은 없다. 그러나 유사시 대만에 대한 중국의 공격을 다른 수단으로 억지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미국은 미사일방어체제 건설을 통해 중국의 전략핵무기의 가치를 무력화하려 한다. 중국은 그에 대응해 미국에 대한 침투력, 그리고 적에 의한 선제공격을 당했을 경우의 생존능력을 높인 핵무기체계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체계를 이미 갖고 있을 뿐 아니라 DF-31A ICBM과 같이 더 발전된 이동식 대륙간탄도탄 핵무기체계(mobile ICBM systems)를 개발하고 있다고 미 국방부 분석가들이 밝히고 있다.
핵군비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미중관계의 저변에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인 2005년 여름 미국 언론들이 “만일 미국이 중국에 적대하여 대만을 도우면 중국은 미국의 도시들을 핵무기로 공격할 것”이라는 중국 국방대학 주쳉후(Zhu Chenghu)장군의 발언을 광범하게 보도한 데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2007년 1월 하순 중국은 새로운 대위성무기(a new antisatellite weapon)를 실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은 물론 우주의 무기화 경쟁에 뛰어들 의도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에 대한 대응임을 미국인들은 주목하고 있다.
현재 중국이 확보하고 있는 전략핵무기로서 미국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단탄두 미사일 (single-warhead missile)인 「동풍 5」(DF-5 ICBM)인데, 모두 18기에 불과하다. 러시아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전략핵탄두를 3,500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중국의 전략핵전력은 그것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런데 러시아의 핵무기고조차도 이제는 미국의 핵선제공격시 전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공격에서 살아남아 미국에 대한 핵보복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즉 1960년대 이후 미국과 다른 핵보유국들이 다 같이 대량보복능력을 공유함으로써 유지되던,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에 의한 공포의 균형이 붕괴하고 미국에 의한 핵우위(U.S. nuclear primacy)가 다시 도래했다는 분석이다. 탈냉전 이후 러시아의 핵전력은 첨단능력에서 쇠퇴해가고 중국의 핵무기 현대화 속도는 느린 반면 미국의 핵전력은 정확한 타격력 면에서 빠른 속도로 향상을 거듭해왔다. 리버와 프레스는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에 대해 핵우위(nuclear primacy)를 재확립하는 것을 의도적인 정책목표로 삼아온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는 더욱 중국의 핵전력은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니며,. 따라서 대만 위기시 중국이 미국의 도시들을 타격할 것이라는 주쳉후의 발상은 미친 생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인 만큼, 러시아와 함께 중국은 미국의 공세적 핵우위에 대한 대응으로 자신들의 전략핵무기체계의 취약성(strategic nuclear vulnerability)과 그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또한 경주할 수밖에 없다. 그 일환이 2000년대 들어 가시화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연합 움직임이라는 측면도 있다. 미사일방어체제 연구개발에 대한 러일간의 공동협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그 한 단면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한편으로 부분적으로는 전략핵 군축의 외양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핵무기고를 더욱 무력화하기 위한 미사일방어체제의 건설노력과 짝을 이루며 더 효과적인 전략적 타격력을 추구하는 핵군비경쟁이 21세기에 들어서도 새로운 양상으로 부단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한가운데에 동북아시아가 있다.
둘째, 미국이 중국 등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그 우위 때문에 미국에 의한 안정적 패권이 확립되어 동북아질서에 안정이 오는 것은 아니다. 전략핵전력에서 미국이 절대적 우위를 유지한다 하더라도 미중간 패권전쟁(hegemonic war) 차원의 전면전쟁이라는 상상 이외의 상황이 아닌 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략적 핵교환이 이루어지거나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전략적 선제핵공격이 강행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이 우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한 불안 등의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동북아에서 대만에서와 같은 지역적인 차원의 분쟁이 폭력화할 경우, 또는 한반도와 같은 제3의 분쟁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개입되는 과정에서 미국이든 중국이든 전술핵무기의 제한적 사용이나 그 위협이 가능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오래전부터 실질적인 핵무장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으며 의지(意志) 면에서도 의심을 받아왔다. 그런 점에서 일본 역시 한반도만의 비핵화 원칙의 조약화에 의문을 던지게 할 수 있는 국가이다. 일본에서는 각료들이 잊을 만하면 한번씩 핵무장 필요성 발언을 하곤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은 주기적으로 미국에게 핵무장의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2006년 10월에도 일본은 미 국무장관에게 그런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일본이 조만간에 핵무장을 할 것이라고 전망해왔다. 케네스 왈츠는 어떤 나라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이 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구조적 비정상성”(a structural anomaly)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핵억지력을 갖추는 것은 강대국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강대국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일본의 핵무장은 궁극적으로는 필연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대규모로 플루토늄을 축적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사실상 이미 핵보유국가이든지 아니면 단지 몇 달간씩 자제하고 있을 뿐인 것인지 의문을 가질 만하다는 것이 왈츠의 생각이다. 왈츠는 더 나아가 일본이 핵무장을 하고서도 그것을 오직 자위(自衛)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미 갖고 있는 재래식 자위대 무장과 마찬가지로 핵무장도 일본의 평화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정당화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된다. 레웰린 휴즈에 따르면,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한편으로 독자적인 핵억지력을 개발하는데 헌법적 해석에서나 국내법 체계에서나 장애물을 만들지 않도록 유의하는 경향을 보여왔으며, 또한 플루토늄 재처리시설들을 포함하여 대규모의 민간 핵 에너지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설들을 유사시 군사용으로도 쓸 수 있도록 한다는 것(nuclear hedging)은 일본의 일관 된 국가전략으로 채용되지 않았다. 또 일본 국내에서 독자적인 핵무장에 대한 지지가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휴즈의 평가이다.
그러나 향후에도 일본의 핵무장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일본 안에서의 논쟁 결과가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휴즈는 불확실성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북한의 핵무장과 같은 외부 안보환경의 변화가 곧 일본의 안보정책의 중대한 변화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할 뿐이다.
2007년 1월 일본의 4차 첩보위성 발사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1998년 북한의 대포동미사일 발사 이후 독자적인 첩보위성체제를 갖추기 위해 시작한 사업의 결과로 알려져 왔다. 2006년 12월 중국이 탄도미사일로 위성을 요격하여 파괴하는 실험을 성공한 것에 뒤이어 나왔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북한 핵위협을 주된 핑계로 대고 있으나, 미국 그리고 미일공동의 미사일방어체제 개발 본격화를 계기로 동북아 4강 사이에 가속되고 있는 우주의 무기화(space weaponization) 경쟁의 한 측면임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일본은 명목상 우주의 평화이용 원칙에 근거하여 정보수집 위성을 방위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집권 자민당은 정부 안에 전략본부를 설치하고 정찰위성의 군사적 이용을 허용하는 ‘우주기본법안’을 2007년 정기국회에 제출할 예정으로 알려지고 있다.
2. 동북아비핵지대화에의 규범을 전제하는 한반도비핵화
이런 상황 속에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서 밝힌 한반도비핵화의 공약을 9.19공동성명과 2.13합의에 이어 평화조약에서 재차 확인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칠 수 있다. 필자는 한반도의 긴장과 전쟁의 위험성까지도 지속시키고 있는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핵심요소가 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재차 명문화는 정당하다고 본다.
첫째, 핵무기가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핵무기주의의 미망(迷妄)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옳다. 핵보유국가들을 제외한 인류의 보편적인 국제적 규범은 핵무기의 궁극적 폐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 원칙을 동북아에서 한반도는 견지해야 한다.
둘째, 한반도의 남북한이 또는 통일 이후의 한반도 국가가 개발하여 보유할 수 있는 규모의 핵무기고로는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를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더 위태로운 안보딜레마의 구조 속에 우리 자신을 몰아넣게 될 것이다. 특히 세계 3대 핵보유국가들이 밀집한 동북아에서 핵무장한 한반도는 강대국간의 갈등이 폭력화하는 유사시 일차적인 공격목표가 되는 위험성을 자초하는 어리석고 위험한 선택이라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셋째, 한반도 안보와 평화의 백년대계의 원초적인 기초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합에 있다. 그 통합을 이루는데 남북한 어느 한쪽이나 또는 남북한 모두의 핵무기 추구는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 핵무장을 추구하거나 그 의혹을 받는 한반도 국가들의 통일을 주변국가들은 더욱 경계할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것은 평화적 통일에 대단히 불리하다.
넷째, 동북아 안보질서의 최악의 상황은 한반도의 국가(들)와 일본 사이의 핵무장경쟁이 본격화하는 시나리오다. 한반도에서 핵무장의 추구는 일본에 우리보다 더 빠르고 대규모의 본격적인 수준으로 핵무장의 명분을 주게 된다. 우리에게 그것은 안보의 플러스가 아니라 심오한 안보 상실의 시작이 될 것이다.
다섯째, 21세기 동북아 군비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되고 있는 미사일방어체제 건설 경쟁과 그것에 대항하는 핵무기체계 첨단화의 경쟁이 전개되고 있다. 북한 핵문제가 조속히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으로서 또는 그것에 책임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명분으로 하는 미일동맹의 미사일방어구축과 이로 인한 중국과 러시아의 군비증강이 현재 동북아질서의 주요한 측면으로 되었다. 한반도의 비핵화 여부는 일본의 핵무장 명분 여부를 결정할 뿐 아니라 향후 동북아의 군비증강 추세의 바로미터가 될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의 속도와 규모 그리고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핵화의 원칙을 고수하고 이행하는 것은 일본의 비핵화를 유지시키면서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초석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의 조약화는 같은 조약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일본의 핵무장 원천배제와 함께 동북아에서 핵무기 위협을 줄여나가기 위한 지역내 국제협약, 즉 비핵지대 구축의 필요성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만이라도 확보해내는 노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동아시아를 비핵지대화하자는 발상을 거론한 것은 표문태가 편저한 『아시아를 비핵지대로』라는 저서가 그 첫 사례로 보인다. 여러 가지 논의들이 있어왔으나, 가장 설득력 있는 동북아비핵지대화이 비전은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에서 대표적인 인사 우메바야시 히로미치가 제안하여 일본의 평화운동과 한국의 평화운동 일각이 공동으로 다듬어온 3+3안에 기초한 동북아시아비핵지대건설 방안이라고 생각된다. 일본과 남북한이 비핵화 준수 약속을 더욱 공고히 하는 조약을 맺고 미국, 중국, 러시아 등 3개 핵보유국들이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한 일정한 반경 안에서 핵무기의 사용과 배치 등을 배제하는 약속을 같은 조약 안에 포함시키거나 또는 별도의 의정서로 그 노력에 동의하고 참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비전은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핵보유국가들의 군사안보전략이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한 비핵국가들이 관련된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핵보유국가들 상호간에서도 핵무기의 역할을 축소해가도록 하는 과정의 첫 출발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에 공동안보가 가능해지려면 그 가장 원초적인 조건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현재의 비핵국가들이 상호간에 핵무장의 유혹을 확고하게 떨쳐내고 이것을 해당 지역에서의 핵보유 강대국들의 핵선제사용 배제에 대한 명확한 공약으로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한반도의 남북한과 일본이라는 기존의 비핵국가들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비핵지대화 추진에 협력할 수 있느냐 여부가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동아시아의 공동안보체제로 확장할 수 있는가의 시금석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의 실현을 위해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을 설득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북반구에서 미국이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s)의 지역들로 간주하는 지역들은 대개 핵보유국가들로 둘러싸여 있다. 또 비핵국가들도 저마다 핵보유국가와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중앙아시아 비핵지대안,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 등을 포함하는 북해지역 비핵지대안, 발칸지역 비핵지대안, 중동지역 비핵지대안, 남아시아 비핵지대안, 남대서양(South Atlantic) 비핵지대안과 함께 동북아비핵지대안이 각각 지역의 일부 또는 민간평화운동의 차원에서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핵보유국가와 비핵국가간의 얽힘의 현실 때문에 그 실현이 가로막혀왔다.
많은 사람들이 동북아비핵지대론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비판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동시에 비핵지대 논의의 내용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한 예로 노병렬은 우리의 비핵지대 논의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철수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을 편다. 문제와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탓이다.
첫째, 동북아비핵지대 건설 논의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성립과 그것의 확장으로서 추구하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비핵지대 건설과 연관된 토론 주제일 수 있으나, 별개의 논의주제이며 전제조건은 아니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군을 가능케 하는 환경이 될 것이고, 또한 한반도 평화체제 성립은 동북아비핵지대의 필수적 조건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군과 비핵지대 건설은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동시에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동북아비핵지대론 자체가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북한이 동북아 주둔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비핵지대 형성을 받아들이는 한,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도 가능하다면 동북아비핵지대를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다만 한반도 평화체제의 성립 위에서만 동북아비핵지대가 가능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전제를 떠올릴 때 동북아비핵지대 형성은 미 군사력의 한반도에서의 물리적 주둔이 해소되는 과정과 맞물릴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더 현실적인 분석이 될 수도 있다.
둘째, 동북아비핵지대론을 제기해온 시민사회와 학계 일각에서의 논의를 전개하여온 사람들이 한반도 평화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여 주한미군의 철군을 상정하여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북아비핵지대론 자체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조건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필자도 우메바야시 히로미찌도 마찬가지다. 우메바야시는 주일미군의 궁극적인 철수를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동북아 비핵지대 건설과 주일미군 철수를 전제조건의 관계로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북아비핵지대 건설이 동북아 주둔 미군사력의 주둔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안보의존을 줄임으로서 오키나와를 포함한 이 지역 미군의 궁극적 철수로 나아가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이 오히려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비핵지대건설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지역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핵선제사용 옵션의 자유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특히 미국의 핵전략은 전 지구적으로 비핵지대의 정착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한반도 평화조약에서 직접적인 해결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은 명백하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 이 같은 미사일방어와 핵무기 증강 그리고 우주의 군사화를 포함한 군비경쟁의 심화는 한반도만의 비핵화의 타당성과 지속가능성을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한반도 비핵화가 동북아시아에서의 핵무기의 군사전략적 비중 축소와 미사일방어체제 개발경쟁 제한을 위한 미국 및 중국과 다른 주변 강대국 모두의 공동 책임과 상응하는 행동 의무를 전제로 한다는 규범적 내용을 조약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1) 동북아비핵지대 구축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이를 위해 공동노력하기 위하여 동북아비핵지대 건설을 연구하는 6자 공동위원회를 기존의 6자회담의 한 소위원회 형태로 구성하거나 아니면 6자회담과 별개의 6자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는 내용의 조항을 조약에 넣는 방법이다.
(2) 만일 이러한 구체적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다소 추상화된 형태로나마 일정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규범적 조항을 삽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즉 “비핵국가들의 비핵화 상태 유지의 의무와 함께 핵보유국가들의 궁극적인 핵무기 폐기의 의무를 규정한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의 정신에 입각하여, 참가국들은 다른 주변 관련국가들(일본, 러시아, 몽골 등 의미)과 함께 핵무기의 위협으로부터 지역내 비핵국가들의 안전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협의를 시작한다.”
IX. 한반도 유사시 미국과 중국의 무력개입 차단 문제
1. 반세기만에 반복된 한반도 역사의 비극
구한말에 터진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7월 23일의 일이었다.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는 청일전쟁에 관한 그의 역저에서 이 사태를 “아시아 최초의 반일(反日) 폭동”이었다고 정의했다. 민비(閔妃)의 비호를 방패로 부패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에 굴욕적이던 민씨 일파의 정권 아래 심화되고 있던 삼정의 문란 가운데에서 일본식 신식군대 설치에 분노한 조선의 구식군대가 일으킨 폭동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에서 특별거류지와 일방적인 치외법권 획득으로 조선에서 상업적 법적 특권을 누리며 이를 기반으로 군사, 정치, 경제,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과 횡포를 늘려가던 일본인들은 이 폭동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사태를 기화로 대원군이 다시 궁궐에 들어가 9년전 자신의 권력을 박탈했던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사건이 임오군란이었다.
이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자유 민권파들까지 나서 조선에 대한 강경론을 주창하는 가운데, 일본정부는 조선에 1천 명의 군대를 파병한다. 근대사에서 일본군이 대외 전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한 최초의 일이었다. 이에 청국은 일본의 파병에 대응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방어하기 위해 군함 세 척과 3천 명의 군대를 급파한다. 청국은 자신들의 보호하에 대원군을 유폐시켰으며, 중조상민수륙통상장정(中朝商民水陸通商章程)을 체결해 조선이 속국임을 명기하였다. 이를 통해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과거의 명목적인 종속관계를 넘어 실질적인 속방화를 기도하게 된다.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지위는 크게 후퇴하였고 한반도에서 청일 양국의 대립이 본격화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 지배층 내부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뉜다. 과거 강화도조약 이후 영향력이 커진 일본에 굴욕적이었던 민씨 일파는 청국에 의한 대원군 유폐 이후 다시 정부를 장악한 가운데 이제는 청국에 기대어 권력보존을 꾀하며 사대당의 길을 걸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원조를 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의 개혁을 추구하겠다는 친일 노선이 등장한다. 한반도에서 청일간의 세력각축이 본격화한 이 시기에 심화되어가는 조선 지도층의 분열은 그 내부에서 폭력적인 수준으로 나아간다.
중국과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을 벌이느라 조선에 주둔했던 청국 군대의 절반 병력이 1884년 조선에서 철수한다. 그 해 12월 친일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은 18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고, 민씨 일파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민중의 도전에 직면하는 사태를 포함한 유사시에는 청국에 의존하는 상황으로 되었다.
조선 지도층 내부 분열상의 폭력적 표현이었던 갑신정변은 청일전쟁의 단초가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것이 1885년 4월 18일에 청나라 리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의 협상으로 타결된 『톈진조약』이었다. 이 조약의 제3항은 “장래 만일 조선국에 변란(變亂)이나 중대한 사건이 있어서 중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派兵)을 요(要)할 때에는 먼저 문서로서 알려야(行文知照) 하며, 그 사건이 진정된 이후에는 곧 철회하여 다시 머물러 주둔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청일양국 중 어느 쪽이든 중대사태로 간주하는 일이 조선에서 발생하면 청일 양국이 조선에 공동 출병할 수 있는 조약상의 근거가 마련된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일본인 학자의 눈에 비친 1890년대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890년대의 조선은 국왕 스스로가 매관(賣官)할 정도로 부패했던 이왕조(李王朝)의 지배하에 있었다. 관료는 가렴주구에 정신없고, 귀족계급인 양반은 농민을 착취하고, 청일(淸日) 양국 상인은 불평등조약이 마련해준 특권을 이용하여 민중을 수탈했다. 조선의 민중은 겹겹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나, 이왕조 내부는 일본파, 청국파, 러시아파로 갈리어 외국세력과 결탁하고 음울한 항쟁을 계속하던 중에 주체적으로 개혁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필자가 일본학자의 이 말을 여기에 인용한 것을 행여 식민사학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이는 몽매(夢寐)를 범하지 않기를... 이 학자는 이어서 “민중은 생활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거듭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민중봉기는 지역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투쟁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여기에 결집의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 동학이다.”
마침내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못 이겨 민중은 폭동을 일으켰고, 폭동의 선두에 섰던 전봉준을 매개로 동학 교단 조직을 통해 지역적 반란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해 3개월 만인 5월 11일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정부군을 격퇴하고 5월 31일 전주에 입성한다.
조선의 국가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광범한 정치사회 개혁을 수용하는 선택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당시 조선 지배층의 시야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당시 민비의 비호 아래 조선 정부에서 실권을 행사하던 병조판서 민영준은 농민군이 전주를 함락시키기도 전인 1894년 5월 16일에 이미 청군 군대의 원조를 의뢰할 것을 주장한다. 당시 조선 정부의 각의(閣議)는 “청국 군대의 원조에 의해 내란을 진압한다면 수만의 국민이 생명을 잃을 것이고, 전국에 폭행 약탈의 폐단이 미칠 뿐 아니라, 열국이 출병하여 조선을 전장으로 하는 전쟁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일단은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폐정 개혁, 불량관리의 처벌로 내란을 해결해야 한다는 데로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일단 민영준의 주장을 기각했다.
그러나 5월 23일에 이르러 농민군 토벌에 나선 초토사(招討使) 홍계훈이 청군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올린다. 이어 5월 31일엔 전주가 함락되자, 조선 조정은 다급해졌다. 민영준은 국왕 고종의 내명(內命)을 받고 마침내 당시 리홍장에 의해 조선에 청국대표(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되어 있던 원세개(袁世介)에게 출병구원(出兵救援)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각료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국왕과 민영준이 주도하여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이 출병요구가 한반도를 외세의 전쟁터로 만든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정부는 6월 3일 밤 의정부(議政府)를 통하여 공식으로 청국에 출병을 청원했다. 다음날 4일 당시 조선주재 일본 공사를 맡고 있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귀국중이어서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일본정부에 약 1,500명의 중국 병력이 청나라 위해위(威海衛)를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하고 아무쪼록 일본도 병력을 급파할 것을 건의한다. 청국정부는 조선에 출병하면서 톈진조약 3항에 따라 일본에 출병을 통지했다. 일본도 6월 7일 청국에 출병을 통고하고 다음날인 6월 8일 이치노헤 효에(一戶兵衛) 소좌가 지휘하는 보병 1대대가 일본 우지나항에서 조선을 향해 출항했다.
조선 최고 지도층 스스로 재촉한 외세의 개입으로 한반도는 청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한 조선의 농민들은 조선 관군이 종속적인 지위에서 철저한 협력을 제공한 가운데 일본군에게 토끼몰이되어 처참하게 도륙 당하였다. 현대적 군대인 일본군과 농민군의 대결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의 형국이었다. 이 난리 통에 조선 국왕의 와이프였던 민비(나중에 “명성황후”로 추존)는 결국 고종 자신의 결단으로 이끌어 들인 꼴이 된 일본군의 칼날에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농촌공동체는 그 전체가 유혈이 낭자한 폐허로 변하였다.
조선사회는 그 사태가 초래한 황폐화로부터 결코 다시 활력을 되찾지 못하였다. 민중의 활력을 외세의 총칼의 힘을 빌려 압살하는데 보조적인 그러나 적극적인 하수인의 역할을 자임하였던 조선의 국가는 잠시 “대한제국”이라는 한편의 희극(喜劇)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곧 영국과의 공식동맹 그리고 이어 미국과의 실질적인 제국주의 콘도미니엄을 구성한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이 주도한 국제적 공인(1905년의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1908년의 루트-다카히라 밀약)의 축복 속에서 조선의 국가를 한 점 재로 만들어버렸다. 내면이 공허하게 텅비어있는 조선의 국가에게 미국이 도움을 제공하지 않고 더 큰 목적인 중국경영을 위해 일본에게 조선의 요리를 일임한 것을 제국주의 시대 그 시대에 어떻게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더 불행하게도 역사의 비극은 되풀이되었다. 해방 이후 미소가 주도한 남북의 분단은 조선의 정치세력들 내부의 분열과 대립으로 더욱 고착화되었고, 남북한 모두 외세의 개입을 재촉하는 가운데 한반도는 또 다시 동족 간에 그리고 미국과 중국을 이끌어 들인 더 크고 오랜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분단된 두 정치체 내부의 집권세력이 자신의 정치체 우선의 당면한 안보이익만을 앞세우며 한반도 전체, 공동의 이익에 대한 목소리들을 묵살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권력과 정치의 변할 수 없는 속성이요 현실이라고 믿는다면, 그래서 한 공동체만의 안보와 군사동맹의 논리만 앞세우는 것의 근시안성과 위험성에 둔감한 것을 당연한 세상지사로 여긴다면, 정치와 통일과 평화, 그리고 역사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과연 공허 이외의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과거 대략 반세기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의 권력집단들이 두 차례나 자초한 역사적 과오들을 21세기에서만은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평화조약의 조항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남북한과 주요 주변국들(미국과 중국)의 행동을 규율할 조약 안에 외세의 무력 개입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사유하고 담아낼 것인가를 우리는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향후 우리가 과거 역사의 비극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남북 공동의 자세와 원칙 그리고 그것을 주변국들에게 설득해낼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은 평화조약의 협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2. 한반도 평화조약에서 외세 무력 개입 가능성을 통제하는 문제
한반도의 안보환경이 평화체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는 평화조약에서 외세의 무력 개입 가능성을 통제한다는 문제의식이 적절한가 하는 질문을 먼저 생각해 본다. 왜냐면 평화체제에서 외세가 무력 개입하는 시나리오는 정의(定意)상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요하다. 왜냐면 평화체제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이른바 남북한 어느 한쪽의 이른바 ‘급변사태’라든가 경제/사회적 재난사태로 인한 심각한 안보적 불안이 발생할 수 있다. 평화체제에서도 남북의 정치체들은 통합되기 이전인 이상 살아있는 유기체들인 만큼 그리고 남북한 각자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또한 부단히 변하는 인식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외세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한에서는 남북한의 관계는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체제에서도 핵심적인 문제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원칙을 확고히 하는 것 뿐 아니라, 분쟁발생과 해결의 과정에서 외세의 무력 개입 가능성을 통제하는 일이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에 몰두하기보다 그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간적, 외교적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해낼 수 있는 장치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특히 평화체제 초기에는 남북한 각자의 군사동맹체제가 잔존해 있거나 유지될 가능성이 높은 채로 있기 때문에, 분쟁 발생시 외세의 역할을 어떻게 통제하느냐 하는 것은 그 외교적 공간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1) 최단시간내 외세 동원, 동맹 우선, 초전박살, 외세의 예방전쟁 허용의 논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간 한국의 안보 및 통일전략에서 가장 강조되어온 것은 한반도 유사시 어떻게 가급적 더 많은 미국의 군사력 증원을 확보하여 압도적 무력으로 초전에 전세를 결정짓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인계철선’(trap wire)이라는 개념으로 유사시 미군사력의 자동개입과 그 역할의 최대화를 지향해온 것으로, 한국 안보개념의 표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쟁 발생시 그것을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초전에 결정짓는 것을 가장 중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초전부터 외세의 적극적인 무력개입을 이끌어내는 전략이다. 그것은 남북한 어느 한쪽의 기대와는 달리 분쟁의 급속한 전면화와 국제화로 전쟁과 분단의 장기적 지속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안보개념이다.
또 그러한 개념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과거 한국군의 슬로건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군사적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초전박살’(初戰撲殺)의 개념이 있다. 평화체제 하에서도 이러한 안보전략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분쟁의 발생은 곧 전면적 전쟁이어야 하고 외세를 신속하게 자발적으로 초대하여 국제전을 만드는 것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부시행정부가 노골적으로 공식화한 또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 개념과 긴밀히 연관된다. 2001년 9월 30일에 작성된 「4개년 방위정책검토」(QDR 2001)는 “핵심지역에서의 침략과 무력의 전진억지(前進抑止)”(deter aggression and coercion forward in critical regions)라는 개념을 명시했다. 전진억지(deter forward)는 핵심지역들에서는 미리 미리 예방적 차원에서 미국의 군사전략적 기지와 군사력을 확보하고 군사 활동을 벌여서 미국에 대한 위협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며, 실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는 신속하게 대응하고 응징한다는 것이 그 개념의 골자다. 과거 미국의 전진억지 개념이 군사적 전진배치(forward deployment)라는 차원의 공간적 예방전략이었다면 2001년 4개년 방위정책검토가 말하는 전진억지는 시간적인 예방전략개념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이 개념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 이른바 불량국가가 실제 침략행위를 하기 전에 그 정권(체제)의 변경을 기도할 수 있다는 개념, 즉 같은 문서에서 제시되었던 “체제변경과 점령”이라는 전략이었다.
시간적 전진억지 개념은 매우 논리적인 결과지만 “예방적 행동”의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부시대통령은 2002년 6월 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른바 ‘부시 독트린’, 즉 예방적 행동과 선제공격을 미국 군사전략으로 공식화했다. “미국은 미국의 국가안보에 제기되는 충분한 위협(a sufficient threat)에 대처하기 위해 선제행동이라는 옵션을 오래전부터 유지해왔다. 위협이 클수록 비행동의 위험도 커진다. 따라서 적의 공격해올 시간과 장소에 대한 불확실성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예방적 행동(anticipatory action)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적의 그같은 적대적인 행위를 미연에 차단하거나 예방하기 위해서 미국은 필요하다면 선제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탈냉전 이후 유엔은 예방외교(preventive diplomacy)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21세기 초입에 미국은 그것을 완전히 도치(倒置)시켜, 예방전쟁의 개념으로 대치했다.
부시행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예방적 선제공격의 개념을 남북한 및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과 중국의 대한반도 전략개념에서 배제함을 원칙으로 하지 않으면, 초전박살, 즉 가급적 빨리 대량파괴 무력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적을 제압한다는 개념에 바탕한 분쟁의 본격 전쟁으로의 확전의 위험성을 최소화하기 힘들다. 특히 남북한의 안보전략이 분쟁 발생 유사시 동맹의 논리를 앞세우는 사고를 유지하고 그것을 안전하게 생각하는 한 그 위험성은 더욱 명확하다.
(2) 대안적 개념은 유사시에 대한 대응에서 시간적/외교적 공간 확보 여지를 최대화하는 것으로서 동맹의 논리보다 유엔 집단안전보장의 논리를 앞에 두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어떤 외국 군사력이 남북한 어느 한쪽의 ‘침략 징후’를 구실로 군사동맹에 의해 즉각 한반도에 무력 개입하는 근거로 예방적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군사독트린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그 가능성을 보다 제도적으로 배제하는 틀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우선 우리의 안보개념을 이른바 ‘유사시’에 신속하게 대응하되, 유사시의 평화적 해결의 시간적, 외교적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전략개념으로 바꿔나가는 일이 핵심이다. 남북 어느 한쪽이 또는 미국이 한반도의 ‘분쟁’또는 ‘유사시’라고 판단하는 사태에 대응함에 있어서, 남북한이 군사동맹 또는 우호관계에 있는 외세의 도움을 청하기까지에 남북한의 자주적인 평화적 분쟁해결의 여지가 가급적 충분히 확보될 수 있는 안보전략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전제로 유사시 한반도에 남북한과 동맹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국가들의 무력을 포함하여 국제사회의 개입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거쳐서만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맹 우선의 논리와 안보개념을 유엔안보리의 합의라는 보편적 집단안전보장의 논리, 더 포괄적인 국제적 동의에 의한 국제사회 개입 초대라는 개념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평화조약에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것이 남북한과 미중 어느 쪽에 의한 것이든 한반도에서 예방적 전쟁 개념을 분명히 추방하는 장치가 될 것이다.
또 남북한 및 미국의 기존의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들이 예방적 선제공격을 정당화하는 군사독트린에 영향받은 부분들은 없는지 깊은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한 경향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을 조중동맹에 대해서도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다 같이 요구하여 조약화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국제법에서 유엔의 논리보다 동맹의 논리가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해석일 수는 있으나 보편적 타당성은 없다. 한 때 국내에는 한미동맹은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이 아니므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수준으로 미군의 자동개입 조항으로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필자는 1989년의 논문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 역시 미군의 개입은 미국의 헌법적 절차에 따른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 한미동맹의 경우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의 관점에서 한미동맹의 법적 구속력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집단안보의 개념을 규정한 유엔의 원리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국제법적 규범이기에 앞서 사안별로 선택하기 나름인 정치전략적 판단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어차피 미군의 한반도 무력개입은 궁극적인 전쟁선포 권한을 가진 미 의회의 동의라는 정치적 선택의 과정을 거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안적 안보개념에 기초하여 유사시 한반도에 외세 무력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평화조약에 포함시키도록 우리 외교가 노력해야 할 사항은 다음 두 가지의 상호 연결된 개념들이다.
첫째, 유사시로 판단되는 상황을 포함한 한반도 분쟁발생의 어떤 경우에도 외부로부터의 무력 개입은 반드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거친 다국적 평화유지 또는 평화집행군의 형태로 제한하는 것을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참가국들이 확인하는 조항이 필요하다.
둘째, 분쟁 발생 초기에 초전박살의 전략적 사고와 깊이 연관된 것으로서의 예방적 선제공격을 정당화한 부시독트린을 명료하게 배제하는 효과를 갖는 조항을 개발하여 참가국들이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참가국들은 한반도의 분쟁 발생시 어떤 경우에도 예방적 차원의 군사행동을 배제하며 반드시 조속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한다”는 문안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3) 통일과정에서 외세 개입 통제 원칙으로서 한국 인민의 통일성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 분단의 고착화가 아닌 분단의 평화적 해소의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 같은 처지에 있던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 점에 관한 국제적 인정을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통독(統獨) 이전의 독일, 특히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동서독관계를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국가간 관계로 명문화할 경우, 독일분단이 고착화되는 역기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서독은 양국관계를 ‘특수한 공존관계’(co-existence type of special relationship)로 규정했다. 반면에 국력에 있어서나 국제적 지위에서는 상대적 약자였던 동독은 서독과 동등한 국가로서의 지위 인정을 요구했다. 1970년 봄 빌리 브란트 수상이 동독 수뇌와 정상회담을 갖고 또 이어 소련과 독소협정(獨蘇協定)을 체결하면서 서독은 동독이 서독과 마찬가지로 유엔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는 것에 동의하기에 이른다.
동서독 기본관계의 질적인 진전은 1971년 9월, 냉전 이래 독일문제의 핵심이었던 서베를린의 정치외교적 위상에 대해 미소영불 네 전승국들이 합의한 「베를린에 관한 4국 협정」(Quadripartite Agreement on Berlin)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냉전의 발전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독일 문제에 대한 국제적 평화협정이 맺어진 것을 의미했다. 이 협정에는 동서독이 빠져있으나 사실은 동서독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베를린문제의 독일화를 위한 주변국들의 협정을 이끌어낸 것으로서 독일외교의 업적이기도 했다. 이후 독일의 운명은 전승 4국이 좌우하는 4국 체제에서 동서독이 독일문제를 4국과 함께 공동관리하는 6국 체제(six-power regime)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로서 독일문제의 부분적인 독일화(partial Germanization)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1972년에 양독간에 기본조약(Basic Treaty)이 체결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기초 위에서였다.
동서독은 이 기본조약에서도 동서독의 국제적 지위에 대해 합의를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동독은 국제법상 완전한 국가로 간주되기를 요구한 반면, 서독은 “두 국가”라는 현실과 “한 민족”이라는 원칙(two German states, one nation)이 동시에 반영되어야 하므로, 양독관계는 “두 주권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특수관계”로 남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 협정에서 결국 양독은 결론을 유보했으며, 그래서 ‘대사’ 교환이 아닌 ‘대표’ 교환으로 합의를 보았다.
남북한은 동독의 경우와는 달리 궁극적인 한반도 통일이라는 목표와 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확보한다는 목표에 명분상 다 같이 동의하는 만큼, 한편으로 동등한 주권국가로서 유엔에 동시가입하는데 합의하면서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라는 전문(前文)을 서로 합의해 삽입할 수 있었다. 동서독관계에서 남북한은 서독의 입장을 다 같이 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73년 1월에 서명된 베트남의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 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은 제1장의 제목이 “베트남인민의 기본적인 민족적 권리”(The Vietnamese People's Fundamental National Rights)이다. 이 제1장은 제1조 하나 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미국과 다른 모든 나라들은 1954년의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협정」(1954 Geneva Agreements on Viet-Nam)에서 인정한 베트남의 독립, 주권, 통일성, 그리고 영토적 존엄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또 전문에서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민족적 권리와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自決權: South Vietnamese people's right to self-determinaton)에 대한 존중의 바탕 위에서 베트남에서 전쟁을 종결하고 평화를 회복할 목적으로,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에서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파리평화협정이 말하는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민족적 권리’는 베트남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 살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은 북베트남과 구분된 독립된 실체로서의 남베트남의 운명이 북베트남과 미국을 포함한 다른 세력들에 의하여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남베트남의 주체로는 평화협정 당사자로서 사이공정권인 베트남공화국 뿐 아니라 남베트남 내부의 공산주의 혁명세력인 민족해방전선이 포함된 남베트남 잠정혁명정부가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주도하는 남베트남 잠정혁명정부는 북베트남의 무력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을 장악하고 이어 공식적인 통일베트남을 선포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평화협정이 남베트남의 자결권과 함께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민족적 권리’라는 개념을 앞세웠다는 점이다. 협상과정에서 북베트남 정부의 입장이 관철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미국이 실질적으로 이미 패배한 전쟁에서 명예로운 후퇴를 정당화하기 위해 북베트남이 요구하는 민족자결권이라는 개념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동기가 어떻든 그 원칙을 인정하는 것은 당시 국제사회의 거의 보편적인 요구였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도 그 원칙에 국제사회는 동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서독 중에서 서독만이 주장했던 “특수관계로서의 동서독관계”를 남북한 은 공동으로 “특수관계로서의 남북한관계”라는 개념에 합의한 것과 같이, 한국 인민의 기본적인 민족적 권리(Korean people's fundamental national rights)의 개념은 남북한이 다 같이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이다. 또한 해방 후 남북한 정부 수립 이전에 유엔은 한반도를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 보고 통일된 정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인정한 바 있다. 그 연장선에서 한반도 평화조약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궁극적으로 통일된 단위로 나아가는 것의 자연스러운 정당성을 확인하는 조항을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요컨대 남북한이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의 “특수관계” 조항과 함께 “한국(코리아) 인민의 민족적 권리와 주권 및 통일성”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 예시(豫示)로서 다음과 같은 문안이 가능하다고 본다. “참가국들은 남북한이 다 같이 유엔 회원국으로서 동등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지며, 동시에 남북한 관계가 전쟁과 오랜 분단 상태로 지연되어온 한국(코리아) 인민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의 특수한 관계임을 확인하면서 한국 인민의 통일성과 민족적 권리를 존중한다.”
다만 “민족적 권리”라는 표현은 곧 남북한이 한민족으로서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되어 동맹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인식을 특히 미국이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또한 베트남전쟁의 경험을 떠올리며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 있고, 중국은 그것이 남한 주도의 북한 흡수를 정당화하는 것이 될 것으로 여기고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의 개념을 어떤 형태로든지 확인받는 것은 20세기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21세기 한반도에서 외세 무력 개입과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재분할 가능성을 줄이는 최소한의 방어적인 개념적 도구의 하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X. 고농축우라늄 핵프로그램 문제
2.13합의는 초기단계 이후의 「다음 단계」에서 북한이 모든 현존하는 핵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를 할 것을 규정했다. 여기에는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의 방북을 계기로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폐기하는 명분으로 삼은 고농축우라늄(Highly Enriched Uranium: HEU)을 이용한 핵프로그램 문제도 포함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북미간의 갈등이 재연될 소지가 크다. 미국은 2.13합의 이후인 2007년 3월 6일에도 북한에게 고농축우라늄 생산노력을 완전히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6자회담 미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들이 무엇을 해 왔는지, 왜 그랬는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 노력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7년 1월에 작성된 미 의회조사국의 북한 핵문제 관련 보고서는 북한이 2005년부터 매년 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한 두 개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2002년 12월의 CIA 정보분석을 아무런 단서 없이 재인용하고 있다.
고농축우라늄 문제는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폐기한 명분으로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주제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미국이 가진 정보의 불확실성과 왜곡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국내 언론과 학계는 다 같이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게을리 하였다. 미국의 공식적 입장을 기정사실로 전제하면서 북한 핵문제를 논의해왔다. 필자는 2004년 9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한 북한 핵프로그램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정보평가와 그에 바탕한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북한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 정보 평가의 불충분성과 왜곡 가능성을 분석하기 위해 필자는 무엇보다도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의 방북과 뒤이은 미국의 제네바합의 파기 선언과 같은 시기인 2002년 11월 CIA가 의회에 배포한 정보보고서의 주장들의 허점을 지적하였다. 그 보고서에서 CIA는 북한이 우라늄농축 시설을 갖추어 풀가동하게 되면 매년 두 개 이상의 핵무기를 만드는데 충분한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미 의회조사국이 2004년 3월에 발간한 한 보고서가 2002년 11월 CIA 보고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결국 그 보고서가 정확성과 객관성을 결여한 추정(guessing)에 근거한 신뢰성 없는 것임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음을 지적했었다. 또한 북한이 확보하거나 확보하려 시도한 것으로 미국정부가 주장한 원심분리기와 고강도 알미늄 튜브들이 실제 핵무기급 시설이 되려면 수천기가 되어야 하지만, 그에 관한 증거를 미국이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재료들은 핵무기와는 무관한 다른 용도, 예컨대 로켓 개발과 관련한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아울러 이라크전쟁 및 이란에 관련된 부시행정부 정보평가들에서 이미 입증된 정치적 왜곡의 사례들을 지적하고, 그러한 정보과장과 정보의 정치적 이용이 북한 고농축우라늄 문제에도 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그 다음해인 2005년 초 셀리그 해리슨이 『포린 어페어즈』에 실린 논문을 통해 기본적으로 같은 취지의 의문을 제기했다. 해리슨의 주장의 포인트 역시 2002년 11월 CIA 보고서가 제시한 북한 우라늄농축 관련 정보평가가 신뢰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리슨은 미국 해전대학(U.S. Naval War College)의 전략연구학과의 과장을 맡고 있는 조나단 폴락(Jonathan Pollack)이 그 CIA 보고서의 부정확성 자체야말로 “북한은 국제사회에 신고할 가동 중인 농축시설(operational enrichment facility)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꼴이라고 말한 사실을 소개했다.
이에 기초해 해리슨은 부시행정부가 북한의 우라늄프로그램에 관한 정보의 제한성을 알면서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즉 제네바합의를 파기하려는 목적을 위해, 그 불확실한 정보를 확실한 증거인 양 내세워 악용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미국정부는 핵무기급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과 저농축 우라늄 시설 사이의 구분을 하지 않고 북한의 우라늄 문제를 과장했다는 것이 해리슨 주장의 요점이었다. 무기급 우라늄시설은 1994년 북미합의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 된다. 무기생산과 무관한 저농축 우라늄은 1994년 합의에 의해 기술적으로는 금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서는 허용하고 있는 수준의 핵활동이다. 따라서 그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요컨대 평화적 목적의 우라늄농축활동과 무기급 우라늄프로그램의 구분이 중요하다는 것이 해리슨의 주장이었다.
해리슨은 핵과학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리처드 가윈(Richard Garwin)의 전문적 평가를 인용했다. 가윈에 따르면, 우라늄농축을 이용해 초보적인 수준의 ‘총 수준’(gun-type)의 핵무기를 만들어내려 할 경우에도 60킬로그램의 핵분열물질(fissile material)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정도를 만들어내려면 최소한 1,300개의 고능력 원심분리기를 3년간 풀타임으로 가동해야 한다. 더욱이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전기를 전압의 굴곡이나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또한 많은 원심분리기 집단(multi-centrifuge cascade)을 동시에 가동하기 위해서는 MIG-21 제트엔진보다 속도가 두 배인 강력한 모터를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은 러시아에서 들여온 MIG 용 엔진도 생산할 능력이 없으며, 매우 제한되고 지극히 불안정한 저급한 수준의 전기 밖에는 공급할 능력이 없다.
결국 북한은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건설하거나 가동할 수 있는 능력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해리슨의 주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는 과정은 불가피하게 원심분리기 회전자(centrifuge rotors)의 부식을 초래하기 때문에 최소한인 1,300개보다 더 많은 대체용 원심분리기들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결국 수천 개의 원심분리기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해리슨은 또 1993-1999년 기간에 미 에너지부 장관 선임고문을 역임하였고 1994년 북미합의에 따른 사찰을 위해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바 있는 로버트 알바레즈(Robert Alvarez)의 다음과 같은 평가를 인용했는데 이 역시 주목할 만하였다: “나는 (북한이 가진) 플루토늄 프로그램이 많은 측면에서 갖고 있는 원시적인 수준에 놀랐다. 나는 그런 북한이 더 복잡한 대규모의 우라늄 프로그램을 다룰 능력이 있을까 회의적이다. 수천 개의 원심분리기를 성공적으로 만들고 가동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외부 지원이 필요하다. 가장 정밀한 기계적 도구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환상적인 기계들을 사들일 수 있는 경제력을 이란은 갖고 있다. 북한은 그런 돈이 없다. 리비아가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고서도 그 일을 결국 해내지 못한 것을 기억하라.”
로버트 갈루치와 미첼 라이스가 『포린 어페어즈』의 바로 다음 호에서 셀리그 해리슨의 글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갈루치 등의 초점은 2002년 여름에 CIA는 북한이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 생산에 필요한 장비들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대해 신뢰할만한 정보를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2004년의 논문에서 이미, 2002년 6월 작성된 CIA의 북한 우라늄 프로그램 관련 보고서를 직접 접한 관계자들을 취재하여 쓴 세이머 허시 기자의 글을 소개했었다. 이 글에서 허시는 그 정보 보고서가 북한 핵무기개발 프로그램들의 실제에 대해 여러 가지 모순되고 모호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북한이 몇 개의 핵탄두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북한이 실제 핵탄두를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CIA, 미 국방부, 미 국무부, 그리고 미 에너지부(핵무기 관리 관여)가 저마다 제각각의 서로 모순되는 평가들을 그 보고서는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03년 미국의 한 주요 일간지가 핵프로그램들을 포함한 북한에 대한 미 정보기관의 분석은 “어림짐작”(guessing) 수준이라고 한 도널드 그레그의 말을 보도한 것은 주목할 만했다. 북한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CIA정보평가의 허점들을 지적하는 가운데 2004년 3월의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가 그레그의 발언을 인용한 것 역시 미국의 전문기관들 내부에서 그 문제에 대한 부시행정부의 판단에 대해 퍼져있던 광범한 불신의 실재를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해리슨의 논문에 대한 반론으로 나름의 의미를 가진 것은 해리슨의 글에 언급된 리처드 가윈이 해리슨의 글에 대해 쓴 코멘트였다. 이 글에서 가윈은 해리슨이 인용한 자신의 말, 즉 “초보적인 (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하나를 만드는데 필요한 60킬로그램의 핵분열 물질을 만들려면 1,300기의 고능력 원심분리기를 3년간 풀타임으로 가동해야 한다”는 표현은 여전히 정확하다고 말했다. 다만 고농축우라늄 20킬로그램만을 이용하면 되는 내파형(內破形: implosion-type) 핵무기를 생산하는 데는 1,300기의 원심분리기를 가동할 경우 14개월만 걸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해리슨의 주장과는 달리 평화적 이용인 발전용 원자로에 쓰기 위해 필요한 저농축 우라늄(low-enriched uranium: LEU)을 생산하는 것이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것에 비해 더 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초보적인 수준의 무기급 우라늄 연료를 생산하는 데는 5천기 미만으로도 1년간 가동하면 되지만, 발전용 원자로 1기를 가동하는데 필요한 저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려면 5만기의 원심분리기를 1년 동안 가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원심분리기를 가동할 때, 1,300기의 원심분리기를 하나로 연결해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전기 소스에서 공급하여 가동하는 것이 아니고, 원심분리기마다 독립된 전기 소스를 제공하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단한 전력공급체계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말을 덧붙였다.
해리슨은 재반론에서 가윈이 지적한 우라늄농축의 기술적 과정에 대한 부분은 새롭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천기의 원심분리기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이러한 대량의 원심분리기를 북한이 확보했다는 증거를 미국정부는 한 번도 제시한 일이 없었다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이 군사용 고농축인지 발전용을 의도하는 저농축인지의 구분이 중요하다는 점도 다시 지적했다.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위해서는 전기나 원심분리기들이 대량 필요한 것 이외에도, 원심분리기 제작과정에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금속학적, 화학적 기술들이 필요하다. 또 가동 과정에서 원심분리기들은 쉽게 부식되어 못쓰게 된다. 따라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수천기의 원심분리기가 소요된다. 북한이 그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가 이 문제를 강조해온 것은 클린턴행정부의 정책, 특히 1994년 북미합의를 파기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앞선 것 이외의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이 해리슨이 재확인하는 요점이었다.
리처드 가윈은 해리슨과는 기술적 문제에 관해 이견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해리슨의 결론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군사용으로 단정하고 이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플루토눔을 이용한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대책을 우선하는 ‘플로토늄 우선 정책’(‘Plutonium First’ Policy)을 지지했다.
해리슨은 2005년의 논문에서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이 군사용이라는 새로운 신뢰할만한 정보가 확보되지 않는 한 당면한 위협인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프로그램에 집중할 것을 제안했었다. 그러면서도 해리슨은 우라늄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북한이 이 부분에 대한 의혹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도록 충분한 사찰을 허용하지 않는 한, 미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최대의 인센티브인 경제 및 외교관계의 정상화는 유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럼 문제는 향후 2.13합의의 이행, 특히 모든 현존하는 핵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를 규정한 ‘다음 단계’의 행동들을 이행함에 있어서, 그리고 이 문제를 평화조약에서 다룸에 있어서 어떤 해법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하면서도, 해리슨이 인용한 북한의 한 고위 장성의 말처럼 “세계가 북한의 우라늄고농축 능력에 대해 계속 궁금해 하도록 하는 것이 북한의 억지력을 강화시킨다”는 인식에 기초해 북한이 HEU 문제에 대한 불투명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것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정치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다.
해리슨이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해결책은 북한이 진정 무기용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저급 수준의 농축시설을 보유한 것이라면, 북한이 이를 평화적 핵이용 프로그램으로 신고할 수 있는 적절한 명분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프로그램을 북한이 계속 유지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남북간, 북미간 대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가장 유의할 점은 부시행정부가 취한 전략, 즉 불확실한 정보를 절대적 확신을 갖고 북한에게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에 관한 일방적인 ‘고백’을 강요한 결과, 정작 진정한 위협인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개발로 북한을 몰아간 전략의 어리석은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는 일이다.
해리슨은 플루토늄 우선 전략을 제안하면서도 동시에 우라늄문제에 대한 모든 의혹을 해소하는 사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 외교 관계정상화를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주장은 의혹해석과 미국의 대북한 인센티브 제공을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경직된 사고를 드러낸 것이었다. 필자는 외교 및 경제관계 정상화의 약속과 그 실질적인 진전과 그러한 사찰 및 무기급 프로그램들의 해체 사이에 더 포괄적이고 유연한 연계방법을 개발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XI. 평화조약체제와 한미동맹/주한미군 문제
여기까지 논의한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한반도 평화조약의 틀은 평화체제 구축 이후 한미동맹과 조중상호원조조약이라는 군사동맹체제들에 어떤 변화를 상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것은 평화체제 구축 이후 한국의 장기적 평화의 비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있고, 이 선택은 한국 사회에서 심오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의 요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평화협정의 네 당사자들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동의하고 동참할 수 있는 남북한과 미중 외세의 군사동맹에 대한 인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평화체제 구축과 그를 위한 평화조약은 군사동맹의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인식전환과 새로운 자리매김을 요구한다.
이 점을 전제로 세 가지의 선택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선택은 보수적 선택으로서, 특히 2007년 초에 들어 한미간에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됨에 따라 새로운 차원으로 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관념이다. 그것은 한미동맹을 FTA를 바탕으로 한 더욱 포괄적인 동맹으로 강화시켜야 하고, 그것은 곧 기존 군사적 동맹의 심화를 포함한다는 의견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한미FTA체결로 인한 포괄동맹이란 한미 경제동맹의 강화의미 뿐 아니라 기존의 한미군사동맹의 강화를 응당 포함하는 것이 된다. 동북아에서 한반도의 미국의 군사기지로서의 성격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 논리이다.
이 의견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이 불가피하다. 첫째, 이러한 의견은 우리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평화조약을 논의하는 것과 양립하기 어렵다. 둘째,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나아가 중국과도 자유무역협정을 추구하는 것이 미래의 큰 흐름으로 볼 때, 한미 FTA로 우리가 추구할 포괄적 동맹이 반드시 군사동맹 강화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할 당위성이나 필연성은 없다.
한편, 평화체제 이후 한미동맹의 위상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비동맹 평화국가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동맹의 정치 자체에 대한 비판이 그 바탕에 있으며, 이 관점은 한미간 자유무역협정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적 인식을 담게 된다. 이것을 장기적인 한국의 미래 비전이라고 수긍한다 하더라도 지금 당면한 평화체제 구축의 전제로 삼기에는 대외협상 이전에 국내정치사회적 합의달성의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 두 관점 사이의 중간에 동맹과 다자협력에 기초한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추구라는 개념을 위치시킬 수 있다. 이 관점은 동맹의 정치를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부정하지 않되, 군사관계 중심의 동맹의 성격을 가급적 비군사화해 나감으로써 공동안보적인 안보개념과 외교의 공간을 넓혀나가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이것을 한미동맹 유연화라는 개념으로 정리해 왔다.
FTA를 계기로 한 한미동맹 포괄동맹론은 사실상 기존 패러다임의 강화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한미동맹 유연화의 관점은 한미동맹의 내면적 성격 이동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동맹 패러다임의 진정한 전환을 추구하는 출발점이다. 한국내 정치적/정서적 현실에 비추어, 중단기적으로는 동맹의 정치와 다자주의적인 공동안보의 이상을 동시에 포용하는 가운데,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통한 한미간 국경의 퇴색을 군사동맹의 강화가 아닌 좀 더 유연화된 동맹의 양식으로 무리 없이 전환하는 정서적 기초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북한 역시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일정한 기간 동안은 미국에 의한 위협이 비대칭적으로 월등하다는 관념을 떨쳐내기는 어렵다. 이런 상태에서 비교적 크게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러시아와는 달리 여전히 군사동맹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과의 상호원조조약을 체제안전을 위한 최후의 방어막으로 간주하고 그 해체를 쉽게 결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화조약체제로의 전환은 일정한 시간 안에 남과 북이 국가연합의 통합적 환경으로 나아갈 조건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므로, 국내의 정서적 여건을 고려한 가운데 남북이 협의를 거쳐서 한미동맹과 조중동맹(朝中同盟)을 군사동맹에서 우호동맹으로 전환시켜나가는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합의를 추구해나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한반도를 동맹의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다자주의적 공동안보를 추구하는 평화의 기지로 발전시키는 문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국가론의 비전을 포함하는 다양한 근본적인 비전들을 장기적으로 검토주제로 포용하면서, 동시에 거시적으로 보면 중단기적인 비전이라고 할 동맹 유연화의 논리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사력의 전략적 유연성 등 한반도의 어떤 일부라도 외세의 군사기지 또는 미사일방어기지로서 기능하는 상황을 해소시켜 나가는 비전과 작업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XII.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질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한반도의 영토적 분단에 근거한 복수의 정치적 실체들의 존재를 전제한 상대적 개념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으로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 복수의 한반도의 국가들과 주변국가들이 개입한 전쟁과 정전협정 상태라는 비정상적인 긴장의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평화체제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두 가지 요소를 갖출 때 평화체제라고 생각된다. 첫 번째 요소는 한반도의 국가들 모두가 상호간에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한 가운데 서로 독립성과 주권을 존중하는 상태다. 둘째 요소는 한반도의 국가들, 그리고 과거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였던 나라들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이 한반도의 분쟁적 이슈들을 외교적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자간 협의장치를 운영하는 상태이다.
여기서 첫 번째 요소의 현재 관건이 되고 있는 북미간 적대관계의 해소와 실질적인 관계정상화를 위해서는 북한 핵문제의 근본적이고 평화적인 해결과 대북한 안전보장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이처럼 핵문제 해결과 대북한 안전보장 및 한반도에서 남북간 북미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의 장치는 위에서 두 번째 요소로 언급한 남북간에 그리고 남북한과 함께 깊은 군사적 영향력을 갖고 실질적으로 한반도에 개입해있는 주변국가들 사이에 제도화된 다자적인 협의장치와 깊은 관련을 갖게 된다.
한반도 평화조약은 그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에 근거한 한반도 평화체제 성립 이후의 동북아질서는 어떻게 전망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한반도의 미래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대만과 함께 소분단체제의 다른 하나를 이루는 한반도에서 평화체제가 성립되고 동북아국가들이 한반도의 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 노력에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동북아질서에는 큰 틀에서 ‘대분단체제’적 요소가 엄존하고 있다. 세계화와 중국, 러시아의 체제변화와 맞물려 증폭되고 있는 경제적 상호의존과 초국경적인 문화적 교류의 확장에 바탕해 동아시아 공동체의 논의가 무성해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동해안선을 따라 그어진 동아시아의 대분단체제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동아시아질서는 그러한 대분단체제가 한편으로 지속되는 바탕 위에서 미중관계가 지정학적인 근본적인 긴장의 요소들을 안은 채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성립될 경우에도 그것과 대분단질서의 동아시아적 공존은 불안정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미중 두 강대국을 포함한 동북아국가들이 폭력적 갈등을 피하면서 양국 관계를 대체로 평화적으로 관리해나가는 다자적 협의기구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동아시아 다자안보협의장치는 양가적인 의미와 역할을 내포할 수 있다. 다자협의체는 한편으로 대만과 한반도에서 그리고 중일간 러일간 관계에서 동북아국가들간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분쟁의 폭력화를 막는 수준에 그칠 뿐 군비경쟁과 같은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인권 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로 실질적인 논의를 회피하면서 내면으로는 대분단체제의 구도에 따라 각자 그리고 상호대립적인 동맹의 논리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한반도의 남북간의 평화체제는 분단상황의 고착화 경향과 공존할 수 있다. 평화체제에도 불구하고 분단은 지속되는 상황은 동북아의 다자간 협의장치를 느슨한 형태의 동북아 강대국회의체(Great Power Concert) 같은 성격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남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6자 중에서 남북한은 나머지 주변 4강의 지정학적 경쟁의 한 가운데에서 외교적 주체가 아닌 객체의 위치로 남을 수 있다. 이것을 필자만의 지나친 기우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들 중에 이런 형태의 다자주의가 동북아에서 가장 실현가능한 지역 공동체의 양식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아시아 공동체 논의에서 명성이 있는 아미타브 아카랴는 동남아시아의 경우에는 모든 국가들간의 느슨한 공동체로서 ASEAN의 역할을 이상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동북아에서는 한반도의 국가들은 “약소국이므로 정의상 배제되는” 그러한 강대국협의체가 지역 안정과 평화에 긍정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따라 한미동맹의 유연화 내지는 해소의 결과로 미국에게는 미일동맹이 더욱 중요시될 수 있다. 그와 함께 지난 수년 사이 특히 활성화되고 있는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SCO)가 시사 하듯이 중국-러시아간의 세력연합이 형성될 조짐을 보여왔다. 그 결과 동북아 4강 사이의 “경쟁하며 협상하는” 강대국 권력정치가 동아시아질서의 큰 틀로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두 가지 차원에서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에 유해하다. 첫째, 한반도 평화체제 자체의 불안정의 내재적 환경이 된다. 둘째, 한반도의 통일과정에 강대국들의 권력정치적 개입의 여지가 높아진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이후의 한국의 근본 과제는 그러한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하여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노력이 될 것이다. 그 노력은 두 가지 차원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 한반도 평화체제 안에서 남북간 경제적 문화적 교류협력을 심화하는 가운데 남북한의 평화적인 정치외교적 통합을 향해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노력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유의할 점은 일본을 포함한 주변 강국들의 지속되는 군비증강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한국이 군비강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논리와 그 정치적 이용을 경계하고 극복하는 일이다. 일본의 무장 강화에 그것을 추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북한과의 정치외교적 통합의 진전을 희생시킬 수 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일본 등의 무장 강화에 대한 진정한 대응이 될 수 없다. 한반도가 적어도 대외정책에서 하나의 외교안보적 단위가 되도록 내부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한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대한 어떤 근본적 대책도 되지 못한다. 대분단의 구도 속에서 일본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다층적인 개입에 의하여 분단된 한반도는 언제든 그 평화적 공존마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남북한이 하나의 정치외교적 공동체로 나아갈 때까지 국가 장기전략의 제일의 원칙은 군사적 신뢰구축과 그 심화에 바탕한 남북한간 평화적 통합의 진전에 두어져야 한다.
둘째, 동북아의 다자적인 안보협의 장치가 강대국들간의 ‘공존적 세력경쟁’내지는 ‘공존적 권력정치’의 구조 속에서 군비증강에 몰두하는 표피적인 협의장치로서 강대국협의체로 전락하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군비경쟁의 완화를 바탕으로 공동안보의 규범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한국이 그리고 남북한이 최대한 공동 노력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한반도가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지적 창의의 발전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한 가지 생각을 부연하고 싶다. 많은 ‘전문가’들은 평화협정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거나 너무 많은 역할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너무 이상적인 평화협정은 현실적이지 못하고 실현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시행정부가 북한에게 외교정상화를 포함한 안전보장의 어떤 대가도 제공하기 전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ocable Dismantlement)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강압외교는 현실적인 것이었는가? 오히려 북한의 본격적인 핵무기개발을 초래한 실패한 고도의 이상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이미 핵무기 보유선언과 일정한 핵실험을 마친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를 실행하도록, 그것도 한반도에 어떤 재앙도 초래하지 않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끌어낸다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상 자체가 심오하게 이상적인 비전이 아닌가?
어차피 우리는 매우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면서 우리와 미국 등 주변국가들의 발상의 전환은 고민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안이하기 이를 데 없으며 비현실적인 미망에 다름 아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