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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들 유관지 목사
오늘의 본문을 잠언서에서 택했습니다. 다른 성경들을 읽을 때는 내용의 흐름에 따라 문단을 구분하고 새 문단이 시작되는 곳에는 동그라미 부호를 해 놓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잠언서에는 문단을 나타내는 이 동그라미들이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잠언서는 대부분 한 절이 하나의 독립된 금언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서는 915절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잠언서에 900개 가까운 금언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잠언서는 금언의 큰 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때입니다.
오늘은 8절의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8절의 "유리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대하면서 우리는 창세기 4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하는 벌을 주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가인은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여호와께 아룁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너무 무거운 벌입니다' 하는 뜻입니다.
8절의 후반부에는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잠언서 26장 2절에는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는 한 곳에 둥지를 만들어야 알을 낳아서 새끼를 얻을 수 있지 떠도는 새는 무엇을 이룰 수 없습니다. 떠돌다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볼 때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보면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교회들도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가운데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첫째, 육신의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땅의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다는 점입니다.
우선 야곱을 봅니다.
야곱은 형을 속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일 때문에 형의 분노를 피해 고향을 떠나 밧단아람의 외삼촌의 집에 가서 이십 년을 보냅니다. 그 이십 년 동안에 결혼을 하였고 자녀들도 많이 얻었으며 재물도 많이 모았습니다. 이제 밧단아람에 뿌리를 내리고 살만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애씁니다. 밧단아람을 탈출하다시피 하여, 형 에서의 분노라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음에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합니다.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박대하기 시작한 것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요. 그러나 그런 일이 없었어도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창30:3).
요셉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죽을 때 그의 형제들에게 '나는 죽지만 하나님이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때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약속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깁니다(창50:22∼26). '나는 타국인 애굽에서 죽지만 유골만이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라는 간절한 소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떠날 때 이 유언을 기억하고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옵니다(출13:18∼19).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땅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고향을 한없이, 한없이 그리워합니다.
바벨론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시137:1).
제2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반드시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하며 격려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레미야서 42장 11절과 12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신약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을 떠난 둘째 아들도 집을 떠날 때는 '야, 자유다!' 하면서 신이 났었겠지만 얼마 안 있어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우리 주변에는 육신의 고향을 떠나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우선 월남 실향민들이 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집을 떠난 노숙자들도 있습니다.
가출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 사람들을 도와야합니다.
이 사람들이 고향이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합니다.
저는 방송 PD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지금도 기억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국도1호선을 따라서'라는 프로그램입니다.
국도1호선은 목포에서 출발해서 대전, 개성,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가는 939.10Km 길이의 도로인데 이 길을 쭉 따라 가면서 이 도로가 통과하는 지역들에 대해 알아보는 내용입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판문군(板門郡)인데 판문군은 어떤 곳인지, 그 다음은 개성인데 개성은 어떤 곳인지, 개성 위는 금천(金川)인데 금천은 어떤 곳인지, 금천 위는 평산(平山)인데 평산은 어떤 곳인지, 그 곳 출신 실향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보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랐는데 하나는 우리 나라에 북한 각 지역 출신 실향민들이 골고루 많이 있다는 사실이고, 하나는 분단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들이 같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큰 슬픔을 그대로 안고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터뷰를 할 때 처음에는 신이 나서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는 거의 예외 없이 웁니다.'아, 고향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로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하는 말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울리면 프로그램은 성공한 것이 됩니다. '국도 1호선을 따라서'에서 재미를 보고 이어서 '국도5호선을 따라서'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도 5호선은 마산에서 출발해서 철원으로 해서 원산으로 해서 영흥으로 해서 후창군까지 가는 도로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시작하다가 중단되었습니다. 이유는 대단히 간단합니다. 제가 방송사를 떠나 목양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가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고향으로 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 제거해 달라고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남한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이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합니다.
저희 교회가 올해에는 이런 분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로 하고 예산도 따로 세워놓았습니다.
심방이 끝나는 대로 이 분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 머물게 되는 대방동 대성공사의 평화교회, 안성 하나원의 하나교회를 방문해서 예배 드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노숙자들, 가출청소년들, 이들은 정말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은 존재들인데,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 요한복음 5장 앞부분,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 성 양문 옆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인 각종 환자들을 찾아간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환자들 역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명절에 -이 명절은 유대인의 여러 명절들 가운데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이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제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38년 된 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38년 된 환자는 고향을 떠난 지 제일 오래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둘째, 영적인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하늘 나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공통점은 본향 찾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본향은 바로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1절에서 16절까지를 읽어 드립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데 모범을 보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나라라는 고향을 위해 육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버렸습니다.
영적으로는 우리는 하늘나라가 고향인 이 땅의 나그네들입니다.
우리는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듯, 야곱이나 요셉이 고향을 그리워하듯, 바벨로 포로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듯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지내야 합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더욱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시에 나와 열심히 일해서 좋은 소문이 나고 인정받은 사람은 설과 같은 명절에 고향에 갈 때 떳떳하게 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산 사람은 이 다음에 고향인 하늘나라에 갈 때 떳떳하게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17절 뒷부분에서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였고 2장 11절에서는 우리를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에 토마스 라우손 테일러(Thomas Rawson Taylor 1807∼1835)라는 회중교회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건강이 대단히 약했습니다. 목회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힘써 일했습니다.
1835년 3월 6일 저녁, 테일러 목사님은 한 집회에서 '나는 죽을 때 말씀을 들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예감한 것 같은 설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테일러 목사님이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가족들이 그의 방문을 열어보니 테일러 목사님은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 때 테일러 목사님의 나이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이 테일러 목사님이 우리에게 남겨준 찬송가가 있습니다. 290장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입니다. 이 찬송가는 3절로 되어 있는데 모두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는 말로 끝납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날 구원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테일러 목사님은 하늘나라를 돌아갈 고향으로 삼고 살았기에 병약한 몸으로 짧은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감동적인 자취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가 고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혼을 부인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고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장 21절에서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고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더욱 불쌍한 자'라고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향인 이 하늘 나라를 늘 사모하고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보금자리에 있는 새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사는 사람, 하늘나라가 영적인 고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서 떠도는 새와 같습니다.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는 안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향인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거기에 마음을 두고 심령이 안식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 괴로운 세상에서 살지라도 언제나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영적인 고향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들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알려주어야 합니다.
셋째, 고향을 떠난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고향을 떠난 교회라고 하는 것일까요?
실향민들이 세운 교회입니까?
아니면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재외동포들이 현지에 세운 교회들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고향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있는 한 가지 사건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제 문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 때 열두 사도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사 일곱을 택해 이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초기에 있었던 이 일은 기도와 말씀, 이 둘이 바로 교회의 고향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들을 고향을 떠난 교회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우리는 고향을 지키겠다. 우리는 이 교회가 고향을 떠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겠다'고 한 것입니다.
프랑스어로는 고향을 떠난 사람을 '데라시네'(deracine)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동시에 '뿌리를 잃은 사람들'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소홀히 하는 교회는 뿌리를 잃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고향인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듯, 기도와 말씀을 고향으로
알고 있는 교회들이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부흥합니다.
오늘은 은급주일입니다. '은급'(恩給)이라는 말을 낯설어 하는 분들이 많은데 '연금'을 예전에는 은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을 교회에서는 그대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은급주일은 한 평생 목회현장을 지키시다 은퇴한 원로목사님들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원로목사님들을 찾아 뵙거나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면 공통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저 기도 많이 하고 말씀 선포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일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을 후회한다'고 하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감리교회를 담임했다가 은퇴하신 목사님 한 분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지방에서 기도와 성경 중심의 설교에 힘쓰며 목회하다가 그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앞의 담임목사, 그 앞의 담임목사가 모두 지적인 분들이었고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다. 나도 뒤떨어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지적인 목회를 하기에 힘썼다. 지금 그것이 매우 후회된다. 내가 지방에서 한 것처럼 기도와 성경 중심의 설교에 힘썼더라면 그 교회는 분명히 더욱 부흥했을 것이고 튼튼해졌을 것이다. 그 교회는 아마도 그런 것을 바라고 나를 담임목사로 청했는지도 모른다'
가슴에 새겨지는 충고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감사한 일들을 두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이 많이 해소되고 연합기운이 강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진보와 보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슨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또 하나는 기도와 말씀이 교회의 고향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동안 기도와 말씀보다 사회참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 분들은 교회의 목적이 마치 여기에 있는 것처럼 여겼고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교회들은 시대에 뒤진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갈채를 받았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과열현상을 보인 이유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이 보수일변도였다가 사회참여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신학이 소개되는데 그것을 너그럽게 수용하지 않으니까 반발로 이런 일이 강해졌습니다.
또 그 동안 우리 사회가 군사독재와 지나친 부조리들을 안고 있었는데 교회가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제, 그리고 사회를 향한 발언과 행동, 필요한 일들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의 바탕 위에서 해야할 일들입니다. 경건에 뿌리를 내리고 해야할 일들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제목이 '품위 있게, 질서 있게'였는데 그럴 때 교회가 하는 이런 일들이 품위를 갖게 됩니다.
경건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교회가 하는 이런 일들은 많은 경우 운동권, 노조, 시민단체가 하는 일들과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참여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 준 인물이 있습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 2. 4.∼1945. 4. 9.)라는 독일 목사님입니다. 내일 모레(2월6일)가 본회퍼 목사 탄생 8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고백교회라는 이름의 바른 교회 운동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분입니다.
신학교 1학년 때 이 분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분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더 놀랐습니다. 이 분이 얼마나 진지한 영적 수련 과정을 거쳤나 하는 것과 얼마나 깊은 경건의 소유자였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본회퍼라는 이름만 알지 않고 이 분이 진지한 영적 수련의 과정을 거친 깊은 경건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에 대해 오랫동안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오늘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존재방식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기도와 인간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에 기도와 말씀의 중요성을 공통으로 강조하는 분위기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고향을 찾는 때입니다.
고향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차들로 지금 고속도로가 지체현상을 이루고 각종 대중 교통수단이 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고향이 있고 그 영적인 고향이 하늘나라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교회의 고향인 기도와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집으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관객 400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보지 못해 무엇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것 같지도 않고 광고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제목이 관객들을 끌어들이는데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집으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말입니다.
'고향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때로는 속삭이고, 때로는 외쳐야합니다.
이런 일에 더욱 힘쓰시는 여러분과 저, 합해서 목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랑, 질투, 위선
성경본문 : 잠언 27: 1-8
1. 자랑하지 말라.
1-2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랑하는 자를 극히 미워하십니다.
시 12:3에 “여호와께서……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인 듯이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는 외람된 자이며, 교만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므로 맡은 자로서 충성을 다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 것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내일을 자랑하며 오늘에 충실치 못한 것은 하나님께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고 그날그날 주님만 믿고 힘써 일해야 합니다.
(2)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 것입니다.
2절에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 1:27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의 무가치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 요한이 여자들이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자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마 8:8에 백부장은 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시며 가라사대 마 8:10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여”라고 하셨습니다.만일 이들이 스스로를 칭찬하였다면 그들의 행위는 오히려 교만한 것이 되었고 가치가 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독일 격언에 “사람이 스스로 칭찬하는 것은 더러운 냄새나는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과오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아름답고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분과 투기
3-4절에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돌보다 무거우니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라고 했습니다.
분을 품는 자는 분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엡 4:26-27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흥분하면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되는 대로 행동하여 자신의 추악함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의 마귀의 시험에 빠져 타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됩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가 분을 품을 때에는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3. 책망과 아첨
5-6절에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면책이란 말은 노골적인 책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상대방에게 내놓고 책선함을 말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람이 아니요 드러내놓고 시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악에서 돌이켜 멸망당하지 않게 해 줍니다.
논어에 보면 “충고하여 벗을 선히 인도하여라”고 하였으며, 노자는 말하기를 “믿음성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친구의 면책은 당장에는 듣기에 고통스러우나 나중에는 양약이 됩니다. 따라서 충고를 즐겨 들을 줄 아는 마음 자세는 지혜로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입 맞춘다는 말은 아부 행위를 가르킵니다. 원수가 친절을 베푸는 것이 해코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참된 마음 없이 호의를 베풀면 삼가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4. 부자와 빈 자
7절에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 쓴 것이라도 다니라”고 했습니다. 매일 호화판으로 먹어대는 자들에게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추라기에 물린 것처럼 아무를 맛있는 음식이라도 곧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반해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도 변변치 못 먹는 자들에게는 배부른 자가 쓰다고 소리칠 정도의 음식도 “달다”고 합니다. 그들은 형편없는 음식도 즐거이 먹고 소화시키며 그것으로 힘을 얻습니다. 주린 자는 냉수 한 그릇이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올립니다. 그러나 배부른 자는 고량진미 진수성찬에도 맛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옳지 못한 행위입니다. 부자는 자신들에게 넘치는 여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5. 방황하는 자
8절에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돌면 사냥꾼에게 잡히기 쉽고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향을 떠난 사람도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로서 본향을 상실한 영혼은 세상에서 유리하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향을 찾아가는 신앙생활에서 힘써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고전 15:58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옮겨 쓴 설교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