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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재 (전주최씨 문성공 후손 모임)
 
 
 
카페 게시글
월당집 부록 6 : 왜곡된 월당공 유적.
여수 추천 0 조회 118 19.04.23 06:09 댓글 1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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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9.04.24 22:50

    첫댓글 상기의 내용중에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라고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1404년에 지었다는 신빙성은 있는 것으로 추정

    2) 최담(崔霮, 1346~1434)으로 호는 월당(月塘)이다. 17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벼슬이 집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1398년 중훈대부 진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0년에 낙향하여 전주 한벽당 정자를 짓고 시와 글을 벗 삼아 살았다.

  • 19.04.24 22:43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전주향교와 월당공께서 거처를 하셨다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전혀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으로 추론되는 부분이고 한벽당은 여러차례의 중수를 그친 상황이고 조선 중엽의 묵화 (그림을 보면 )한벽당은
    여러체의 건물로 되어 있는 것을 볼수가

  • 작성자 19.04.25 03:15

    @아베베 오랜만 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글씨를 창암 이삼만이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고
    대부분 전주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며
    전주최씨 가문에서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19.04.29 18:26

    @여수 허허... 들은체도 않고 자기말만 쏟아내니 馬耳東風이고 牛耳讀經이지요...아는 것은 어찌 그리도 많으신지...

  • 19.05.01 14:39

    @여수 확실한 문헌이나 근거를 가지고 판단하시는 것이 옳은 판단일것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새로운 왕조나 정부가 개국하거나 탄생 하면
    전여 관련 없는 인물을 중책에 등용하지 않은 부분이고
    개국 전후에 중용하는 인물을 보면 연관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연구하여서
    아니면 정정을 하여야 할부분일것이며
    창암 이삼만 한분이 말씀하셨다고 관공서의 자료가 변경되지는 않는 부분입니다

  • 19.05.01 14:29

    @우보 남을 비방하시면 책임을 져야할 부분이 생기는 부분입니다
    조심하셔야 할 부분입니다

  • 19.05.01 16:55

    @아베베
    조선의 개국 1392년 개성 수창궁 홍무27년 7월 17일
    한양 천도 1395년 왕궁완성
    한양도성 완성 1396년
    1396년 한양 천도 이듬해
    병자년(1396, 태조5)에 어진 재상에게 천거받아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으로 왕명에 응하였으며, 무인년(1398, 태조7)에 중훈대부(中訓大夫)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임명되었습니다. 경진년(1400, 정종2)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꽃과 나무를 소재로 시를 지으면서 유유자적하였습니다.

  • 19.05.01 16:58

    @아베베 한벽당(寒碧堂) :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조 8년(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유허비에는 ‘월당루(月塘樓)’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 ‘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벽’이란 이름은 물이 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ㆍ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한장석(韓章錫, 1832년 ~ 1894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이조참판

  • 19.05.01 17:00

    @아베베 한벽당 한장석 선생의시
    역정의 버드나무에 이별생각이 길고 / 驛亭楊柳離思長
    석양에 수레 모는 한벽당이네 / 落日驅車寒碧堂
    말 위에서 봄을 보낸 나그네 신세 오래인데 / 馬上送春爲客久
    강남의 간사가 유람할 곳 찾기 바쁘네 / 江南幹事索遊忙
    초록 물굽이가 개울 끼고 두 봉우리 솟았는데 / 綠灣夾澗峯雙角
    붉은 꽃 맺힌 높은 누대는 물 한 곳에 있네 / 紅結飛樓水一方
    바로 북쪽의 고향을 볼 수 없어 근심인데 / 直北鄕關愁不見
    흰 구름 뜬 한강 북쪽으로 머리 돌리네 / 白雲回首漢之陽

  • 19.04.24 23:02

    함양,남원,지리산의 아기발도(아기 영웅이란 뜻의 고려어+몽골어) VS 이성계



    한국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모두, 고려 말기 황산 지방에서 벌어졌던 고려군과 왜구와의 전투를 기록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년), 5백여 척의 군세를 가진 왜병 선단은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인 진포(鎭浦)에 상륙하여 밀집대형을 갖추고 성벽처럼 방어태세를 취했는데, 이들이 타고 온 배는 진포에서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火砲) 공격에 격침되고,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는 해안 마을을 휩쓸며 약탈을 일삼는다. 8월에는 함양(咸陽) 동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고려군을 패배시키고(원수

  • 19.04.24 23:03

    고려사절요》는 아지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賊植立不動,有一賊將,年纔十五六,骨貌端麗,驍勇無比,乘白馬,舞槊馳突,所向,披靡莫敢當,我軍稱阿只拔都, 爭避之.】

    적은 박혀 있는 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 겨우 15, 16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적장은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이 아기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31, 경신(庚申)2, 신우(辛禑) 6년(1380년)

    .... 운봉의 인월역에 진을 치고 남원을 포위한 왜구는 "

  • 19.04.24 23:18

    @아베베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에 임명하고 이성계는 1380년경 삼도도찰사로서
    왜구를 진압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기록됨 위화도 회군 보다 8년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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