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0. 돈황석굴 명사산과 월아천
돈황 명물…소리나는 모래산, 사막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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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과 월아천> |
사진설명: 돈황에서 25km 떨어진 명사산은 20~30km나 길게 뻗은 황량하고 적막한 모래 언덕이다. 길이 200m, 폭 300m의 월아천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
막고굴은 돈황을 대표하는 명물(名物)이다. ‘막고굴’을 생각하면 ‘돈황’이 떠오르고, ‘돈황’을 이야기하면 ‘막고굴’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막에 우뚝 솟은 막고굴을 현재는 ‘莫高窟(막고굴)’로 명명하지만 본래는 ‘漠高窟(막고굴)’로 불려졌다. ‘사막의 높은 곳에 있는 굴’이란 뜻이다. 사막보다 높은 명사산 절벽에 굴을 뚫어 법당을 만들고 승방을 지어 수행했으니, 말 그대로 사막보다 높은 굴이었던 것이다.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돈황에서 유명한 것은 막고굴만이 아니다.
‘소리가 들리는 산’ 명사산(鳴沙山)과 그 속에 있는 ‘월아천(月牙泉)’도 돈황을 유명하게 만든 명물들이다. 해발 1650m의 명사산은 거대한 모래산이다. 실루엣처럼 매혹적인 모래 언덕이 끝없이 이어져, 찾아오는 이들을 푹 빠져 들게 만든다. 명사산이 유명해진 것은 그림 같은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미끄럼 타고 모래 언덕을 내려오면 휘파람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태양열에 달궈진 모래알이 서로 마찰해 나는 소리라고 하는데, ‘소리 나는 모래 산’엔 예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 있다. 수백 년 전 언젠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중 갑자기 모래폭풍이 불어와 양쪽 군대를 모두 덮쳤다. 군사들과 병장기들이 흔적도 없이 모래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 후부터 명사산에선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죽은 병사들의 함성소리나 원한에 찬 소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2002년 9월27일 금요일. 막고굴을 보고 명사산으로 달려갔다. 명사산에 가기 전에 먼저 백마탑에 들렀다. 쿠차에서 여광과 함께 양주로 가던 구마라집(344~412)스님이 타고 가던 백마가 돈황 근방에서 죽었다. 그동안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백마가 죽자, 구마라집 스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탑을 세웠다. 그게 바로 백마탑(白馬塔)이다. 백마탑 입구에 좌판을 벌려놓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는데, 주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뜨개질을 하거나 마작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제야 호객행위를 했다. 심심하고 무료해 마작놀이나 뜨개질을 하는 것 같았다. “중국 여성들은 한가한 시간에 대개 뜨개질을 한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30㎞ 길게 뻗은 명사산…휘파람 같은 소리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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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낙타를 타고 명사산 안팎으로 오가는 관광객들. |
백마탑 참배를 마치고 30분 정도 달리니, 저 멀리 모래 언덕들이 보였다. 부드러운 등성이 선을 가진 모래 언덕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래뿐이었다. 입구에 도착해 걸어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모래와 관광객, 그리고 모래 위에 앉아있는 한 무리의 낙타들만 보였다. 사막을 건널 때 없어서는 안 될 길잡이이자, ‘사막을 건너게 해주는 배’가 바로 낙타 아닌가. 정겨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낙타는 실제 교통수단으로 활용되는 낙타들이었다. 낙타를 타고 사막 속으로, 명사산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있는 낙타에 타니, 먼저 뒷발을 일으키고 나중에 앞발을 세웠다. 뒷발과 앞발을 세우는데 약간의 시간 차가 있었다. 뒷발을 일으키고 앞발을 세우는 그 짧은 사이, 몸이 앞으로 기우뚱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낙타가 앞발마저 세우고 출발하자 정말 편안했다. 다섯 마리가 한 조가 돼 출발하는데, 모두 끈으로 이어져, 맨 앞 낙타를 모는 한 사람의 몰이꾼이 다섯 마리 낙타를 모두 몰고 명사산 안으로 들어갔다. 낙타 타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사실은 모래를 밟으며 명사산에 들어가려 했는데, 막상 낙타를 타니 정말 좋았다. 10분정도 들어가 내렸다. 낙타가 앉을 땐 출발할 때와 반대로, 앞발을 먼저 접고 뒷발을 구부렸다. 앞발을 내리는 순간 온 몸이 앞으로 기우뚱해, 마치 앞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낙타 등에서 내려 사방을 보니 산 위엔 사람들이 가득했고, 월아천도 보였다. 모래 썰매를 타는 사람들도 많았다. 명사산에 들어온 것이다.
돈황에서 25km 떨어진 명사산은 20~30km나 길게 뻗은, 황량하고 적막한 모래언덕이다. “사면이 모래 언덕으로, 산등이는 칼날 같아 올라가면 소리가 나는데, 발로 밟으면 허물어지고 바람이 불면 원래 모습대로 된다”고 안내인이 말했다. 막고굴은 바로 이 명사산의 동쪽 면 절벽에 개착된 석굴을 말한다.
먼저 월아천으로 갔다. 사막 한 가운데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호수가 월아천이다. 사막에 호수가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월아천은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아오른다고 한다. 천년 전부터 모래 바다(沙海) 가운데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한 번도 모래에 파묻힌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호수 주위에 부는 바람이 모래를 호수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는데, 쉬이 믿기진 않았다. 지금은 관광용으로 전락한 샘이지만, 사막을 다니는 순례자나 여행객들에게 월아천은 정말 귀중한 호수였으리라. 타클라마칸 사막을 걸어 나오는 동안 심신(心身)이 마를 대로 마른 구도자가 멀리서 월아천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생명수이자 감로수로 인식됐을 것이다.
월아천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갈대와 풀들이 호수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었다. 호수 속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호수 옆에는 누각이, 최근에 만든 듯한 누각이 있었다. 일부는 공사 중 이었다. 맨발로 사각거리는 모래 소리를 들으며 호수 주변을 돌고, 명사산으로 올라갔다. 맨 모래를 밟고 가는데, “그렇게 가면 빨리 힘이 빠진다”고 해, 만들어진 사다리를 타고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물론 사다리 타는 값을 지불해야만 했다. 20분 정도 걸어 등성이에 오르니, 모래 언덕만 보였다. 탁 트인 조망(眺望)을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탁 트이기는커녕 모래 언덕, 모래 언덕, 그 언덕 너머 또 모래 언덕만 있었다. 낙타들이 뜯어먹는 풀들이 바닥에 간간이 한 두 포기 자라고 있을 뿐, 그야말로 모래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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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명사산 입구에서 만난 낙타떼. |
모래썰매 타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돈황 지역 사람들은 단오날 명사산에 올라, 액을 막기 위해 모래 위에서 미끄럼 타는 풍습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미끄러지는데 이 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마치 벼락 치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안내인이 귀뜸했다. 과연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 타 보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산위에서 내려보니 월아천이 한 눈에 들어왔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남쪽 언덕엔 고목들이 드문드문 서있다. 대부분 말라가고 있는 듯 했다. 길이 약 200m, 폭 300m의 우아한 샘이 그곳에 있었다. 멀리서 본 탓인지, 아니면 모래 언덕에 둘러싸인 풍광에 압도된 탓인지, 월아천이 한층 신비롭게 보였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나 구도자들이 월아천을 보고 환희에 젖었을까. 힘든,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힘들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온 순례자들이 막상 월아천을 만났을 때, 그들은 얼마나 생동(生動)했겠는가.
천년 전부터 계속 물 솟아오른 월아천
월아천과 썰매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사막의 일몰(日沒)을 찍기 위해 김형주 기자와 모래 언덕을 하나 더 넘기로 했다. 1시간 정도 걸어 앞에 보이는 언덕을 넘었다. 그러나 그곳엔 또 다른 모래 언덕만 있었다. 모래 산의 성향(性向)을 파악 못해 헛고생만 한 셈이 됐다. 그곳에 앉아 모래를 한 주먹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어느 새 빈손이 됐다. 한 주먹 또 쥐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손을 틀고 이리 저리 살폈다. 그러는 사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맞은 편 산등성이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씩 사라져 갔다. 모래 바다를 달렸다. 단단한 흙바닥과 달리 속도가 전혀 나지 않았다. 발이 자꾸 모래에 빠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헉헉거리며 처음 올라갔던 등성이로 돌아와, 사다리 타고 내려갔다. 모래 산을 내려와 다시 올려다보니 여전히 모래뿐이다. 북적되던 사람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주변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다시 낙타를 타고 명사산 입구로 나왔다. 낙타는 여전히 앞발 뒷발을 차례로 세웠다. 몸이 기우뚱했지만, 두 번째라 그다지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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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돈황 막고굴 전경. |
낙타에 몸을 맡기고, 어둠에 싸인 명사산을 돌아보았다. 저 산 다른 쪽 절벽에 있는 막고굴, 그 옛날 구도자들과 수행자들이 거기서 정진할 당시, 막고굴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지금은 한낱 관광지로 전락해버렸지만, 수행자들이 머물고 신도들이 찾아와 기도했을 그 때, 막고굴은 중국 제일의 사원이었다. 인도·중앙아시아를 거쳐 돈황에 도착한 불교가 막고굴에서 새로운 꽃을 피웠고, ‘돈황의 꽃’은 중국 대륙을 지나 우리나라에 유입됐다. 불교는 이후 한국문화와 사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어둠이 짙어가는 명사산에서 ‘한국불교의 불빛’을 보았다면 지나친 말일까.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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