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인물]
충재 권벌의 생애와 활동 권오신(안동문화원 회원)
1. 서언 충재(冲齋) 권벌(權橃)은 조선 중종~명종 연간에 활동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그는 기묘․을사사화 등을 통하여 많은 신진 사류들이 죽거니 귀양가는 어려운 시기에 살았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編)』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두 번이나 과거에 뽑힐 만큼 학문도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이 유교를 교화(敎化)의 근본으로 삼아 이 땅에서 이상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시키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조금도 불의에 굽히지 않고 사화 때는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류(士類)들을 구하려고 힘쓰다가 도리어 자신이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평생 관직 생활을 통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를 구현하는데 힘썼으며, 항상 정론(正論)으로 올곧은 선비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했다.
2. 가계와 출생 권벌은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으로 1478년(성종 9)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道村里)에서 부 사빈(士彬)과 모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동권씨는 시조 권행(權幸)이 고려 태조와 후백제의 견훤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이 지방의 북쪽 병산(屛山: 현 와룡면 서지동 부근)에서 싸울 때 고려 태조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사성을 받은 이래 대대로 안동에 세거해 왔다. 그러나 고려 고종 조에 수평(守平)․수홍(守洪) 형제가 추밀원부사․상서좌복야가 되어 상경종사(上京從仕)하게 된다. 그 후 고려가 망하자 충재의 5대조인 예의판서(禮儀判書) 권인(權靷)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안동 소야촌(所夜村: 현 서후면 교동)에 자리잡았다. 그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고려를 그리워하여 마을 이름도 송파(松坡)로 고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생애를 마쳤다. 충재의 부친 사빈(士彬)은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고 성균관에 유학하며 학문에 힘썼으나 생원시에 합격하는 것을 끝으로 두고 사환에의 뜻을 접었다. 그리고 송파에서 외조부인 이조좌랑 정약(鄭若)의 별서(別墅: 농장 부근에 지어놓은 농막이나 별장)가 있던 도촌으로 이거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자녀 교육에 힘써 아들 사형제 중 장남인 야옹(野翁) 의(檥)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흥현감을 역임했으며, 둘째인 충재와 막내인 재촌(齋村) 장(檣)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3. 충재의 관직 생활 충재는 10여세에 대구(對句)를 맞추어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그런 가운데도 부친의 엄한 훈육 속에 열심히 학문을 닦아 1496년(연산군 2) 19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어 1504년에는 책문(策文)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후일 글 속에 ‘處’자가 있다하여 합격이 취소되었다. 당시 폭군 연산이 궁중 내에서 음행(淫行)을 저지르자 환관인 김처선(金處善)이 이를 죽음으로 간하였다. 그러나 연산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김처선의 다리와 혀를 잘라 죽이고 그의 이름자인 ‘處’자의 사용을 금하였던 것이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물러난 1507년(중종 2), 다시 과거에 응시한 충재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부정자 종사랑으로 관계에 나아갔다. 이어 예문관 검열이 되었는데 충재는 이 때의 일들을 기록한 『한원일기(翰院日記)』를 남겼다. 1508년(중종3)년 당시 기사관(記事官)으로 다른 신진 사류들과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범인 이극돈(李克墩)을 추죄하고 억울하게 부관참시된 김종직(金宗直)을 신원(伸寃)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1511년(중종 6)에는 여러 동료들과 7조소(七條疏)를 올려 당시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그 7조소의 내용을 보면, 1. 풍속을 바로잡아 사치를 억제할 것. 2. 쓸모 없는 관리를 도태시켜 국가의 재용을 넉넉히 할 것. 3. 인재를 가려서 추천하고 출척(黜陟)을 분명히 할 것. 4. 지방 수령을 잘 뽑아서 변방의 백성을 구제할 것. 5. 내수사(內需司)의 사사로운 창고를 혁파할 것. 6. 근수(根隨: 관리를 따라다니는 관청의 하인)의 수를 줄일 것. 7. 재상의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는 물리칠 것
정치의 시폐(時弊)를 적극적으로 논한 이 소를 보면 당시의 사류들이 지향하는 정치 이념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연산의 부패한 정치를 일소하고 백성을 위한 도덕 정치의 구현에 힘썼다. 1513년(중종8) 충재는 홍문관 동료들과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릉) 복위를 청하였다. 윤허받지 못하자 김정국(金正國), 소세양(蘇世讓)과 다시 올려 윤허를 받았다. 충재는 1518년(중종13) 다시 소를 올렸다. “노산군은 후사가 없어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동종(同宗) 사람으로 후사를 삼아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마음이 지공지정(至公至正)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소릉의 복위도 그렇지만, 특히 노산군의 후사 문제는 세조의 등극 명분을 상당히 훼손시키는 행위로 잘못하면 자신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는 문제지만 충재는 명분이 옳은 일에는 이토록 과감하였다. 1513년 충재가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일어난 정막개(鄭莫介)의 일은 그의 직신(直臣)으로서의 면모를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의정부의 관노 정막개가 박영문(朴永文), 신윤무(辛允武)의 역모를 고변하여 그 공으로 당상관 절충장군 상호군이 되고 박영문의 집과 재산을 하사받고 호사를 부리며 그 행동이 교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때 항간에서는 이 역모 자체도 박영문과 신윤무가 정부에 불만을 토하는 것을 정막개가 교활한 언사로 꾸며 영달을 꾀한 일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이에 충재는 정막개가 역모를 듣고서도 10여 일이나 머뭇거리며 고변을 늦춘 일을 들어 다시 정막개를 문초할 것을 주청하였다. 역모에 관한 일은 잘못하면 도리어 역모에 얽혀 모두가 피하는데도 과감히 고변자의 문초를 주장한 이 일은 불의 앞에 과감한 충재의 성품을 온 조정에 떨치게 하였고 정막개는 그 직첩을 빼앗기게 되었다. 충재를 비롯하여 윤인경(尹仁鏡), 이자(李耔), 소세양(蘇世讓), 김세필(金世弼) 등의 사류들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훈구공신들의 전횡 속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무너진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열심히 힘썼다. 그들은 후일 조광조(趙光祖)가 등장하여 중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유교의 이념에 입각하여 3대(하․은․주)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할 때도 적극 호응했다. 특히 충재는 이언적(李彦迪)과 더불어 영남 사류의 의론을 이끌며 조광조룰 적극 도왔다. 충재는 계속 내직에 근무하며 벼슬이 올라 이조정랑,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1519년(중종14)에는 예조참판에 오르고 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4. 기묘사화와 낙향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충재를 비롯하여 이자 등 당시 뜻있는 선비들은 너무 급진적인 개혁은 화를 자초한다며 속도를 늦출 것을 수 차례 간했으나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에 충재는 외직을 청하여 삼척부사를 제수받았다. 송별의 자리에서 충재는 자기와 동방급제하였으며 조광조와도 가까운 김정(金淨)에게 다시한번 우려를 나타내며 간절히 타일렀다. 조좡조는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 도교의 일월성신을 구상화한 上淸․太淸․玉淸에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던 관청)를 폐지하였다. 또 현량과로 뽑힌 자기 일파의 신진 사류를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히고 훈구세력들을 외직으로 밀어내었다. 특히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등극시킨 정국공신들 중 4분의 3이나 되는 사람들의 공훈을 삭제한 일은 훈구 세력의 극렬한 반대를 야기시켰고, 중종도 신진사류들의 지나친 과격성에 혐오를 느껴 끝내 들을 돌렸다. 충재가 우려한 바와 같이 정국은 기묘사화라는 엄청난 회오리에 휩싸였다.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거나 귀양갔고, 1519년 11월 충재도 삼척부사에 제수된지 5개월만에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11월 충재는 안동 도촌에서 봉화 문수산(文殊山) 아래 자리한 닭실(봉화읍 유곡리)로 이거하였다. 닭실은 충재의 외조부인 사재감주부 윤당(尹塘)이 살던 곳이다. 윤당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의 사위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세조가 황보인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하자 이곳 닭실로 숨어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해 12월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1521년(중종 16)에는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金淨)이 죽었다. 충재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통곡하였다. 1526년(중종 21) 충재는 집 서쪽에 서재를 짓고 ‘冲齋(충재)’라 당호를 써서 붙였다. 그리고 서쪽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구암정(龜岩亭)’이라 하였는데 이 집이 현존하는 ‘청암정(靑巖亭)’이다. 충재는 정자에 올라 도학 연구에 몰두하며 세상을 잊었다. 당시의 조정은 기묘사화로 실권을 잡은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무리가 정권를 독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얼마 안가서 정권은 다시 김안로(金安老) 일파에게 넘어갔다.
5. 다시 관직생활 시작 1533년(중종 28) 충재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라는 전교가 내려졌다. 실로 14년만에 충재는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되었고, 그 해 6월 다시 밀양부사를 제수받았다. 이 충재는 유곡을 떠나 상경하였다. 기묘사화 때 함께 파직된 오랜 친구 이자(李耔)도 만나고, 김안국(金安國)도 만났다. 특히 김안국을 만날 때는 후일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퇴계 이황(李滉)이 동행했는데,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전의 이황은 이때 김안국을 만나고 나서, “참으로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말씀을 들었다.” 하고 탄복하였다. 이후 충재는 한성부좌윤, 경상도관찰사, 한성부판윤을 거쳐 1539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명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된 것을 고치고자 주청하는 일)의 주청사(奏請使)로 연경(燕京: 현 북경)을 다녀온 후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한성부판윤, 예조판서를 거쳐 1545년(인종 1)에는 우찬성이 되었다. 이 해 인종대왕이 재위 7개월만에 서거하고 어린 명종이 등극했다. 충재는 당시 우찬성으로 영의정 윤인경, 좌찬성 이언적과 원상(院相: 왕이 죽은 뒤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이 되었다.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되자, 정권은 명종의 외삼촌인 유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일파가 잡게 되었다. 그들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비롯하여 유관(柳寬), 유인숙(柳仁淑)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그들의 만행에 맞서 윤임, 유관, 유인숙을 목숨을 구하려던 충재도 파면되어 고향 유곡으로 돌아왔다.
6. 귀양과 서거 1547년(명종 2) 서울 양재역(良才驛) 벽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벽서가 붙었다. 이에 윤원형 일파는 을사사화의 남은 무리들이 한 짓이라 하여 많은 선비들을 다시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충재도 이에 연루되어 전라도 구례(求禮)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이배되었다. 삭주로 귀양가는 충재와 강계(江界)로 귀양가는 이언적은 같은 시각에 벽제역(碧蹄驛)을 지나게 되었다. 한평생을 함께 벼슬하며 뜻을 같이 한 두 정승은 서로 지척을 지나고 있음을 알면서도 죄인의 몸이기에 만날 수 없었다. 삭주로 이배된 이듬해인 1548년(명종 3) 충재는 3월 71세로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난세를 만나 타향에서 눈을 감은 신하는 시신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유곡 마을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 후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된 명종은 1567년(명종 21) 충재의 모든 작위를 다시 내려주었다. 또 1570년(선조 3) 충정공(忠定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1592년(선조 25) 삼계서원(三溪書院)의 묘우(廟宇)가 완성되었다. 7. 맺음말 중종 36년 11월 7알자 중종실록을 보면 권벌을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권벌은 독서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경연석에서는 언제나 좋은 말을 아뢰었으며 천둥 같은 임금의 위엄 아래서도 몸을 돌보지 않았고,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이하 생략>” 퇴계 이황은 충재를 평하여, “용모가 빼어나고 풍신(風神)이 수명(秀明)하고 도량이 넓고 컸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사치하지 않았으며, 지위가 올라가도 쓸쓸함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라고, 하였다. 또 율곡 이이는, “권벌은 사직을 지킨 신하이다. 그가 계(啓)를 올리며 쓴 말은 밝기가 별이나 해와 같다.” 라고, 하였다. 이외 충재에 대해 평한 여러 선현들의 말씀과 실록에 나타난 그의 언행을 통해 상고해 보면 그는 매사에 근면성실했음을 알 수 있다. 열심히 학문을 닦고, 벼슬에 나가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올바른 정치를 펼치기 위하여 힘썼다. 특히 국가대사에 임하거나 의리에 관한 일에서는 과감하고 추상같이 대처하였다. 직간(直諫)과 바른 소리를 잘 하였기 때문에 늘 권신과 소인배의 미움을 샀다. 현재 충재가 살던 봉화 닭실(酉谷) 마을에는 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그가 살던 집과 서재 및 정자가 있고 인근에 그를 제향하는 심계서원이 있으며, 마을은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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