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단종 피시(被弑)
세조는 욕망을 성취한 후에도 그 조카 단종에 대한 처치 문제를 근심하였다. 이에 세조의 뜻을 아첨하는 무리들이 상소하되 상왕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그냥 경성에 둘 수 없다하여 내쳐 경성 밖에 있게 하소서 하거늘 왕이 이에 상왕의 지위를 낮추어 노산군(魯山君)이라 칭하여 깊은 산중 영월(寧越)에 있게 할 새 첨지(僉知) 어득해(魚得海)의 50의 군병으로 호위하여 보내고 동시에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는 노산을 호위한다 하여 순흥부(順興府)에 귀양 보내고 조금 후에 사약(賜藥)하여 죽게 하다.
금성이 단종을 보호한다는 혐의로 이제 순흥의 유배(流配)가 있게 되었다.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서로 만나게 되어 눈물 머금고 시사를 의논하며 두 사람이 뜻을 정하고 단종복위를 꾀하였다. 이보흠이 남중인사들과 의논하고 단종을 순흥으로 모시고 영남일대를 웅거하여 보려고 격문을 초하던 중 순흥관로가 그 격문을 가만히 도적하여 가지고 경성에 올라와 변을 고하였다.
세조가 노하여 이에 관문을 발하여 이보흠과 및 순흥의 여러 인사들이 다 참혹히 죽음을 당하고 금성은 안동 옥에 가두었다가 죽일 새 금성은 일이 그릇된 줄 알고 의관을 고쳐 입고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신다 하고 북향통곡하고 죽고 그 외 송현수(宋玹壽) 등 20여인이 다 같이 잡혀 죽었다.
그 이듬해 2년 10월 20일에 노산군에게 또 사약을 내리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淵)이 사약을 가지고 영월에 가서 차마 사약을 드릴 수 없어 주저하더니 나장(邏將)을 쓰시고 곤룡포(袞龍袍)를 입으시고 마포에 나아와 이유를 물으시니 도사가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말씀을 아뢰지 못하니 노산이 북향사배 하시고 죽음을 청하신대 노산을 항상 모시던 자에게 명하사 활줄로 목을 매어 죽게 하니 때에 나이 17이라.
태도가 용융하시고 조금도 원망이 없이 악독한 삼촌의 손에 원통히 죽음을 받으시니 이 비보를 들은 영월사녀들이 강에 던져 자살한 자 부지기수요 또 죄인의 시체라 하여 모두 두려워 수시하는 사람이 없었다가 다행히 그 고을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란 인이 있어 가만히 시체를 거두어 간수하였다. 노산이 영월에 있을 때 매양 밤이면 관풍(觀楓) 매죽루(梅竹樓)에 올라앉으시고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처량하여 듣는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 없더라. 노산의 슬픈 글 두어 구절을 기록하여 천고에 비장한 사실을 한번 추모하노라.
노산애시(魯山哀詩)
자규시(子規詩)
월백야촉혼추(月白夜蜀魂啾) 식수정기루두(食愁情徛樓頭)
이제비아문고(爾啼悲我問苦) 비이성무아수(非爾聲無我愁)
기어세상탁고인(寄語世上탁苦人) 심막제춘삼월자규루(심莫祭春三月子規樓)
달 밝은 밤 두견이 우니 근심품고 루두에 비겼서라.
네 소리 설고 내 맘 괴로워 네 소리 아니면 내 근심 있으랴
들으라 세상 근심 사람아 춘삼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동상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乃愁人耳獨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