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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영양 스크랩 나은 이동표
혜명 추천 0 조회 37 13.06.26 05: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명 : 이동표(李東標) , 1644년(인조 21)년 ~ 1700년(숙종 26)년
본관 : 진보(眞寶)
: 군칙(君則)
: 나은(懶隱)
출생지 : 예천군 금릉리(金陵里)
분묘지 : 춘양(春陽) 어로동(漁老洞)
입사경로 : 1683년(숙종 9)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
내관직 : 성균관 전적,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이조 좌랑, 홍문관 교리
외관직 : 창락도 찰방, 양양 현감, 광주 목사, 삼척 부사
증직및기타 : 이조 판서
숙종시대의 뛰어난 인물

숙종시대 인물을 평함에 있어서 나은(懶隱) 이동표에 이르러서는 만인이 명신이라며 평을 한다. 이는 그가 기사년에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단광(張壇擴)을 왕청(王淸)으로 봉한 나라의 변을 당하였을 때에 소를 올려서 바른 말을 하였고, 또는 권신 귀족의 무리들을 배척하여 촌등(寸勝 : 물을 밝게 하는 약물)으로 탁한 하수(河水)를 맑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태산북도와 같은 높고 큰 명망이 그가 아니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충간공 난은 이선생 신도비명 중에서)
태몽과 비범한 유년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신이한 태몽을 꾸었는데, 태어나자 과연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아이 때부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중하며 말하고 웃는 데 절도가 있으며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학문을 배울 때 문리가 바로 트여서 스승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항상 책을 대한 채 마음을 거기에 기울였으며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큰 그릇이 될 것임을 말했다.
의롭지 않은 복을 취하지 않음

어머니의 뜻에 따라 향시에 응시하러 갔더니 시관이 이동표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리 말하기를 이번 시험의 장원은 딴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동표는 그 말을 듣고 웃더니 응시할 날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머리를 빗는데 천 번을 빗느라 시간이 늦어져서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조롱하여 웃으며 이천소(李千梳)라 별명을 붙였다.
출사와 임금의 평가

1675년(숙종 1)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정묘년에 증광과(增廣科)에 합격하였으나 파방(罷榜)으로 실패되고 1683년(숙종 9)에서야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권력자의 시기로 낮은 창락찰방(晶樂察訪)에 임명되었다가, 기사년에 임금이 한림(翰林)의 자격자를 특별히 추천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이동표가 1등으로 추천을 받았다.
당시의 재상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이동표는 문학(文學)과 도덕이 당세에 짝할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옥당(玉堂)에 두어야겠지만 요직에 임용하는 일이 급하니 순서를 기다릴 수가 없다.’고 하신다.”고 했다.
이해를 떠난 직언1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고 얼마 되지 않아 중궁(인현왕후)의 손위(遜位)가 있게 되자 간관이었던 박태보(朴泰補)·오두인(吳斗寅)·이세화(李世華)·이상진(李尙眞) 등이 혹은 죽고 혹은 귀양 가기도 했다. 임금이 명령하기를, 그 일에 대해 다시 말하는 자가 있다면 역적으로 다스리리라 하였다.
이동표는 당시 영외(嶺外)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는 당장에 상소문을 써서 서울로 달려가서 들여보냈다. 대강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나라에 큰 사건이 있는 날에 모든 신하들과 함께 간하지 못하였으니 불충의 죄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 오늘의 일에 있어서 전하의 조정에서 녹을 먹는 자가 다들 전하의 뜻에 순응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모든 신하들이 급히 아뢰고 격렬하게 논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복합(伏閣)을 멈추라는 엄명이 내려졌기 때문이지 어찌 전하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겠사옵니까?
임금이 너무 진노하시기에 서로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니 어찌 한마디 후회하시는 말씀을 아끼시고 사방백성의 실망은 가벼이 여기시나이까? 또는 대각(臺閣)의 입시(入侍)도 정지시키시고 조사기를 귀양 보내라 하시는 명령도 옳지 못합니다.”
사리를 헤아린 주장

하루는 임금의 행차를 따라서 장릉(단종의 능)에 갔을 때에 육신사(六臣祠)를 지나다가 육신의 복직을 의논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모든 신하들이 “춘추의 예에 따르면 친근한 위치에서는 말을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는 세조가 난신(亂臣)으로 죽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충절만은 인정 하였으니 임금의 교시를 신하들이 순종하는 것이 안 될 것 없다고 하였다.
이해를 떠난 직언

어느 해 가을 임금이 태학에 친히 시찰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에 급제한 사람에게는 광대를 주어서 앞에서 춤을 추면서 길을 인도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해 이동표는 교리(校理)로서 진언하기를 “광대놀음은 성인(聖人)이 싫어하는 바인데, 이것으로서 제생(諸生)의 기분을 돋우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며 반대했다.
원칙을 지킨 인사행정

이동표가 이조 좌랑 겸 시강원 사서로 승진되어 사람을 등용하고 물리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나쁜 사람을 물리치고 청백한 사람을 쓰는 일을 관장했다. 전장(銓長)이 권세가의 자제 두 사람을 청백리로 선정하려고 함에 마땅치 않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고, 민장도(閔章道)의 등용을 통과시키려 하기에 “민장도는 본디 덕행이 없기 때문에 선비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고 있는데, 지금의 정승의 아들이라 하여 쓸 수는 없다.”며 거절하였다.
전장이 화가 나긴 했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서 타이르기를 만일에 민장도의 등용을 통과시켜 주기만 한다면 나도 그가 하는 청은 무엇이라도 듣겠노라 하였다.
불의와의 비타협과 귀향

임신년에 당시 정승의 아들인 민장도를 등용시키라는 전장(銓長)의 압력을 거절한 후 공평성이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적으로 사람을 회유하려는 자와 함께 일을 볼 수 없다며 그 날로 사표를 내고 서울을 떠났다.
우비를 갖추고 배에 오르니 조정의 동료들이 전송 나와서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소퇴계(小退溪)라 하였다.
거듭된 임금의 부름

임신년 귀향 이래 계유년 봄에 이르기까지는 헌납·이조 정랑·교리·사인·집의 등으로 여러 번 제수되었지만, 그 자신은 주역강의로 일생을 마치려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임금의 뜻이 너무 융숭하고 간절하므로 부득이 부름을 받고 다시 올라갔더니 정부에서나 민간에서나 다 같이 기뻐하였고, 거리의 아이들도 서로 싸울 때에 하는 말이 “네가 이사인(李舍人)과 같이 덕망이 있느냐.”고 하였다.
소읍의 지방관을 자청함

이동표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 다시 우부승지(右副承害)로 승직되었다. 동료들이 다 같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대사성과 대제학, 이조 참의의 물망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모두 위태롭고 흔들리는 곳이라 조정에 오래 머물기가 싫었고 또는 어머니가 연로하였기 때문에 돌아가서 봉양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임금이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여 마침 높은 지방관으로 가라고 했으나 소읍이 더 편리하다며 소읍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광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풂

광주 목사로 있을 때에 정사가 공명하고 간명하여 백성들이 잊지 못하였다. 또한 삼척 부사로 있을 때에는 마침 큰 흉년이 찾아와서 봉급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부역도 덜어 주었더니 이웃 고을 백성들까지 모여들었다.
당시 상소를 올려서 구제할 길을 청할 때마다 임금이 들어 주었기 때문에 떠돌던 백성들이 안정되고 신음하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이를 목격한 어사가 가장 높은 평가로 임금에게 보고했다.

가족이야기

: 이지형(李之馨)
생부 : 이운익(李雲翼)
: 순천김씨 김후기(金厚基)의 딸
집안의 내력

나은 이동표의 조상은 진보(眞寶) 사람으로 고려 말기에 홍건적의 난을 토벌해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진 이자수(李子修)이다. 나중에 안동으로 옮겨와 세거하게 되었다. 성균관 진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가 추증된 이계양(李溪陽)이 다시 예안으로 옮겨왔다.
그의 아들 송재(松齋) 이우(李?)는 문장과 경학에서 뛰어났으며 관직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우의 아들은 이수령(李壽?)으로 황산도 찰방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이풍(李馮)이 예실시(禮實寺) 첨정을 지냈다. 이풍에게 아들이 없어 동생인 이충(李?)의 아들로써 뒤를 이었는데, 그가 이동표의 증조부로서 광해군 때 이이첨을 죽여야 한다고 소를 올린 분이다.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참봉을 지내고 이조 참판을 추증받았다.
이 분의 아들이 바로 이동표의 아버지 이운익(李雲翼)이다. 이운익은 종숙(從叔)인 이지온(李之?)에게 출계하였는데, 순천김씨 김기후(金基厚)를 부인으로 맞이해 이동표를 낳았다.
어머니에게 내린 임금의 은전

이동표의 낯빛은 희고 키가 크며 씩씩하고 기운차 보였다. 경연에서 강의할 때면 천도와 인도의 깊은 뜻과 왕도와 패도의 구별과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거듭 거듭 풀어서 설명하고 알뜰하게 일러 올렸다. 그러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귀 기울여 들었고 강의를 마치고 나올 때면 돌아 나오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휴가를 받아서 고향에 올 때에 임금이 명하기를 “이동표는 항상 경연에 두어서 나의 고문을 삼아야 할 일인데 노모가 고향에 있기 때문에 항상 어머니를 가까이서 돌볼 생각에 잠기고 있으니, 어찌 직장에 전념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를 뫼시고 서울로 오게 하라.”고 하였다.
상소를 올려 어머니가 병중이어서 먼 길을 떠날 수 없다 하였더니 대답이 내리기를 “나의 명령을 어기지 말라.”면서 어머니에게 의복과 반찬을 후하게 내려 보냈다. 이에 잔치를 베풀어서 남들에게 영광을 알리었다.
어머니를 따라감

귀향한 뒤로는 춘양의 산수를 좋아해서 예천에서 이주하려 했는데 10월에 어머니 상을 당했다.
그가 여묘살이 중에 조석으로 곡을 함에 너무 지나쳐서 몸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가족들이 모르게 영양소(營養素)를 드렸지만, 먹지 않고 1700년(숙종 26) 7월17일에 돌아가니 향년 57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여 후한 제물을 내렸다. 춘양 어로동(漁老洞)의 부인 권씨의 묘와 합장했다.

학문이야기

향사 : 원산서원(元山書院)
학파 : 퇴계 학파
위기지학에 뜻을 둠

4, 5세에 경서와 사기(史記)에 정통하였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차차 자라면서 더욱 삼가고 힘써서 항상 말하기를 "남자로 태어나서 마땅히 성현이 되기를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고 한마디 말과 한 번의 행위도 규율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의와 경을 주로 하는 공부

단정하고 확실한 학문과 치밀한 공부로서 의(義)와 경(敬)을 주로 하였고 사서(四書)와 주자의 글을 손에 놓지 않았다. 배운 바 학문의 활용이 밖으로 드러남에 있어서, 가정에서는 어머니를 섬김에 그 뜻과 육체를 봉양함을 극진히 하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지극한 효성을 느끼게 했다. 또한 임금을 섬김에는 단정한 모습으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리를 지킴에 흔들림이 없었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만을 위하여 권력의 위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서는데도 절도에 맞게 하였으니 경과 의에서 충분한 수양을 얻지 않고서야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나은문집』의 간행과 내용

이 책은 일찍이 이광정(李光庭)과 권만(權萬)이 교감(校勘)하여 발행하려 하였으나, 1813년(순조 13)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 소실되어 발간이 중단되었다. 그 뒤 1880년(고종 17)에 현손인 한용(漢庸)과 5대손 형(衡)등이 유고를 모아 간행하였다. 문집 가운데 소의 내용은 시정(時政)을 직간한 것이 많으며, 특히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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