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서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이 있어 왔다. 직립보행부터 도구, 불, 언어의 사용이라는 여러 가지 특성이 인류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 인류를 확고부동한 진화의 정점에 오르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경배이다. 오직 인류만이 가족이나 친구가 죽었을 때 반드시 매장하면서 망자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하여 속삭이면서 신화를 빚었다. 인간은 그만큼 주검을 거룩하게 생각하였고 이런 신화를 종교와 철학으로 그리고 과학으로 발전시키면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위상과 존엄성을 높일 수 있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시간 한계의 표상이다. 죽음의 전 단계인 노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당연한 귀결에 대한 맹목적 수용이 대종을 이루었다. 노화와 죽음은 운명적인 과정이었기에 결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노화세포의 특성을 규명하는 과정에 늙은 세포가 젊은 세포보다 외부 스트레스에 의한 세포사멸에 대해서 강한 저항성을 가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개체수준의 독성자극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임이 규명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노화가 죽음의 단순한 전 단계가 아니고 증식을 포기하고 생존을 선택한 생명현상의 일환임을 밝혀주었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고 오히려 죽음에 저항하는 과정으로 정의되면서 노화는 피동적 퇴행적 개념을 탈피하여 능동적이고 보존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노화는 비록 증식을 포기하였지만, 생존을 택하여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거룩한 현상인 것이다.
필자가 백세인 연구를 하게 된 계기는 연령이 증가되어 늙어가면 생체기능이 점점 저하하게 되기 때문에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명활동은 어떤 것일까 규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백세까지 살아온 분들은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행복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백세인을 만나면서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을 누리며 희로애락을 발산하면서 열정적으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온전하고 성실하게 삶을 영위하는 모습에서 나이듦의 거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거론되어 온 노화개념은 건강노화이다. WHO를 중심으로 건강하게 늙기를 강조하였다. 다음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촉구하는 활동적 노화와 나이에 상관없이 생산적인 활동을 강조하는 생산적 노화가 있다. 이에 덧붙여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을 지키고 경제적 대비를 하자는 성공적 노화가 등장하여 회자되고 있다. 이들 개념은 모두 젊은 시절부터 노력하여 건강, 활동, 효율, 경제적 부, 사회적 위상을 노년에 이루기를 강조하면서 외형적인 결과와 성과 중시의 양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 이론에 따르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위축되기 마련이고 여유가 없어져 가는 노인들에게는 오히려 좌절감을 주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현재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고 가치적이고 존엄적인 의미를 찾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인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긍정적 노화라는 개념이 등장하였으나 역시 의미가 뚜렷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안으로 여건이 부족하고 힘들더라도 자긍심과 당당함을 잃지 말자는 의미에서 당당한 노화(Confident Aging)라는 주제를 제안하여 늙음의 질적 개념을 새롭게 부각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실제 삶에 있어서의 구체적 노력과 질적 향상을 강조하는 웰에이징(Well Aging)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증하고 있는 노인들에게 노화라는 현상에 대한 의식을 바로잡고 삶에 끊임없는 도전의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피동적인 개념을 벗어나 보다 긍정적인 시각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죽음을 경배하면서 다음 세상을 기대하는 생명의 연속성을 믿어 왔으며, 이제는 노화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생존을 선택 유지하려는 거룩하고 절실한 생명의 노력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백세인이 보여주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와 생명을 소중히 지키려는 의지를 보면서 삶의 존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당당하게 생명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통하여 나이가 들어 초췌해지고 쇠퇴되어 뒤 안으로 밀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서서 적극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새롭게 거룩한 노화(Holy Aging)라고 별도로 정의해보고자 하였다. ‘거룩하다’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에는 위대하다, 범접할 수 없다, 귀중하다 등이 있다. 백세인 들이 오랜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성실하게 살고 있는 모습은 그대로 생명의 위대함, 범접할 수 없음, 귀중함을 노정해주고 있다. 따라서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 생명의 과정이며 그 과정을 오래오래 유지하면서 지켜나간다는 일은 분명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료출처: 서울대 총 동창신문 제536호(2022. 11.15)
박상철 / 전남대 연구 석좌교수
서울대학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0년부터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과학기술부 우수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주 연구는 암, 대사, 노화 분야이며 국내에서는 대한생화학분자생물학회,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한국노화학회, 한국노인과학학술단체연합회 등의 회장을 역임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노화학회 회장, 국제단백질교차결합학회 회장, 세계노년학회 아태학회 사무국장, 국제운동생화학회 대회장, 국제백세인연구단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노화학 분야 세계적 학술지인 'Mechanisms of Aging and Development'와 'Journal of Cancer Research and Clinical Oncology'의 책임편집인을 담당했다. 국가로부터는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하였으며, 올해의 과학자상, 유한의학대상, 동헌생화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생명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장수보다 좋은 것은 없다', '한국의 백세인', '100세인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