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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15) - 2023 .11. 23(목) |
이번 성지순례 코스는 대전교구 서남쪽에 있는 부여, 서천, 보령 지역. 흔히 말해 하부내포 지역이다. 지석리 성지, 신막골 성지, 서짓골 성지, 삽티 성지, 도앙골 성지가 이들이다. 그리고 가는 길에 황새바위 순교성지를 거친다. 황새바위 성지를 제외하면 다른 성지들은 다들 박해시대 숨은 교우촌이라 성지로 조성된 지가 얼마 되지 않거나 아니면 지금 조성 중이라서 규모가 크지 않아 그리 시간이 많이 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번의 순례는 황새바위 성지가 중심이 된다.
이번에는 한때 성당 액션단체 활동을 했던 김 라파엘 형제의 개인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원거리라 직업 운전자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힘들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라 오직 감사한 마음뿐이다. 08시 성당 출발. 중간 휴게소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곧장 달려도 황새바위 성지에 도착 11시 40분, 3시간 40분이나 소요되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 - 죽음보다 천만 배 무서운 것은... |
황새 바위 순교자 성지의 주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6-1, 도로명 주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118.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한때는 한반도 서남부의 중심이었다.
충청지역 순교의 중심지 공주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청감영이 있었던 곳이라 충청도 지역의 행정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충청도 5영 중 우영(右營)의 수장을 겸임하여 충청도 관찰사는 행정 및 군사와 치안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따라서 중죄인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고 군영에서 처단되었다.
이런 이유로 공주는 약 100년 동안 천주교 박해의 중심지였다. 충청도에서 대표적인 순교지가 되어온 것은 공주 이외에도 해미(지금의 서산시 해미면)와 홍주(지금의 홍성읍)가 있었다. 해미는 읍성이 있고 한때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배속된 병영이 있었으며, 홍주 역시 읍성이 있고 이를 지키는 군영이 있었다. 실제 공주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처형이 이루어진 곳이다.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 예산 · 해미 · 덕산 · 신창 · 홍산 · 연산 · 청양 · 보령 · 진잠 · 유구 · 직산 · 천안 · 공주 · 비인 · 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북의 청주 · 진천 · 연풍 · 옥천, 전라도의 전주 · 광주, 경기도의 죽산 · 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 등 매우 다양하다. 곧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왔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이곳에서 처형되었던 것이다.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판결을 받은 사학죄인들에게 사형 집행은 출신 고향에서 하도록 했는데 이를 해읍정법(該邑正法)이라고 했다. 공주 지역의 순교자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금강 유역의 공주지역은 해미, 홍주 등 내포지역에 못지않게 천주교세가 강했음을 입증한다.
황새바위(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78호)
공주 들머리 이곳 황새바위 순교지의 위치는 지리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곳으로 모래사장이 있어 공개처형지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 언덕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많이 서식했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설로는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바위'라는 말에서 황새바위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교도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흐르는 물이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백제가 멸망하던 때 백제 부흥을 위해 수많은 군사들이 이곳 공주(당시는 웅진성)을 거점으로 싸우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피를 흘렸다. 그리고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전라도에서 발호한 수만 명이 우금치 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해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의로운 피를 수없이 흘린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전해진다.
황새바위의 순교자
공주 지역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신해박해 (1791) 이전으로 추정된다. 1791년 공주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김명주와 홍철, 인철 부자가 내포 사람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바가 있으며, 1792년 관찰사 박종악의 수기에 공주 산상면 규동(현 공주시 유구읍)에서 이덕침 등 4형제가 사학(邪學)을 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초기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달레는 공주 감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는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했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감영록에는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 그밖에 밝혀진 순교자 등을 합하면 공주지역에서 순교한 사람의 수는 337명이라고 한다. 따라서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단일 성지로서 전국 최다의 순교자를 낸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순교자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 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자신의 팔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했던 손자선 토마스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사학의 괴수'라는 이름을 들은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손자선 토마스(1844-1866)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에서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를 배출한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후, 포졸들이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조롱하였지만 토마스가 굴하지 않자 덕산 관장은 그를 해미로 압송하였다. 그는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더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지켰다. 그는 말했다.
"나도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 몇 천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마침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공주에서 관장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토마스는 즉시 자신의 양팔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결국 토마스는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존창 루도비코 (李存昌, 1752-1801)는 충청남도 예산의 농민 출신의 학자로, 초기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하에 신부가 되어 충청도 지방을 맡아 전교에 힘쓴 결과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같이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알고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하여 윤유일(尹有一)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에 보냄으로써 마침내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못 이겨 한 때 배교하여 홍산 (鴻山, 부여지역)으로 이사 갔으나, 전날의 배교를 뉘우치고는 더욱 열심히 전교함으로써, 내포와 그 인근지방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천주교가 가장 성하였다.
그의 조카딸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할머니였고, 최양업(崔良業)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되는 등, 조선 말기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 공헌은 지대하였다.
1795년 말에 그는 다시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4월 8일 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 조성 과정
충청도 최대의 순교지가 긴 잠에서 깨어난 시기는 1980년 들어서이다. 1980년 12월에 성지 조성을 위해 부지 매입이 이루어지고 1984년에 황새바위성지 성역화사업 추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85년 11월 7일 무덤경당 및 순교탑 봉헌식이 있었고 2002년 11월 29일 성전이 건립되어 봉헌식을 가졌다. 2011년 9월 24일 황새바위 순교자 337위 명부 봉헌식을 가짐으로 성지의 개발 촉진의 계기가 되어 이듬해 2012년 1차 성지종합개발계획을 통해 성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성지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정상에 황새바위 광장과 야외성당을 조성하고, 입구 공간을 정비하며 사무실과 쉼터(카페 몽마르트) 등을 신축하였다. 특히 1983년 건립 당시 재원 부족으로 콘크리트에 판석을 붙여 세운 기념비적 건축물인 무덤경당도 원래 설계대로 보령 오석을 이용해 통돌쌓기 방식으로 새로 건립하여 2012년 10월 20일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14년 순교자 광장의 순교탑을 보수하며 내부에 기도실을 조성했고, 2015년 황새바위 광장으로 오르는 언덕에 빛의 길과 묵주기도 길 등을 조성하고, 황새바위 광장에 두 번째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 언덕을 조성하였다. 또한 2016년 순교자 광장과 공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담하게 부활성당을 건립하고 그 앞에 순교자의 모후상을 모신 성모 광장을 조성하였다. 2017년 9월에는 기존의 몽마르트 카페 자리에 황새바위 기념관을 개관해 성지의 역사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옛 공주교도소 자리에 성지 성당을 신축하고 기존 성당을 순교기념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며, 이전 예정인 성지 맞은편 공주시 교육지원청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피정의 집과 교육관 · 사제관 · 수녀원 · 식당 등 편의시설을 갖출 계획도 갖고 있다.
성지 입구
11시 40분. 성지 입구에 이르렀다. 성지가 언덕 위에 있기에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 위에서 예수님께서 팔을 벌려 환영해 주신다. 인자하신 예수성심상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의 표현이며 우리의 응답을 바라시는 예수님의 원의를 보여주시는 모습이시다.
순례 순서는 맨 입구 예수성심상(안내도의 오른쪽 상단)에서부터 시작하여 황새바위 성지 성전, 몽마르트 카페(황새바위 기념관)을 거쳐 아랫광장인 순교자 광장 내에 있는 순교탑, 무덤경당, 축복하는 예수님, 열두 개의 빛돌을 거쳐 오른쪽 옆으로 빠져 로사리오 정원을 갔다가 다시 빛의 길을 통해 윗 광장인 부활광장으로 간다. 부활광장에서 황새바위 십자가와 부활성당, 야외제대를 본 후 내려오는 길에 성모동산을 거친다. 대충 이런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황새바위 성지 성전
참배 겸 성전을 먼저 찾았다. 벽에 성전이라 씌어있고 입구 창문에 성지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런데 들어가면 먼저 휴게실을 겸한 성물방이 있어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성전은 2002년 11월 29일에 축성된 건물이다.
성전 내부는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좌우 각 1열의 교우석 장의자가 있고 제대 후면벽에는 원형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그 밑에 커다란 십자고상이 위치하여 제단의 중심을 이루고 제대 오른쪽에 감실이 있을 뿐 대체로 단조롭다.
제대 정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성광이 유리를 통해 볼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척추뼈 일부라고 한다.
제단 앞쪽 왼편 끝에는 나무색의 성모자상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동양화 하나가 액자에 담겨있는데 이곳에서 순교한 성 손자선 토마스 순교화이다.
순교화는 병인교란 때 손자선이 스스로 팔을 물어뜯는 장면이며 그해 3월 31일에 공주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공주감영에서 취조를 받을 때 “배교의 표시로 팔을 물어뜯어 보라, 그러지 못하면 배교로 간주하여 석방하겠다”는 관장의 말에 바로 두 팔을 이빨로 물어뜯어 유혈이 낭자했다는 내용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오른쪽 벽면에는 은은한 스테인드글라스 아래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고 왼쪽 벽면에는 한 작가(김민선 크리스티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안내에 의하면 작가가 황새바위성지에서 아이들과 함께 걸으면서 느낀 영감을 작품화한 것들이다. 이중에는 특이하게도 돌맹이로 만든 십자가. 바다의 풍랑을 이겨낸 선박의 조각들로 만든 십자가 등 다양한 성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전을 나와 사무실과 옛기도길 표지판을 보고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성지 사무실이 있고 바로 가까이 작고 아담한 몽마르트 카페가 있는데 주인은 없다. 안으로 들어가면 황새바위 성지 기념관이 있다.
황새바위 성지 기념관(몽마르트 카페)
그리 큰 전시실은 아니지만 고서를 중심으로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중에는 황새바위 성지 조성 중에 나온 출토품도 있다.
옛기도길
길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순교자의 어록을 모아 새겨놓은 길을 말한다. 이 길은 성전 십자가에서 시작하는 묵주의 길로 이어지는데 아직 조성 중이라 포장이 덮여진 곳도 있다.
순교자의 어록 몇 개를 든다. 이국종 바오로(공주 30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따라오는 구경꾼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
순교자 남상교 아오스딩(제천 84세)에게 동료 유림이 찾아와서 “여보게 큰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 이렇게 형편없는 곳에서 굶어 죽을 수가 있나? ”하며 배교하기를 권하자. “내가 하느님을 믿고 있는데 어찌 배반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소?” 하며 끝내 굶어 죽었다.
이보기 바오로(청양, 정산 56세) 배교하면 쌀을 주고 풍헌이라는 관직을 내려주겠다는 말에 “고을 전체를 주어도 결코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소.”하며 앞으로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니 누가 와서 나에게 무슨 말을 할려고 해도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니 내게 전해주지 말라고 했다.
전시관을 나와서 다시 오르던 길에 나오니 왼쪽으로 십자가의 길이 나 있다.
십자가의 길
삶의 순간순간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청하는 길, 목숨을 버림으로써 참된 생명을 얻어 넘치는 사랑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묵상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순교자 광장으로 오른다. 오르다보면 돌문 하나가 나타나온다. 어떤 이들은 ‘바늘귀 문’, 또 어떤 이들은 ‘천국의 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지막한 돌문은 겸손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 자신을 낮추며 기도의 준비를 하고, 기도를 마치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갈 때는 머리를 숙이는 겸손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 돌문을 들어가면 순교자 광장이다.
순교자 광장
황새바위 순교성지에는 광장이 둘이 있다. 그 하나가 이 순교자 광장이며, 조금 더 오르면 부활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에는 기념탑, 열두 개의 빛돌, 무덤경당, 그리고 축복하는 예수님상이 조성되어 있다.
순교탑
순교탑은 순교자들이 처형당할 때 사용되었던 칼을 서로 맞대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칼이 상징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칼과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유혹의 칼이다. 세상과 나를 향한 두 개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고 날카롭게 서 있을 때, 참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 속에서 하늘로 향하는 계단을 한걸음 디딜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는 말에 유혹을 끊으려는 단호한 의지를 실감한다.
순교탑은 한국 교회창설 200주년에 순교선열들이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 진리만을 따르신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다는 표지판이 있다. 기념탑의 2층 감실에 작은 성전이 있어 예수님 고상을 모시고 있다.
열두 개의 빛돌
열두 개의 기둥돌이 서 있다. 이 돌들은 열두 사도를 상징하며 동시에 이곳에서 순교하신 337명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조형이다. 아무 명칭도 없고 다듬지도 않고 그냥 투박하고 거친 모습 그대로 서 있다. 하지만 이 돌들에는 우리 교회의 주춧돌인 열두 사도와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인 순교자들의 정신이 이 돌 안에 담겨 있다.
축복하는 예수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 일체 구도로 중앙에는 예수님께서 구름 위에서 계신다. 박해와 순교의 험난한 길 가운데서 굳건한 믿음을 지켜내셨던 황새바위 순교자들을 축복하고 계시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상이 음각부조의 형태로 십자가 정면에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는 아담의 해골이 작게 묘사되어 있다. 십자가 앞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하며 서 계신다. 십자가 뒷면에는 한국교회 초기 공동체 신앙인들의 터전과 감영과 향옥, 제민천변에서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로는 순교한 영혼들이 천사들과 함께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 박해의 험난 길 가운데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걸어간 황새바위 순교자들의 순교 역사가 잘 표현돼 있다. 조각가 김경란(마리아) 작가의 작품이다.
무덤경당
무덤경당은 원래 1987년에 고통과 슬픔을 넘어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염원하며 지었는데 경비가 모자라 미완성으로 있다가. 2012년 로사리오 성월에 다시 예산을 투입하여 완공한 경당이다.
예수님의 돌무덤을 형상화한 무덤경당은 죽음과 부활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돌무덤은 죽음이라는 종말과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라는 성경 말씀처럼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살아계시는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경당이다.
출입문 우측에 서울대 최종태 교수가 세운 고통의 성모상이 있다.
무덤경당은 황새바위 성지에 묵주와 십자가가 발굴되면서 부지를 매입하고 1985년 순교탑과 함께 건립했다. 건립 당시는 공사비 부족으로 설계도대로 완공하지 못했는데 2012년에 4억5천만 원을 들여 완공했다. 오석 통돌쌓기 공법으로 설계한 미니멀 건축의 대표작로 건축가협회 수상작이라고 한다. 지하에 가로 4.8, 새로 5,4에 높이 3.6m. 규모의 작은 묘실이 있다.
지금까지 본 성전 중 가장 작은 성전이다. 성전이기보다는 기도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예수님을 이렇게 좁은 곳에 가두다시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넓은 아파트에 사는 우리들이 죄스럽다. 지하 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그야말로 체구 큰 사람은 내려갈 수가 없을 정도로 좁아 어지간히 주의하지 않으면 사고라도 날 것 같다.
지하에는 중앙에 관이 놓였고 벽에는 순교자 명단이 빼곡 기록되었다.
지하묘실을 나오는 길은 다시 올라가지 않고 외부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즉 바깥 현관에서 긴 회랑을 통과하니 석축으로 쌓은 출구문이 있었다. 출구문이지만 이리로 들어간다면 입구문도 된다. 빠져 나와 넓을 전망을 보며 큰 숨을 몰아쉬었다.
옛날 순교자가 갇혔던 감옥이 이렇듯 좁지 않았나 한다. 감옥에 많이 수용하기 위해 다리를 서로 포개었다는 기록도 읽은 것 같다. 나와 보니 옛기도문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위로 가는 길로 돌아와서 조금 오르니 묵주기도의 길이 가로 지르고 있고 교차로에 로사리오 정원으로 가는 표지판이 오른쪽을 가리키고 서 있다. 묵주기도의 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묵주기도의 길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의 삶을 복되신 동정마리아와 함께 묵상하며 묵주기도의 길을 따라 걷는다. 길 위의 묵주기도 표지석을 보니 성모님이 천상모후의 관을 쓰고 하늘에 올려지는 곳이어서 묵주기도의 길 영광의 신비가 다 끝나는 지점이었다.
로사리오 정원
로사리오 정원은 경사지에 터를 내어 잔디밭을 조성하고 나지막한 돌 탁자와 의자를 놓아 정담을 나누는 정도의 조그만 쉼터였다. 좀 떨어진 곳에 하늘에 걸린 듯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조형물이 있고 성모상은 없다. 묵주기도의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묵주기도의 길의 묵주는 둥근 돌인데 이것이 53개나 되니 엄청난 숫자이다. 이 묵주 봉헌자의 명단이 새겨진 돌비석이 누워있었다.
다시 부활광장으로 오르는 교차로에 돌아와서 위로 오른다. 이 길은 빛의 길이다.
빛의 길
빛의 길은 묵주기도 빛의 신비를 묵상하는 길이다. 빛의 신비는 묵주기도의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에 추가된 신비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재위 25년 첫날인 2002년 10월 16교서를 통해 반포하였다. 빛으로 온 예수의 공생활에 관한 내용으로, 예수가 세례 받음, 첫 기적을 행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함, 거룩하게 변모함, 성체 성사를 세움의 다섯 가지를 묵상한다. 주로 목요일에 이 주제로 묵상한다. 오늘이 바로 목요일이다. 빛의 신바와 관련되 사각형 돌 표지판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빛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부활광장이 나타난다.
부활광장(황새바위 광장)
부활광장은 황새바위 성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광장이다. 아래쪽 순교자 광장에 무덤경당이 있다면 부활광장에 부활성당이 있고, 순교자 광장에 기념탑이 있다면 부활광장에는 황새바위 십자가가 서 있다. 그리고 순교자광장에 열두 개의 빛돌이 있다면 여기는 야외제대의 돌이 있다.
황새바위 십자가
부활광장 초입에 세운 황새바위 십자가는 좌대 1m, 십자가 6m 크기로 만들어졌으며, 십자가 앞 예수님의 성상과 한 벌을 이룬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상, 예수님께 대한 부활의 희망을 담았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손을 내밀어 맞아주시는 형태로 형상화됐다. 순교자광장 무덤경당 왼쪽에 세운 축복하시는 예수님 성상과 같이 두 점 모두 조각가 김경란(마리아) 작가의 작품이다.
부활성당
부활경당은 단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영원한 부활의 진리를 노래하는 경당이다. 경당 안에는 3700여점의 백자 도자기 평판 벽화 작품들이 모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저 흙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 색을 입고, 색을 입은 흙이 1,250도의 뜨거운 불에 의해 재탄생되어 각각의 의미를 담으며 환희의 찬가를 부르는 순교자들과 신앙인들의 마음이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들 도자 작품은 서양화가 조부수(질베르토)가 2017년 3월 선종하기에 앞서 2016년 11월에 제작한 유작이며 제대는 아들인 조각가 조성민(돈보스코)씨가 제작했다.
도자 평판에 일일이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칠한 뒤 고온에 구워서 이어붙인 도자 벽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초점을 맞췄으며, 경당 안은 마치 하느님을 향한 순교자들의 찬미기도 노래가 들려오는 듯한 빛의 향연이 펼쳐지는 듯하다.
야외제대
부활 광장에는 큰 돌 제대와 12개의 거석이 세워져 있다. 제대 돌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서 황새바위의 가치를 기리기 위해 옮겨 놓았다. 그리고 12개의 거석들은 12사도와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거석 뒤에는 337위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성모동산
내려오는 길에는 성모동산에 들렀다. 공주 지역의 성모 신심은 각별하다. 1846년 11월 2일 한국교회의 제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안 안토니오 신부님은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작은 오두막집에서 몇 명의 신자들을 모아 ‘성모성심회’를 조직하고, 나흘 뒤 그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신부(성모성심회 창설자)에게 보고를 하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창설되게 된다.
또한 1861년 당시 공주에서 사목하던 조안노(P.JOANNO, 오 베드로) 신부는 공주 전 지역을 성모영보(예수 탄생 예고) 구역으로 선포한다. 이처럼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아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키운 곳이 바로 공주인 것이다
다시 출발점이다. 시간은 오후 1시. 1시간 남짓한 시간이 정말 후딱 지나갔다. 아직해미, 홍성의 성지가 남아 있지만 공주의 황새바위 성지가 충청 지역의 최대의 순교성지임 분명한 같다. 지형이 많이 바뀌어서 당시의 순교 참상은 짐작하기 어렵지만 지금 내려다보이는 복개된 재민천이 당시에는 붉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황새바위 순교성지 기도를 마음에 새기며 기념촬영을 끝으로 순례를 마감했다.
황새바위순교성지 기도
지극히 자비하신 하느님
고통과 죽음의 자리였던 이곳을
거룩한 부활의 땅으로 축복해 주셨으니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황새바위 순교성지에 스며있는
순교자들의 거룩하고 복된 삶의 여정과
목숨을 바쳐 증거한 신앙을 기리며
위로와 용기를 얻는 순례자들을 축복하시어
그들에게 황새바위 순교성지가
하느님을 만나고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는
은총의 배움터가 되게 하소서.
또한 순례자들과 후원자들과 봉사자들이 사랑 안에 일치하여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소중한 성지를 가꾸고 보존하게 하시어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바르게 전하며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도록
은총과 자비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황새바위 순교자들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시간이 낮 1시. 딱 점심시간이다. 하부내포지역 소규모 성지에는 마땅한 식당도 없을 것 같아 공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계림식당이라는 곳에 가서 갈치정식에 공주 밤막걸리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이 밤 생산지라 판매소에 들러 한 상자씩 차에 싣고 지석리 성지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