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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한바 있지만 월당공은 돌아가신 직후에 저술된 <제공찬시병서>로 인하여 그 일생이 매우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보다는 입에 발린 말로 아는 체나 하려는 호사가(好事家) 내지는 그리하면 조상이 아름답게 꾸며질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지어낸 엉터리 정보가 마치 사실인양 널리 퍼져 있는데, 문제는 공신력을 가져야 할 관서(官署)마저 검증도 없이 그런 엉터리 정보를 퍼트리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자.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에서 전북유형문화재 제15호 한벽당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이 누각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崔霮)이 태종 4년(1404)에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데, 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 하여 <한벽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호남의 명승 한벽당에는 시인 묵객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길 가던 나그네들도 이곳에서 쉬어가곤 했다.
지금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만 주변과 조화를 이룬 단아한 모습과 탁 트인 시야로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또한 전주 한옥마을 은행나무길에서 랜드마크가 되고 있는 은행나무(전북보호수 9-001호, 풍남동은행나무) 아래에는 전주시청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전주에는 향교와 풍남동 길목에 수령이 500년은 족히 됨직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슬지 않는 나무로 관직에 진출할 유생들이 부정에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 향교에 심었다고 한다.
풍남동 은행나무는 조선의 개국공신 월당 최담선생이 귀향한 후 후진양성을 위해 학당을 세우면서 전주최씨 종대 뜰 안에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남동의 은행나무는 조선왕조 500년간 갖은 풍상을 겪으며 조선왕조의 흥망을 지켜본 산역사이며 전주가 호남 유학의 본향임을 상징한다.
그래서 전주 사람들은 정겹고 유서깊은 이름 “은행나무 골목”을 사랑한다.
하지만 월당공이 “조선의 개국공신”이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1404년에 한벽당을 지었다”거나, “후진 양성을 위하여 학당을 세웠다”는 것 또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문화재청이나 전주시청에서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허위 사실을 홈페이지에 기술하고, 또 많은 비용을 들여서 돌에 새겨 세워 놓았는지 모르지만, 가장 믿을 만한 자료 <제공찬시병서>에 의하면 월당공은 1346년(충목왕 2) 4월 5일에 태어나, 1362년(공민왕 11) 사마시에 급제하고, 1363년 내시부 참관이 되었으며, 1377(우왕 3)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그 해에 바로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와 20년간을 살다가 1396년(태조 5) 봉상시 소경으로 다시 벼슬에 나갔으나 2년 후 1398년(태조 7) 지진주사가 되어 진산으로 내려왔고, 1400년(정종 2)에는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1388)을 단행하기 11년 전에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한가하게 살아가는 선비가 조선 개국에 어떤 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월당공은 조선의 개국에 전혀 관여한 바 없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전주최씨종대 안으로 들어서면, 은행나무 밑에 “月塘崔霮先生 諸公讚詩(월당최담선생 제공찬시)”라 적힌 비슷한 모양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2014년 7월 중랑장공파 종중에서 세운 비석으로, <참의공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찬시(讚詩) 10수를 번역하여 세운 것이다. 뒷면에는 <제공찬시병서> 원문을 수록하고 그 옆에 한글로 간단한 해석이 붙어 있는데 마치 <제공찬시병서>를 발췌 번역한 것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내용이 <제공찬시병서>와는 다른 것으로, 지어낸 글을 <제공찬시병서>의 내용인 것처럼 보이도록 적어 놓았을 뿐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 해 계묘년(1363)에 결혼하시던 그해 참관이 되셨고 그 후 정사년(1377)에는 문과에 급제하시었다.
그 후 홀로계신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낙향하시여 계해년(1383)에 호남 완산부(풍남동)에 선생은 아들 사형제를 가르치기 위해 독서실로 이곳에 강당(종대)을 지으셨으며 서쪽 담 아래 은행나무와 화초를 심어 가꾸시고(현재 은행나무는 전라북도 보호수 9-1로 지정되어 전해지고 있다.) 늘 꽃나무를 벗 삼아 시를 읊으시며 20여 년간 지극 정성으로 효행 하시던 중 병자년(1396) 현상의 추천으로 봉상소경이 되시고 무인년(1398)에 중훈대부 지진주사가 되셨다.
하지만 그 옆에 한문으로 적혀있는 <제공찬시병서>의 해당 부분을 번역해 보면
又中丁巳(皇明太祖洪武十年高麗辛禑三年公年三十二)之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鄕子職極修而仍喜遯自樂不求宦達者二十年也至于丙子(洪武二十九年我太祖大王卽位之五年公年五十一)爲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供職於三年戊寅(洪武三十一年公年五十三)拜中訓知珍州事
그러던 중 정사년(1377, 명나라 태조 홍무 10년, 고려 우왕 3년. 공의 나이 32세) 문과에 급제하셨지만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들로서 직분을 다하여 홀 어머님께 효도하고 은퇴자로서 생활을 스스로 즐기시며 벼슬에 나가 출세하기를 원하지 않는 생활을 20년간 하셨다.
병자년(1396, 홍무 29년, 우리 태조대왕 즉위 5년, 공의 나이 51세)에 이르러 어진 재상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의 소경으로 벼슬에 나갔다가 3년간 봉직하신 후 무인년(1398, 홍무 31년, 공의 나이 53세)에 중훈대부 지진주사가 되셨다.
이 글 어디쯤에 “선생은 아들 사형제를 가르치기 위해 독서실로 이곳에 강당(종대)을 지으셨으며”로 번역할 만한 곳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현재의 전주최씨 종대가 독서실로 지어진 것이라는 기록으로서 가장 오래 된 것은, 1939년 4월에 최병수가 지은 <종대중건기(宗垈重建記)>인데,
洪武年間我先祖月塘公經始剙建爲其子四昆季讀書之室西墻下銀杏亦當時所植而
홍무 연간(1368~1398)에 우리 선조 월당공께서 그의 아들 4형제의 독서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처음 지은 것이며, 서쪽 담장 아래에 은행나무 역시 당시에 심으신 것이다.
하지만 최병수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500여년이나 지난 시점에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갑자기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최병수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월당공의 장남 송애공과 차남 송파공은 1389년(공양왕 1)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막내아들 연촌공은 1384년(우왕 10)에 태어났으므로, 두 형님이 문과에 급제하는 날 아직 5세의 아기에 불과하였고, 자라서 책을 읽고 공부할 즈음에는 두 형님은 벼슬에 나가 전주를 떠나서 살고 있었으므로 4형제가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연촌공은 계유정난의 부당함을 알리는 글 <일편야사(一篇野史)>를 지었는데, 생육신(生六臣) 원호(元昊)와 교류를 하면서 영암에서 전주 풍남동으로 옮겨와서 살다가 전주에서 돌아가셨고,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주덕산에 묻히셨다.
연촌공이 말년을 보낸 살림집은 완동구제(完東舊第)라는 이름으로 조선후기까지 전해오고 있었는데, 1769년(영조 45) 녹동서원에 봉안(奉安)하고 있던 연촌공 영정(1) 사본을 다시 그려서 봉안할 때, 남은 옛 그림을 1774년(영조 50) 주암서원이 건설되어 옮겨 갈 때까지 잠시 봉안하기도 하였다.
1743년 <건륭보>를 발행하면서 전주최씨문성공대종회(2)가 구성되었으나 아직은 시조 문성공 시향을 모시지 않았으므로 그다지 활동을 하지 않다가, 1797년(정조 21) 3월 3일 제단(祭壇)을 쌓고 처음 시조 문성공 시향을 모시게 됨으로 인하여, 문성공대종회의 활동이 일상화(日常化)되자 완동구제는 드디어 문성공대종회의 종대(宗垈)로 사용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종대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180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완동구제”라고 표현되고 있으며, 그 이후부터는 “종대”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 관한 확실한 근거를 종대로 사용되기 시작하고 5년 정도 지난 1805년(순조 5) 간행된 대동보(大同譜) <가경보(嘉慶譜)>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경보>에는 <전주최씨족보기사(3)>라는 제목의 서문을 안렴사공파 선산종회 18세 하헌(荷軒) 최봉우(崔鳳羽)가 지었는데;
마침내 완동종대(4)에서 선사하는 사람과 기술자 1~2인에게 부탁하고 모두들 한 마음으로 힘을 보태어 1년간의 노력한 끝에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完東宗垈繕寫屬匠賴一二人之同心彈力匝一歲而
즉, <가경보> 인쇄를 전주부 동쪽에 있는 종대에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18세 최종화(崔鍾華)가 <경보구서(京譜舊序)>에 이어 지은 발문(跋文)에는;
완동구제에서 단취하여 계해년(1803) 봄에 일을 시작하여 을축년(1805) 봄에 일을 끝낼 수 있었으니 감찰공의 업적을 더욱 크게 만든 것으로 또한 우리 가문에서 조상님의 뒤를 이어가는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單團聚于先祖烟村公完東舊第始事於癸亥春訖工於乙丑春監察公之功於是爲大而亦豈非吾宗繼述之美
같은 책에 적혀 있기를 한 사람은 “완동종대에서 발행했다.”라고 표현하고 또 한 사람은 “완동구제에서 발행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같은 장소를 두고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완동구제가 종대로 사용되기 시작한지 몇 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아직은 옛날 이름과 새로운 이름이 섞이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을 통하여 전주시 풍남동 36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전주최씨 종대는 월당공이 아들 4형제를 위하여 독서실로 지은 집이 아니고, 연촌공이 말년을 보내다 돌아가신 살림집, 즉 완동구제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증명되는 것이다.
* 전주최씨세적록(貞) 영인 - 종대중건기.
가경보 1권 영인.
- 5~6 페이지 전주최씨족보기사 -
- 17~18 페이지 경보구서발 -
* 인물정보.
원호(元昊, 1396~1463) : 원주원씨. 자 자허(子虛), 호 관란(觀瀾), 무항(霧巷). 시호 정간(貞簡). 생육신.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원주로 은거하였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서쪽에 집을 지어 “관란재”라 하고 아침저녁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고, 마친 뒤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앉을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단종의 장릉(莊陵)이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일편야사>를 지은 연촌공을 복건자로 <몽유록>을 지었다.
최병수(崔秉銖) : 인물정보를 찾을 수 없음.
최봉우(崔鳳羽, 1753~?) : 하헌공(荷軒公), 안렴사공파, 선산종회, 인재공(현)파 18세 휘 봉우(鳳羽).
최종화(崔鍾華. 1764~?) : 중랑장공파, 영암종중, 의령공(지성)파 18세 자 성관(聖觀).
* 각주.
(1) 보물 제594호. 처음 존양사를 건립할 때 영정을 봉안하려 했으나, 기정공이 반대하여 봉안하지 못했는데, 훗날 김수항을 추가 배향할 때 김수항의 영정을 봉안하게 되므로, 연촌공도 영정을 복사하여 봉안하였는데, 이때 김수항의 영정이 낡아서 다시 그리면서 연촌공 영정 사본도 다시 그리게 된 것이다.
(2) 全州崔氏文成公大宗會. 당시에는 아직 시조 문성공 시향을 모시지 않았으므로 그다지 역할을 하지 않았다.
(3) 全州崔氏族譜記事. 전주최씨족보의 서문을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4) 完東宗垈. 전주부 동쪽에 있는 종대라는 뜻이다.
첫댓글 상기의 내용중에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라고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1404년에 지었다는 신빙성은 있는 것으로 추정
2) 최담(崔霮, 1346~1434)으로 호는 월당(月塘)이다. 17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벼슬이 집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1398년 중훈대부 진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0년에 낙향하여 전주 한벽당 정자를 짓고 시와 글을 벗 삼아 살았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전주향교와 월당공께서 거처를 하셨다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전혀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으로 추론되는 부분이고 한벽당은 여러차례의 중수를 그친 상황이고 조선 중엽의 묵화 (그림을 보면 )한벽당은
여러체의 건물로 되어 있는 것을 볼수가
@아베베 오랜만 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글씨를 창암 이삼만이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고
대부분 전주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며
전주최씨 가문에서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수 허허... 들은체도 않고 자기말만 쏟아내니 馬耳東風이고 牛耳讀經이지요...아는 것은 어찌 그리도 많으신지...
@여수 확실한 문헌이나 근거를 가지고 판단하시는 것이 옳은 판단일것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새로운 왕조나 정부가 개국하거나 탄생 하면
전여 관련 없는 인물을 중책에 등용하지 않은 부분이고
개국 전후에 중용하는 인물을 보면 연관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연구하여서
아니면 정정을 하여야 할부분일것이며
창암 이삼만 한분이 말씀하셨다고 관공서의 자료가 변경되지는 않는 부분입니다
@우보 남을 비방하시면 책임을 져야할 부분이 생기는 부분입니다
조심하셔야 할 부분입니다
@아베베
조선의 개국 1392년 개성 수창궁 홍무27년 7월 17일
한양 천도 1395년 왕궁완성
한양도성 완성 1396년
1396년 한양 천도 이듬해
병자년(1396, 태조5)에 어진 재상에게 천거받아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으로 왕명에 응하였으며, 무인년(1398, 태조7)에 중훈대부(中訓大夫)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임명되었습니다. 경진년(1400, 정종2)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꽃과 나무를 소재로 시를 지으면서 유유자적하였습니다.
@아베베 한벽당(寒碧堂) :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조 8년(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유허비에는 ‘월당루(月塘樓)’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 ‘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벽’이란 이름은 물이 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ㆍ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한장석(韓章錫, 1832년 ~ 1894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이조참판
@아베베 한벽당 한장석 선생의시
역정의 버드나무에 이별생각이 길고 / 驛亭楊柳離思長
석양에 수레 모는 한벽당이네 / 落日驅車寒碧堂
말 위에서 봄을 보낸 나그네 신세 오래인데 / 馬上送春爲客久
강남의 간사가 유람할 곳 찾기 바쁘네 / 江南幹事索遊忙
초록 물굽이가 개울 끼고 두 봉우리 솟았는데 / 綠灣夾澗峯雙角
붉은 꽃 맺힌 높은 누대는 물 한 곳에 있네 / 紅結飛樓水一方
바로 북쪽의 고향을 볼 수 없어 근심인데 / 直北鄕關愁不見
흰 구름 뜬 한강 북쪽으로 머리 돌리네 / 白雲回首漢之陽
함양,남원,지리산의 아기발도(아기 영웅이란 뜻의 고려어+몽골어) VS 이성계
한국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모두, 고려 말기 황산 지방에서 벌어졌던 고려군과 왜구와의 전투를 기록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년), 5백여 척의 군세를 가진 왜병 선단은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인 진포(鎭浦)에 상륙하여 밀집대형을 갖추고 성벽처럼 방어태세를 취했는데, 이들이 타고 온 배는 진포에서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火砲) 공격에 격침되고,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는 해안 마을을 휩쓸며 약탈을 일삼는다. 8월에는 함양(咸陽) 동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고려군을 패배시키고(원수
고려사절요》는 아지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賊植立不動,有一賊將,年纔十五六,骨貌端麗,驍勇無比,乘白馬,舞槊馳突,所向,披靡莫敢當,我軍稱阿只拔都, 爭避之.】
적은 박혀 있는 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 겨우 15, 16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적장은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이 아기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31, 경신(庚申)2, 신우(辛禑) 6년(1380년)
.... 운봉의 인월역에 진을 치고 남원을 포위한 왜구는 "
@아베베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에 임명하고 이성계는 1380년경 삼도도찰사로서
왜구를 진압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기록됨 위화도 회군 보다 8년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