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외교를 다른 말로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고 한다. 사대는 대중국 외교, 교린은 중국을 제외한 주변 여러 나라와의 외교를 가리키지만, 주로 대일본 외교를 말한다. 대일본 외교는 대중국 외교에 비해서 국가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은 못지 않았다. 대일본 외교에서 조선 후기까지 기본 지침서가 된 책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이다. 이 책은 신숙주가 세종의 명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성종 때에 지어 바친 책으로, ‘바다 동쪽의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일본 본국을 비롯한 구주, 대마도, 일기도와 유구국까지, 바다 동쪽 여러 나라의 지세(地勢)와 사정, 국세(國勢) 규모와 교빙(交聘) 절목 등이 지도와 함께 잘 갖추어져 있고, 후대에 이를 바탕으로 필요한 사항을 추가했기 때문에 일본과의 외교에 오랫동안 기본 지침서로 활용된 듯하다. 이 경구는 그 서문에 신숙주가 인용한 말로서, ‘내치’의 중요성을 역설하려는 데 본뜻이 있다. 글은 이렇다. 신이 듣건대,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어(邊禦)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에 있으며, 전쟁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다.’ 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이제야 체험할 수 있겠습니다.[臣嘗聞, 待夷狄之道, 不在乎外攘, 而在乎內修, 不在乎邊禦, 而在乎朝廷, 不在乎兵革, 而在乎紀綱其, 於是乎驗矣.] |
신숙주는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관료로 활동했다. 특히 외교 분야에서 전략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이 기간 외교 일선에는 늘 그가 있었다. 1460년(세조 6)에는 동북면에 신흥 야인(野人)이 세력을 결집하여 변경 침입이 잦아지자,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직접 출정하여 군사 전략을 짜는 등 야인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외교 전략가인 신숙주가 내치와 조정, 기강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그 후 조선의 역사는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내치’에서는 실질을 좇아 현실에 변용하기 보다는 과거를 인습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는 현실 대응의 한계로 나타나곤 했다. 또 ‘조정’은 당파로 사분오열 쪼개져 권력 다툼의 장이 되어 버려서 뜻 있는 인재들의 설 자리를 빼앗았다. 그런 가운데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 거듭되는 외란(外亂)과 각지의 민란에 무기력하기만 했다. 조선의 역사는 말기까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신숙주만큼 영욕간에 극을 달린 인물도 드물다. 살아서는 영화가 극에 달했고 죽어서는 훼절, 변절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성세(盛世)는 신숙주 같은 관료나 인재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 가고, 중국이 다시금 ‘중국적 세계 질서’를 꿈꾸는 시기! 탁월한 외교 전략가 신숙주의 이 경구는 우리에게 시사점이 크다. 「해동제국기서」는 『보한재집(保閑齋集)』, 『해행총재(海行摠載)』, 『동문선(東文選)』에도 실려 있다. |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