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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백투더 천국, 차원여행>의 줄거리:
시간여행을 주 소재로 한 백투더퓨처라는 영화를 아시지요? 이와 비슷하게 기독교 신앙은 실제로 차원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여행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차원여행은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일어납니다. 차원여행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있는 하늘 아버지계신 천국으로 여행할 수가 있습니다.
백투더 천국, 차원여행
(막15:6-20)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백투더 천국, 차원여행>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Back to the Future라고 하는 제목의 영화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시간을 거스르고 시간의 흐름을 앞서가는 시간여행이 주소재가 되어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거나 시간의 흐름을 앞질러갈 수는 아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공상과학영화이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어요.
그런데 차원여행이 있습니다, 여러분.
시간여행은 시간의 흐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을 거슬러 가거나 앞질러가거나 간에 시간의 흐름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시간여행인데, 차원여행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그 차원을 넘어서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차원여행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느냐?
시간여행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일어납니다, Back to the future, 왜 future인데 back이라고 하는 말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미래로 갔다가 다시 내가 사는 현재로 돌아와야 되니까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back to the future 시간을 거슬러야 되는 것이라면, 이 차원여행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가는 흐름이 있는데, 그 마음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갑니까?
이 세상에서 정해놓은 가치들을 향해서 흘러갑니다.
건강, 돈, 권력, 명예, 이런 것들을 향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차원여행은 이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일어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차원여행의 끝은 어디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가는데, 이 사람들의 마음의 흐름을 거슬러서 차원여행이 시작되면 그 차원여행의 끝은 바로 천국이라는 거예요.
지금 차원여행을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 분명히 해두셔야 돼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뭐냐 하면 ‘지금 하늘아버지 계시는 그 천국이 첫 번째 관심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관심인 게 신앙이에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그 천국으로 차원을 달리 하는 차원의 여행을 하려는 것이 불가능한 게 아니에요.
마음이 흘러가는 마음의 흐름을 역행해서 가면 됩니다.
그 마음의 흐름을 역행하다 보면 언젠가 천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천국여행이 지금 시도되어야 되고, 지금 천국에 도달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이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는 천국여행에 우리 마음이 붙잡을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해주는 목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목표지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해운대 해수욕장에 가서 수영하며 놀고 싶다, 그러면 부산이라는 목표지점으로 가야 해운대 해수욕장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방향성도 잡을 수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마지막 목표가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고, 십자가 바로 너머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과 천국이 붙어있고, 그 붙어있는 접점에 십자가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십자가 너머에 천국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것은 차원여행을 해나간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바라바보다도 열등한 존재로 취급을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명절 때가 되면 로마총독이 죄인 중의 한 사람을 사면해주는 관습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으니까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물어봅니다.
빌라도 딴에는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생각되는 바라바를 거명해서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놓아줄까 하고 물어봅니다.
사실은 빌라도가 그렇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아무나 한 명을 정해서 놓아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도 드세게 예수를 고발하고 있으니까, 자기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죄를 확증할 수가 없고 유대인의 고발이 전혀 설득력이 없어서 놓아주고 싶은데, 유대인들의 반발이 심할까봐 자기 책임을 면하려고 바라바와 예수를 선택하라고 내놓습니다.
빌라도 생각에는 아마 바라바는 극악무도한 죄인이니까 틀림없이 이들이 바라바보다는 차라리 예수를 놓아달라고 하겠지 하는 짐작이 있었을 것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민란을 꾸미고 민란 중에 살인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바라바가 누구냐 하면, 이 세상 삶의 현장으로부터 격리시킨 자입니다.
삶의 현장에 같이 놔두었다가는 안 될 것 같다고 해서 삶의 현장에서 격리시킨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바라바보다도 예수님이 못한 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뜻이 됩니까?
이 세상을 떠나라는 뜻이에요, 이 지구를 떠나라는 얘깁니다.
바라바는 이 지구 안에서 그래도 삶의 현장으로부터 격리된 자인데, 삶의 현장으로부터 격리된 그 바라바보다도 예수님이 더 못한 존재로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뭐라고 하는가 하면 ‘지구를 떠나라’라는 얘깁니다.
지구를 떠나라고 하는 외침이 들리는 장소에 예수님이 서 계신 이유가 뭡니까? 지금.
예수님이 놓여 져 계신 그곳이 바로 우리가 서야 될 자리인 거예요.
우리가 차원여행을 하면서 지나가야 되는 지점인 겁니다.
그냥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사건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사건을 향해 가고 있는 이 모든 과정이 다 십자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거쳐야하는 지점을 주님께서 표시해나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에서부터 유대인들의 재판, 빌라도의 재판 그리고 오늘 바라바 선택, 그 다음에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로 때리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고 희롱한 그 자리, 이게 다 우리가 차원여행을 하기 위하여 거쳐야 되는 지점을 주님께서 마크를 해나가시는 겁니다.
그 끝 지점은 십자가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고백을 할 때는 단순히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주문처럼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의 의미가 겟세마네서부터 재판과정과 바라바를 선택하면서 버림받는 과정, 로마 군인들에게 조롱받는 과정이 다 아코디언을 누를 때 압축되는 것처럼, 십자가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 과정 전체가 다 밟아지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게 안 되는 거라 이겁니다.
겟세마네서부터 재판과 바라바 선택과 로마 군인들의 희롱의 과정이 다 포함되어야 주님과 함께 죽는 일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들어가는 마음의 흐름을 역행하여 거스르는 차원여행의 과정들이라는 겁니다.
자,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여러분, 겟세마네서부터 지나온 모든 과정,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희롱한 바로 직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다 이루어져야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게 바로 차원여행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는 여행인지 한번 살펴보자는 거예요.
겟세마네는 핵심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겁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비로소 겟세마네에서 심히 놀라실 그때에 사람들이 처한 저주의 상황으로 떨어지시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똑같은 입장에 서계시면서 주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들이 이제 우리가 차원여행을 해야 되는 지점들을 마크해 나가시는 것인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몸으로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됩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내가 붙잡고 있는 한, 아버지의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차원여행의 출발점이 이 세상의 가치를 붙잡는 손을 놓아버리는 겁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는 것은 ‘돈이 벌리든 안 벌리든, 내가 일찍 죽든 늦게 죽든, 내가 승진해서 높아지던 낮아지던,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을 들어가든 말든,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내가 완전히 마음에서 놓아버리겠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것이 차원여행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재판과정을 거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산헤드린, 선민인 유대인의 재판이 있었고 빌라도의 재판이 있었는데, 재판이 너무나 다르게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 살펴본 것처럼, 유대인의 왕이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빌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돈과 권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전혀 마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걸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확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전에도 그러셨지만 겟세마네를 통해서 이미 다 놓아버리셨습니다.
권력도 돈도, 이 세상 안에 있는 어느 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님의 라이벌이 아니고, 죄를 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러므로 죄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삼각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에게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가치와 선민인 내가 삼각관계에 있게 됩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가치를 놓았을 때 예수님이 적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마는,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상가치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대적을 사랑하는 게 돼버립니다.
돈이 하나님의 원수예요.
왜 그렇습니까? 선민들에게 있어서는 내 마음을 빼앗아 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마음을 돈이 빼앗을 수 있으니까, 건강문제가 빼앗아갈 수 있으니까…
내 인생의 비전이 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냐 하면, 내 마음을 내 인생의 비전이 빼앗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세상의 가치를 버립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버려야 된다.
그렇게 원수로 규정을 해버리십니다.
돈과 건강과 비전과 성공과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원수로 규정을 해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발끈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었나 하면, 돈 많이 주시고 건강 주시고 성공 주시고 승진 주시는 분으로써 하나님의 존재가 의미 있었었는데, 그 모든 세상의 가치를 다 하나님의 원수로 규정해버리니까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겁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라바 같은 살인죄를 지은 자를 선택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라바가 진짜 예수님보다 낫기 때문에.
이들에게 바라바가 예수님보다 더 나은 이유가 뭡니까?
바라바가 사람을 죽인 이유는 간단해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그 가치를 가치 있게 여겼고, 그 가치를 손에 쥐려고 한 겁니다.
민란을 일으켰다는 걸 보니 이 사람이 열심당원이었다고 추측해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민란을 일으켰다가 사람을 죽였다고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국의 독립이라고 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를 같이 동의하고 추구하고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니까 바라바가 살인자라도 예수님보다 나은 것이에요.
세상의 가치를 같이 추구하고 그 마음의 흐름을 같이 따라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흐르는 마음들을 다 정죄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바라바가 나은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돈이 하나님의 원수라니?
내가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돈 달라고, 건강 달라고, 모든 가족의 일이 형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의 흐름과 똑같이 가고 있으면서 다른 것은 단지 하나님을 찾고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찾고 있는 그 모든 가치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니까 미울 수밖에 없지요.
또, 로마 군인들의 희롱도 사람들이 흘러가는 마음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기 전의 마지막 지점.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고 하고, 갈대로 때리고 침을 뱉는 그 상황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됩니까?
로마 군인이라는 것은 그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지배력의 상징이고 실체인 로마정부의 말단의 단계를 말합니다.
지배력의 말단단계.
이 지배력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에요.
마음의 흐름이 지배력을 확보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지배력은 내 뜻대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지배력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힘으로 지배할 수도 있지만 설득으로 지배할 수도 있어요.
내 뜻을 다른 사람에게 관철시키는 게 지배입니다.
예쁜 아내가 남편에게 애교를 부려서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사게 되는 것, 이게 지배하는 것이에요, 애교를 통해서 지배하는 겁니다.
이 지배력의 말단이 바로 로마시대 때의 군인이었어요.
그런데 지배력의 제일 마지막 끝인 자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그 자리, 이 세상 지배력의 말단에 속한 자들에 의해서 조롱받을 수밖에 없는 그 자리, 이 자리가 바로 십자가 직전의 자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이 자리를 거쳐야 된다는 얘깁니다.
마음을 거스르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좋아서 쫓아가고 흘러가는 그것을 거슬러서 차원여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내 마음에서 다 방면해버리고 ‘이제는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내 마음은 차원여행을 통해서 십자가 너머에 있는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 지금 가겠습니다, 내 몸이 남아있는 내 삶은 아버지 뜻대로 하시되 사업이 잘되든 못 되든, 내가 60에 죽든 70에 죽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자식문제가 어떻게 되든 아버지 뜻대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모든 세상의 가치를 놓으면서부터 시작해서 교회에서는 버림을 받는 거예요.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해요,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을 벌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부흥 하려고 하니까, 교회부흥이 하나님보다 더 좋은 거예요.
교회부흥이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다 이 세상 가치를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자고 하는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는 차원여행을 주장하다 보면 미움 받게 돼있지요.
하나님의 원수를 좋아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거니까.
오죽 사람이 못났으면 지구를 떠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의 바람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선택해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입사도 취직도 입학시험도 결혼도 그렇고 모든 과정이 다 나를 선택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라바, 사회에서 격리된 자보다도 못한 자, 완전히 지구를 떠나야만 하는 그 위치에 서야 차원여행의 과정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재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원수로 취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는 죽어버려요.
교회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이야기하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미워합니다.
선민들이 나를 미워해요.
그리고 바라바와 로마 군인들, 지배계급의 말단인 자들도 나를 조롱하는 그런 위치, 완전히 마음의 흐름과 거꾸로 되는 그 과정을 거쳐야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얘기고, 이렇게 죽으면 깜짝 놀라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이런 과정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죽자마자 십자가 너머에 있던 천국이 우리 마음에 확 열리고 천국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우리 몸은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아버지가 주인이 되셔서 소원하시고 계획하시고 이끌어가시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기독교신앙 아닙니까?
기독교신앙이 뭐예요?
모든 세상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그 흐름에 역행하는 십자가를 목표로 겟세마네에서부터 모든 과정을 지나가는 이 차원여행을 통하여 지금 마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고, 그럴 때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서 이끌어 가시는 것, 이게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차원여행.
Back to the 천국, 모든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과 거꾸로 십자가를 향해 갈 때 바로 그곳에 천국이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여 겟세마네에서부터 모든 과정을 백투더 천국의 차원여행으로 이루어갈 수 있게 해주시고, 이 차원여행이 날마다 눈 뜨면 매일같이 이루어져서 매일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 매일 내 몸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살아가시는 귀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