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16-18
무고한 자의 피의 호소 / 김윤기 목사
남조 유대나라의 14대 왕인 므낫세는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린 왕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므낫세는 당시 선지자들의 입을 봉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매일 그들 중 몇 사람을 살해하였다고 합니다(Josephus).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도 이때 톱에 켜이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한편 율법에서 '무죄한 자' 라는 것은 죽음의 심판에 해당되지 않는 자, 즉 사면(赦免)을 받을 수 있는 자를 가리키며 이런 사람들은 보호해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자'는 곧 "살인자"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므낫세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정책에 대하여 비판한다고 하여 신실한 자들과 선지자들 즉 무고한 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공평의 도시였으나 이제 므낫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포학한 도시로 변했고, 의로운 도시였으나 부르짖음이 가득한 도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사 5:7).
이번 3.1절은 83돐을 맞는 3.1절이요, 기독교에서도 하나의 절기로 지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기독교도 기미년 3.1운동 때 왜놈들에 의하여 무참하게도 무고한 수많은 생명을 아사 갔기 때문에, 3.1운동은 교회와 직간접으로 큰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 한국 교회가 3.1운동에 참여한 경로입니다.
1919년 2월 8일에 일본 동경에 있는 우리나라 유학생이 먼저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3·1운동이 맨주먹으로 일어난 운동인 것처럼, 또한 2·8운동도 총이나 칼 한 자루 없이 빈손으로 일어난 운동입니다. 동양의 최대강국(最大强國)이요 세계 오대강국중(五大强國中)에 하나라는 일본에 항거(抗拒)한 운동입니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불가침이라고 이르는 천황(天皇)이 자리잡고 있는 일본의 어마어마한 수도인 東京한복판, 三百여만명이 사는 東京중심지에서 불과 三·四百명의 학생들이 적국(敵國) 일본에게 너희들은 무력(武力)과 위협(威脅)으로 사기(詐欺)와 간계(奸計)로 한국을 먹어버렸으니 아무래도 우리는 독립을 해야 되겠다고 부르짖은 독립 운동입니다.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은 이광수로 하여금 만들게 하되 영문과 일문으로도 각각 번역하여 일본의 조야(朝野)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의 시작이 교회가 아니고 우선 동경 유학생 중심으로 일본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될 때 그 집회의 장소가 기독 청년회 회관이고 그 대회의 처음과 나중에 윤창석 목사의 기원이 선언의 행위에 종교적 분위기의 협조를 가능하게는 하였지만, 그 주도가 교인이 아닌 이광수였습니다.
3.1운동의 유발은 멀리 윌슨 대통령의 소위 민족 자결주의 제창이나 이때 고종왕의 서거가 (1919.1.24)가 일인의 자객에 의해서 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3.1독립운동이 발생했다고 보지만 그 보다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으니
①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멸망이 컸고
②엄격한 총독정치의 군정과 그 횡포에 대항하기 위하여
③일제의 민족성 박멸 기도. 등 10가지 정도의 근본원인이 있었습니다.
이 3.1독립운동은 한국사람전체의 운동이었고 또 천도교나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 단체가 선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핵심과 기동성은 기독교를 경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 교회가 강력한 민족의 정기와 울분을 호소할 효과적인 통로를 제공했는데 기독교 교회의 전국적인 유기적 맥과 망을 이용하지 않고는 비밀의 연락과 그 보장 그리고 거사의 동시성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최남선씨가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33인이 서명했을 때 그중 16(장로교7명, 감리교 9명)명이 기독교인사였습니다. 미국 기독교 연합회 동양문제 위원회의 글에는 "예수교인만이 현시점에서 국제 정세에 정통하여 민족 자결의 횃불을 들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며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 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이라는 것입니다." 또 동지에서 "예수 믿는 다는 말과 독립 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이 지금 한국에서는 동의어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2. 3.1운동 참여의 결과와 교회의 피해입니다.
3.1운동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2,000만명이고 기독교는 겨우 30만명(1.5%)이었습니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일본 경찰. 헌병. 군인들은 총칼을 가지고 맨주먹의 독립시위자를 무참히 진압했습니다. 구타, 고문, 사살, 구금, 방화 등이 연달아 일어나고 감옥마다 만원이 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낸 통계만 보아도 한국인 사상자 631명, 고문당한 자 1,400명, 체포된 자 28,934명, 징역 언도 5,156명, 교회파괴 82동 등이었습니다. 예수교 장로회의 보고에 따르면 장로교회의 참화는 체포 3,804명, 체포된 목사.장로 134명, 사살된 자 41명, 매맞아 죽은 자 61명, 파괴된 교회당 12개소등이었고, 성결교단은 박봉진 이상철 목사가 독립만세 부르다가 투옥되고, 평양에서만도 1919년 3월부터 6월까지 교인 347명이 투옥, 13명은 사살 또는 고문으로 죽고 26개 교회가 폐쇠되고 19개교회당이 피해를 입게되었습니다. 김병조목사의 한국독립운동사략=(1920)에는 극심한 야만적 악형을 받은 이를 2개월동안에 2만5천97인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1918년에 견주어 교회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가 하는 것은 교회수가 4천81개에서 4천17개로, 교인수가 16만9백9명에서 14만4천62명으로, 주일학교 학생이 11만5천5백76명에서 9만5백4명으로 각각 감소된 사실에서도 뚜렷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독립운동이 한국교회에 결국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명약관화한 일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실패할 경우 교회에 대한 박해나 핍박이 올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 운동에 가담했던 것이 교회입니다. 독립운동 후 일본 경찰과 헌병의 병력은 교회를 때려부수고 종탑과 성경책을 산산조각 냈으며 검거, 선풍 역시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목표로 했습니다
(수원 제암리교회, 화성군 향남면 발안장의 피해 )
드렁바위라고도 부르는 작은 농촌이요 빈민들이 몇십호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3.1운동때 교회가 중심이 되어 만세 부르고 동리가 참여했었습니다. 음3월 16일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몰려와 16세 이상의 모든 교인들을 예배 당에 모이라 하여 모아 놓고는 문을 잠근 다음에 밖에서는 총을 탕탕 쏘며 석유를 예배당에 뿌리고는 불을 질렀습니다. 밖에는 무장한 왜경들이 총 끝에 창을 꽂아들고 예배당을 포위하고 불타는 예배당에서 뛰쳐나오려는 자는 창으로 찔렀습니다. 전교인들은 소사하고 달아나는 동민들은 왜경이 쫓아가 죽이고 그 동네 모든 가옥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29명 소사했는데 그 중에 20명은 기독교인이고 9명은 비교인 이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선교사들은 일절 배제시켰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선교사들의 본국정부에서는 조선의 정치에는 선교사들이 참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의 글에는 "손에든 것 없이 주먹만 불끈 쥐고 저항도 안하는 백의의 겨레가 갖은 폭악과 잔인에 쓰러지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또 무차별하게 총에도 맞아 거꾸러지며 이런 일이 오늘도 내일도 이 나라 도처에서 자행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을 못추니 미칠 것 만 같다"고 했습니다.
2001년 1월 아펜젤러 2세의 딸이자 노블 선교사의 외손녀인 마가렛 하일러에 의해 전달된 2권의 문서와 자료집에는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 교회 외에도 수원역에서 서쪽으로 21마일 떨어진 사강리와 인근 마을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음이 기록돼 있는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노블 문건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만 326채의 집이 불에 탔으며 39명이 사망하고 1600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또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일본 경찰이 발포하자 군중들이 일본 경찰을 돌로 죽인 내용 등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언급돼 있습니다.또 이번 노블 문건에는 고종 황제를 독살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배 사진이 실려 있는 등 미공개 자료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는 3.1 운동 때 무고한자가 수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무고한자의 피의 호소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해 가해자를 심판하십니다.
본문 에서 므낫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어떤 선지자가 활동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는 히스기야가 죽기 이전에 예언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스바냐의 사역은 요시야왕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므낫세의 통치 기간 55년 동안에 성경상으로 알려진 선지자들은 아무도 없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왕하21:10-15절에 기록된 말씀들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또는 익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선포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삼상 3:11과 렘 19:3 에서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는 무서운 심판이 될 것이며 그러한 심판의 소식을 들을 때 공포와 전율로 인해 귀가 멍멍할 정도가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무고한 자의 피를 많이 흘렸던 므낫세는 그 죄의 댓가로 예루살렘 멸망(B.C. 586)을 가져왔는데 므낫세 사후(B.C. 642년경) 약 60년 후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무혐의 한 사람을 죽이면 가해자에게 심판의 경고를 했습니다.
①하나님은 다윗의 범죄에 대해 나단 선지자를 보내 경고와 심판을 합니다.
(삼하12:9-10)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이렇게 하나님은 다윗이 간음죄를 범하여 그 자식을 낳아 어린아이로 클 때까지 책망이 없다가, 드디어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자 즉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먼저 살인죄를 지적하고 다음에 간음죄를 책망을 했습니다.
②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을 하나님이 직접 심판을 했습니다.
범죄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얼마 가지 아니해서 직접 책망과 벌을 내리시었습니다. (창4:10-12)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직접 가인에게 나타나시어 책망을 했습니다.
③아합왕은 이스라엘의 총 42명의 왕중 가장 악한 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이세벨과 공모하여 무고하게 나봇을 죽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내 그를 책망을 합니다. 성경은 무고한자의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곧 따라 나옵니다.
(왕상21:17-19)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나니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무고하게 죽인자를 직접 또는 선지자를 보내 그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했습니다.
④일본도 2차대전의 패전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전국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애매하게 고난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그 가해자를 역사 속에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참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