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위에 떠가는 서북각루
버스를 타고 장안문을 돌아 수원역 가는 길, 왼쪽으로 보이는 팔달산자락에 억새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지며, 억새꽃은 더욱 기세 좋게 피어 흰머리를 풀어헤치고 때를 만난 것이다. 오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아 마침내 그, 눈부심이라고 할까. 은빛머리의 가을 연인을 만나는 기분으로 찾아갔다.
장안공원을 따라 화서문 앞에서 다시 화서공원으로 올라섰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라니, 어찌 숨이 막힐 듯 가슴 벅차오르지 않았겠는가. 아! 강원도 봉평의 메밀꽃인들 이보다야 더 고울 수는 없을 것이다. 짜릿함이 밀려온다. 가슴으로 안아보는 눈부신 연인의 황홀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성곽 길 담장을 따라 무리를 지어 오르는 저 은빛행렬은 마치 서북각루를 머리에 꽃가마처럼 이고 구름 위를 떠가는 형상을 연출하고 있다. 저들의 행렬은 팔달산 서장대를 향해가고 있다.
억새의 행렬은 왕의 행차를 떠올리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환상이 생긴다. 창덕궁을 출발한 만조백관과 6천인파의 능행차가 떠오른다. 은빛 서걱거림 소리는 왕의 행차를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하얀 고깔 쓰고 만장기 휘날리며 배다리건너 시흥행궁, 지지대고개 넘어 먼 길 걸어와 장안문을 입성하지 않은가. 그리고 무지개 칠간수 화홍문, 방화수류정, 사대문을 돌아 어여차, 저렇듯 서장대 굽어보며 팔달산을 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 상서의 기운, 정조대왕 인인화락 애민 향기 십리 성길 따라 흐르고, 팔달산 바라보면 화산의 용주사, 사도세자릃 향한 효의 정신이 가슴에 젖어온다. 정녕 못다 이룬 정조대왕 개혁의 꿈 억새꽃 여기에 피었음이라. 그렇다! 저 노을빛 서쪽 하늘에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서북각루를 품에 안고 떠가는 융숭 깊은 왕의 행차 저 억새꽃, 누구라도 와서 한번 바라보고 빠져보면 누가 억새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서북각루를 어여차! 떼메고 팔달산을 오른다.
수원팔경이 어디인가 알아보았다. 제1경은 광교적설(光敎積雪)이다. 광교산에 봄눈이 쌓였을 때를 두고 말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날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시루봉 노루목 산장 길 능선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어느 이른 봄, 진경을 만끽하지 않았을까. 제2경은 팔달청람(八達晴嵐)이다. 팔달산의 맑은 바람, 또는 팔달산의 맑은 날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도심 속 매연에 시달리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다.
제3경은 남제장류(南提長柳)다. 수원천 남쪽의 세류동 버드내를 말한다. 그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어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4경은 화산두견(花山杜鵑)으로 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대왕의 건릉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진달래꽃이 피고 두견새가 우는 것을 말한다. 제5경은 북지상현(北池賞蓮)으로 연꽃이 핀 만석거를 말한다. 제6경은 서호낙조를 말하며, 이는 중국의 서호를 본 따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제7경은 화홍관창(華虹觀漲)으로 화홍문의 무지갯빛 칠간수를 보는 것이다. 제8은 용지대월(龍池待月)로 방화수류정아래 용지에서 달을 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수원 팔경 중에는 추상적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수원팔경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앞으로 화서문 언덕의 억새꽃도 경관에 들법했기 때문이다. 아니, 수원의 신 팔경도 이제는 이름 붙여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관광명소로 손꼽을 수 있는 곳, 그중에는 화성의 가을 억새꽃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디서 본들 억새꽃의 아름다움이 그렇듯 장엄하고 진중하며, 예스러운 가운데 많은 상상을 유추하게 한단 말인가.
뒤돌아보면 전설 담은 광교산의 두 얼굴이 누워 있다.
이 가을 속의 연인을 찾아 나서보라고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다.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