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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혁신특별위원회가 제275회(7월 2일) 임시수위단회에서 ‘혁신특위 활동 최종보고, 업무 이관계획 및 관련절차’를 보고한 후 해산했다. 원기 107년 3월 8일에 시작해 2년 3개월 동안 교단혁신안을 제안하고, 수위단회와 출가교화단을 통해 논의과정을 이끌어 왔다.
그동안 12인 혁신특위위원과 19인의 전문위원들은 3개 영역(지도체제·교화구조·전무출신제도 혁신)에 대한 과제를 집중적으로 연마해 안을 만들었다. ‘지도체제 혁신안’을 토대로 <교헌>과 규정을 개정, ‘교화구조 혁신안’을 통해서는 교화의 자치와 공동교화를 공모할 경우 시범사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원광> 600호에서는 그동안 특위 활동에 최선을 다해 온 위원들의 회고를 지면으로나마 듣고자 한다. 자세한 내용은 올해 말 혁신특위에서 발행하는 백서로 만나게 된다.
재가 허인성 위원
오만년 회상은 절로 오지 않는다
재가 정우진 위원
내 인생에서 만난 대도정법
출가 신은생 위원
혁신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출가 박세웅 위원
우리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오만년 회상은 절로 오지 않는다
허인성 위원·정릉교당
교단혁신특위 위원으로 선출된 후에 많은 우려와 조언을 받았다. ‘어차피 안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2년 3개월 동안 우리 교단에 밀알이 되고자 성심을 다했다.
필자는 원기 106년 전서폐기사태 이후 자발적으로 생성된 예비거진출진단 모임을 통해 재가가 소외된 교정 정책에 대해 알게 되어 공부에 대한 분발심이 일었다. 특위 위원이 되면서 모든 활동을 끊었지만 이미 관계를 맺게 된 재가교도님들은 출가교도님들과 다르지 않은 대종사님 심통제자로 비쳐졌다. 내 성격은 보수였지만 내가 주장하던 바는 혁신이었기에 진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혁신특위가 출범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자료에서 교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많이 제시가 되었었다. 특히 원기 100년 교헌개정특위에서 제시했던 안은 버리기가 아까운 안이었다. 비록 상정도 못하고 폐기가 되었지만 당시 교단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셨던 선진님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보다 교화라는 이름 아래 더욱 새로운 일을 추진하는 데 있었다.
특위 활동 초반에 수많은 충돌이 야기됐다. 재가 교도의 목소리를 낼라치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든가, 결국 출가 교도의 동의를 얻어야 혁신이 가능할 것이라든가, 그런 인식에 동의할 수 없다든가 하는 의견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대종사님 심통제자로서 일원상의 진리를 믿는 우리 재가 출가 교도들이 꽉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재가·출가 전교도가 다 같이 주인이 되어 일원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공화제도의 체제와 십인일단의 교화로 참 문명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라는 <교헌> 전문의 뜻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재가도 지금의 출가와 같이 교단의 주인이 되자는 것이었고, 일원상의 진리를 믿는 교도로서 공화제도의 체제를 갖추기 위해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십인일단의 교화로 참 문명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거진출진교화단 활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 교단의 체계를 무너트리는 도전이었고, 소수의 출가 교도들의 피해가 예상된다 하였다. 공부도 신심도 확인되지 않은 재가들이 교정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빗발쳤고, 세력화할 수 있다는 인식 하에 거진출진단은 논의조차 할 수가 없었다.
특위에서 수많은 토론을 통해 만든 혁신안이 그대로 통과되지 못했음은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수정에 수정이 가해진 그 혁신안조차 통과되지 못할 가능성은 농후했다. 그럼에도 대중은 변화를 택했다. 이렇게 역사는 한 걸음 나아갔다. 변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 교단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미완의 혁신안이었고, 불충분한 수용이었지만 이런 변화를 택한 우리 교단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제대로 읽어야 하고, 지금까지의 환상은 벗어던진 채 벌거벗은 자신을 냉철히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대종사님 심통제자로서 우리의 할 일이다. 변하지 않으면 오만년 회상이 저절로 될 리 없다.
출가는 다시 전무출신의 정신을 살려가야 하며, 재가는 진정한 공도자 숭배를 표상해야 한다. 언론은 더 이상 용비어천가를 부르지 말고, 재가와 출가가 함께 교단의 주인이 되도록 쓴 소리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전 교도는 이 공부에 마음껏 희열을 느껴야 하고, 이 사업으로 회상을 열어가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새로 선출되는 우리의 지도인은 재가가 이 공부를 잘 하도록, 재가가 교화의 주체가 되도록 정책을 세워주길 바란다. 모든 정책의 중심에 재가를 놓고, 그 재가가 마음껏 공부와 사업을 하도록 출가가 지원해주길 바란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내 인생에서 만난 대도정법
정우진 위원·여주교당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을 실감했다.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최대한의 변화와 개선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단혁신특위 위원으로 참여하기까지도 한 번에 위촉된 것이 아니다. 한 차례 탈락했다가 다시 이력서를 넣어 통과되었다고 들었다.
원기 106년 전서사태 이후 교단개혁모임에 참여하면서 교단의 실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필자는 ‘반드시 교단을 혁신시키겠다’는 특별한 정신으로 참여했다기보다는 ‘내 인생에서 만난 소태산 대종사님의 대도정법과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한다’는 소박한 심정으로 참여했다. 그만큼 소태산 대종사님의 가르침과 멀어져 가고 있는 교단의 시스템에 대해 실망감이 큰 상태였다.
필자는 혁신특위위원과 전산 종법사님과의 두 차례 면담 과정에서 종법사님께 질문드렸던 내용을 상기해 본다.
원기 107년 종법실에서 이루어진 면담에서 필자가 발언한 요지는 이렇다. ‘대종사님 법이 <정전>으로 발간되고 인터넷으로 번역되어 게재된 이상 소태산 대종사님 법은 계속 확산되어 나갈 것이다. 그런데 현 교단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위태롭다. 하나는 <정전> 원문에서 멀어진 법위사정과 법위의 남발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전무출신 삶의 양극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또 질문을 드렸다. ‘퇴임 후 상사원을 계속 이용하실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로 퇴임 교무님들처럼 돌아갈 것인지’였다. 당시 종법사님께서는 잠시 뜸을 들이시더니 “대중의 뜻에 따라야지”라고 답하셨다. 면담 후 2년 반이 지난 지금 만덕산성지에 퇴임 종법사님의 상사원 마련이 공식화됐다. 대중의 뜻이 거기에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두 번째 원기 108년 면담에서 필자가 중요하게 질문드렸던 내용은 교정원조직규정과 수위단회 의장단협의회에 관한 것이었다. 교정원 원의회에서 의결되었다 하더라도 중요정책과 사업, 중요인사에 관한 것은 반드시 수위단회 의결을 거쳐야 한다는 점, 그리고 수위단 의장단협의회가 가진 ‘의안조정’ 권한이 수위단 ‘운영위원회’로 이관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종법사님께서는 ‘그것은 별문제가 없다’는 요지로 말씀하셨다. 필자가 보기에는 여러 인치 요소들 중 대표적인 것이지만 종법사님께서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신 것 같다.
필자는 건강이 썩 좋지는 않은 상태에서 밤을 세워 혁신 관련 문건들을 분석하고 만드는데 임했다. 공부와 능력이 부족하여 솔직히 힘들었고, 빨리 이 일이 마쳐지길 학수고대했다. 재가 수위단원 8명 직선을 일궈낸 성과가 있는 반면에 출가수위단만 최상위 교화단으로 하는 우(愚)를 범했다. 수십년 째 지적되어 온 ‘<정전>원문에 충실한 법위사정 과제와 전무출신 표준급여 차이 해소 과제’는 또 다음 기회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제안 드린다. 100년 만에 처음 만든 혁신특위를 매 대(36년)가 끝나기 3년 전부터는 작동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조직의 건강성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서이다. ‘인과를 말하는 종교일지라도 인과는 피할 수 없다’라고 본다.
혁신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신은생 위원·사창교당
2년 3개월의 혁신위 활동이 끝이 났다. 시작할 때는 언제 이 활동이 끝이 날까했는데, 어느새 해단식을 하고 보니 가장 먼저 든 감상은 시원섭섭함이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더는 회의를 하지 않아도 되고, 한 달에 한 번 익산에서 또는 서울에서 정기회의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많이 남겨두고 끝이 난 것 같아 아쉬움도 많다.
교단혁신특별위원회는 3대 3회에 혼란한 교단 상황을 새롭게 혁신하여 4대를 맞이하고자 출범하였다. 위원구성부터 많은 난항이 있었지만, 강해윤 위원장님을 비롯한 11명의 특위 위원들은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2시간이 넘는 주간미팅과 월 1회 정기회의를 통해 교단의 5가지 혁신 과제(교법정신회복, 지도체제, 교화구조, 육영교육, 전무출신제도)를 1차 도출했다. 이후 총단회 및 중앙교의회를 통해 3개 영역으로 확정했다.
돌이켜보면 이 다섯 가지 영역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기에 모든 영역이 충분히 논의되고 대중들의 합의를 통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왔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특위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년이면 교화 현장 교무 20년 차가 되어가는 나로서는 무엇보다 교화혁신이 우선이었다. 그 외에 다른 영역들은 솔직히 관심도가 적었다.
하지만 특위 활동을 통해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우리가 이 다섯 가지 영역을 다 혁신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그 어려움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은 영역이 없으며 서로가 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영역이 다 중요하지만, 대중들의 설문을 통해 혁신특위에서는 지도체제부터 우선순위를 두고 논의를 해나갔고, 그 결과 교헌이 개정되었으며 올 9월에 있는 수위단 선거부터 적용이 되어 지도체제 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현장 교무님들에게 가장 관심도가 높은 교화혁신 부분에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치 공동교화를 제안하였고, 공모를 통해 시범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교무님은 교화혁신에 있어 많은 기대를 하였는데, 제안된 부분에 있어 이게 무슨 혁신이냐? 이렇게 해서 교화가 되겠냐? 큰 우려와 실망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현재 10명 이내로 나오는 6급지 교당에서 교화하는 나로서는 향후 10년을 바라보았을 때 이 제안은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공동체 교화에 대해 실패한 경험이 있는 교단의 구성원들은 또다시 공동체라니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교화 현장도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제안한 자치 공동교화의 모델은 그때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교단혁신위 활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상은 ‘왜 우리 교단은 아주 작은 변화만 시도하려 해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걸까?’ 였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해 가는데,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를 이야기하면서 지금 우리 교단은 어떠한가?
고정된 의식으로는 절대 변화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대중은 전에 없던 일이 벌어지면 걱정스럽고 염려될 수 있다. 이번 수위단 선거가 그러하다. 출가, 재가가 정수위단이 되어 교단을 운영해 갈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선거부터 지금 걱정과 우려가 크다. 하지만 언제까지 걱정과 우려만 하고 있을 것인가?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갈 때는 두려움이 따른다. 두려움을 극복한 순간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된다.
세상은 변화를 수용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다. 두려웠지만, 변화를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극복했기에 지금의 이 놀라운 세상을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교단도 지금의 변화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다함께 다같이 한다면 한발 한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더 이상 월요일 주간미팅도 한 달에 한 번 정기회의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현장에서 많은 출·재가들과 우리 교단의 미래를 위해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혁신위 활동은 끝이 났지만, 혁신은 지금부터 시작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박세웅 위원·원광대학교
교단의 명에 따라 부득이 교단혁신특별위원(이하 특위)으로 활동하며 처음부터 품은 다짐은 ‘우리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였다. 돌이켜보면 아직은 교단 일을 하기에 모든 면에서 부족한 사람으로서 이 다짐만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비우고 다시 모든 것을 담아 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일부의 혁신이 아닌 전체의 혁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 출발부터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하는 원망과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절망 그리고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라는 열망까지도 빠짐없이 담아야 했다. 그 누구의 목소리라도 옳고 그름을 떠나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면 선후본말을 따라 중요도와 우선도가 정해질 것이며, 이 모든 과정이 대중의 의견을 따라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진다면 대중의 일심 합력을 이끌 것이라 여겼다. 그래야만 적어도 우리의 혁신이 자칫 ‘개악’(改惡)으로 빠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수십 차례의 회의를 통해 그릇에 담겨진 내용을 분류하고 분석하였고, 전문위원과의 연마와 정선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지도체제·교화구조·전무출신제도 세 가지로 최종 혁신안을 만들게 되었다. 나는 이 중에서도 교화구조 혁신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재가가 교화의 주역으로 성장하기 위해 최소한 그들이 공부로 성장하고 교화 역량을 키워갈 수 있는 교화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중의 열망을 담고 싶었다.
모든 위원은 각각 맡은 혁신 분야에서 일심과 정성을 다했다. 비록 일부에서는 특위에 대한 냉소적인 반응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도 우리가 부족한 탓이라 여겼다. 우리는 그렇게 쉽지 않은 길에서 포기하지 않았고, 대가나 인정조차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릇으로서 우리의 역할이 원만히 마쳐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위원장님을 비롯한 모든 위원과 사무처 구성원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특위 활동을 하면서 한 가지 놀란 일이 있었다. 우리가 설문을 통해 만들어가는 혁신의 내용들이 이미 30여 년 전부터 언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미 다가올 위기를 감지하고 교단의 변화를 갈망해 왔으며 모두가 그 필요성에 대해 공감해 왔던 것이었다. 앞서 이미 많은 공력을 들여 구체적인 혁신안까지 제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또다시 혁신이라는 구호를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기존의 혁신안이 참신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을 책임지고 지속성과 전문성을 가지고 실행해 가기 위한 ‘그 한 사람’이 부족한 결과였다. 이는 특위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 또 다른 혁신 구호의 참고 자료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갖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혁신안들이 단계별로 수용되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안도할 수 있었다. 비록 아직은 작은 걸음이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전산 종법사님은 우리 교단의 발전을 장강(長江)의 흐름에 비유해 주신 적이 있다. 장강은 멀리서 보면 더딘 것 같고 멈춘 것 같지만 그래도 유유히 흐르고 있음이다. 특위가 있기 전에도 그랬고, 그 활동을 마친 후에도 교단은 법신불 사은님과 대종사 성령의 가호 아래 이소성대로 발전해 갈 것이라 믿는다. 특위 활동하면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과 교단에 진 빚은 교단 어느 구석에서라도 대종사의 교법 정신으로 살아가는 길이 곧 교단 혁신의 길임을 믿고 실천해 가며 갚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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