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曺園)을 유람하고 며칠 뒤에 오경삼(吳景參)이 나에게 말하였다. “제 조카 오수옥(吳壽玉)이 백문(白門) 안에 새로 집을 장만했는데, 집의 정원이 꽤나 경치가 뛰어나 꽃구경도 좋고 달구경도 좋으며 조망하기도 좋고 질탕 즐기기도 좋습니다. 만약 봄놀이를 한다면 여기 말고는 반드시 조원일 것이나, 멀리 있는 백거이(白居易)를 취한다는 혐의가 있을까 두려우니, 한번 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에 경삼으로 하여금 먼저 가서 자리를 준비하여 기다리게 하고, 유선(幼選), 사술(士述)과 함께 뒤이어 갔다. 경삼과 수옥이 정원 안에서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은 북동쪽에서 비스듬히 굽이쳐 남쪽으로 뻗었는데, 가로로 대략 백 보(步)쯤 되고 세로로는 그것의 반이었다. 동쪽으로는 대릉방(大陵坊)을 굽어보니 일만 기와집을 셀 수 있을 듯하였고, 서쪽으로는 백문을 마주하니 흰 칠을 한 성가퀴는 하얀 비단이 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그 밖으로는 관악산(冠岳山)의 푸른 남기가 가까운 듯 먼 듯 아른거렸고, 숲 속 연못의 한 무리 소나무가 성가퀴 위로 드러나니 친밀한 모습이 마치 책상을 마주 대한 듯하였다. 화초와 수목이 정원 전체를 뒤덮어 드문드문하기도 하고 빽빽하기도 하며 가지런하기도 하고 비스듬하기도 하였는데, 무성하고 찬란하여 한낮의 햇볕이 내리쬐자 거의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당 뒤에는 기이한 소나무가 있었다. 그 줄기는 희고, 비늘은 작고 많으면서도 푸르렀는데, 꿈틀거리는 모양이 허공을 유영하는 용 같았다. 줄기의 삼분의 이에는 가지와 잎이 붙어 있지 않았고, 위로 삼분의 일에 이르러서야 잎이 비로소 펼쳐졌다. 높고 낮음도 없고 얇고 두터움도 없어 멀리서 바라보면 전정(剪定) 가위로 정성껏 가지치기한 것처럼 보였다. 이에 지난날 조원을 유람한 것은 애초에 가까운 것을 소홀히 여기고 먼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이었으며, 이 정원이 비로소 나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소나무 아래를 거닐었다. 이어 약산공(藥山公)의 사판(祠版)을 배알하며 지난날을 회상하니 마음이 슬퍼졌다. 공께서 일찍이 나를 미욱하다고 여기지 않고 나에 대한 기대를 말씀할 때면 매번 ‘국기(國器)’라고 칭찬하셨고, 내가 지은 글에 대해 말씀할 때면 항상 ‘문장(文章)’이라고 칭찬하셨다. 당시에 나는 18, 9세였는데, 어른이 그렇게 말씀한 것을 내가 능해서라고 여기지 않고 단지 그것으로 나를 책려하여 능한 데로 나아가게 하시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공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12년이 되었을 때 내가 은대(銀臺)에서 이천(伊川)의 수령이 되어 나갔다. 두루 인사를 다니다 상국(相國) 이종성(李宗城)을 뵈었는데, 초면(初面)이었다. 상국이 기쁘게 맞이하고는 약산을 자(字)로 부르면서 “아무가 예전에 나에게 ‘나의 문하에 채 아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가 어리지만 훗날 재상(宰相)이 될 그릇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네.’라고 하였네. 내가 일부러 마음에 새겨 두고 지금껏 잊지 않았네. 그대의 얼굴은 비록 생소하지만 마음으로 안 것은 이미 몇 년이라네.”라고 하였다. 오호라, 공이 이런 말씀을 이 상국에게 하고는 나에게는 이 상국과 이러한 대화를 하였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실제로 알지 못했으니, 이것이 고인(古人)의 도(道)였던 것이다. 선배들이 후진(後進)을 추천하고 장려하는 것이 이러하였으나, 나를 돌아보면 지금 늙어 흰머리가 되었다. 지위로 보자면 공의 말씀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나, 업적으로 보자면 하찮아 말할 것이 없어 초목(草木)과 함께 썩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 드물다. 공이 나에게 기대하셨던 것이 어찌 하찮은 것이었으랴. 나는 이에 나를 알아주셨다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모자라나마 이렇게 기록하는 바이다.
[주-D001] 오원(吳園) : 오대익(吳大益)의 조카 오수옥(吳壽玉)의 집 정원이다.[주-D002] 오경삼(吳景參) : 오대익(1729~?)으로,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경삼이다.[주-D003] 백문(白門) : 고대에 팔방(八方)을 팔문(八門)으로 나누었는데, 서남방을 백문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남대문을 가리킨다.[주-D004] 멀리 …… 혐의 : 당나라 때 문신인 배도(裴度)가 복선사(福先寺)를 중수(重修)할 때 비문(碑文)을 백거이에게 부탁하려고 하자 황보식(皇甫湜)이 듣고는 크게 노하여 “가까이 있는 황보식을 놓아두고 멀리 있는 백거이를 취한단 말이오. 이후로는 부탁을 사양하겠소.”라고 하자, 배도가 사과하고 비문을 청했다고 한다. 《文獻通考 卷233》 여기서는 가까이 있는 오원을 놓아두고 멀리 있는 조원을 유람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주-D005] 유선(幼選) : 목만중(睦萬中, 1727~1810)으로,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유선, 호는 여와(餘窩)이다.[주-D006] 사술(士述) : 번암의 종질(從姪) 채홍리(蔡弘履, 1737~1806)로, 자는 사술, 호는 기천(岐川)이다.[주-D007] 약산공(藥山公) : 오광운(吳光運, 1689~1745)으로,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藥山), 시호는 충장(忠章)이다.[주-D008] 이종성(李宗城) : 1692~175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