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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분과 - 동화>
12명의 마뜨료시카와 떠난 여행
1712명의 마뜨료시카와 떠난 여행- 박경선 동화.hwp
1. 요기요, 안녕?
한국에 왔다. 기차를 탔다. 기차가 횡성역에 다다르자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덜컹거리는 차창 밖에 풍경들이 낯 설다. 러시아에서 보던 키 큰 자작나무들이 아니다. 하지만, 양쪽에 줄지어 서있는 단풍 물든 나뭇잎들이 손을 흔들며 반긴다.
‘요기요, 반가워!’
그래, 오랜만이야. 이십년 만에 찾아온 조국, 엄마 품이 아닌가? 노란 나뭇잎도 차창에 붙어 나를 따라온다. 버스는 꼬불꼬불한 길을 까불대듯 달린다. 들판의 곡식들도 바람 따라 너울거린다.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나는 기대를 하며 산골로 산골로 끌려간다.
“종점입니다. 모두 다 내리세요.”
내 앞에 나이 많은 기사아저씨가 서 있다. 버스에는 아무도 없다.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고마워 소망원은요?”
기사 아저씨에게 소망원 이름을 대는 순간, 나는 꼬마가 되어 버린다.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는 분명 여섯 살 난 여자아이 목소리다.
“아, 축하해 소망원 말이군. 고마워가 축하해로 바뀐 지가 꽤 되었는데......”
아저씨는 내 얼굴을 훑어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맞아요. 수녀님이 축하해로 바뀌었다고 했어요.”
그러자 빙그레 웃으며 저기 오솔길쪽을 손으로 가리킨다.
“저어기로 곧장 가면 되는데...”
말끝을 흐리며 나를 계속 훑어본다. 내가 금방 꼬마로 변해버려 이상하게 여기는 듯하다. 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오솔길로 접어든다. 가을 하늘이 너무 파랗다. 눈물이 난다. 파란색이 내 눈에 가득 담겨서 그런가? 파란 하늘 아래 주황색, 청색 기와지붕들이 나지막하게 엎드려있다. ‘날 찾아봐라.’하며 숨바꼭질한다. ‘그래 찾아보지.’ 저만치에 빨간 지붕, 아담한 집이 보인다. 가까이 가니 ‘축하해 소망원’이라는 글자가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늙수그레한 수녀님이 멀리서 지켜보다 뜰을 걸어 나오신다. 미리 해외 전화를 해둔 덕이다.
“엠마수녀님이세요?”
“그래요. 요기요씨, 멀리서 오느라 힘드셨지?”
수녀님이 대뜸 손을 잡아주신다. 수녀님 옆으로 줄지어 선 꽃들도 반겨준다.
‘요기요, 반가워!’
반가움에 꽃이름부터 묻는다.
“이 꽃들, 꽃이름이 뭐죠? 저 어릴 때도 여기 많이 피어있었어요.”
“아, 코스모스. 러시아엔 없어요?”
나는 못 봤다는 뜻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2. 기억상자
수녀님을 따라 사무실에 들어선다. 난로 위 주전자가 따스한 입김을 내뿜고 있다. 수녀님은 준비해둔 박하차를 찻잔에 부어주신다. 페퍼민트 향이랑 비슷한 향기가 좋다. 한 모금 마시니까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녀님을 바라보니 날마다 꿈속에서 본 듯한 얼굴이다.
“어머니 얼굴이 기억나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웃어 보인다. 엄마 얼굴이 수녀님과 닮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뻥치고 다니는 아이로 몰려 쫓겨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럼 기억상자도 못보고 쫓겨 가야 되는데? 안 돼!’
수녀님은 뒷방으로 가더니 낡은 상자 하나를 꺼내온다. 어릴 때 보던 필통보다 두 배로 큰 파란색 플라스틱 통인데 색이 바래었다.
“여기 뭐가 들어있는지 기억나요?”
“글쎄요. 말씀 낮추세요. 저는 지금 여섯 살 요기요를 찾아왔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 엄마, 아빠의 사진과 이름, 사는 곳 주소. 그리고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사진 한 장 정도, 내 생일 등. 나는 통을 받아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젖힌다.
‘헉. 뭐야. 이게 다야?’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어린애가 검은색연필로 그린 그림이 한 장 들어있다. 자전거 그림과 여자 얼굴 그림이다.
‘그래 맞아. 친구들이 자기 부모님 사진을 상자에 넣을 때 나는 사진 대신 그림을 그려 넣었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림 밑에 개발새발 쓴 글자가 적혀있다. 자전거 밑에는 ‘따르릉’, 여자 얼굴 밑에는 ‘따이공’이라 적혀있다. 수녀님이 쪽지를 들여다보더니 뜻풀이를 하신다.
“따이공이라면 중국말로 보따리장수인데... ”
수녀님 말에 기억이 어렴풋하다. 사람들이 엄마를 ‘따이공아’하고 불렀던가? 보따리를 이고 다니던 엄마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따르릉은 뭐야. 아빠 이름인가?”
수녀님 질문이 황당하다. 저 글자는 분명 내 글씨일 텐데 왜 썼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 볼펜 길이만한 나무막대기가 하나 들어있다. ‘이 막대기는 뭐람?’ 나는 막대기를 치우며 옆에 놓인 꼬마 숟가락을 꺼내 쥐어본다. 손아귀속에 쏙 들어앉아 보이지도 앉는 숟가락이다.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난다. 내가 찾고 싶었던 엄마, 아빠 이름도, 얼굴도, 주소도 없는 기억상자라니...... . 이 걸 보려고 이십년을 벼루어 왔던가? 그리고 러시아에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나는 고개를 떨군다. 수녀님이 미안한 듯 말한다.
“기억 상자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사진이랑 부모 사진, 그리고 부모 이름 정도는 쓰여져 있어야하는데...... .”
내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숙여진다. 수녀님은 보다 못해 또 궁시렁거린다.
“여기 맡기게 된 사정이라든지, 언제 찾으러오겠다는 편지라도 받아 넣어두어야하는데. 하다못해 부모를 기억할 만한 물건 하나쯤은 들어있어야 하는데...... .”
수녀님 목소리도 떨려 나온다. 나는 당황스럽다. 내가 울 일이 아니다. 내 슬픔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늙은 수녀님을 울게 할 수는 없지.
3. 함께 온 마뜨료시카
나는 내가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천천히 푼다.
“수녀님, 러시아 마뜨료시카 인형 알지요? 까면 깔수록 속에 더 작은 것이 들어있는 인형 형제요.”
“알지!”
수녀님이 눈물을 훔치더니 웃어 보인다. 나는 내가 만든 거라며 첫째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얘는 이름이 웃음콩이에요.”
하며 소개시킨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청보자기로 둘러싸왔다.
“으, 인형 얼굴이 인형 만든 사람과 닮았네.”
“예, 제가 이 인형 만드는 공장에 다녀요.”
“그럼, 목공사란 말이야?”
“아니에요. 몸체는 나무 깎는 기계로 다듬지만요. 얼굴 그리고 색칠하는 것은 모두 손으로 하거든요.”
“그럼 화가로구먼. 몇 년이나 하면 이런 솜씨가 나올까?”
수녀님이 신기해하는 바람에 나는 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여섯 살에 건너갔거든요. 그때부터 이 공장에서 잔일을 돕다가 지금껏.”
그러면서 내 비밀을 털어놓는다. 나무인형에게 눈, 코. 입, 귀를 그려주고 고운 색깔 옷을 입힌 뒤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주며 눈을 맞추면 인형이 깨어난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통하게 되고 말도 주고받는다는 것까지.
“마력의 손바닥이구먼. 감사한 일이네.”
수녀님이 활짝 웃는다. 웃음콩도 활짝 웃는다.
“웃음콩이 그러네요. 울고 난 뒤에는 웃음 약이 최고라고.”
나도 수녀님께 웃어 보인다. 함께 울어준 수녀님께 보여드리는 선물이기도 하다. 마음이 좀 차분해지자 마뜨료시카 인형 통 안에 들어있는 둘째를 꺼낸다.
“얘는 둘째, 고맘콩에요.”
내가 수녀님께 인사 시키자 고맘콩이 불쑥 말한다.
“모든 게 고맙지요. 뭐!”
내가 대신 말해주긴 했지만, 통에서 나오자마자 뜬금없는 말을 하다니.
“맞아, 부모가 아기를 키울 수 없어 기관에 맡길 때야 오죽했으면 그럴까? 세월 따라 철 들면 모든 게 고맙지. 뭐.”
수녀님이 나와 고맘콩의 마음을 읽은 듯 대신 말한다.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셋째를 불러낸다.
“얘는 장남콩에요. 장난이 좀 심해서.”
하며 꺼내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빛바랜 플라스틱 통 속으로 머리를 박는다. 그 바람에 기억 상자 속에 그림으로 누워있던 자전거가 다가온다.
‘요기요! 자전거 태워줄까?’
“어린 날, 자전거를 참 타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전거를 그렸구먼.”
나는 그저 웃으며 넷째를 불러낸다.
“얘는 옴마콩에요.”
하며 세워놓으려는데 기억상자 쪽으로 쓰러진다. 그러더니 엄마 얼굴에 부딪힌다.
‘요기요, 행복했으면 좋겠다.’
선으로 그려진 엄마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다섯째를 불러내어 세운다.
“얘는 다섯째, 불량콩에요.”
불량콩이 쑥스러운 듯 중얼거린다. 그래서 수녀님께 불량콩이 한 말을 전한다.
“불량콩이 그러네요. 어린 날은 불행했다고.”
“불행은 행복을 위한 디딤돌이지 뭐.”
수녀님이 혼잣말을 한다. 나는 여섯째를 불러내어 소개 시킨다.
“얘는 여섯째, 밥마콩에요.”
그러자 밥마콩이 쓰러지며 기억 상자 속 숟가락에 몸을 부딪친다
“기억나네요. 생일날 하얀 쌀밥을 퍼먹었어요. 이 숟가락을 계속 빨고 다니니까 원장님이 내 생일 선물로 가지라고 했어요.”
“쯧쯧, 옛날에는 모두 다 배불리 먹지 못했지. 식구들은 좀 많았나. 또.”
그러는데 누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이내 고개를 들이밀고 편지 한통을 내민다.
“원장님, 여기 싸인 좀 해주세요.”
“그럽시다. 우체부 양반! 차 한 잔 하고 가시게.”
수녀님이 차 한 잔 나누는 틈에 밖으로 나온다. 먼지 뒤집어 쓴 자전거가 기다리고 있다. 양반이 타고 온 자전거인가 보다. ‘아, 따르릉이다.’ 다가가려는데 양반이 이내 나와서 타고 가버린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만 귀에 남는다. 어렴풋한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다 사라져버린다.
4. 잘 계세요. 사랑해요!
자전거가 사라지자 나는 다시 사무실에 들어온다. 수녀님이 한 줄로 늘어선 마뜨료시카를 가리키며 묻는다.
“도대체 이 조그만 통 안에 몇 사람이나 들어있담?”
“아직 여섯 아이가 더 들어있어요.”
“세상에나 그럼 열 두 형제야? 고 작은 통속에...”
나는 수녀님이 놀라는 게 재미있어서 더 큰 몸짓으로 일곱 번째를 불러내어 세운다.
“얘는 노래콩에요.”
노래콩은 마뜨료시카 통 속에서 나오더니 기억상자속의 작은 막대기를 집어 들며 ‘이것 내것!’ 한다.
“그래, 맞아!”
내가 노래콩의 막대기를 받아 쥐고 저으며 노래를 부른다.
“서산 넘어 해님이 숨바꼭질 할 적에~ 촛불 하나 켜놨죠. 학예회 때 부른 노래에요.”
그러자 수녀님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맞힌 듯 손뼉을 친다.
“옳아. 그때 지휘를 했구먼. 그 막대기로.”
나는 웃으며 여덟 번째 아이를 불러내어 세운다.
“얘는 놀람콩에요.”
“정말 놀랄 일이네. 이렇게 작게 만들어 색칠하려면 힘이 몇 배나 더 들 텐데...... .”
수녀님은 놀람콩을 요리조러 돌려본다. 나는 아홉 번째를 불러내 수녀님 앞에 들이밀며 말한다.
“얘는 소망콩에요.”
그 말에 수녀님이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요기요씨 소망은 뭐예요. 물어봐도 되나?”
그 말에 나는 주저하다가 내 마음을 털어놓는다.
“예. 인형 그리기 놀이 잘하는 거예요. 저처럼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공장 쉬는 날 고아원, 소망원을 찾아가요. 목각인형에 저네들 엄마, 아빠 얼굴을 그려 선물하는 놀이에요.”
“상상으로?”
나는 열 번째를 꺼내 세우며 닮음콩이라고 소개시킨다. 그리고 아까 했던 수녀님 물음에 대답한다.
“상상 아니에요. 아이들이 엄마, 아빠 얼굴을 대신하는 모델이지요. 닮은꼴이니까.”
“알겠어. 아이들 저네 얼굴을 그려 주름살만 살짝 더 그려넣는단 말이지?”
나는 까르르 웃으며 대꾸한다.
“맞아요. 수녀님, 우리 인형 그리기 놀이 같이 할까요?”
수녀님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가 보다. 활짝 웃는다. 나는 열한 번째를 꺼내 소개시킨다.
“얘는 기쁨콩에요. 얘들이 제가 그려준 인형을 엄마인양 안고 노는 걸 보면 저도 기뻐요.”
“요기요씨, 복 받겠어!”
나는 얼른, 수녀님 칭찬이 당치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어릴 때 잃어버렸던 제 기쁨을 아이들한테서 찾아 채우려는 제 욕심에서이지요.”
그러면서 열두 번째를 불러내어 세운다.
“얘는 막내에요. 행복콩!”
“에게게. 이쑤시개보다 작구먼.”
수녀님 말에 행복콩이 어깨를 움추린다. 나는 행복콩이 들어라고 큰소리로 말한다.
“큰 얘들은 키가 일 미터짜리도 있지만요. 얘는 일 센티미터에요. 제일 작지요. 그래서 제일 귀여워요.”
내 말에 행복콩이 가슴을 도로 쭈욱 펴 올린다.
“제일 귀염을 많이 받는다고 행복콩이라 부르나봐?”
“막내만 보면 그렇고요. 얘들은 모두 한 통 속에 들어 있어 행복콩에요. 뿔뿔히 흩어져 있지 않으니 행복하지요.”
내 말에 수녀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지. 행복이란 가족이 한데 모여 사는 거지.”
그러더니 열 두 명의 마뜨료시카를 한 명, 한 명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본다. 그리고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춘다. 수녀님도 나처럼 마뜨료시카에게 마력을 걸어보는 걸까? 어쨌든 수녀님이 마뜨료시카와 노는 동안, 나는 기억 상자 속의 그림으로 누워있는 엄마, 아빠를 불러본다.
‘엄마, 아빠 어디 계세요? 어디든 살아 계시면 좋겠네요.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요? 만날 수 없더라도 행복하세요.’
나는 기억 상자의 뚜껑을 닫으며 속삭인다.
‘잘 계세요. 사랑해요!’ (2017년 11월 4일. 원고지 37매)
문단 약력
1993년 아동문학 평론지에 동화 신인상 추천
작품집:『아기 반달곰 친구 불곰』외 22권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