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편리한 시기의 화장실이 있었을까요?
7080을 넘어 90까지도 일부 주택은,,,
일명 "똥장군" 아저씨들이 주기적으로 와서 펐습니다, 펐어요...변소를 말입니다.
일단, 똥장군이 오면
제일 처음 한사람이 그들에 앞서 딸랑이을 들고 딸랑거리며 동네 한바퀴를 돌아다닙니다.
운동으로 따지면 준비 운동을 하듯이 미리 퍼야될 집은 준비하라고 알려주는거죠.
그 소리가 멀어지고 들리지 않을 때 쯤 되면
몇 사람이 아래에 보이는 사진에 보이는 기구를 메고 동네를 들어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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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차가 들어오기 불편한 곳은 이 분들이 걸어서 직접 와야되는 발품팔이의 노력이 필요했었죠.
그러면 우리네 어머니들께서는 미리 기다렸다가 똥장군 아저씨가 앞으로 지나갈라치면 불러서
어느 집이라고 위치를 가르쳐줍니다. 그러곤 역시나 빠질 수 없는 흥정을 벌입니다.
" 한 통 당, 퍼는데 얼만교?..."
" 000 입니더~..."
" 쪼매 싸게해주소?..."
" 이건 시에서 금액을 정해놓았심더~..내 마음대로 어떻게 하는게 아닌기라요...!!!..."
이번 경우는 대부분 어머님들의 완패로 결론지어집니다.
(안 펄라면 마소......)
(그렇다고 진짜로 안펄 수도 없고...-.-)
그런 분위기라서 불리한 위치에서 벌이는 흥정의 당연한 귀결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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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메고 왔던 2 통의 기구에 인분을 가득채우고 나갈 때에는 반드시 주인을 불러 확인합니다.
" 보소, 가득 채웠지요,,,일단 한 번 나갑니다..."
그러고, 또 와서 퍼고 나갈 때에는
" 이 번이 두번 째 나가는 깁니더~..."
이렇게 나가는 횟수를 확인시켰죠. 그래야 나중에 5번 왔니 6번 왔니 그런 실랑이를 피할 수 있었지요.
그러기를 한 두 시간하다보면 한 집, 두 집 다 퍼내고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이 때 쯤 되면 온 동네가 야시꾸리한 내음새로 파다하게 둘러쌓여 있었지요.
피할래야 피하기 어려운 상황...ㅎㅎㅎ...
그 냄새가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난 뒤에 동네 길을 나가게 되는 일이 있어서 가다 보면
똥장군 아저씨들이 남기고 간 파편에서 나는 악취를 또 맡아야 했습니다.
그나마 지각있는 동네 분이 연탄재로 덮어 놓으면 그나마 빨리 악취가 사라졌고
그러질 못했을 때에는 그 근처에선 독하디 독한 향취를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 참 먼길을 돌아가기도 그랬죠.
하지만, 아마도 이 분들이 없었으면,,, 정말 큰 일이 났었지 않았겠나 싶네요...^_^
그러다가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생활환경의 변화로 인해
편리한 정화조를 설치하는 시기가 왔었죠.
어느 순간 수세식 변소가 하나 둘 씩 사라지더니 이 직종에 관계된 똥장군 아저씨를 본 적이
이제는 상당히 오래되어 그 것이 언제였는지도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 집을 마지막으로 퍼고 가던 아저씨의 말이 떠오르네요.
" 이제 이 집도 오늘 퍼는 것이 마지막이네..."
도시의 똥장군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죠. 시골의 똥장군 이야기로 달려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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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시골은 도시와는 똥장군의 개념이 다릅니다.
비료가 귀하고 비쌌던 시절,,, 사람의 인분은 자연적인 거름 역활을 했습니다.
어릴 적 큰 아버지 댁에 가면 위의 사진에 보이는 똥장군 거름통을 지게에 얹어 메고
논으로 밭으로 가시던 큰아버지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이것을 쓰게되면 단점이랄까요?
한마디로, 위생상에 문제점이 있긴 했습니다.
70년대를 넘어 80년대의,,, 한참 중산층이 단단하고 먹고 살만한 시절
화학비료로 지은 채소는 벌레가 없이 깨끗하여 선호하였고
자연 비료로 지은 채소는 벌레가 잎을 깔가먹고 있는 것이 보이면 불결하다고
사람들의 손에서, 눈에서, 입에서 멀어졌지요.
그렇게 자연적으로 사람의 인분으로 농사하는 농법은 사라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인분으로 지은 것은 아니지만, 태평농법, 오리 농법등의 유기농법으로 가꾼것이 더 대우받는,,,
되려 벌레가 있으면 몸에 나쁜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높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없으서 못파는 시대가 되었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한가봅니다...^^;;
오늘은 똥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떠벌이다가 이만 물러갑니다... 즐거운(?) 저녁...^___^
첫댓글 감사 드립니다. 옛추억들을 새롭게 떠울려봅니다
펀 담 날, 비가 오면 골목길이 상쾌해지구~~~~~~~ ㅎ
그당시에 퍼세식이 있는 집은 그래도 그동네에서는 제법 부유층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지네요.
어릴적에 작은것은 요강에서 큰것은 공중변소 ㅠ.ㅠ 한겨울 밤에 공중변소 갈라하면 으그그그...변소에 뛰엄뛰엄 희미하게 켜진 거미줄 쳐진 백열등 뒤에서 변소귀신이 나올까봐 문도 못닫구(그래서 그런지 닫히지 않은문이 많았음ㅋㅋ) 밑을 쳐다보면 흐미 mouse가 빼꼼 쳐다보구 있구..잽싸게 끊고 나왔던 슬픈 변소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당시에 이런 생활환경땜시 여자들이 변비가 많지 않았나 생각되어집니다.
맨밑똥장군은밭에거름할때퍼와서밭에뿌렸죠....부산에서도60년대까지흔히볼수있었죠....
우리 진주에서는 세번째 사진의 똥장군으로 퍼러 다녔죠.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똥장군이 와서 퍼 가고 똥값을 우리가 받앗습니다. 그래서 똥장군 오는 날이 용돈 생기는 날이었죠. 펄 때 얼마나 냄새가 지독합니까. 코를 꼭 막고 기달렸다가 돈을 받자마자 만화방으로 달려 갔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돈을 받던 것이 주고 퍼 가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시대로 바뀌더라고요 ㅎ 어린 시절 유일했던 용돈 벌이가 사라지고, '엄마 돈 10원만~~~~"하는 시절이 되어 버린거죠 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