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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동규 목사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아침에 떠돌이 개를 하나 만났습니다. 아파트 앞에서 어린이들을 태우고 가려는 중에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떠돌이 개라서 사람들을 무척 경계합니다. 그런데 큰 딸 은솔이에게는 열렬히 따라 붙는 겁니다. 막 튀어 오르고 붙고 안기고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손을 내밀면 쏜살 같이 달아나 버리는 겁니다.
떠돌이 개의 특징이 다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지나면서 발길로도 차고 때리기도 하고 짓궂게 장난도 쳤는가 봅니다. 학대받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무서워합니다. 은솔에게는 그렇게 달라붙고 친절하게 굴던 개가,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부르니까 막 사납게 짓는 것입니다. 아마 극도의 방어심리 경계 심리가 발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대받은 개는 공격적이 됩니다. 접촉을 두려워하고 눈치만 봅니다. 맘을 못 놓고 항상 불안해 있습니다.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 달아납니다. 제가 집에 데려 가려고 해도 좀처럼 마음 문을 열지 않고 막 피하고 짖으려고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달래서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정성스레 씻겼습니다. 털도 다 깍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털을 다 깍고 보니 속이 상처투성입니다. 부스럼, 긁힌 자국, 종기, 버짐, 말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상처투성이 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름을 ‘라파’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리고 주일 하루를 내내 정성을 기울였지만 문을 완전히 열지는 않고 경계를 합니다. 밥을 줘도 안 먹고 내가 없어야 먹습니다.
그런데 제가 3일 동안 수련회 다녀와서 보니 완전히 정서가 치유된 것 같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개는 반가우면 막 뛰어 오릅니다. 때로는 설설 기면서 뒤집어 집니다. 복종과 사랑의 표시지요. 그리고 막 따라 다닙니다. 먹는 것도 잘 받아먹습니다. 완전히 사랑을 느끼고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바깥에서 막 크던 개라서 아파트에서 키우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너무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내 보냈습니다.
아~ 하나님도 나를 이렇게 치료해 주셨구나라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나는 인간이라 내쳤지만 하나님은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고 보살피고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공격적이고, 경계심이 많고 불안에 떨고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끝까지 치유해 주십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을 깨닫고 안전과 평화를 맛봅니다. 정서가 치유되고 영혼이 밝아집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저서에 보면 감정에 상처를 받게 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첫째 감정에 상처를 받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생겨 불안하게 되고
☛두 번째는 분노심이 생긴다고 합니다. 미움, 시기, 반항, 질투 등도 모든 본노의 다른 모습입니다.
☛세째로는 실패의 감정이 생겨 좌절감, 열등감, 죄책감 등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네번째는 교만한 마음이 생겨 이기심, 자만심, 편견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심리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단 한가지 이 상처를 치료하는 큰 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이십니다. 몸의 의사일 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그런데 치료를 하려고 하면 달아나고 반항하고, 필요 없다고 하고, 도망갑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은 사랑으로 끝까지 치료해 주십니다. 이런 치료자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오늘 이사야서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야의 사역을 다루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치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어느 구절 보다 잘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 수많은 구약 구절 중에서 바로 이 구절의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이 말씀을 정확하게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누가복음에서도 인용이 됩니다. 바로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읽은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역의 방향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4:17-21)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서의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예수님에 의해 오늘 이뤄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치료의 사역입니다. 눈먼자, 가난한자, 갇힌자, 포로된자를 치료하시고 참된 해방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실재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스무가지나 넘는 각색 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세리, 죄인, 무식꾼, 사마리아인 등 병든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천대받고 왜곡된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창녀와 부정한 여인도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다 새 삶을 찾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치유 사역입니다. 몸을 치유하고, 정신을 치유하고 왜곡된 인격을 치유하고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토루니에는 인간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존재, 즉 종합적 존재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치료도 네 측면에서 파악하여 전인치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 네 측면 모두에 골고루 퍼져 있었습니다.
먼저 이사야의 메시아 치유사역은 어떤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까? 이제 그 내용을 자세히 묵상해 보십시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1절)
가난한 자에게 주는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아나빔)는 상처나 억압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들입니다. 마음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는 다 상처나 억압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입니다.
치유의 사역은 먼저 마음 상한 자에게 베풀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치유 사역은 먼저 마음 상한 자를 고치는 데 있습니다. 육체가 상한 것도 물론 심각한 것이지만, 마음이 상한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상한 마음을 치유하지 않으면 멀쩡한 몸으로도 아주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왜곡되고 병들어 있습니다. 생활이 왜곡된 것은 병든 영혼의 결과일 뿐입니다.
제가 상담을 많이 해 봅니다만, 전부 마음의 문제요 영혼의 문제입니다. 마음 한 번만 잘 먹으면 되는 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도박으로 가정이 완전히 파탄 지경에 있는 가정을 만납니다. 그런데 해답은 아주 간단해요. 도박을 끊으면 되지 않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되는 데 그게 죽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해 어떤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에 아내가 도박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주기적으로 엄청난 돈도 물어주고 폭력도 행사해 봤습니다. 자녀들도 엄마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조그만 틈만 생기면 시장 다녀온다고 하고서는 도박장에 가는 겁니다. 쇠사슬에 묶어 놓지 않고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정은 풍지박산이 났습니다. 가장 간단한 것 마음만 돌리면 되는 데,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왜곡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전부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행복하게 살려면 마음속에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한번 마음속에 상처를 받으면 좀처럼 치료되기가 어렵고 받은 그 상처를 통해 좌절감과 절망의 포로가 되고 열등의식과 자기폐쇄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반항적이고 파괴적인 사람, 반사회적인 인물이 되기 쉽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그 상처를 어떻게 조처하느냐에 따라 그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처에 대해서 3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첫째는 .상처를 받은 후에 자신은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합니다.
☛둘째는 상처의 책임을 모두 남에게 전가시키는 책임전가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처나 시험을 자기갱신의 기회로 삼지 못합니다.
☛셋째는 상처를 은혜로 치료하고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 시험과 상처를 자기발전의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집니까?
현대는 아픔과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생활이 어그러지고, 가정이 어그러지고, 인간관계가 뒤틀어지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 넣어 다 녹여 버리고 다시 새 제품으로 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감옥에 가 보면, 육체적으로 병들어서 골골한 사람, 장애자 이런 사람들 많이 와 있는 게 아닙니다. 전부 어떤 사람들입니까? 겉으로는 아주 멀쩡한 사람들입니다. 전부 멀끔하고 전부 잘 생겼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면 모든 게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1절)
우리 주님은 먼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을 통해서가 아니면, 주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상처받은 마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잘 오십니다. 그리고 완전히 치유하고 회복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여러분의 상처를 주님께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의지하고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두 번째 치유사역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포로는 이방 나라가 쳐들어와서 포로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 나라는 여러 가지입니다.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외의 것도 많습니다. 돈의 포로가 된 사람,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 명예의 포로가 된 사람, 게으름의 포로가 된 사람, 안락의 포로가 된 사람 종류가 많습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오락의 포로, 마약의 포로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성인들은 TV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포로가 된 사람들은 인생이 완전히 무장 해제 되어 있습니다. 하라는 대로해야 합니다. 자기 의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집착이 일어나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무장 해제예요. 이게 바로 포로 된 것입니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되면 포로가 된 것입니다. 술이든 담배든, 마약이든 취미든, 기호든 전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되지 않으면 이미 포로가 된 것입니다.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팔이 하나 없는 여인이 있었읍니다. 처녀 때부터 20여년동안 팔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열등감에 젖어 살아왔읍니다. 마음속에는 깊은 상처가 있었읍니다.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 팔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다녔읍니다.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뒤에서 큰소리만 나도 그녀는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렸읍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하루,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말씀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말씀 중에 팔 없는 것을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 말씀을 깊게 묵상했습니다. 팔 없는 것에 대한 감사! 팔 없는 것에 대한 감사! 이윽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영혼이 병든 것도 아니고, 온 몸이 망가진 것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 포로로 갇혀 억압되어 살아 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처음으로 팔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기 몸을 결박하고 있던 것에서 자유를 얻었읍니다. 그후 그녀가 외출을 하려고 했을때 위장을 하고 다니던 팔의 스카프를 풀어 버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읍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것만은 풀수 없다고 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진실로 내게 감사하였다면 위장하고 다니던 것을 풀라.'고 하셨읍니다. 그렇게 팔이 하나 없는 여자인 것을 인정하고 나니까, 숨길 것이 없고 보니까 큰 자유를 느껴서 더 크고 깊게 찬송하고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불구됨을 찬송함으로써 마음 속의 깊은 상처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참 자유를 얻을 때 행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포로에서 자유로와야 합니다. 주님이 포로생활에서 풀려나게 하셨습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완전한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든, 명예든, 향락이든, 쾌락이든, 분노든 절망이든, 취미든 기호든, 일상의 자잘한 습관이든, 만남과 인간 관계든, 그 어떤 것이든 포로가 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참 자유를 주셨으니 삶을 다스리고 사용하십시오. 누리고 주장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안 되는 분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치료의 하나님께서 내적 치유를 해 주실 것입니다. 포로잡은 것들을 쳐부수고, 놓여나게 하실 것입니다. 의지를 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치료의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치유사역의 세 번째는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는 것입니다.
놓임을 준다는 말의 원래 뜻은 ‘갇힌 자의 감옥을 여는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열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영어 번역에서는 갇힌 자의 암흑을 밝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둠을 밝게 비춰 주는 것, 갇힌 세계를 열어 주는 것, 이것이 치료의 사역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기 세계에 갇혀 지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억압입니다. 어둠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치료의 하나님께 간구 해야 합니다. “주님, 나의 갇힌 세계를 열어 주십시오. 저의 어둠을 해결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가장 성숙한 기도입니다.
인격이 닫혀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직도 영혼이 어둠에 빠져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나의 인격에는 어둠의 구석이 없는지? 나의 인격은 닫혀져 있지 않은지? 나의 세계는 갇혀져 있지 않은지? 주님의 빛 아래 밝게 쪼이도록 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격의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빛을 주실 것입니다. 그대의 무의식에까지 똬리를 틀고 있는 암흑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참으로 밝고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갇힌 세계에서 놓여난 자 만이 남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격 안에 아직도 어둠이 치유되지 않는 자는 남을 치유하는 복음 증거의 사역에 효과적으로 임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 주님의 치유 사역은 참으로 깊고도 넓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 모두를 치료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상함과 억압과 갇힘을 해결해 주십니다. 재가 회관으로 바뀌도록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도록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화관은 축제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치유되고 회복되면 기쁨이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은혜의 해입니다.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입니다. 바로 희년입니다.
희년은 해방과 치유의 해입니다. 억압된 자를 치유하고 갇히고 억눌린 자를 해방하며, 왜곡된 자, 상처 받은 자를 회복하는 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매일 만난다는 것은 이 치료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치료의 주님을 매일 만나, 상처를 치유 받고 억압을 해결하고, 갇힌 세계를 열어 가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밝고 건강하고 참된 자유를 만끽하는 한 주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저희를 치유하여 주소서
저희의 과거를 치유하여 주소서
저희의 왜곡된 영혼을 치유하여 주소서
저희의 감정과 정서와 인격을 치유하여 주소서
저희의 부정적인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여 주소서.
저희의 병든 인격과 습관을 치유하여 주소서.
저희의 불건강한 관계와 만남을 치유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