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향기/ 송재옥
벌써 가을인가? 깊은 밤에 듣는 귀뚜라미 소리가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뒤척이다 다시 불을 밝힌다. 눈에 들어온 것은 황지우의 시집이다. 나는 그것을 뽑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나 시집을 펼 생각을 못 한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제목이 '어느 날 나는 흐린 수종사 다실에 앉아 있을 거다'로 자꾸 바꿔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얼마 전 다녀온 수종사(水鐘寺)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 컸기 때문인 것 같다.
수종사에는 글 모임의 한 언니에게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게 되었다. 먼저 수종사라는 이름에 끌렸다. 세조가 피부병으로 고생할 때였다고 한다. 어느 날 오대산으로 요양을 다녀오던 중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유달리 맑고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왕은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소리가 나는 곳에 가보니 그것은 토굴에서 바위 아래로 물 떨어지는 소리였다고 한다. 세조는 너무 놀랍고 신기해서 그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수종사라고 하게 했다. 나는 그 토굴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싶었다.
수종사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비탈진 급경사 산길이다. 산길과 푸른 하늘이 맞닿아 있다. 길 옆 풀숲에는 물 봉선이며 좁쌀 풀 따위 귀여운 풀꽃들이 피어 해맑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수종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밀조밀하게 작은 절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나는 토굴을 찾았다. 그런데 몇 백 년의 세월을 안고 있던 토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육이오 전쟁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물은 떨어지고 있었다. 업보로 고생하던 세조가 이 물소리를 듣고 절을 지어 마음을 달랬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물소리가 더 맑게 들렸다.
앞마당을 지나 전망대에 서면 앞이 탁 트여 산기슭 아래 북한강과 남한강이 모여 Y자로 흐르고 있는 모습과 끝없이 펼쳐진 아련한 산줄기가 장관이다. 서거정이 동방 제일의 풍광을! 안은 사찰이라고 격찬했다더니 과연 그럴 만하다. 작은 산사가 키 큰 은행나무 두 그루와 잘 어울려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한 바퀴 돌아볼 것도 없는 작은 절에서 서너 시간을 머물다 왔다. 거기에 다실(茶室) 삼정헌(三鼎軒)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정헌에 들어서면 강 쪽으로 난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시야가 탁 트인다. 눈 아래에 강과 두물머리 마을이 아득히 멀어 보이고 산등성이와 하늘은 내 눈높이까지 내려앉아 있다. 두어 자 길이의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 뉘여 놓은 탁자 위에 하얀 다기가 정갈하게 갖춰져 있다.
나는 차를 좋아한다. 그러나 다도를 갖춰서 마셔본 적이 없다. 우리들은 서로 차를 어찌 우려내야 하는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고 단정하게 생긴 분이 단정한 옥색 모시 한복을 곱게 갖춰 입고 다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분을 보자 언뜻 신사임당이 살았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분은 잔잔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 아름다움에 끌려 모두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너무 고우세요." 하고 말을 붙였다. 그분은, 이 절의 다도회 선생님이셨다. 우리는 찻잔을 데우고 찻물을 붓는 법을 배웠다. 한 손안에 들만큼 작은 찻잔을 잡는 법도 배웠다. 찻잔을 잡은 엄지와 검지 사이의 공간이 반달 모양이 되게 하고 찻잔은 손가락 하나의 넓이만큼 내려서 잡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처럼 향이 그윽한 차는 일찍이 마셔 본 적이 없다. 비탈진 산길을 오르며 본 하늘색만큼이나 그윽했다. 어설프게 나마 다도를 지키며 마신 차여서일까. 수종사의 물로 차를 우려내어서일까. 아마도 나도 한 점 자연이 되어 산들한 강바람 산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때 무엇이든 맛이 없으랴. 한참 차에 취해 있는데 그 고운 선생님이 손수 지었다는 시조를 낭송하셨다. 수종사에서 차를 마실 때의 정갈하고 사심 없는 마음을 노래한 시였다. 나도 금세 시 한 수 읊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사의 다실에서 우리는 그렇게 오래 앉아 있었다.
우리의 차 문화가 이웃나라보다 폭과 깊이가 있는 것은 물맛이 뛰어난 때문이기도 하다. 옛 선비들은 차를 마시며 삶의 여유를 누렸다. 조선시대 학자 신흠은, '물이 끓고 차의 향기가 맑게 번질 때 마침 문 앞에 손님이 찾아온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라고 했다. 수종사에서는 늘 물을 끓인다. 절을 찾는 이들과 함께 차의 맑은 향기를 나누고 싶어서 일 것이다.
나도 다기를 마련하고 싶다. 티백에 든 차에서는 맡을 수 없는 수종사의 차 향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는 다성(茶聖) 초의에게 써 보낸 작품에서 차와 선(禪)이 한 맛으로 통함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는 차를 통해 선을 이루려 함이 아닐까? 추사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나도 그렇게 차를 마시고 싶다. 남편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도란거리며 차를 마시고도 싶고, 옆집 미희 엄마와 한결이 엄마를 불러서 아이들 재롱 떠는 이야기 나누며 차 향을 음미하고도 싶다. 혼자 서면 어떠랴. 차 한 모금 머금으며 명 수필 한 편쯤 읽는다면 무엇이 그리 부러우랴.
사위가 고요하다. 이제 귀뚜라미도 잠이 들었는가 보다. 수종사의 차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이른 새벽이 되어버렸다. 슬쩍 창으로 스쳐 들어오는 초가을의 바람이 산산하다. '어느 날 나는 운무에 둘러싸인 수종사의 다실에 앉아 있을 거다' 제목이 바뀐 책을 책꽂이에 꽂는다.
[출처] [좋은수필]나누고 싶은 향기 / 송재옥|작성자 에세이 자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