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자의 난과 쿠데타
( 혁명 정권을 무너뜨린 또 다른 혁명 )
방원이 대궐에 도착하여 서쪽 행랑에서 대기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여러 군(君)들은 모두 타고 온 말을 남겨 두지 않고 돌려보냈으나 방원은 소근을 시켜 서쪽 행랑 뒤에서 말을 먹이며 대기하도록 했다.
이 때 방번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방원이 그를 불렀다. 뒤돌아 본 방번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다가 그냥 대답하지 않고 들어갔다.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밤은 깊어 초경(初更-19~21시)에 이르렀다. 대전(大殿) 시종이 나와서 말했다.
"임금께서 병이 위급하여 병을 피하고자 하니 여러 왕자들은 빨리 안으로 들어오되 종자(從者)는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오."
이화, 심종, 이제가 먼저 나가서 뜰에 서고 정안군은 익안군 방의, 회안군 방간, 상당군 등 여러 군(君)들과 더불어 문밖에 잠시 서성거렸다.
"밤에는 궁중(宮中)의 여러 문에 반드시 등불을 밝혔는데 지금 보니 궁문에 등불이 없다."
누군가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수군거렸다. 방원이 그때서야 좌우를 휘둘러보니 궁문에 등불이 없었다. 영추문에도 없었고 광화문에도 없었다.
대전으로 통하는 작은 문에도 없었다. 의심이 더욱 꽂혔다. 이화와 이제 그리고 심종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으나 방원은 배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서쪽 행랑 문밖으로 나와 뒷간에 들어앉아서 한참 동안 생각했다.
"뒷간을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대전(大殿)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영추문을 나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어디로 가야할까?"
운명의 갈림은 순간의 선택이다
운명이 갈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개인 이방원의 운명과 신생국 조선의 명운이 걸린 결단이 뒷간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결심은 고뇌의 배설일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간 익안군과 회안군이 달려 나오면서 방원을 불렀다.
"정안군! 정안군! 어디 있는가?“
"나 여기 있습니다, 형님들은 어찌 큰소리로 부르고 그러시오?
목소리를 낮춥시다. 형세가 하는 수 없이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면 살 것이오. 여기에서 머뭇거리면 죽을 것이오.“
선택은 결정되었다. 방원의 외침은 단호했다. 평화시의 줄서기 하고는 격이 다르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순간의 판단이다.
정변의 와중에는 더욱 그렇다. 돌아 나오는데 이복동생 방번이 눈에 밟혔다. 마천목을 시켜 방번을 불렀다.
"나와서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 종말에는 저들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
방원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방번은 회랑으로 돌아가 버렸다.
방원이 말에 올랐다. 익안군, 회안군, 상당군이 따라 나섰다. 몸이 날렵한 상당군은 방원의 말을 따라 오는데 몸집이 무거운 익안군과 회안군은 뒤뚱거리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가관이 아니었다.
방원이 순화방 사저 입구에 있는 군영(軍營) 앞에 이르러 말을 멈추었다. 이숙번이 장사(壯士)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빈, 심귀령, 등도 있었다.
익안군, 상당군, 회안군 부자(父子)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민무구, 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소근만이 칼을 쥐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막대기를 쥐고 있었다. 이에 민씨 부인이 광에 넣어둔 둔 철창(鐵槍)을 꺼내어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사병혁파가 단행되던 10여일 전 모든 무기는 반납하도록 명이 내려졌지만 민씨 부인이 몰래 감추어둔 무기였다.
방원이 조선군 원수(元帥)의 대기(大旗)가 있는 둑소(纛所)의 북쪽 길에 이르러 이숙번을 불렀다.
"이제 어찌하면 되겠는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명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했다.
"군호(軍號)를 내려 주십시오."
명령을 내려 달라는 뜻이다.
"군호는 산성(山城)으로 한다.“
방원의 군호가 내려졌다. 이 군호는 훗날 순라군 사이에서 서로 피아를 식별하기 위한 암호와는 격이 다르다.
공격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소수의 정예로 권력의 핵을 찌르는게 쿠데타
이날 밤. 방원의 명령을 기점으로 피를 부르는 살육의 밤이 펼쳐졌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숙청되었다. 보위에 있던 태조 이성계는 물러나고 세자 방석은 척살되었다. 권력의 핵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쿠데타다.
실록에는 왕자의 난, 그 밖의 사서에는 방원의 난 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쿠데타였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방증은 방원이 군사를 동원하여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쿠데타는 전면전이 아니다. 군사를 총동원하여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정예로 권력의 핵을 찌르는 것이 쿠데타다.
훗날 이러한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박, 전이다. 박은 소수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푸른 기와집을 접수했고, 전은 소수의 직계 보안사 요원과 헌병대를 한남동에 투입하여 군권을 장악한 후 최통을 위협했다.
실록에는 정도전 진영에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인지 구실인지 알 수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태조실록은 태종 이방원이 보위에 있을 때 쿠데타에 참여한 하륜이 편찬했다. 그 후 세종 조에서 정인지가 증보 편수했다. 냉철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실록은 해당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관이 기록한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편찬했다.
사실(史實)을 기록하기 위하여 임금과 맞서다 유배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사관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후대의 일이다.
조선왕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한 태종대와 세종대에는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다. 이러한 토양위에서 객관성을 유지한 실록이 편찬되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이러한 와중에서 소신 있는 신하가 간신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간신이 충신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오류를 바로 잡아주는 것이 학자들의 몫이다. 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아주는 것이 그들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오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실록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가 이왕직을 설치하고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왕조실록으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472년 역사를 관통하는 방대한 기록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위대한 기록유산이다. 이러한 가치를 세계인의 인정했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