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4,13-35
오소서 성령님,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예, 우선 우리 마음 안에 사십니다. 어제 초등부 미사 때에 물어보니 첫 번째 답이 하늘이고 두 번째 답이 우리 마음이었는데요, 가톨릭교회교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완성을 기다리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 사신다.”(655항)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어디에 계실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 교령은(8항) 그리스도를 찾는 세 가지 길에 대해 말하는데요, 첫째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묵상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는 알렐루야 대신에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라고 복음환호송을 노래했는데요,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시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 안에 계십니다.
두 번째로는 교회의 거룩한 신비들인데요, 전례와 성사 안에 예수님은 계십니다. 모든 성사 안에 계시면서 특히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 계십니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계시듯 다른 사람 안에 계시고요, 특히 마태오 복음 25장에서는 “내가 굶주렸을 때, 내가 목말랐을 때, 내가 헐벗었을 때…”라고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과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공의회 문헌은 그리스도를 가난한 사람들, 어린이들, 병자들, 죄인들과 비신자들 안에서 찾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찾는 길 세 가지는 이처럼 첫째 말씀, 둘째 전례와 성사, 셋째 사람들인데요, 이 세 가지를 합치면 뭐가 될까요?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사람들과 함께 거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미사 안에 계시지 않으실 수가 없습니다. 이 미사 안에서 예수님은 말씀 안에, 성체 안에, 또 내 옆의 이웃 안에 계시기 때문에 미사는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현존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 세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는데요, 첫째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풀이해 주시는데, 이는 말씀의 전례에 해당합니다. 둘째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시는데, 이는 성찬의 전례이고요, 낯선 이에게 “저희와 함께 묵으시라”고 권하는 제자들은 이미 복음 말씀 즉,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다”는 말씀을 실천하고 있기에, 나그네인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의 특별한 점은, 두 제자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일상에서 뵙고 싶어도 알아뵙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셔야 하지 않을까’하며 우리의 예상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을 말씀, 성사, 그리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서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제가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늘 하던 얘기였는데요, 그러면서 이것이 우리의 예언직, 사제직, 사목직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생이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럼 신부님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시나요?”
이 질문을 받고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는데요, ‘그러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고 공부해보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G. 하센휘틀)는, 내가 선행을 베풀기 싫은데 ‘저 사람이 예수님일 수도 있으니 꾹 참고 착한 일을 해주자’ 이런 식으로 착한 일을 하면, 그 사람 자체가 존중받고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선행을 위해 그 사람의 인격이 이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가 어느 해 성탄 때 이주민들을 위한 미사를 부탁받았는데요, 대화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차를 몰고 신학교로 돌아가려다가, 필리핀 사람으로 보이는 엄마와 아들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웠습니다.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원동이래요. 후회했습니다. 정반대 방향인 데다, 원동이면 대전역을 지나가야 하는데 연말이라 엄청 막힐 게 뻔했거든요. 그런데 어떡해요? 물어봤으니 태워줘야죠.
그런데 아이가 차 뒷자리에 앉아서 과자를 먹었나 봐요. 엄마가 “야, 신부님이 차 태워주셨는데 차 안에서 과자 흘리면 어떡해”라고 얘기하길래 “괜찮다”고 했습니다. 비록 엊그제 세차는 했지만…. 그런데 엄마가 계속해서 “이것 봐, 다 흘리네. 자꾸 이러면 신부님 화내신단 말야!”하고 얘기하길래 또다시 웃으며 괜찮다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아니, 과자 봉지를 뺏으면 되지 왜 자꾸 혼만 내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을 내려 드리고 차를 유턴하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성탄절에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이 내 차를 타 주셨는데, 내가 속으로 갈궜구나.’
그 엄마가 “유정아~ 나 필리핀 엄마 아냐~ 나 성모님이야~”하고 말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과 예수님이 변장을 하고 제 차를 타신 것이 아니라 그분들은 정말 그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그분들에게 해 드린 것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하신 것으로 받으시겠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분이 그분 자체로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예수님도 그 안에서 사랑받으시고 존중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미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시는 예수님,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 뵈올 눈이 뜨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이웃의 모습으로 내 옆에 계신 예수님,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의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님, 나의 도움을 청하는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나의 사랑을 원하는 내 가족의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 뵈올 눈이 열리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