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3)
[에피소드5]
유격훈련은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는 격렬한 훈련이다. 그래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해병장교들도 보병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는다. 또한 공수 특전단 장교들도 보병에서 차출된다. 유격훈련은 육군의 모든 병과 중 오직 보병만이 거쳐야할 필수 코스인 것이다. 북한의 124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유격전의 중요성과 그 훈련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한국 육군의 특수훈련 중에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이 있다. 공수훈련은 공중에서 떨어질 때 인간에 생래적으로 존재하는 공포감과의 전쟁이라면. 유격훈련은 인간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체력과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격훈련의 개요는 첫째 체력단련인데, 장거리 산악 급속행군, 유격체조 및 장애물극복훈련, 산악구보, 외줄로프타기, 암벽등반, 수중낙하훈련 등이다
둘째는 유격전술훈련인데, 그 내용은 수색정찰, 침투 및 습격, 도피 및 탈출 등이다. 유격훈련에 있어서는 피교육생의 계급호칭을 부르지 않고, 전원 X번 올빼미로 통칭된다. 그 것은 사고방지를 위해 교육생의 긴장도를 높이기 위한 압박용이다.
유격훈련 하루전날 가장 힘들다는 54Km의 산악급속행군에 대비하여 나는 양말에 비누칠을 하였다. 비누칠을 하지 않으면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다 갈라지고 통증이 심하여 행군을 견뎌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야영에 필요한 모포는 친구인 육사 초군반 박태순소위에게 가서 A급으로 빌려왔다. 육사출신 장교들에게는 모든 지급 물품이 최상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일 새벽 일찍이 상무대를 출발하여 2열 행군종대로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코스는 광주 무등산을 넘어 적벽, 이서, 동복으로 이어지는 54KM의 험준한 산악로였다. 앞에서 언급한바 5중대 전우가 행군 후 사망한 일도 있고 해서 긴장이 되었다. 말이 행군이지 유격대 인솔 장교가 선두에서 몽둥이로 압박을 가하면서 행군속도를 높이면, 자주 앞사람간의 사이가 벌어진다. 그러면 행군대열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로 구보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몽둥이를 든 유격대 장교들과 올빼미 마크가 새겨진 붉은 모자를 쓴 조교들이 호각을 불며 행군을 독려 압박했다. 예정된 시간 안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 기진했다. 그래서 행군대열에서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뒤에 지프차가 다가왔다. 군의관 대위가 “힘이 들면 나에게 행군을 포기해도 좋다” 고 포기 의향을 물었다. 아마 5중대에서 일어난 사망 사고 때문에 재발방지를 위하여 학교당국이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만약 행군을 포기 한다면, 다음 중대에 합류해 다시 유격을 받든지, 아니면 보병학교 졸업 후라도 반드시 유격훈련을 마쳐야만 제대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권유를 거부하고 이를 악물고 대열에 따라 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은 후 담배 한 모금 피우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니, 조금 견딜 만 하게 되었다. 역시 당시 우리들은 조금만 쉬어도 피로회복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만큼, 다이나믹했다. 그래서 그 때 내가 포기 안한 게 천만 다행이었다. 짧은 점심식사가 끝나고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에다 개인화기로 무장한 채 구대별로 박격포 까지 교대로 들어야 했다. 따라서 지칠 대로 지쳐 10분간의 휴식시간이면 군장을 벗지 않은 채 뒤로 벌렁 누워 휴식을 취했다. 유격장에 도착하기 전 이서라는 곳에서 강물을 건너야했다. 물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5~6명이 손을 잡고 강을 건넜다.
유격장에 도착하니 식당입구에 기행1기가 훈련을 필하고 헌정한 돌비석이 있었다. 비석에는 “극한 속의 여유”라는 의미심장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다음날부터 맹렬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유격체조와 선착순 산길 뺑뺑이 돌리기 등 끝임 없는 기합을 받으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체득했다. 그것은 “하라는 대로 다 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기합을 받더라도, 눈치껏 요령을 피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조교가 안볼 때는 체조를 하지 않고 쉬다가, 다시 그들의 시선이 돌아오면 하는 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하루일과가 끝날 무렵 재수 없게도 나는 조교에게 요령이 발각되어 그 추운 산속에서 물에 들어가는 오리체벌을 받았다. 물에 옷이 다 젖으니 산속 저녁 무렵의 한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옷을 말릴 곳도 없었다. 나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 물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자니 괴롭기 짝이 없었다.
며칠 동안, 우리는 너무 지쳤기 때문에 양치질 하는 사람이 없었다. 훈련이 끝나면 식사하고 그대로 쓰러져 잤다. 그래서 연병장에 집합하면 입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때 생각지도 못한 통닭이 광주시내에서 개인당 한 마리씩 단체로 배달되어 왔다. 중대장이 몰래 시킨 것이었다. 중대장이 치킨업자한테 약간의 혜택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 소식을 연대장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격이 끝나고 언젠가 학군장교들이 집합한 자리에서 연대장은 우리 중대장을 “어이 미스터 통닭” 이라고 불러 교육생들의 배꼽을 잡은 적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사식을 못하게 되어있는 유격장에서 맛있는 치킨을 먹을 수 있어서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닭을 좋아하지 않는 옆 동료 덕분에 그 친구가 건네 준 통닭까지 먹을 수 있어서 더더욱 행운을 누렸다. 그때의 닭은 하도 맛있어서 뼈까지 남기지 않고 씹어서 먹을 정도였다.
그 친구의 이름은 서울고를 나오고 서울대 국문과 졸업인 최종용군이었는데, 자기 큰아버지가 당시 국회국방위원장인 최영희 의원이었다. 최종용은 당시 결혼을 한 어엿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는 보병학교 졸업 후 후방사단인 광주 인근 31사단에 근무했다고 들었다. 제대 후 그는 삼성물산에 근무했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다. 최종용은 심성이 아주 선량해서 그가 내무반 바로 옆 동료가 된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고, 훈련기간 중 서로가 정신적으로 많은 의지를 했다.
[에피소드6]
유격훈련 중에 가장 두렵고 사고발생 개연성이 높은 것이 수중낙하(일명 하강훈련) 훈련이다. 유격교관이 훈련에 들어가기 전 겁이 나서 훈련을 하고 싶지 않은 장교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몇 십 명의 신청자가 우르르 나왔다. 수영을 못하는 나도, 훈련을 면제해 주는가 하는 얄팍한 마음이 들어 신청대열에 합류했다.
그러자 상황은 생각했던 것하고 정반대였다. 교관은 정신을 강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물속에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이는 등 기합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훈련생들이 훈련코스를 마칠 때까지 기합을 주면서 기다리다가 우리를 최종적으로 훈련에 투입했다. 훈련 코스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높은 곳에서 깊은 물속에 떨어뜨리는 코스였다. 수영을 잘 못하는 교육생들이 물위로 떠올랐을 때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조교들이 물을 먹이는 등 골탕을 먹였다. 나는 수영하면서 숨은 잘 못 쉬지만, 영법(泳法)은 학교체육시간에 배웠기 때문에, 짧은 거리는 숨을 쉬지 않고 헤엄을 칠 수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코스는 골탕을 먹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두 번째 코스는, 절벽 높은 곳에서 활차를 타고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다가 교관의 붉은 기신호에 맞추어 활차를 놓고 물위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출발부터 낙하지점까지 185m나 되는 긴 거리인데다 높이도 49M이기 때문에, 활차에 손을 잡는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중간에 손을 놓아버릴 경우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래가 물이지만 마치 고층빌딩에서 떨어지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즉 떨어 질 때의 충격과 물에 부딪히는 압력 때문에 심장마비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교관이 적색 기를 높이 들었을 때 다리를 수평으로 들은 다음, 기를 내릴 때 활차(滑車)의 손을 놓고 물속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을 놓칠 경우 줄의 끝에 있는 바위에 부딪혀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따라서 사망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바위에는 고무덮개를 씌워놓았다. 그러나 고무에 부딪히면 죽지는 않지만, 충돌 압력 때문에 장애자가 된다고 했었다.
교관의 거듭된 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고가 일어나는 이유는 도착지점에 진입하기 전 공포심 때문에 교관의 신호 깃발을 보지 않고 눈을 감아버린다는 점이었다.
나는 두 번째 코스도 멋지게 통과했다. 처음에 높은 절벽 위에 있는 활차를 잡았을 때는 으스스 했다. 그러나 바람의 저항으로 바지가 팔랑팔랑 거리며 신속히 내려갈 때는 짜릿한 재미도 있었다. 눈에 잘 보이라고 붉은 유격대 모자를 쓰고 아래위로 온통 붉은 옷을 입은 교관이 붉은 깃발을 올렸다가 내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신호와 함께 교육받은 그대로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안전하게 떨어졌고 XXm를 곧장 수영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 때 그 기분은 마치 봄날의 아름다운 꿈을 꾼 것 같은 상쾌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먼저 훈련을 받은 중대원들은 햇볕에 이미 물에 젖은 옷을 다 말렸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담배를 한 가치 씩 맛있게 피우면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창피한 마음을 느꼈고 훈련과 인생에는 절대 공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광우 자서전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