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知的打算 太十章四十-四十二節 宮朝淸夕
門徒皆欲打算 而從主. 彼得曰 捨之何得也(太十九章二十七節)?. 雅各母曰 願在主左右(太二十章二十一節), 是侈欲也. 主亦以計算諭之, 五兩与金者五有二曰誠者. 如是訓之 人易動於利害故也. 萬古皆然 只計目前者 止於目前, 計來日者 期於來日. 計於遠大者 不計目前及來日也.
雅各計十四年後 取妻而勞働, 摩西計四十年後 入國而忍苦, 無非計算也. 吾等今日之苦 果有計算乎, 如擊空乎?
我題數平日之事. 今失明得者 何也, 今得明失者 又何也? 當慚然猛省. 迎主僕果有何賞? 迎先知 受先知之賞, 迎義人 受義人之賞.
窃觀人逢迎傳道 到門拒而不納 後到天門 果能入乎? 謹求者亦當拒絶 況不納乎? 況逼迫乎? 害灵者共必納之 諂笑者 嗜利者 到卽如恐不及而納之 後到獄門必矣.
今日敎會亦有賞, 非賞雖善 拒之, 惟賞雖惡 納之. 信之對象 甚錯, 非主而乃人也. 天國亦有賞乎? 信者惟信是賞. 彼宣敎年費 數有万兩 而傳道他國 果無智乎? 敎人隨力 費金不少, 而禮拜果無賞乎? 智者磐上建屋 愚者砂上建屋. 論与人事, 雖冷水一器 不失賞.
主曰 与福於受 是何意也? 与是損 何福也? 然古賢達 皆与之人也. 人不知此 但以受爲福. 今朝鮮受之人也. 与尊受屈 故与雖同情然 可受者 反爲羞恥人. 當知此可也.
今朝鮮敎友 五十年受於人, 當爲与之人. 某某大敎會 當發奮勞 使傳道 于農村帶. 何時朝鮮婦人亦 能宣敎外國? 彼中國誰能救之? 持銃劒之外人乎? 戰無是也 中人可安受. 今言与之. 人之行動 比彼受之人 爲何如也?
027. 슬기로운 계산 / 마태복음 10:40-42 궁정교회 주일아침, 삼청교회 주일저녁
신도는 모두 타산을 하고서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는데 무엇을 얻습니까(마19:27)?” 야고보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에 앉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으니(마20:21) 이는 분수에 넘치는 욕망이었습니다. 주님 역시 계산으로 비유하셔서, 다섯 양을 받은 자가 5량을 남기고 두 양 받은 자와 함께 정성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가르치심은 사람이 이해(利害)에 쉽게 움직이는 까닭입니다. 옛날부터 그러했으니 다만 눈앞에 것만을 계산하는 자는 눈앞에서 멈추고, 내일을 계획하는 자는 내일을 기약합니다. 원대한 미래를 계획하는 자는 목전이나 바로 내일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14년 후를 계산하고 아내를 얻기 위해 노동을 했고, 모세는 40년 후에 입국을 위해 고난을 참았으니, 계산이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고난을 과연 계산합니까,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까?
제가 여기 몇 가지 평일의 일로 요지를 삼았습니다. 오늘 잃고 내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오늘 얻고 내일 잃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부끄럽다면 깊이 반성해야합니다. 주의 종을 영접하면 과연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영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습니다.
제가 보건대 사람의 뜻을 맞추어 전도하여서 입문하게 했는데 거절하고 들이지 않았다면 후에 천국 문에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요? 삼가며 구하였으나 역시 의당 거절했다면 황차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더욱이나 핍박하는 자이겠습니까? 영을 해치는 자도 한가지로 받아들이고 조소하는 자나 이익만 즐기는 자가 이르면 두려워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후에 지옥문에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 역시 상이 있는데, 상이 아니면 비록 선이라도 거절하고, 오직 상에는 비록 악이라도 받아들입니다. 신앙의 대상을 심히 착각하고 있으니, 주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천국도 역시 상이 있습니까? 신자는 오직 신앙이 상입니다. 저 선교에 연간 비용이 수만 양인데 타국에 전도하는 것이 과연 어리석은가요? 교인들이 힘을 따라 쓰는 돈이 적지 아니한데, 또 예배하는 것은 과연 상이 없습니까? 슬기로운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남에게 주는 일로 논하자면, 비록 냉수 한 그릇이라도 상을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는 것은 덜어내는 것인데 어찌 복입니까? 그러나 옛날 어질고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이를 아지 못하면 다만 받는 것으로만 복으로 여깁니다. 지금 조선은 받는 사람들입니다. 주는 것은 존경을 받고 받는 것은 굴종하는 고로 주는 것이 비록 동정하는 것 같으나 가히 받는 사람은 도리어 수치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마땅히 이를 아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조선 교우들은 이제까지 50년 동안 남에게서 받았으니, 이제는 마땅히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모한 대교회들은 당연히 분발하고 노력하여 농촌지대에 전도하기를 힘쓰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때에나 조선 부인들도 역시 외국 선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중국을 누가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총칼을 지닌 외국인가요? 전쟁도 없는 이때에 중국인들이 안전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주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저 받는 사람에 견주어본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