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스카나’
- 우리들의 아버지는 누구였나!
늦가을, 아버지가 생각난다
내 고향은 충남 서천이다. 고향 마량포는 서천에서도 버스를 타고 30분쯤 들어가야 하는 바닷가였다. 아버지는 17살부터 중선(中船)을 타고 조기잡이를 다녔다. 내가 조금 성장했을 때는 1톤이 채 안 되는 작은 어선을 타고 꽃게와 대하, 주꾸미를 잡았다. 바다가 생존의 밧줄이었지만 아버지는 평생동안 어촌과 어부라는 직업을 부정하고 멸시했다. 눈에 거슬리는 이웃 사람에게는 ‘뱃놈들’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완고하고 폭력적이었다. 자주 화를 냈고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 쓰고 소리를 지르면 평화로웠던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동토(凍土)로 변했다. 매를 들고 훈육하는 것에도 거침없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가족들의 행복을 저해하는 독재자라고 생각했다. 웃으며 재밌게 놀다가도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밖으로 나가거나 한쪽 구석에 숨기 바빴다.
아버지의 삶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비로소 이해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소년기에 해방을 맞고 20대 초반에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어떤 환경과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그때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사랑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조금씩 깨달았다. 우리 아이들의 사춘기를 겪으며, 바르고 정직하게만 성장했다고 자부했던 내가 얼마나 부모를 힘들게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늦가을에 떡 한 덩어리를 아들에게 먹이고 싶어 덜덜 떨며 골목길을 서성였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도 그제서야 생각났다.
우리는 가까우면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생활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 지역에 오래 살았다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이라도 관심과 알려는 노력 없이는 감히 ‘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아버지는 몇 년 전 소천하셨다. 평소 나는 아버지에게 괜찮은 아들이었고 살아 계신 동안 효도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를수록 잘해드린 것보다 아쉬운 것들, 부족한 것들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진한 사랑이 묻어나는 영화를 볼 때 더욱 그렇다.
메흐디 아바즈 감독과 작품세계
저녁에 일찍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깼다. 눈이 침침해서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네플릭스에서 ‘토스카나’라는 영화를 한 편 골랐다. 내가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순전히 ‘토스카나’라는 지명 때문이다. 토스카나는 로마 북서쪽에 있다. 피렌체, 시에나, 피사, 아레초와 같은 익숙한 도시들이 토스카나에 속한다. 몇 년 전 아내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토스카나 지방을 지났다. 낮은 구릉과 널따란 평원,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과 올리브 숲, 케냐의 마사이족처럼 쭉쭉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인상적이었던 지역이다.
영화 ‘토스카나’는 덴마크 영화다. 덴마크는 안데르센의 나라다. 목장과 우유, 교육으로 주목받고 그룬트비라는 교육사상가로도 유명하다. 나에게 덴마크 영화는 익숙하지 않다. ‘언 에듀케이션, ’하루‘ 등을 연출한 유명한 여성 감독 론 세르피그, 푸셔 시리즈로 유명한 니콜라스 빈 딩 레픈 정도가 기억된다. 메흐디 아바즈 감독은 1982년생이다. 지금도 젊은데 영화는 2017년부터 찍었다. 초기작인 ‘와일 위 리브(2017)’, ‘콜리전(2019)’은 가족들의 지원 속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작과 각본을 ‘아바즈’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담당했다. 홀로서기를 하면서 만든 첫 번째 작품이 2022년 ‘토스카나’와 2023년의 ‘뷰티플 라이프’다.
나는 메흐디 아바즈 감독이 ‘토스카나’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든 이유를 모른다. 영화 제목도 ‘토스카나에서 생긴 일’이라던가 ‘토스카나 와이너리’가 아닌 ‘토스카나’라는 지명만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연환경과 정서를 가졌거나 아니면 나처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홀딱 반했을 수도 있다. 토스카나는 그만큼 낭만적이고 삶이 진실하다.
아버지의 삶이 빛나는 순간을 경험할 것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테오(안데르스 마테센)는 성공한 요리사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출신이지만 덴마크에서 활동하며 미슐랭 가이드의 별들을 수집했다. 소피아(크리스티아나 델아나)는 집시였다. 떠돌이 생활에 진력이 나서 토스카나 지방을 지날 때 혼자 도망쳐 테오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자랐다. 테오에게는 코펜하겐 항구가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멋진 레스토랑을 짓는 꿈이 있다.
자금이 부족해서 전전긍긍할 때 아버지의 부고가 도착했다. 테오에게 아버지는 나쁜 기억이다. 아내와 자식을 팽개치고 식당운영과 요리에만 몰두했던 매정한 사람이었다. 테오는 아버지의 죽음을 유산을 팔아 식당을 신축할 기회로 여겼다.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토스카나에 갔을 때 아버지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소피아(크리스티아나 델아나)를 만났다. 웨이츄레스였던 소피아는 테오에게 적대적이고 도도했다. 아버지의 열정과 진심, 토스카나의 소울을 이해하지 못하는 속물로 대했다. 주변 사람들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존경심도 테오를 당황하게 했다. 그렇다고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테오는 여러 사람이 모인 파티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신에게 개자식’이었다고.
답보상태에 있던 레스토랑 매각은 소피아의 결혼식 파티를 계기로 급진전한다. 테오는 아버지의 전통적 방식을 버리고 덴마크에서 불러온 일급 요리사들과 함께 환상적인 요리를 만들어 구매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영화에는 반전이란 것이 있다. 테오의 생각은 ‘아버지의 레시피북’과 ‘마당에 세워진 동상의 실체’, ‘집안에 남겨진 기억의 잔재’를 확인하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테오만 기억하지 못했을 뿐 사람들의 기억과 유품, 집 안 구석구석에 빼곡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매각했던 레스토랑을 두 배를 주고 다시 매입한 테오는 아버지의 레스토랑을 복원했다.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오고, 결혼 후 남편 곁을 떠났던 소피아도 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다시 레스토랑을 찾는다.”
“토스카나”는 관객들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극적인 장면 없이 느리게 전개되는 서사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파고들지도 못했다. 액션 씬이 자주 등장하는 스릴러 영화도 아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의 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전통의 계승과 변용’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자애로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한국전쟁과 50, 60년대의 엄혹하고 궁핍한 세상에서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성장하는 아이들 곁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전후 세대인 우리는 아버지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기보다 엄격하고 자애롭지 못했던 기억들만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어색함 때문에 갑자기 성장한 아이들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아버지를 밖으로 밀어내기만 했다. 근래에는 아버지의 경험과 지혜가 ‘꼰대’라는 이름으로 멸시당한다. 자녀들은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근현대사의 험난한 궤적을 뚫고 가족과 자녀를 건사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을은 반추의 계절이다. 이 영화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되새김질하는데 좋은 안내서다. 무식하고 투박해 보였던 아버지의 삶이 빛나는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2023.11.07. 평택시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