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목사
오늘은 우리 총회에서 청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청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7-8절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고 즐겁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말로 시작합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 했습니다. 먼저 7절의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한 데에서 "빛"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은 인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서도 "태어난다"는 것을 종종 "빛을 본다"고 하고 "죽는다"는 것을 "눈을 감는다"고 하듯 "빛"이란 말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란 표현은 사는 것 또는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생은 사는 것, 살아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일단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라고 오늘 본문의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따르는 8절 상반절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합니다. 인생을 항상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9절에서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고 권면이 아니라 거의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고 즐길 가치가 있는 것임을 밝힌 일반적인 선언에 이어 특별히 청년의 때를 언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의 의욕과 활기가 가장 넘치는 때가 청년기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살며 즐길 가치가 있지만, 청년기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기쁘고 자유롭게 지내야 할 이 청년의 때를 시시하게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여기서 우리는 일단 청년들에게는 최대한 밝고 즐겁고 기쁘고 자유롭게 그들의 때를 살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어른들의 세대에는 청년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책임이 있음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8절로 올라가서 하반절에 보면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라고 함으로써 앞섰던 인생예찬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발언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캄캄한 날"이란 앞선 세월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는 노년의 때와 그 후의 죽음으로 다가가는 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노년과 죽음의 때에 대한 묘사는 본문 12장 1절부터 그 이하에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여기 1절의 "곤고한 날"과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은 노년기에 대한 묘사라 할 수 있고, 2절의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짐"과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남"은 죽음이 가까운 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비가 오고 나면 개어야 할 터인데 다시 어두워짐으로써 더 이상 빛을 기대할 수 없는 때, 즉 인생이 끝날 때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의 노년의 대한 묘사는 3절부터 5절 상반절 사이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 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 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 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 니 ... “
이 부분은 신체의 각 기관이 약해지는 노년기의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는 것은 두 팔의 힘이 약해졌음을 암시합니다.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는 것은 두 다리의 힘이 빠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친다"는 것은 이빨들이 빠져서 잘 씹지 못함을 뜻합니다.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눈이 어두워짐을 말합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진다"는 것은 귀가 어두워짐을 의미합니다.
"맷돌 소리가 적어진다"는 것은 말 수가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은 잠을 잘 못 이루고 작은 소리에도 깬다는 말입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이 쇠한다"는 것은 노래부를 힘도 없어짐을 의미합니다.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란다"는 것은 기력이 쇠하여 높은 곳에 오르거나 먼 거리 여행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구나무가 꽃이 핀다"는 것은 머리가 반백이 되고 하얘지는 것을 말합니다.
"메뚜기도 짐이 된다"는 것은 메뚜기를 들기도 힘들만큼 쇠하여진다는 뜻입니다.
"정욕이 그침"은 이성에 대한 관심과 의욕도 다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5절 하반절부터 7절까지는 다시 죽음에 대한 묘사입니다.
“5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 래하게 됨이니라 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 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기 전에 기억하라 ”
6절에서 "은 줄에 매어있는 금 그릇"은 인간의 고귀함을 가리키며 또한 황금기와 같은 건강한 시절의 인생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샘과 우물은 언제나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떨어져 깨지며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져 물을 긷고 담을 수 없게 됨은 인생이 끝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나이 들고 죽게 될 때는 모든 것이 허무하게 여겨질 수 있음을 8절은 이렇게 보여줍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런데 이 인생에 대한 묘사의 갑작스런 변화는 청년의 때를 예찬하는 본문 9-10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나이 들기 전에 실컷 즐기라는 것인지?
아니면 젊어서 즐겨봐야 나중엔 다 헛것이라는 말인지?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이 말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봅니다:
☛첫째, 청년들은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검은 머리의 시절, 즉 젊은 시절이 다 헛되게 여겨지고 아무 낙이 없다고 하게 될 곤고한 날이 뒤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청년의 때뿐 아니라 평생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주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청년의 때를 잘 지내야 합니다. 청년의 때를 잘 지내려면 인생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이 없이 그저 즐기는 것은 청년의 때를 바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노년의 때를 예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살 때만 생각하지 않고 죽을 때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정말 잘 살 수 있습니다. 청년 때에는 죽음 같은 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청년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삶을 바르게 영위할 수 없습니다.
정말 바르게 사는 것은 나의 삶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창조주이시고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의 기원과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도 좋은 삶, 영원히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주이심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청년의 때를 즐기며 살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렵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청년의 때가 지나도 항상 즐거울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지나갈 한 때만 즐거울 삶이 아니라 영원히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에서 청년의 때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는 이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인생의 모든 때가 그렇지만 청년의 때 또한 함부로 살 수 없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청년들아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것이 오늘 우리 청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어른들에게는 청년들에게 본이 되는 삶의 모습, 후회되지 않고 존경과 흠모를
받을 만한 삶의 모습을 보이라는 명령으로 들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는 주말부터 지금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대망의 월드컵 축구대회가 한국과 일본에서 한 달 동안 벌어집니다. 1988년에 서울에서 열렸던 올림픽경기 이상으로 젊은이들을 열광시킬 이 지구촌의 축제는 평생에 다시 맞기 힘들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저녁에는 세계 최강의 프랑스대표팀과 한국대표팀의 평가전이 벌어집니다. 프랑스 대표팀의 그 환상적인 예술축구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청년들은 그 누구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더군다나 청년1부는 헌신예배를 드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우리 청년들과 새문안의 모든 교우들에게 절호의 기회입니다. 무엇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겠습니까? 우리가 축구를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보여줄 기회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청년들이 만사를 잊어버리고 축구를 보는 즐거움에 빠졌을 때 우리 청년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또 우리 어른들이 우리 청년들의 본이 되는 신앙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청년들로부터 존경받고 흠모의 대상이 될만한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있어야 할 시간에 TV 앞에서 축구와 만나고 있을 사람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헌신해야 할 시간에 축구에게 헌신하고 있는 청년이 한 사람도 없기를 원합니다. 평소에 저녁예배에 참석하지 않으시던 분들도 오늘 저녁에는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한 달 동안 나머지 경기들은 실컷 즐기세요. 그러나 우리 교회의 정기예배시간은 월드컵축구경기도 전혀 건드리지 못했다는 역사를 남겨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교회로서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축구 때문에 예배에 빠진다면 우리가 세상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축구 앞에서는 하나님을 얼마든지 잊어버릴 수 있다면 기독청년들이 세상의 청년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1시간 반 동안의 그 축구경기의 즐거움 하나 포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일생을 바쳐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하겠습니까? 오늘 저녁 축구를 기억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청년들아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이 제목을 오늘 저녁을 위해 주시는, 월드컵 기간 동안 주시는, 평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