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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의 성지 안동(安東)을 가다
여행의 네 가지 조건
멋진 여행에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좋은 볼거리, 맛있는 먹거리,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 지난 해 중국 광동의 ‘아리랑로드를 가다’를 다녀온 뒤 안동(安東)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다녀오고 싶어 하는 답사의 성지(聖地)가 됐다. 석주 이상룡, 의열단원 육사 이원록, 조선공산당 제1,2대 책임비서였던 김재봉과 권오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백하 김대락과 함께 카타리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누님은 전라도 담양 사람이다. 광주민주항쟁에 참여했다가 고문과 옥고를 치렀고 경상도 문딩이와 결혼해서 30년 넘도록 안동에서 살고 있다. 카타리나는 가장 경상도스런 안동에서 가장 전라도스런 홍어음식점을 운영한다. ‘행복한 집’이 그곳이다. 홍어집은 그녀의 생업이면서 사회운동의 거점이고 안동사회운동의 명소다.
지난해 대전의 ‘소방관(가명)’이 행복한 집을 다녀갔다. 소방관은 열댓 장의 사진을 단체카톡방에 올리며 자랑을 했는데, 얼마 전에는 충북의 홍순두선생이 다녀와 또 한 번 ‘자랑질’을 했다. 너무 배가 아프고 셈이 나서 늦기 전에 나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쇠뿔도 담김에 빼라고 생각난 김에 안동에 전화를 했더니 코로나 상황이니 두 세 명만 살짝 왔다 가라고 한다.
‘두세 명’이라는 말을 듣고는 적합한 인물 검색에 들어갔다. ‘아리랑로드’를 통해 친해진 윤기홍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지난 하반기에 퇴직한 윤선생도 나와 같은 백수다. ‘안동 함께 갈텨?’ 윤선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가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둘이서만 갈 생각을 하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장선생에게도 전화를 했다. 현직교사인 장선생은 수업을 당기고 조퇴를 해서라도 동행하겠다고 했다.
봉정사에서 만난 극락(極樂)
답사일정을 짰다. 밋밋하게 ‘행복한 집’으로 직행하는 것도 뭐해서 가는 길에 ‘봉정사’, 오는 길에는 ‘소수서원’이나 ‘병산서원’을 답사하기로 했다. 카타리나는 안동에 오면 무조건 임청각에서 자야 한다고 강권한다. ‘임청각에서 잘 수만 있다면 우리야 땡큐지.’ 쾌재를 부르며 가능하겠냐고 했더니 요즘에 숙박도 하고 있단다. 카타리나의 도움을 받아 임청각에 전화를 했다. 임청각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라고 하자 본인들도 연구소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며 넓은 방을 제공하면서도 숙박료 1/3을 깎아 줬다.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다 내고 싶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평택에서 봉정사까지는 불과 2시간 30분쯤. 과거 국도(國道)로만 5시간 넘게 걸렸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봉정사는 2018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국보(國寶) 15호 봉정사 극락전이 있어 역사책에만 가끔 언급됐을 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소박한 사찰이었는데 이제 호기심 어린 관광객들로 경내가 어지러울 전망이다.
봉정사 가는 길은 참 아름답다. 직선만 강조하는 요즘 도로들과 달리 봉정사로 가는 길은 곡선의 미학을 한껏 뽐낸다. 곡선의 미학은 산 아래 매표소에서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오르는 언덕에서 절정을 이룬다. 종무소 부근에서 안내 팸플릿을 뽑아드는데 친절하게도 안동시문화유산해설사께서 나와 안동관광 정보와 봉정사에 대해 꼼꼼히 안내해준다.
덕휘루는 만세루나 안양문처럼 극락과 사바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다. 고풍스런 덕휘루 마루 밑을 지나니 대웅전과 극락전이다. 대웅전은 석가여래의 집이고 극락전은 아미타여래의 집이므로 여기가 부처의 거처이고 극락이다. 국보 제15호 극락전은 고려 후기 건물이다. 1972년 수리 과정에서 1368년 중수했다는 묵서명이 나와 부석사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고 평가받게 되었다. 혹자는 건물의 외관이나 기법이 고려 후기 유행했던 고구려양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쯤 대웅전 마당을 나와 영산암에 올랐다. 밋밋했던 대웅전과 극락전에 비해 영산암은 건축적 아름다움과 조경이 뛰어나다. 그래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던가 ‘나랏말 ᄊᆞ미’ 같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단을 오르며 사진도 찍고 풍경도 감상했다. 인적이 드문 암자에는 고요가 흐르고 굴뚝에서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윤기홍선생은 굴뚝연기 참 오랜만이라며 반긴다. 여기가 진정 극락이다.
정말 ‘행복한 집’
주소만 들고 ‘행복한 집’을 찾았다. 구도심의 허름한 한옥인줄 알았더니 요즘 안동시에서 가장 핫 하다는 옥동 신도심에 위치했다. 집을 찾지 못해 두어 바퀴 빙빙 돌다가 차에서 내리는데 문밖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던 카타리나가 반겨 맞는다. 누님같은 이 푸근함이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서둘러 내오는 음식을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타리나 누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특별 음식이란다. 특별음식의 정체는 냉이튀김과 부침개였는데 솔가지와 갓 피어난 홍매 가지로 데코레이션한 정성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막걸리 뚜껑을 열어 술잔을 주고받았다. 홍어삼합도 진미(珍味)였고 짭짤하고 칼칼한 전라도 김치를 푹 익혀 내온 김치찜도 일품이었다. 조금 있으니 안기혁군이 합세했다. 나하고 한신대학교 대학원을 함께 다녔던 친구인데 올 1월 초 안동시청학예사로 발령받았다.
‘행복한 집’ 내부는 이곳이 진정 안동지역 민주화의 성지이며 사회운동의 중심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카타리나는 며칠 전 비로 물이 새는 바람에 집안이 엉망이라고 투덜댔지만 식당 곳곳에서 배어나는 눅진한 진정성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문재인대통령 사진과 유명 인사들의 친필휘호를 감상하다가 반대편 벽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무현대통령’이었다. 그가 앉았던 자리, 그가 먹었던 음식, 그와 나눴던 대화를 내가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 날 여자 친구 집안과 상견례가 있다는 안기혁군을 먼저 보낸 뒤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막걸리통이 여러 통 비워지고 우리의 목소리 톤도 점점 올라갔다. 카타리나의 배려로 내가 좋아하는 홍어전까지 섭렵하고 나자 윤선생과 장선생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우리 옆자리에서 홍어회와 막걸리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던 손님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비웠다.
결혼 후 안동에 내려와 여느 아낙들처럼 살림하며 학교와 성당에서 열심히 사회 봉사하던 카타리나가 ‘행복한 집’을 개업한 것은 2003년 5월. 그를 중심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결집하고 사랑의 연탄 나눔 안동지부가 결성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보수의 성지 안동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도 거행했다. 시를 쓰고 판각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도 ‘행복의 집’은 비빌 언덕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품안에서 자란 친구들과 동생들이 안동의 사회운동, 문화예술운동의 중심으로 자랐다.
영광입니다, 임청각(臨淸閣)
좋은 사람들과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이야기를 나눴으니 이제 훌륭한 잠자리만 구하면 더할 나위 없다. 숙소는 유서 깊은 임청각, 석주 이상룡선생의 고택이다.
안동에는 고택(古宅)이 많다. 옛부터 안동의 선비들은 관직보다 학문을 중시하고 학문보다 지조를 높게 여겼다는데, 그래서인지 고택 중에는 민족을 위해 헌신한 열사, 의사들의 유허가 많다. 대한제국시기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이만도선생의 옛집 향산고택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과 며느리 김락, 손자 이동흠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락 여사의 언니가 석주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이고, 김우락의 오빠가 김대락선생이다. 안동 내압마을은 독립유공자만 20여 명이다. 그 중 백하 김대락선생과 일동 김동삼선생이 가장 유명하다. 석주 이상룡의 처남이기도 한 김대락의 옛집은 택호(宅號)가 ‘백하구려’다. 도산면 원촌마을에는 육사 이원록의 옛집이 있다. 풍산읍 오미마을은 조선공산당 제1대 책임비서 김재봉과 의열단원 김지섭의 고향이며, 풍천면 가일마을은 제2대 책임비서 권오설과 권오상의 고향이다. 권오설의 집터는 냉전체제 하에서 콩밭으로 변해버렸고 권오상의 수곡고택은 아직도 남아 있다. 가히 독립운동의 성지(聖地)라고 일컬을 만하다.
보물 제182호 임청각은 지조로만 따지면 안동 최고의 고택(古宅)이다. 명문 고성 이씨의 종택이며 500년이 넘는 내력을 지녀 역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도 대단한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 민간주택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일제가 집 앞으로 철도를 내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임청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석주 이상용(1858~1932)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석주가 있기에 임청각이 있는 것이지 임청각 때문에 석주가 대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임청각 출신의 독립유공자는 석주를 비롯해 11명에 달한다. 3.1운동 당시 안동에서 가장 먼저 만세를 부른 이상동, 이봉희도 석주의 동생이다.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손부 허은(이육사의 외사촌)도 독립투사였다. 그 이름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진다.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양반가옥 답게 안채와 사랑채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은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 큰 ㅁ자 안을 4개의 독립된 공간으로 구분했는데, 동쪽에는 군자정과 사당, 우물마당에는 사랑방과 우물방이 있다. 내당에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안사랑, 부엌이 있으며, 가장 서쪽의 중정(中庭)에는 부엌과 뒷방, 마루와 창고가 있다. 앞쪽으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는 행랑과 창고, 화장실 등 부속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카타리나의 ‘행복한 집’에서 수다를 떨다보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대리기사를 불러 운전을 맡기고 우리는 안동의 밤풍경을 감상했다. 옥동에서 군자정까지는 가는 10여 분 대리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안동사람이 아닌 걸 눈치챘나보다.
‘옥동이 왜 옥동인지 아십니꺼?’
뭔가 집히는 게 있기에 ‘혹시 감옥이 있던 곳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더니 ‘어떻게 아셨습니꺼’라며 깜짝 놀란다. 그 뒤로도 기사님의 지식방출은 계속됐다. 안동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신도시건설 과정에서의 변화, 곳곳의 지명 등 상식이라고 하기에는 광범위하고 해박한 지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아세요’
‘뭐 안동사람들은 다 이 정도는 안다 아입니꺼’
군자정에 들어서니 관리를 맡고 있는 김선생님 부부가 반가이 맞는다. 후손 김항증선생이 연로하여 서울 따님 댁에 기거하시고 김선생 부부가 집을 관리한다고 한다. 너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해서 무척 미안했다. 우리 숙소는 사랑방이다. 책방이 달린 온돌방이어서 셋이 자기에는 넉넉했다. 마련해준 매실차를 한 잔씩 마시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윤선생은 석주선생님의 책방에 자리를 폈고 장선생과 나는 사랑방에서 자기로 했다. 오랜만에 누워보는 군불 땐 구들장이 뜨끈하다.
월영교와 군자정, 그리고 병산서원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오랜만에 누워보는 구들이 낮 설었던가보다. 하릴 없이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들었는데 핸드폰의 알람소리가 울린다.
8시에 아침을 먹었다. 김선생님 부부는 우리를 안채로 안내하더니 당신들은 안방, 우리는 웃방에 앉게 했다. 밥상은 가장 나이가 적은 장선생이 들게 했다. 그것이 예법이라고 했다. 우리 중 외모가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윤선생에게는 독상, 장선생과 나에게는 겸상을 내주었다. 소박한 밥상이지만 담백하고 정성이 가득했다. 식사를 함께 하며 김선생님은 아들자랑을 한다. 서울대 한국사학과에 입학했는가 본데 윤선생과 동문이라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한다.
카타리나는 아침에 월영교에 다녀오라고 권했다. 2003년 안동댐 건설로 사라진 월영대 자리에 목교와 누정을 지어 만든 다리다. 한복체험같은 행사도 하고 풍광도 수려해서 지금은 안동의 명소가 되었다. 임청각을 나서는데 집 앞을 가로질렀던 철길이 보이지 않았다. 확인해보니 성역화사업을 위해 철길을 철거하고 2025년까지 임청각 원형을 복원한다고 한다. 철길이 개통됐던 1942년 일제통치 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이 고통이라며 자결했던 이준형선생이 떠오른다. 임청각이 복원되면 그의 영혼이 다시 돌아오려나.
임청각과 탑동고택 사이에는 법흥리 7층 전탑이 있다. 벽돌로 쌓은 전탑은 삼국시대 말기부터 유행했지만 석탑에 밀려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일부에서만 유행했다. 보통은 5층이나 3층인데 법흥리 전탑은 7층이다. 그러고 보면 임청각이나 탑동고택도 본래는 법흥사 터였을 것이다. 불교가 쇠퇴하고 빈자리를 유교가 채우면서 대찰(大刹)이 명문가의 종택이 된 풍경이다.
10분밖에 안 걸린다고 해서 출발했는데 30분 가까이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간간이 비까지 내렸지만 그래도 풍광이 수려해서 걸을만했다. ‘월영교(月影橋)’, 달밤에 노닐었더라면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월영교 건너편 찻집에 올라가 커피를 마시는데 카타리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임청각에 도착했으니 빨리 오란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서둘러 달렸다.
카타리나와 함께 임청각을 답사했다.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임하의 풍경도 수려했지만 무엇보다 사당 참배가 뜻깊었다. 임청각 사당에는 석주 이상룡선생을 비롯해서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은 열한 분의 영정과 훈장, 표창장을 걸어두고 있었다. 유가(儒家)에서 흔히 말하는 4대 봉사, 5대 봉사하는 사당보다 훨씬 자랑스럽고 당당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카타리나가 이끄는 대로 큰절을 올렸다. 선생의 당당한 삶과 의로운 기(氣)가 폐부 깊숙이 꽂힌다.
엇 저녁 술자리에서 약속했던 권오설선생의 묘(墓)는 다음에 답사하기로 했다. 날도 궂은 데다 장선생이 조금 일찍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을 겸 카타리나와 함께 안동문화예술의전당으로 향했다. 전시실에서는 판각을 하는 남천 손현목선생과 제자들의 작품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오래 전 카타리나의 ‘행복한 집’을 출입하며 예술혼을 키웠던 후배들이 성장하여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손선생의 해설을 들으며 감상하는 판각의 세계는 참 매력 있었다. 분명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손선생의 안내로 지하 한식뷔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경상도음식은 맛이 없다’ 또는 ‘먹을 것이 없다’는 선입견으로 쑥국 한 수저를 떴는데 향긋한 쑥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충주에 사시는 아버님을 뵙고 올라가겠다는 윤선생을 고려해 병산서원으로 답사일정을 변경했다. 안동에서 하회방면으로 나가는 길은 넓고 시원하게 확장되었다. 답사객의 옛 정취만 고려한다면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2차선을 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의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하회삼거리에서 곧장 병산서원 방면으로 향했다. 병산서원 방면으로 접어드니 얼마 되지 않아서 비포장도로가 시작됐다. 넓직한 포장도로에 식상해서인지 오랜만의 비포장도로가 정겹다. 오래전 대학원 답사를 할 때 ‘도로를 포장하면 쓸데없는 사람들이 드나들어서 싫다’던 류성룡선생 후손의 말씀이 생각났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병산서원은 꽤 알려졌다. 마을 입구쯤에는 전에 없던 주차장까지 마련되었다. 병산(屛山), 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절벽 아래로 낙동강이 흐른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보기 힘들어진 너른 백사장도 무척 반갑다. 주차를 하고 내방객들과 함께 병산서원을 향해 걸었다. 서원입구에는 병산서원의 상징 ‘만대루’가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경상북부지역에서 퇴계의 흔적을 만나는 것은 쉽다. 퇴계의 학맥으로 경상북부가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주 이상룡도 퇴계의 학맥이다. 대한제국시기 의병투쟁을 전개한 유인식, 이만도,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김동삼, 김대락도 퇴계의 영향 아래 있다. 그래서 병산서원 답사는 역사적 의미, 건축적 의미, 학문적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다. 입교당에 오랫동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당에는 매화가 만발하고 만대루 넘어 적벽(赤壁)과 백사장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만대루는 전날 답사했던 덕휘루와 닮았다. 덕휘루의 다른 이름이 만대루이니 그게 그거일 수 있다.
서원에서 루(樓)는 비단 학생들의 풍류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이름 있는 서원들은 ‘학벌’의 중요한 근거였고 정치·사회적 여론이 형성됐던 공간이었다. 송시열을 배향했던 화양동 서원은 서울대학과 같은 힘을 발휘했고, 영남에서는 도산서원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서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은 학봉 김성일을 배향하는 호계서원과 함께 영남의 연세대학과 고려대학이었다. 그만큼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강력했다는 말이다. 유명한 ‘병호시비’에도, 개항기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할 때도, 대한제국 시기 의병을 일으킬 때도 만대루에 모여 여론을 모았을 것이다.
문경을 거쳐 이화령 터널을 지나니 어느새 충주(忠州)다. 윤선생을 집 앞에 내려주고 우리는 평택으로 달린다. 1박 2일의 안동답사가 가슴을 흩고 지난다. 오가는 차 안에서, 막걸리 잔 기울이며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 카타리나를 통해 그리고 임청각을 통해, 안동이라는 도시를 통해 얻었던 좋은 기운들이 혈관과 세포를 통해 온 몸으로 퍼진다.(2021.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