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갈 집기들이 만들어지면서 성막 건설은 절정을 향해 진척되었다. 본 장에서는 성막 뜰에 자리할 번제단, 물두멍과 성막의 외형을 결정할 성막 말뚝과 포장이 만들어지면서 마침내 성막의 구조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1. 하나님의 주권과 백성의 자의식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성소와 그 안의 집기들에 이어 성막 뜰의 집기들 역시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성소가 하나님의 적극적인 통치를 보여준다면 성소는 그 통치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표시할 신앙의 상태를 표현한다. 반면에 성막 뜰은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의 표시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번제단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드리는 장소이다. 특히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은 대속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대속의 신학적 의미는 제사에 대한 규례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있다. 특히 율례와 법도를 선포한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대속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중보자에 대한 인식이다. 중보자 사상이 결여된 대속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대속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중보자 신앙으로 진전되는 것이다(27장 구속사 강해 참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중보자 사상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과도 일치한다.
번제단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치유하신다는 사실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죄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번제단은 인간의 편에서 가장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제단은 하나님의 긍휼을 대변해 준다. 죄 있는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번제단에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 조차도 그 전권(全權)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번제단과 함께 물두멍이 있다는 것은 필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 그 앞에 나가는 일에 있어서 성결은 선결 조건이기 때
문이다. 성결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항시 유지해야 할 조건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신앙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사 제도 역시 이스라엘의 성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죄로 인해 더렵혀진 백성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성결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성결은 제사장적 사명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기도 하다(출 19:5-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는 말씀은 제사장 사역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시사해 준다. 이 말씀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고 하셨는데 이 역시 성별된 삶을 요구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성결은 윤리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결은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요구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방 나라 백성들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19장 구속사 강해 참고).
성막 뜰은 이스라엘의 성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성소를 보호하기 위한 기능과 하나님을 수종드는 제사장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갖추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성결한 삶을 전제로 한다. 이스라엘의 성결이 상실되었을 때에는 성막 뜰의 의미조차도 같이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대하시는 원칙
성소의 기물들이 값비싼 금으로 만들어지고 화려하게 장식된 반면, 성막 뜰의 집기인 놋제단과 물두멍이 값싼 놋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기능이나 가치 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소의 기물들은 나름대로 각기 그 기능에 적합하게 설계되었고 합당한 재료를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번제단과 물두멍 역시 고유한 기능을 위해 놋을 재료로 선택하였다. 당시에는 금과 은 그리고 놋이 주로 사용되는 금속재료였음을 감안할 때, 구태여 값비싼 금만으로 모든 기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럴만한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면 언약궤 역시 전부 금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만듦에 있어 먼저 조각목으로 구조를 만들고 금으로 둘러싸도록 하셨는데, 그것은 값비싼 금만으로 모든 기물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기 기물들은 그 용도에 따라 설계되고 재료가 선택된 것뿐이지 금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놋을 재료로 하는 기물보다 더 중요한 의미나 가치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성소의 앙장이나 휘장 역시 그 기능을 무시하고 값비싼 금으로 만들도록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막과 그 기물들을 통해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그것들이 금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러한 물질은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러 물질 중 하나일 뿐이다. 단지 좀더 세밀한 가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성(展性)과 연성(延性)이 풍부한 재료인 금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가치보다는 그 재료의 특성을 고려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질의 가치를 중시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의 성년들로 하여금 똑같이 은 반 세겔을 생명의 속전으로 요구하신 것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성전세를 요구하심에 있어 부자나 가난한 자라 해서 더 내거나 덜 내지 못하도록 하셨다(출 30:15). 사람의 생명을 속하는 가치가 겨우 은 반 세겔밖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은 반 세겔은 속전을 위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며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설에 참여함에 있어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의 성년된 자를 계수하고 일괄적으로 은 반 세겔씩 바친 것 역이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26절). 성전을 건축함에 있어 누구는 많고 누구는 적게 바쳤다는 비교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동등하게 참여했다는 사실만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자기의 형편이나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르게 성전 건축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다 할지라도(36:3-7) 그것이 다른 사람과 얼마만큼 가치의 차이를 지녔는지에 대하여 비교할 근거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성전 건설에 참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성년으로 계수된 모든 사람이 은 반 세겔씩 바쳤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성전 건설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물질의 부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누구나 동등하게 대우하시며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신다. 심지어 과부나 고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동등한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의미와 존재 가치를 가진다. 때문에 과부나 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심성이 부패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대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