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사 기고-
정충사와 충신 안주목사 장무공 김준(旌忠詞와 忠臣 安州牧使 壯武公 金浚)
대한사랑정읍지부장 심 민 섭
조선시대 정읍의 3충신을 모신 정충사는 정읍시 농소동 신흥마을 위쪽에 있으며 호남의 명산인 두승산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옛 고부군에서 출생한 3충신을 모신 정충사는 1632년(인조 10년)에 창건하였고 1657년(효종 8년)에 정읍에서는 최초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忠烈公 송상현(宋象賢)과 壯武公 김준(金浚)을 모시다가 무장공(武壯公) 신호(申浩)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 고종 때 조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7년 3월에 복원되고 1975년2월 문화공보부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로 지정받았다가 1985년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74호로 지정되었다.
정충사(旌忠祠)경내에는 외삼문, 내삼문, 일각문 2개소와 사당, 서원이 시설되어 잇고 고풍스러운 석축담장이 둘러서 있으며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고 600년이 넘은 귀목이 우람하게 3충신의 사당을 지키고 있다.
이곳 정충사에 배향된 안주목사 장무공 김준장군은 언양김씨(彦陽金氏)로 고려명장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14세 손으로 증조 김수건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고 부친 金匡弼과 모친 함양박씨(椷陽朴氏)사이에 1582년(선조 52년)에 태어났다.
공은 젊어서 유학을 닦아 경전과 사서에 통달하였으며 기개가 있고 강직하여 호걸로 자처하였고 체격이 우람하고 눈이 부리부리하였으며 장수다운나이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이 되고 선전관을 거쳐 승진되어 교동현감으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 돌아와 어머님 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급한일이 있어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5일 동안 먹지 않고도 굶주린 기색없이 삼년상을 마쳤다고 한다.
그때 광해군의 정사가 혼란해지자 공은 고부로 내려가 10년간 은둔하면서 “누가 곧은 道와 몸을 용납지 못한다 하였던가? 편한다리 내 맘대로 굽히고 펴며 단표(簞瓢,단사표음(簞食瓢飮))로도 족히 기갈을 면하니 가소롭다. 명리(名利,명예와 이익)에 연연하는 사람들이여”라는 시를 지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냈으며 인조반정이 일어나 추대의 모사에 참여하여 반정 성공 후 도총부 도사(都總部都事)에 임명되었다가 죽산부사(竹山府使)로 나가 정사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였고 모든 처신은 동료들 중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1624년(인조 2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께서, 후영장으로 임진강 상류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병력이 1천명도 채 되지 않았으나 군기가 엄숙하고 방어준비에 소홀함이 없었다. 임진강 하류의 방어진이 붕괴되고 대장 이경립이 반란군에 투항하고 반란군이 도성으로 진입하자 공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쫓아갔으나, 뒤이어 도운수의 격문을 받고 영평산성으로 물러나 수비하던 중 반란군이 평정되어 죽산부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명성이 더해져서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가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훈련원정으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이후 봉산군지역이 비적들의 피해가 심해지자 조정에서 문무에 능한 공을 봉산군수(鳳山郡守)로 발령하여 부임한지 1년이 채 안되어 안정시키므로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워 추모하였다.
1625년(인조 3년) 통정대부로 승차 되어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안주는 북방의 요세지였으나 병력이 창성과 의주에만 치우쳐있고 병사(兵使:兵馬節度使)조차도 없어 방어가 아주 허술하였다.
1626년(인조 4년) 여름 명나라의 조사(朝使,使臣)를 영접할 때 접빈의 일을 맡은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두진(창성,의주)에서 병력의 양성에 힘쓰지 않으면 내가 한갓 목사의 칭호만 가지고 있어 오랑케가 침략해 올 경우 그대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라고 경고하였음에도 사전에 대비를 못한 채 그 이듬해 1627년(인조 5년)정월에 창성, 의주가 연달아 청나라 오랑케에게 함락되자 절제사(節制使) 남이흥(南以興)이 휘하병력 수백명을 거느리고 안주성으로 달려왔으며 인근 증산현감(甑山縣監), 태천현령, 영량현령, 박천군수 등과 협력하여 민병을 소집하여 남절제사에게 지원해 주고(원래 안주성에는 평안병사의 1만여 병력이 있었으나 이괄의 난으로 흩어지고 1천여 명만 남아 있었음) 공은 북문을 맡아 수비하고 있는데 청나라 대군이 청천강을 건너 성 밖에 이르러 겹겹으로 에워싸고 공격해 오자 주야로 적병을 막았으며 적병과 3차례에 걸쳐 공격과 후퇴를 번갈아 가면서 격전중 적진영에서 서찰을 띄워 화친을 요구하고 한편으로 적에게 투항한 강홍립의 부장들을 보내 투항을 요구해 오자 이에 불응하고 성위에 올라가 투항한 부장들을 꾸짖으며 결사 항전의 의지를 표명하자 적병들이 총공격을 감행해 오므로 북문 문루에서 전황을 살피던 남이흥 병사는 안주성이 함락의 위기에 처해있음을 판단하고 강화의 임금에게 장게를 올리기로 마음먹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외로운 성이 적군에 포위되어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임에도 평안감사 윤훤은 수하에 군사를 두고 있음에도 하루길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구원하려하지 않으니 신은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라는 글을 써놓고 김준목사의 아들 김유성(金有聲)을 사자(使者)로 골라 천거하니 “내 아들만을 살기위해 보낼 수는 없다”라는 충과 의에 불타는 김 목사의 말에 다른 사람을 골라 보냈다. 이때 성중에는 김 목사의 처 김씨(부인은 상배함) 소생의 3살 난 딸과 봉산군수의 아들 라수소(羅守素)에게 출가했다가 근친와 있는 16세의 딸이 있었는데 봉산군수로부터 며느리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고도 “오랑케가 성 밖에 있는데 내 식구를 내보내면 성안의 민심이 동요된다.”라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딸 역시 “오직 죽음뿐이니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유서를 혈서로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너희들이 다행히 살아남거든 이것을 낭군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안주성 전투는 청나라 8기군 3만여 명의 적들과 성내의 우리 측 군사 3~4천여의 병사들과 성안의 백성까지 부녀자들은 돌을 깨트리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 나르고 장정들은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들에게 끼얹어 막아내는 등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며 이렇게 3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며 혹독한 추위까지 겹치면서 최후가 임박해 있음을 깨달은 김준 목사는 병사 남이흥, 박천군수 등과 함께 북향사배하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화약포대에 불을 당겨 장렬하고 치열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전해온다.
공은 평소에 항상 칼 한 자루를 갈아서 곁에 두고 말하기를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대장부는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나의 명이 이 칼에 달려있다.”라고 말하였으며 또 “내가 감행하는 것은 용맹스럽기는 하지만 책략이 부족하다 나의 계획을 도와줄 사람만 있으면 비록 10만의 병력도 지휘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나라를 위한 충성심을 강조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적병도 많은 병력이 함께 폭사하였는데 김준 목사의 나이 46세였으며 아들 유성도 아버지의 순정을 듣고 적병과 싸우다 죽었으며 가족들 또한 성중의 민가에서 몸종이 적과 싸우다 죽고, 처 김씨도 세살난 딸과 같이 죽었고 근친 딸인 라수소의 처도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절명하지 않고 적들이 보호하며 치료했으나 단식 끝에 죽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평안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안주성의 순절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인조대왕은 “한집안이 삼강을 갖추었다.”라며 아쉬워했다고 전해오며, (공의 충절 5년 후인) 1632년(인조 10년)정읍의 정충사에 배향되고 1681년(숙종 7년) 좌찬성에 추증되고 장무공(壯武公)의 시호를 내렸다.
향리인 정읍시 농소동 정문안 마을에는 김준목사의 부조묘(不祧廟), 삼강정려(三綱旌閭), 충복헌충비(忠僕獻忠碑)가 있고 정읍 주천삼거리 옛 군부대 정문 옆 선산에 신도비(神道碑)가 설치되어 있다.
정문안 마을은 400여 년 전부터 삼강정려문(三綱旌閭門)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금정리에서) 정문안 마을로 불렸으며 마을에 있는 언양김씨 삼강정려는 전라북도문화재 자료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고 삼강정려의 삼강은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가지 강령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며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나라를 위해 순절한 김준장군 부자, 처의 충절을 기리어 1632년(인조 10년) 나라에서 세워준 정려각이다.
언양김씨 문중에 전해 내려오는 장무공유사(壯武公遺事)에는 당대 충신, 효자, 열녀의 복이 고루 갖추어진 장무공(壯武公)집안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초강십리(楚江十里)와 사산십리(사산십리)를 사패지지(賜牌之地)를 하사(下賜)하였으며 예관을 보내 충절의 혼을 위로하고 제향하였다고 전해온다.(초강십리는 입암 천원에서 정우 초강까지 정읍천 농지 12km를 말하며 사패지지는 용계동과 주천리 산 100정보의 선산을 받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농지분배로 빼앗기고 현재는 선산 80정보만 종중재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정문마을 주변 공평마을 소년봉 아래의 정읍천 하천 변에 초강정(楚江亭)이 광해군 시절 장무공의 낙향 기간 중에 세워졌으나 현존하지 않고 규장각 직제학 민병승(閔炳承)이 찬한 초강정지유허비(楚江亭址遺墟碑)가 있었으나 유허비 또한 형태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며 정읍시 북면 남고서원에 배향하고 있는 호남의병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의병장이 公과는 언양김씨 숙(叔)항렬로 알려지고 있다.
※ 단사표음(簞食瓢飮) :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의 물-소박한 음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말하며 청빈한 생활태도를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