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주일이 다가오는 게 싫었다. 주일은 여느 평일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일보다 더 바쁘고 더 피곤한 하루가 돼 버린 지 오래다. 피곤에 찌들어 억지로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설교가 무덤덤했다. 주일의 은혜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며 믿음을 점검하고 회개하라는 설교가 나를 찌를 때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죄는 없었는지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곤 했다. 회복된 듯 주일이 기쁨으로 차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때일 뿐. 다시 바쁜 평일, 평일보다 더 피곤한 주일이 반복된다. 설교를 주일에 맞춰 하니 빼먹을 수도 없고 평일은 평일대로 거기에 맞춰 또 설교하니 또 빠질 수도 없다. 듣다 보면 모든 말씀이 다 옳고 맞는 말 같아서 내 믿음을 나름 지키기 위해 때가 되면 교회로 향한다. 월화수목금토일 헌신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가득하다. 누구 한 사람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도 그 분위기에 동화될 수밖에...
싫은 약속 잡아 놓고 억지로 나가는 사람마냥 겨우겨우 아이들 챙기고 남편 비위 맞추며 그렇게 주일 아침은 분주했다. 온몸이 긴장한 탓에 집에 오면 녹초가 된다. 왜 하나님만 쉬어야 하는지, 왜 종처럼 왕을 떠받드는 느낌만 드는지 억울하고 속상했다. 월요일은 양육으로 화요일은 전도대로 수요일은 차 전도로 목요일은 사랑방으로 금요일은 권찰회로 토요일은 교회 청소로 주일은 주일예배로. 하루도 쉴 틈이 없다. 여기에 특별 새벽 기도에 철야 예배까지. 간혹 빠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조사가 들어온다. 정말 좋아서 교회에 나갔다가 올무에 걸린 느낌이다.
나야 원래 그런가 보다 하지만 남편은 힘들어했다. 직장 다니는 남자가 특새 기간이면 마누라 눈치 때문에 새벽같이 나갔다가 비몽사몽 출근한다. 출근해서도 몽롱한 정신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건 당연하다. 나도 한때 밤새워 놀아 봐서 아는데, 그런 날 출근하면 하루가 고통 그 자체다. 퇴근할 때는 더 가관이다. 졸음 운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한창 저녁 준비하는데 전화가 울려 받으면 남편의 처절한 한마디 "여보, 나 잠 좀 깨게 해 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겉으로는 고생하는 남편 위하는 척 온갖 아양을 떨지만 속은 그것도 못 견디는지 그 믿음 참 지지리도 없구나 싶어 한숨 쉰다.
아이들은 또 어떤가. 막내딸은 유치원 다니느라 놀지 못했다며 주일만 되면 놀러가자고 떼를 쓰며 운다. 교회 가면 못 논다며 가기 싫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 아이스크림으로 꼬이고 스티커로 꼬이고. 그것도 안 먹히면 교회 광장에서 아이랑 놀다가 남편과 교대로 예배를 드린다. 큰딸은 아예 주일은 교회 가는 날로 습관화되어 있긴 했지만 때때로 피곤하고 쉬고 싶을 때면 사춘기의 반항이 큰 한 방으로 무섭게 터져 나를 몹시 힘들게 했다.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한 주를 열심히 산 우리 가족은 하루의 꿈 같은 휴일을 온전히 교회에 반납하며 몇 년을 살았다.
도대체 주일이 언제 왜 생겼는지 궁금했다. 성경을 읽어도 안식일은 있지만 주일은 기록돼 있지 않다. 믿음 좋은 권사님, 집사님한테 주일을 왜 지키는지 물어보면 모두 한 목소리로 주님이 부활한 날로 전통적으로 지킨다는 말만 한다. 성경에는 안식일에 모두 모였다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면 안 될까? 토요일에 예배하고 일요일은 가족과 쉬면 참 좋겠는데. 혼자 끙끙거리며 인터넷 검색을 해 봐도 똑같은 내용만 가득했다. 성경을 그대로 믿고 따르라는 설교를 지겹도록 들었던 나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주일을 지킨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일을 사람이 만들었다는 말인데 그 사람이 만든 규칙을 목숨처럼 지킨다는 게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교회에서 하는 말이 모두 참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권사님, 집사님, 전도사님 말도 모두 옳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설교가 있다. 죄 짓지 못하게 교회에서 바쁘게 돌린다고. 시간이 많으면 더러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 짓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행사가 참 많았다. 한 가지 끝내고 숨 좀 돌렸다 싶으면 또 다른 행사. 모두 유익하고 좋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행사를 일주일 내내 감당해야 하는 내가 곧 죽을 것 같다는 게 문제다. 하나님도 하루는 쉬었는데. 원망이 쌓이고 목사들은 한량으로 보였다.
어린 신자에서 어른으로 자라라고 하면서 언제 어른이 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계속 어린 신자라며 질책하고 훈계한다. 세상으로 나가라고 말은 하는데 행사에 찌들려 교회 속에서만 얼쩡거리고 있다. 마치 결혼한 아들을 제도로 분리했지만 현실은 하나하나 간섭하며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 꼴이다. 이제는 성인이고 자유롭고 싶은데 부모라 모질게 끊을 수 없는 착한 아들. 사실 교회는 성도를 떠나보내기 싫은 거다. 계속 묶어 두고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거다. 미운 시어머니처럼....
일주일 내내 교회에 출석하게 만드는 온갖 행사로 똘똘 뭉친 교회는 자칫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죄 짓지 않게 해 준다는 사탕발림으로 의식을 통제하고 사회와 단절시키고 고립되게 만든다. 그렇게 단절된 신자들은 교회라는 집단에 더욱 단단히 결속되고 의리로 하나가 된다. 의리가 자립하지 못하게 막는다.
공동체의 의리가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고 있다. 내가 교회에 나간 건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공동체에 소속이 되고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혔다. 이제 독립하고 싶은데 하나하나 간섭하며 아직 멀었다고 막는다.
그 간섭은 "더 기도해 보세요"다.
주일이 짐으로 다가올 때 내게 믿음 없다고 정죄하는 공동체가 공동체 맞는가. 교회 바깥 친구에게 피곤하다고 투정했다면 아마 좀 쉬라고 했을 것이다. 이웃 언니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매일 바쁘냐고, 좀 쉬어 가면서 하라고. 그러나 정작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죽으면 지겹도록 쉴 텐데 일할 수 있을 때 하라고 재촉했다. 이놈의 교회가 사람 미치게 만든다. 주일 성수를 지키게 하고 싶다면 평일에 뺑뺑이 돌리지를 말든가.
나는 내 신성한 권리인 휴일을 돌려받고 싶다.
그럼 도대체 주일은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게 바쁠 때는 알지 못했던 이 주일이란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주일은 한때의 전통에 불과했다. 김두식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130쪽)의 일부를 옮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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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는 321년에 일주일이 시작되는 첫날을 국정 공휴일로 선포합니다. 일주일의 하루를 휴식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좀 더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주일'을 공휴일로 공포한 것이 아니라 'Sunday', 즉 태양의 날을 공휴일로 공포한 것이었습니다. 아폴로 숭배의 정신에 따라, 태양의 날이 되면 점쟁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자문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입니다. 원래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아폴로를 각별히 신봉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황제가 된 직후 그는 아폴로 신에게 막대한 예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제국에 어려움이 닥칠 때면 태양의 날을 맞아 점쟁이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물었습니다.
이것을 읽는 순간 나는 또 배신감에 떨어야 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 주일, 교회 생활 오래 했다는 사람들 붙잡고 물었던 그 주일의 유래를 나는 수년이 지난 지금 책에서 찾았다. 태양의 날에 점쟁이에게 물었던 오랜 전통을 따라 노동자들이 딱 하루 쉬는 휴일을 예배하는 수단으로 만든 것이다. 교회는 주일 성수라는 법을 만들어 휴일을 갈취했다.
성경만 백독 천독 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말들 한다. 기도하고 설교만 제대로 들어도 그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말들 한다. 철썩같이 믿었다. 그런데 주일의 유래도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없는 교회를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성경 한 권만으로는 알 수 없는, 목사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로만 알 수 없는 아니, 알려 주지도 않고 알리고 싶지도 않은 수많은 내 궁금증들을 나는 책을 통해 해소해야 하는 실정이다.
성도들 죄 짓지 말라는 따뜻한 배려로 일주일을 온갖 행사에 동원하는 교회는 생각을 막고 의식을 통제하는
나쁜 사람들이다
뉴스앤죠이 : 이현미 (cyi0811) 기자에게 메일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