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부산서면교회 학생회 LTC 강의, 주제: 예배란 무엇인가? 강의안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의 의미로서 예배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의 가장 원형적 형태를 살펴봐야 합니다. 창세기 2장 8절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창설은 세우고 설립하고 천막을 친다는 뜻이지만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천지창조에 그치지 않으시고 특별히 에덴을 창설하셨을까? 창세기 2장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아담을 에덴에 두고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이 중요한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가? 그 이유는 단어들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작한다. 땅일 경우 밭을 일구거나 농사짓는 것을 뜻하지만 하나님이라면 섬긴다는 뜻이 됩니다. 섬긴다는 말은 제사장이 성전에 관계된 일을 할 때 쓰이며 예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주의하여 지킨다.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출애굽기 15장 17절에서 보다 분명해집니다. 홍해의 기적 이후 모세의 찬양을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기업의 산에 심는다.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처소로 삼으시려는 것이고 이 처소는 자기 손으로 세우신 성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손으로 세우신 성전으로 창설하셨습니다.
이 의미들로 보자면, 에덴은 하나님이 심으신 성전이고 아담은 성전을 섬기는 자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우리는 엎드립니다. 이 임재는 성전을 전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임재한 곳은 거룩한 곳, 성전이고 그곳에서 우리는 신을 벗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가장 원형적 형태의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에서 아담의 예배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배와 삶이 일치될 수 있는가? 아직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항상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만을 기뻐합니다. 죄가 없는 그에게는 오로지 이 성향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가 에덴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곧 예배입니다.
그리고 여기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또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십니까? 그게 반복됩니까? 누구도 집을 다 지으면 들어가 살지 다시 허물고 짓고 하지는 않습니다. 집을 다 짓고 나면 그 안에서 편히 삽니다. 그러나 아담이 이걸 다 망쳐놓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좋은 집을 주셨지만 아담은 그 집을 완전히 더럽히고 훼손해 버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편히 살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은 아주 중대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더는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기 전까지 안식이 없습니다. 아담의 죄는 안식을 망쳤고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그렇게 아담은 성전을 잃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전과 안식의 회복이 있어야만 합니다. 왜? 예배는 본질상 하나님이 임재하신 처소인 성전에서의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은 이 예배의 참된 본질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죄인인 인간은 예배할 수 없고 즉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몸에 더러운 벌레가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 가차 없이 쳐 죽여서 떨어뜨립니다. 죄는 하나님에게 이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죄는 온갖 저주를 일으키고 인생은 안식이 없으며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처럼 예배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어떤 희생이 담보된 속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사라는 예배의 형식이 필연적으로 생깁니다. 그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였습니다.
창세기 4장 5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과 아벨이 각각 얻은 소산을 희생으로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그러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아지지 않습니다. 단지 가인의 제물, 다시 말해 가인이 드리는 예배만 받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가인도 받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가인의 예배는 형식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단지 형식적인 예배만이 아닙니다. 예배가 삶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은 예배의 본질을 회복한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타락 이후 예배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형식적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분리된 것도 문제지만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에 아예 형식적 예배마저도 저버립니다. 그래서 그나마 지탱하던 형식적 예배를 버린 순간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타락해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전의 회복이며 둘째는 안식의 회복이고 셋째는 삶과 예배의 일치입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경작하는 것, 섬기는 게 이스라엘에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은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곳 성전에서 예배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시는 이유, 즉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장소적 개념만이 아니라 형식도 정하셨습니다. 3장 18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이스라엘은 이 말씀대로 광야에서 제사라는 형식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예배가 거룩한 삶으로 일치되어야 했기에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막을 둘러싼 12지파의 모든 지경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회복되어야 할 마지막 퍼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안식, 그래서 안식일의 준수가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면 모든 게 잘 되고 끝났는가? 그들은 진정으로 성전을 회복하고 삶은 예배와 일치되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는가? 아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이 있고 십계명이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그들의 심령에 죄가 있어서 예배가 삶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성전이 그들 밖에 사람이 세운 무언가로 십계명도 돌에 새겨져 그들 밖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들 자신이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율법이 돌이 아닌 그들 마음에 새겨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17절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 이것이 핵심입니다. 다윗은 늘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위해 지을 수 있는 성전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도 사람이 지은 어떤 성전도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친히 집을 짓겠다 하셨습니다. 그 집은 다윗의 씨에서 날 자가 지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며 다윗의 위는 영원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하 7장에 역대상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다윗의 위에서 날 자, 다윗의 위를 영원하게 할 왕,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자가 누굴까?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은 영원하지 않았고 다윗의 왕위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메시아, 하나님이 지으시는 영원한 성전을 뜻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있었지만 사실상 가인의 제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일부 소수의 사람,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만이 삶과 예배를 일치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이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이사야서 1장 11절과 1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악의 삶을 살면서 형식적 예배만 드리면 그만이라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 여겼습니다.
그러면 계속 반복되는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가? 그 답이 메시아에게 있을 것이라 선지자들이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메시아가 오시면 사람이 지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는 성전이 세워지고 돌에 새긴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에 율법을 새겨 삶과 일치된 예배가 드려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게 메시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26절과 27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듯이 이제 사람안에 거하시며 죄악을 제거하시고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마음에 새겨진 법이 성령의 역사로 규례를 행하게 합니다. 예배와 삶이 일치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게 요한복음 4장의 우물가 여인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예배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겁니다.
예수께서 정오에 사마리아의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셨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시면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이방인과 혼혈이며 자기들 맘대로 자기들의 성전을 세운 일종의 신앙적 사생아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한 자로 여기고 절대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을 걸었을 때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뭔가 불쾌하고 잔뜩 긴장하며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10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여자에게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은 당연히 메시아, 그리스도시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을 뜻할까? 사도행전 11장 17절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 말씀은 이방인이었던 욥바의 고넬료 시몬과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을 말합니다.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이 생수는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예 알아듣지 못합니다. 여자는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다는 말이냐? 예리한 논리로 반론합니다. 현실적인 논리는 아주 강력하게 들립니다. 당신 말은 근거가 없다. 이 우물은 야곱만이 아니라 대대로 사람과 짐승이 마시는 물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크냐?
이 여자와 예수님은 사실상 전혀 다른 관점에서 대화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을 때 완전히 점입가경이 됩니다.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 주어서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달라. 무슨 말입니까?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게 있으면 이런 고단한 삶이 없겠지만 그런 건 없다는 겁니다. 삶의 현실은 냉혹하다. 세상에 안식은 없다. 그게 이 여인이 배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현실이 대화에 물꼬를 트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녀가 말한 바로 그 현실을 너무 정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 말에 담긴 현실의 높은 벽을 이 낯설고 이상한 유대인 남자가 알고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남편이 이전에 다섯이 있었지만 버림을 받았고 지금 있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 여자가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는지 알게 됩니다. 그녀는 어떤 이유에선지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남편이 없고 자녀없이 산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남자에게 기대고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극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여자가 형편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고 있다고 쉽게 단정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이 여자의 삶은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여자는 매우 중요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현실의 비참한 삶이 변화되는 유일한 길이 예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예배의 원형에서 봤듯이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인 성전에서의 삶이며 이 예배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 여자가 현실의 혹독한 삶에 지쳐 있고 어쩔 수 없는 고단한 삶을 지금 살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이 예배가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임을 압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쩌면 삶을 사는 동안 그게 현실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삶은 다를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굳이 야곱의 우물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이유입니다. 그 답이 예수님이셨던 겁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삶을 꿰뚫어 보고 있는 예수님이 선지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 형편이 어떻게 해야 바뀔지 그걸 묻지 않고 예배를 말합니다. 이 여자는 성전의 회복과 장소가 중요하다는 걸 인식합니다. 메시아를 통해 그것이 약속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첫 질문이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였습니다. 사마리아인가 예루살렘인가? 예수님은 사마리아도 예루살렘도 아니라 하셨습니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왜 예배할 때를 말씀하신 걸까요? 그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에덴이 하나님이 창설하신 곳 심으신 곳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창설하신 곳 심으신 곳이며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창설하시는 참된 성전이십니다. 23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기 예배의 가장 중요한 면인 삼위일체적 예배가 나옵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께 드립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 때 이것은 천사나 사람의 영혼처럼 그런 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이라 할 때 이것은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심을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반드시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이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은혜와 역사로 말씀을 순종함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와 삶의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성향이 점점 가득하게 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그녀는 메시아를 기다렸고 메시아가 오시면 이루어질 것을 알고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라고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내가 그리스도다 메시아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성경이 말씀하는 바로 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알아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여자가 그것을 안 순간, 그녀의 삶은 변합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갑니다. 버려진 물동이가 그녀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녀를 지탱하는 생수는 그 물동이의 물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묶고 있던 무거운 멍에와 족쇄에서 벗어나 안식하게 됩니다. 이제 그녀는 34절에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양식 즉 말씀으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누가 알았겠습니까? 거의 숨어 산 이 여자를 통해 그 동네 모든 이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될지를, 참된 예배를 드리면 이와 같은 역사가 나타난다거나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심령에 변화가 있으며 그 변화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전의 삶을 더는 살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주신 양식, 말씀을 따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39절에 증언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입술의 말만 아니라 삶의 언어입니다. 그 증언이 온 동네 사람들을 구원의 은혜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제 성전은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우리의 삶은 예배와 완전히 일치하며 우리는 완전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나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 되었음에도 내 안에 여전히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안식이 있는 곳에서 살지 않습니다. 에덴이 아니라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예배와 여전히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는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으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신자는 예배와 삶이 일치되기를 분투함으로 그것을 일치시키는 게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성령의 충만과 역사를 간절히 구하고 기도함으로, 예배와 삶의 일치를 이루어 갑니다. 내 안에 시작하신 선하신 그 일을 하나님이 결국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신자가 죽을 때 죄는 그치고 신자의 삶과 예배는 완전히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삶은 그 자체가 예배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안식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며 신자 안에 옛사람의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백성들이 메시아가 오면 참된 안식이 도래할 걸 믿고 그를 기다리며 안식일을 지키며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예배와 일치시키려 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기에 비록 구약시대처럼 의식법의 제사를 드리지는 않으나 초대교회가 주일에 모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성취하신 성전의 회복과 안식의 회복이 완전해지길 소망하며 예배한 것처럼, 우리도 주일을 지켜 예배합니다. 말씀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내는 예배와의 일치를 위해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예수님을 생각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지금까지 예배의 의미를 성전과 안식일 그리고 삶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예배는 이 세 가지 관점으로 볼 때 그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드리는 삼위일체적 예배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이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성자는 그 뜻을 성취하셨으며 성령은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