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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가톨릭 교회(Ⅲ)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
교황 요한 23세(1958-1963) : 비오 12세는 말년에 교회의 내외적 행정에 있어서 비타협적 고자세의 입장을 고수하고 방어적 반동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보수적이었던 교황의 서거 이후에 새 교황을 선출할 추기경단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일부에서는 전임 교황의 정책이 지속되기를 원하였고, 일부에서는 과거의 교회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모습의 교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3일 동안 진통 속에서 치른 선거는 열두 번째의 투표에서 양측이 절충하여 ‘과도기 교황’으로 베네치아의 대주교이며 타협적인 태도와 온화한 성품을 지닌 노령(76세)의 추기경인 안젤로 쥬세뻬 론깔리를 선출하였다(1958년 10월 28일).
그러나 이 때의 추기경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과도기의 이 교황이 짧은 재위 기간(4년 7개월) 동안에 트렌트 공의회의 정신 속에서 생활하는 구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현대 가톨릭 교회사에 있어서 새 시대의 문을 연 ‘혁명 교황’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론깔리는 14세 때에 베르가모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4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로마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론깔리 신부는 1년 후 베르가모 교구의 주교 비서로 지내면서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와 영신 지도 신부로서 신학생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그는 교구장의 오른팔로서 교회 신문을 발간하였고 가톨릭 액션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폭넓은 사목 경험을 쌓았다.
론깔리 신부는 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에는 육군 병원의 원목 신부와 군종 사제로 활동하였다. 1921년 교황 베네딕또 15세에 의해 이딸리아 외방 선교회의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교회 행정 업무에도 경험을 쌓아가면서 많은 저명한 성직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교회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도서관을 이용하다가 도서관장인 아킬레 라티 몬시뇰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라티가 비오 11세로 교황에 피선된 후에 론깔리를 바티칸 외교관으로 임명하고는 관습대로 명예 대주교로 서임하였다.
론깔리 대주교는 외교관의 생활에 들어가 처음에는 불가리아의 교황사절로서 활동하였다(1925-1934). 그리고 터어키와 그리이스의 교황 사절을 역임하는 동안 동방 정교회의 국가에서 지도자들을 만나며 동방 정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1944년 독일군이 후퇴한 후에 새 정부와 교회 관계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샤를르 드골 장군과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들이 독일 점령군에 협조한 프랑스의 구정권과 가깝게 지낸 교황대사의 로마 소환과 프랑스 주교들이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때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곳의 적임자로 론깔리 대주교를 선택하여 파리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하였다. 론깔리 교황대사는 외교관으로서의 수완을 발휘하여 프랑스의 긴장된 정교(政敎) 관계를 완화시켰으며, 프랑스 교회의 자주권을 다시 취득하였다. 또한 그는 전쟁 포로인 독일 신학생들을 석방시키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이러한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교황청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1953년, 비오 12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 베네치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론깔리 추기경이 교황 칭호로 요한 23세를 선택하였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놀랐다. 요한 23세란 칭호는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1415년에 폐위된 가교황의 이름이었다. 이러한 중세기의 불명예스러운 교황명을 다시 선택한 것은 교황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로써 교회 역사의 어두운 한 장면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요한 23세의 혁명적인 사상은 교황으로서의 그의 행동에서도 나타났다. 교황은 ‘바티칸의 포로’로서 바티칸 구역을 벗어나지 않던 88년간의 전통을 깨뜨리고 로마와 여러 도시의 거리를 거닐면서 일반 시민과 담소하거나 교도소와 병원을 방문하였고, 옛 친구들을 식사에 포대하여 오찬을 베풀었다.
이렇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보여주기를 꺼리지 않는 교황의 새로운 모습의 혁명적인 자세는 이제까지 교황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일반 대중에게 놀라움과 함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요한 23세는 교회를 비정치화하여 바티칸 통치자로서의 교황의 위치를 낮추어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전통적 교황의 명칭)이라고 강조하였고, 지방 교회인 로마의 주교로서 세계 주교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교회 밖의 세계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교황은 그들과 대화를 갖고 교회를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교황은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이며, 바티칸에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따뜻하게 영접하였고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또한 반공주의자였던 비오 12세와는 달리, 소련의 당 제1서기이며 수상안 흐루시초프의 사위인 야쥬베이를 바티칸에서 접견(1963)하는 등 공산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한정된 개선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도 하였다.
공의회 소집 발표 : 요한 23세는 1959년의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 마지막 날(1월 25일)에 성 바오로 대성전을 방문하여 교황 기도실에서 기도한 후에 미사 성제에 참석한 17명의 추기경들 앞에서 사목적 방향의 교회 쇄신과 그리스도교 일치의 촉진을 위해서 세 가지 계획, 즉 로마 교구회의 소집, 전체 공의회의 개최, 교회법의 현대화 개정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의향은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갑작스럽게 받은 성령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재일치를 주요 목표로 하여 90년 만에 열릴 제21차 전체 공의회의 소집은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공의회란 말마디는 거의 혁명으로 들렸다. 더우기 교황이 공의회에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초청하겠다는 말은 보수적인 교황청 인사들의 의구심과 반발을 받았으나, 교회 밖(특히 동방 정교회와 영국 성공회)으로부터는 좋은 반응을 받았다. 교황의 세 가지 계획은 단계적으로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5백 년만에 열리는 로마 교구회의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1959년 2월에 구성되어 교구 규칙의 기초, 수정하여 8백 조항의 법안이 1960년의 본회의(1월 24일-1월 31일)에 상정, 토의되었다. 이 회의는 로마 시의 교회 사목을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적응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2단계인 전체 공의회도 로마 교구회의와 같이 교회의 시대적 적응화라는 목표와 함께 그리스도교 일치를 증진시키고자 1963년에 개최되었다. 마지막으로 교회법의 개정을 위해 1963년 4월 교회법전 개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요한 23세는 그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 개혁안 작업은 최근에 마무리되어 머지않아 선포될 단계에 이르렀다.
공의회의 준비 : 요한 23세가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의향을 발표한 지 5개월만에 국무성 장관 타르티니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여 교황청 10개 성성의 고위 성직자들로 준비위원회가 되었다. 이 위원회는 세계 각처에 있는 추기경, 주교, 수도회의 총원장, 가톨릭대학의 신학교수, 교회법 전문가들에게 공의회에서 토의될 안건을 제시하도록 요청하는 자문기관으로서 공의회의 직접적 준비에 필요한 위원회와 사무국의 구성을 논의하고 의사 일정을 계획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60년 6월 5일에 10개의 전문적 준비위원회(신학, 교구 행정, 성직자 규율, 수도자, 성사, 전례, 학문과 신학교, 동방 교회, 선교, 평신도 사도직)와 2개의 사무국(매스 미디아, 그리스도교 일치)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에서 다룰 안건을 조정하는 중앙위원회가 60개국의 주교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위원회의 요직은 교황청이 행정직에서 거의 독점하였다. 따라서 공의회가 교황청의 주도 하에 진행도어 어떠한 획기적 변화가 기대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의회가 교황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세 가지 표시가 나타나고 있었다. 첫째는 평신도 사도직 위원회였다. 이는 교황청의 현존하는 어느 행정 부서에도 해당하지않는 기관이었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의 설치였다. 이 사무국은 교황의 신중한 격려를 받아가며 교황청 당국자의 간섭에서 벗어나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세째는 각 위원회의 위원 선출이었다. 과거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위원들이 교구 사목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교들이었다. 이는 새로운 구성 방법이었다.
그리고 외형상으로는 각 준비위원회가 보수주의의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신학과 사목적 관점에서 진보주의 성격을 지닌 학자들의 영향력이 뒤에서 행사될 수 있었다. 각 준비위원회는 세계 각처로부터 온 2천여 건의 제의를 다루어 70개의 안건을 중앙위원회에 제출하였고, 중앙위원회는 이를 수정하거나 다시 작성하여 공의회가 열리기 석달 전에 세계 주교들에게 발송하였다. 지방 교회의 주교들은 많은 안건, 특히 신학위원회의 안건은 전통적 가르침을 재천명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교 일치를 겨냥한 공의회가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에 대해 방어적 성격을 띤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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