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을 몰아내고 한반도의 주인이 된 그날....676년11월 기벌포 해전
아들아, 지난 여행길에 들렀던 장항 스카이워크를 떠올려 보거라.
그곳에서 봤던 넓은 갯벌과 서해 바다의 정경도.
장항 스카이워크의 또다른 이름은 기벌포 해전 전망대라 했는데 기억하느냐?
장항스카이워크 (기벌포 해전 전망대)
앞서 두번의 기벌포 전투를 얘기했는데..아마도 국제적이고, 세계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전투라면, 두번째 말한 백강전투겠지만..
우리의 역사만, 우리 민족사에서의 측면에서만 놓고 본다면 기벌포 전투 중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전투는 아마도 676년 11월의 기벌포 해전이 아닐까 생각해.
기벌포에서 16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에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대규모의 전투가 무려 세차례가 있었던 것은 아빠가 여러번 말했듯이
금강의 하구인 기벌포가 바로 백제의 왕도였던 사비로 향하는 관문으로서 가지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란다.
아빠는 그 16년동안 벌어진 세번의 기벌포 전투를 시간 순서대로 풀어주고 있으니
앞에서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서 따라오면 될 것이다.
먼저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다시 한번 신라와 당, 나당동맹(羅唐同盟)에 대한이야기를 하고 가야할 것 같구나.
신라와 당이 돌궐-고구려-백제-왜의 동맹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을 말한다.
나당동맹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3년 백강전투를 통해 백제의 부흥을 저지했다.
668년엔 평양을 점령하며 고구려까지 멸망시켰지.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
나당동맹의 핵심은 신라와 당의 영토분할 약속인데..대동강을 경계로 이남은 신라가,
이북은 당이 가지기로 했어.
그런데, 문제는 당이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야.
당은 신라도 이용만 해먹고, 기미주로 삼아서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여러번 드러냈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엔 그 땅을 신라에 넘기지 않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당군을
주둔시켜 그들이 관할하였어.
신라의 문무왕을 겁박해서, 멸망한 백제 왕족인 부여융과 당의 신하 자격인 그들을
웅진의 취리산에서 회맹을 맺게 했는데..이는 신라에 대한 모독이었지.
아예 대놓고, 백제 땅을 당이 차지할테니 잔말말고 받아들여라 이 말을 하는 것이니까.
문무왕은 당장 전쟁을 벌이고 싶었지만,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그 치욕을 감내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후 당은 이젠 고구려 왕도인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또 신라와의 약속을 대놓고 무시했어.
이젠 도를 더해서 신라를 계림도독부라 칭하고 왕이 아니라 당의 신하인 계림도독으로
임명했으니.
신라는 당의 야욕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내부 결속을 다지고 힘을 길르며 때를 기다렸어.
그리고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고..그 때를 기다리며 명분을 쌓았지.
백제인들을 포섭하고, 은밀히 당과 전쟁을 벌이는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조용히
전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도 신라의 이런 움직임을 모르진 않았단다.
당 고종이 노하자 신라는 일단 숙이고 김양도와 김흠순을 사신으로 보내 해명하고,
시간을 벌면서 그들의 의도를 살피는데..당은 이들 사신을 억류하여 김양도를 죽이고
김흠순만을 신라에 돌려 보냈지.
신라는 김흠순을 통해 당의 의도를 확인했다.
아들아, 670년 당의 대총관 설인귀가 서신을 보내어 황제에 대한 불충을 꾸짖고 항복을
요구했다. 따르지 않으면 신라의 사직을 끊겠다고..막말까지 서슴치 않았지.
이 편지를 받은 신라는 강수를 시켜 답설인귀서라는 서신을 보내 신라의 입장을 밝혔다.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먹지 못했는데, 당나라군은 양식이 남아 돌았다.
신라는 계절마다 장기 주둔한 당나라 군사의 옷을 만들어주었다.
1만명의 당나라군이 지난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먹고 입었다.
당나라군의 가죽(皮)과 뼈(骨)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피(血)와 살(肉)은
신라가 길러준 것이다."
답설인귀서에서 강수는 당이 신라에 한 약속을 상기시키며, 신라가 동맹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당의 신의없는 태도를 지적하고
부당함을 강조하였다.
이것은..곧, 신라가 이젠 당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신라의 몫은 분명히 받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고, 당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말이기도 했다.
671년 6월 사비 인근 석성에서 장군 죽지(竹旨)가 당군을 선제공격해서 3천5백을
참하며 대승을 거두고 압록강 건너 고연무가 이끄는 고구려 부흥군과 힘을 합쳐 당군을
공격하며 나당전쟁의 서막을 열었단다.
문무대왕의 화전양면술
아들아,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무려 7년을 끌었단다.
신라는 당이라는 당대 초강대국을 상대로 해서 때로는 강하게 부딪히고, 때로는 숙이고
강약조절을 하면서 화전양면술(和戰兩面術)로 맞서 잘싸웠지.
역시 오랫동안 치열한 전투로 단련되어서인지..신라는 확실히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것 같아.
나당전쟁 기간동안 전선은 대체로 현재의 경기 북부지역인 연천 일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을 보면, 신라는 상당히 효과적으로
싸워나갔음을 알 수 있다.
매소성 승첩의 주역, 신라 장창당
그리고 675년 9월, 매소성(買肖城,경기 연천 대전리산성)에서 이근행이 이끄는
당의 기병 20만과 신라군 3만이 격전을 벌여 신라가 기적의 대승을 거두었다.
매소성에 주둔한 당군을 신라군이 공격했고, 전투 끝에 승리했는데 당군에게서
빼앗은 말만 3만3백8십필에 병장기도 수없이 많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승리였다고
삼국사기의 기록이 말하고 .
이 매소성 전투는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쥐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
그리고..나당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최후의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지.
이젠 네게도 익숙할 금강 하구, 기벌포가 그 최후의 전투..운명을 가를 전장(戰場)으로
또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아들아, 그런데 왜 또..기벌포일까.
공격해온 당의 입장에서 보면 매소성 전투에서 보듯이..신라의 강력한 저항으로
당이 육로를 통해 임진강과 한탄강 방어선을 뚫기 힘들다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어딘가 약해 보이는 곳을 우회해서 기습 공격을 펼쳐 그 돌파구를
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게 당이 주목한 곳이 기벌포란다.
게다가 기벌포를 공략하면..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사비와 웅진을 공략할 수 있고,
그렇게 신라의 후방을 흔들어, 큰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
당은 설인귀(薛仁貴)가 직접 수군 대함대를 이끌고 기벌포로 향했어.
하지만, 그런 당의 의도를 이미 신라도 읽었던 것 같아.
대비를 하고 있었지.
사찬 김시득(金施得)이 이끄는 신라 수군함대가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어.
676년 11월의 일이었다.
기벌포 해전도
김시득이 이끄는 신라 수군은 압도적인 규모의 당 수군과 기벌포에서 맞붙어
싸우는데..첫 싸움에선 졌지만, 굴하지 않고 무려 22회에 달하는 해전을 벌인 끝에
결국은 당군 4천여명을 참하고 승리를 거두었지.
아들아, 676년 11월 기벌포 해전의 결과로 신라는 서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당군의 전쟁의지를 꺾었단다.
당이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기면서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아들아, 신라가 당이란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대동강 이남의
지역만 아우르는 불완전한 통일을 이룬 것에 대해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가 존재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보는 것처럼 민족사관의 관점에서 신랄한 비판을 가할 수 있고,
현실론적인 관점에서 신라의 입장으로 변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들아, 하지만 신라가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에서 당을 축출하고,
최초로 한민족이 한 나라의 틀 속에서 통합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어쨌든..
사실이고,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하고 평가할만 하지 않느냐.
만약에..기벌포 해전에서 신라가 패하고, 나당전쟁에서 패했다면..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말이다. 우리는 중국사람이 되어 중국말하고 중국 역사를 배우고..한민족인 것도
잊고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676년 11월 기벌포 해전의 결과로 초강대국 당의 야욕을 저지함으로써
한민족이 그 정체성을 지키고 생존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들아, 우린 이런 이유로 기벌포 해전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새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잊혀진 명장, 신라 수군 김시득 제독도 기억하거라.
어쨌든..676년 11월, 기벌포 해전에서의 승리..
그날은 한민족의 운명을 우리 힘으로 결정짓고, 정체성을 지킨 의미있는 날이었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