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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협[權悏]의 비명(碑銘) 조경(趙絅)
贈領議政吉昌府院君權公神道碑銘 幷序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 10월에 영가(永嘉) 권 대부(權大夫, 권대운(權大運)을 이름)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다가 북변의 관찰사(觀察使, 함경감사)로 나가면서 나의 집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불초(不肖)의 할아버지는 대려1)(帶礪) 공신(功臣)으로 품계가 삼공(三公)과 같았는데, 묘소의 나무가 이미 크게 자랐는데도 아직까지 비명(碑銘)이 없으니, 이는 실로 기다린 바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집사(執事)께서는 비명을 지으실 때 가식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불초 등이 우리 할아버지의 사적을 영원히 전하기 위해 집사를 놔두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가장(家狀) 한 통을 드리어 집사에게 폐를 끼칩니다.”고 하였다. 내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며 말하기를, “옛날 촉지무(燭之武)가 말하기를, ‘청년 시절에도 남보다 못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늙어버렸으므로 능히 할 수 없다.2)’고 하였는데, 그때의 일과 비록 다르기는 하나 이 말은 늙어서 혼미한 나를 비유할 수 있다. 어떻게 오래도록 폐지한 필연(筆硯)을 가지고 위대한 분의 공훈 대업을 묘사해낼 수 있단 말인가? 대부는 나중에 필시 이를 후회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권 대부가 여전히 생각을 바꾸지 않고 올해에 또 사람을 보내어 와서 폐백을 대신하고 예의를 표시하며 간청해 마지않았다. 대체로 그의 뜻은 내가 직하3)(稷下)의 말류(末流)에 배열한 처지로서 선조(宣祖)가 계실 때 더러 지척에서 당시의 어진 재상들의 기풍과 덕업을 들었으리라고 여기었기 때문인데, 이는 권 대부가 기어코 나의 한마디 말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조상을 추모하는 대부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되어 비명(碑銘)을 써 주기로 허락하였다.
가장(家狀)을 살펴보건대, 백제(百濟)의 견훤(甄萱)이 하늘을 무시하고 예착(羿浞)4)처럼 신라(新羅)에 해독을 끼쳤다. 신라의 종족으로 길창(吉昌)을 지키고 있던 김행(金幸)이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맞아서 같은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자 고려 태조가 의롭게 여겨 권씨(權氏)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는 ‘사전에 기미를 알아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그 뒤로 자손이 매우 번창하여 수백 년 이래 대부분 충효(忠孝)로 저명하여 지금까지 쇠하지 않았다. 권부(權溥)란 분도 충효로 큰 명성이 있었고 벼슬이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으며, 주자(朱子)가 주석(註釋)을 붙인 사서(四書)를 간행하여 반포하였으므로 평론가들이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은 권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8대에 이르러 권상(權常)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는데,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사물을 감동하였으므로 선조(宣祖)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어 처음에 비의(緋衣)를 하사하였으며, 80세가 되자 또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직질(職秩)을 더하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는데, 그 사실은 영상(領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가 지은 묘지(墓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안정 나씨(安定羅氏)는 고려(高麗) 지후(祗候) 나직경(羅直卿)의 후손이자 어모 장군(禦侮將軍) 나운걸(羅云傑)의 따님인데,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장부(丈夫) 다섯 명을 낳았는데, 다섯 번째가 의정공(議政公)으로서 이름은 협(悏)이고, 자(字)는 사성(思省)이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뛰어났고 관례(冠禮)를 치르자마자 문장에 주력하여 24세 때 정시(庭試)에 장원하고 그 이듬해 알성시(謁聖試)에 4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에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춘추관(春秋館)으로 들어갔다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기었는데, 이는 모두 추천을 받은 것이었다. 성균관(成均館)은 전적(典籍)으로부터 직강(直講), 사예(司藝)에 이르렀으며, 낭서(郎署)는 호조, 예조, 병조, 형조의 원외랑(員外郞)으로부터 정랑(正郞)에 이르렀으며, 춘방(春坊)은 사서(司書), 문학(文學)으로부터 필선(弼善), 겸필선(兼弼善)에 이르렀고, 사간원(司諫院)은 정언(正言)으로부터 헌납(獻納)에 이르렀으며, 사헌부(司憲府)는 지평(持平)으로부터 장령(掌令), 집의(執義)에 이르렀고, 홍문관(弘文館)은 수찬(修撰)으로부터 교리(校理), 응교(應敎)에 이르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으며 전조(銓曹)의 낭관(郎官)도 가까스로 여러 번 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섬 오랑캐가 큰 멧돼지와 긴 구렁이처럼 우리나라를 잠식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임금이 도성(都城)을 떠나려고 하였으므로 도성이 흉흉하였다. 공이 대사헌(大司憲) 김찬(金瓚)과 같이 문을 열고 들어가 항의하기를, “도성에 위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있고 아래로는 백관(百官)과 만민(萬民)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비록 위급하더라도 성(城)을 등지고 일전(一戰)을 벌려야 할 것입니다. ‘죽어도 떠나지 않는다’는 맹가(孟軻)의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조가 비록 그 말을 채용하지 않았으나 내심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패검(佩劒)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밤 2경(二更)에 선조가 숭례문(崇禮門)을 나가자 공이 말굴레를 지고 수행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명(明)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平壤)에 주둔한 왜적과 싸울 때 공이 임금의 명을 받아 삼도(三道)의 군량(軍糧)과 마초(馬草)를 독촉하여 명나라 군사에게 공급하여 병사가 포식하고 말이 날뛰니, 평론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그 뒤 오래 있다가 의정(議政) 정철(鄭澈)이 삼남 도체찰사(三南都體察使)가 되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택하였다. 정철이 겉으로는 공의 재능을 칭찬하였으나 실은 억제하였는데, 이는 공이 일찍이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 기축 옥사(己丑獄事)를 맡은 사람이 형벌을 남용(濫用)한 것을 탄핵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이 막좌(幕佐)로 들어가 오직 국사(國事)만 가지고 토론하였으므로 그가 호시 탐탐(虎視耽耽) 노렸으나 어쩔 수 없었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체찰사는 강화(江華)에 머물고 호남과 영남의 군무(軍務)를 공에게 위임하였다. 이때에 한강 이남 고을은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고 들판에는 푸른 풀이 없었는데, 공이 소매를 떨치고 가서 주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안집시켜 그 일을 끝마쳤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새로 호남에서 피를 마시고 맹약(盟約)한 뒤 예기를 몰아 다시 준동하려고 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별다른 계책이 없으므로 명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자’고 하니, 선조가 신하들을 살펴보고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사람은 권협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공이 그때 응교(應敎)로 있다가 당상(堂上)으로 승진되어 고급사(告急使)가 되었다. 공이 명을 받고 급히 달려가 겨우 한 달 만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최입(崔立)의 병부 군문(兵部軍門)에 국서(國書)를 전달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우리나라의 상황을 통렬히 개진하였는데, 말할 때마다 눈물이 흘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격앙되었다. 최 군문(崔軍門)이 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 산천의 형세, 도로의 원근, 왜적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점령하였으며 그대 나라가 방어한 곳이 얼마나 되며 비축해 둔 군량이 얼마나 되며 군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그림을 그려서 가지고 오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평소에 ≪동국지지(東國地志)≫를 익혔으므로 화공(畵工)에게 입으로 설명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어 그림을 만들어 올리니, 최 군문이 병부 시랑(兵部侍郞) 이정(李楨)과 같이 그림을 펼쳐 놓고 공에게 일일이 따져가며 물어보자 공이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공이 물러가자 시랑이 통역관 표정구(表廷耈)를 불러 공의 관직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나서 말하기를, “저런 사람은 일국(一國)에 제일가는 재주인데 어찌 흔하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바로 심의 보고하여 남북의 전함(戰艦)과 보병(步兵)을 징발하고 또 산동(山東)의 군량을 조달해 공급하기로 하였다. 공이 천자(天子)의 큰 은혜를 우러러 사례하고 머리를 조아리다 피가 흘러내린 얼굴로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지금 고갈(枯渴)의 처지에 놓여 조석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서강(西江)을 터놓는다 하더라도 제때에 구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평(永平)에는 남병(南兵)과 군량이 많이 있으니, 영평은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므로 수레와 소로 교체해 실어 나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스러운 천자께서 일체로 보는 인자함이 안팎의 구분이 없습니다. 대인(大人)께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주선하여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제할 때 필시 조금도 지체하지 않을 줄로 여깁니다.”고 하니, 최 군문이 공의 말을 받아들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청을 인준하였다. 공이 또 근각(筋角)과 초황(硝黃)을 요청하여 싣고 돌아왔는데, 군자(君子)들이 말하기를, “그의 민첩은 따라갈 수 있으나 그의 충성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선무 공신(宣武功臣)을 선정할 때 선조가 특별히 공을 정훈(正勳)으로 기록할 것을 명하고 군(君)에 봉하였는데, 그 교서(敎書)에, “자산(子産)이 말을 잘하여 그 정성 임금이 귀를 기울이게 하였고,5) 포서(包胥)가 통곡하여 그 지성 금석(金石)을 꿰뚫었도다.6) 7년의 전운(戰雲)을 거두니, 그게 누구의 공로인가? 삼한(三韓)을 안정되게 하였으니, 나를 빛나게 하였도다. 이에 시(詩)를 외운 재능을 더욱 믿게 되고 전쟁을 중지시킨 공렬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남궁(南宮)에서 대책을 기획한 신하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으나 임금의 포상을 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명철한 임금이 신하를 알아보고 한 말씀은 변경할 수 없다고 하겠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고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는데, 모두 명성이 났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승정원(承政院)으로 들어와 동부승지(同副承旨)에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여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가 겨울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 겨울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또 대사헌이 되었다가 가을에 승진되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겸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그때 당시의 명망을 지닌 어느 고을 수령이 세력을 믿고 법을 농락하자 공이 축출하고 조금도 봐주지 않았으나 그 사람이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가 요직(要職)에 등용되어 말하기를, “권협처럼 법을 지켜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공은 곧은 도리로 행하는 고인(古人)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이듬해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선조(宣祖)가 승하하였는데, 예조 판서가 상례(喪禮)를 주관하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온 관례였으므로 공이 신중히 일을 보되 오직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절을 준수하니, 헐뜯는 자들이 탄핵하였으나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는데 종묘(宗廟)의 보수를 감독하였기 때문이고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는데 회맹(會盟)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에 사은 정사(謝恩正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는데, 공의 나이 그때 더욱 높아 기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을 회피하지 않았으니, 이는 공의 지조이다. 5천 리의 길을 지척(咫尺)처럼 여겨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는데, 그때는 엄동 설한(嚴冬雪寒)이었으므로 꽉 짜인 일정에 노인의 기혈(氣血)이 어찌 상로(霜露)에 손상되지 않았겠는가? 이듬해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병석에 누웠다가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 정월 27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에 태어나 66세를 살았다. 공의 부음(訃音)을 보고하자, 임금이 조부(弔賻)를 내리고 재상에게 증직을 의결케 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추증하고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추봉하였으니, 죽음을 애도하는 은전이 지극하였다. 공이 막 세상을 떠났을 때 묘소가 맞지 않아 부평(富平) 수탄리(水呑里)에다 임시 장례를 치렀다가 그 이듬해 봄에 그 산등성이 계좌 정향(癸坐丁向)에 묻히었다.
공은 골격이 장대하고 모습이 풍만하여 약관(弱冠) 때 나라의 그릇으로 보이었다. 거기다 명철한 스승 순천 도정(順川都正)을 얻어 귀의(歸依)하였으므로 탁마하고 훈도된 바가 박사가(博士家)의 말뿐만이 아니었다. 벼슬길에 나간 뒤로는 집안 대대로 전해온 충효(忠孝)를 지키었고 학문이 우뚝 뛰어나자 위로 선조(宣祖)의 인정을 받았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나라의 급한 일에 헌신하되 개인의 일보다 더 주력하였는데, 나라가 재차 부흥한 것은 공의 힘이 많았다고 하였다. 선조의 하교(下敎)에 일컬은 바를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아! 공이 조정에 나온 지 40여 년간에 거치지 않은 직책이 없고 공로가 견줄 사람이 없는데, 이는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고 있으므로 어린아이들도 이야기하고 있다. 공의 큰 형님 지사공(知事公, 권황(權愰))과 둘째 형님 참판공(參判公, 권희(權憘))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아버지처럼 섬겨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적어도 반드시 나누어 먹었고, 계절이 바뀌면 반드시 의복을 해 드리는 등 거른 해가 없었으니, 송(宋)나라 때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이 그의 형 백강(伯康, 사마단(司馬旦)의 자(字))을 섬긴 바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부가 된 여동생과 아이들을 종신토록 돌봐주었고 빈한한 조카 남녀들이 공의 힘을 입어 시집가거나 장가간 자들도 많았다. 봉록이 들어오면 종족과 이웃에게 베풀고 털끝만큼도 따지지 않았다. 공이 만년에 들어 더욱더 볼만한 것이 있었다. 문을 닫고 조정의 귀한 사람과 왕래하지 않았고 비록 인척이라도 요직에 있을 경우에는 만나지 않았는데, 사람이 그 이유를 물어보면 말하기를, “이는 우리 동흥공(東興公, 동흥 부원군 권상(權常))의 유훈(遺訓)이다.”고 하였다. 자질(子姪)들을 대할 때 엄숙하면서 법도가 있었고 항상 가문이 지나치게 융성한 것을 경계하며 말하기를, “내가 항상 ≪주역(周易)≫을 읽으면서 한마디 말을 음미한 것이 있으니, ‘적선(積善)한 가문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가문의 벼슬과 부귀가 조상이 쌓은 충효(忠孝)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는가? 유지하기 어려움이 얻는 것보다 더 어렵다. 유지하는 도리는 검소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 재상을 지냈지만 옷걸이에 비단옷이 없었고 밥상에 두 가지 고기가 없었고 집에는 단청을 칠하지 않았는가 하면, 입 밖에 과장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또한 비방하는 말도 꺼내지 않는 등 일생 동안 하루같이 실행하였으니, 공은 간결하고 진실한 덕 있는 군자(君子)라고 이를 만하다. 병환이 위독했을 때 국모(國母, 선조비(宣祖妃)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폐위하자는 의논이 제기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제들에게 부축해 일으키도록 하여 일어나 앉아서 매우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고 붓을 찾아 조그만 종이에 짤막하게 편지를 써서 지사공(知事公)에게 주라고 하였는데, 지사공이 결국 대절(大節)을 수립한 것은 역시 공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공의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인데, 할아버지 최극성(崔克誠)은 헌납(獻納)이고 아버지 최말(崔沫)은 정랑(正郞)이다. 부인이 유순하고 차분한데다 지조가 있어 군자(君子)와 짝하여 효성이 아울러 드러났고 어른들을 도와 제사를 경건히 지냈으며, 자녀들을 가르치고 노복을 부리는 데 모두 도리에 따라 하였으므로 가정이 화목하였다. 구비한 복을 누린데다 아들을 많이 두었고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군 12년)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나 공의 왼쪽에 묻히었다. 7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권신중(權信中)은 생원(生員) 출신으로 통정 대부(通政大夫) 풍덕 군수(豊德郡守)이고, 둘째 아들 권필중(權必中)은 생원 출신으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고, 셋째 아들 권경중(權景中)은 무과(武科) 출신으로 연일 현감(延日縣監)이고, 넷째 아들 권정중(權正中)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다섯째 아들 권근중(權謹中)은 세자익위사 사어(世子翊衛司司禦)이고, 여섯째 아들 권심중(權審中)은 진사(進士) 출신으로 호조 좌랑(戶曹佐郞)이고, 일곱째 아들 권위중(權偉中)은 진사(進士)이며, 큰딸은 이조 좌랑(吏曹佐郞) 유업(柳)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시환(李時煥)에게 시집갔다. 권신중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권대임(權大任)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의 작호를 받았고 둘째 아들은 권대명(權大鳴)이고 셋째 아들은 권대식(權大式)이며, 딸은 박상빈(朴尙彬)에게 시집갔다. 권필중은 6남 5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권대덕(權大德)은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둘째 아들은 권대순(權大淳)이고 셋째 아들은 권대숙(權大淑)이고 넷째 아들은 권대주(權大胄)이고 다섯째 아들은 권대하(權大夏)이고 여섯째 아들은 권대화(權大華)이며, 큰딸은 최진(崔璡)에게, 둘째 딸은 이경회(李慶會)에게, 셋째 딸은 정랑(正郞) 윤유근(尹惟謹)에게, 넷째 딸은 찰방(察訪) 이창현(李昌炫)에게, 다섯째 딸은 지여관(池汝寬)에게 시집갔다. 권경중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대복(權大復), 권대장(權大壯)이고 딸은 현령(縣令) 유중경(柳重烱), 이덕승(李德升)에게 시집갔다. 권근중은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권대운(權大運)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이고 둘째 아들 권대윤(權大胤)은 포천 현감(抱川縣監)이고 셋째 아들은 권대원(權大遠)이고 넷째 아들은 권대술(權大述)이다. 권대윤은 권정중의 후사가 되었다. 큰딸은 사간(司諫) 이후(李垕)에게, 둘째 딸은 이시계(李時繼)에게, 셋째 딸은 송변(宋)에게 시집갔다. 권심중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권대민(權大敏), 권대익(權大益)이고 큰딸은 송도응(宋道凝)에게, 둘째 딸은 이우(李)에게, 셋째 딸은 진사(進士) 노사민(盧思敏)에게 시집갔다. 권위중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권대재(權大載)는 문과(文科) 출신으로 공산 현감(公山縣監)이고 큰딸은 생원(生員) 이담(李墰)에게, 둘째 딸은 생원(生員) 최동로(崔東老)에게, 셋째 딸은 생원 이명린(李命麟)에게 시집갔다. 권대임은 1남 권진(權瑱)을 두었는데 돈령부 봉사(敦寧府奉事)이고, 권대명은 1남 권우(權瑀)를 두었다. 권대식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현(權玹)이다. 권대순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경(權璟), 권윤(權玧), 권침(權琛), 권장(權璋)이다. 권대주는 1남 4녀를 두었고, 권대하는 4남 4녀를 두었다. 권대화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권서(權瑞)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권대장은 1남 권찬(權瓚)을 두었다. 권대운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위(權瑋), 권규(權珪)이다. 권대윤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권원(權瑗)은 생원(生員)이고 둘째 아들 권환(權瑍)은 문과에 합격하였고 셋째 아들은 권준(權埈)이고 넷째 아들은 권연(權瑌)이다. 권대민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성(權珹), 권감(權瑊)이다. 권대익은 3남을 두었는데, 권조(權琱), 권소(權玿)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권대재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권해(權瑎)는 문과 출신으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이고 둘째 아들은 권유(權瓀)이고 셋째 아들은 권분(權玢)이다. 권진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이경(權以經), 권수경(權守經)이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2백여 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성(城) 바치어 원수를 갚으니 의주(義主, 왕건(王建))가 안색을 바꾸어서 아름다운 성씨 하사했도다. 그 자손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조상을 생각하고 계승해 나가 오래 갈수록 더욱 현명했도다. 훌륭한 길창공(吉昌公)에 이르러 우리 선조(宣祖)를 섬기어서 선대 업적 크게 확장했는데, 효성을 옮기어 충성을 다하여 명령에 따라 동분 서주하며 헌신한 공로가 드러났도다. 임금이 노고를 통촉하니 공의 큰 공 영화스러워 공신 책록 환히 빛났도다. 지위와 벼슬이 높았으나 여전히 겸손을 유지하니 주역의 도리 드러났도다. 큰형님 둘째 형님 막내가 백수토록 즐겁게 살았으니, 세상에 그 누가 필적하랴? 구원병 끌어오고 왕 환도했으며 훌륭한 부인과 어진 자제 있으니 복록을 완전히 갖추었도다. 나라를 걱정한 마음이 죽도록 쉴 새가 없으니 쌍열(雙烈)과 우애가 있었도다. 내 필력이 무디어졌으나 공 행실 명법(銘法)에 맞으니, 지나는 이 경의 표하리라.
각주
1) 대려(帶礪) : 이는 대려 맹약(帶礪盟約)의 준말. 공신을 책록(策錄)하면서 황하(黃河)가 허리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아질 때까지 나라에서 공신의 가족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함.
2) 촉지무(燭之武)는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대부(大夫)인데, 진(秦)ㆍ진(晉) 두 나라가 정나라를 치기 위해 포위하자, 정나라에서 촉지무를 시켜 진 목공(秦穆公)을 만나서 설득하게 하였을 때 그가 하였던 말로, 마침내 진 목공이 맹약(盟約)하고 돌아갔다는 고사(故事).
3) 직하(稷下) : 제(齊)나라의 지명인데, 제 선왕(齊宣王)이 문학(文學), 유세(遊說)의 선비를 좋아하여 이곳에다 객관을 설치하고 추연(騶衍), 순우곤(淳于髡), 전병(田騈), 접여(接予), 신도(愼到), 환연(環淵) 등 76명을 초빙하여 상대부(上大夫)로 삼아 직임을 주지 않고 국사만 논의하였음. 당시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즉 학문에 종사하는 자를 지칭함.
4) 예착(羿浞) : 후예(后羿)와 한착(寒浞)으로, 한착은 하(夏)나라 때 유궁국(有窮國) 임금 후예의 총애하는 신하임. 후예가 하나라 황제 상(相)의 자리를 찬탈한 뒤에 한착에게 수상의 임무를 맡겼는데, 한착이 또다시 후예를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였음.
5) 자산(子産)은 춘추 시대 정(鄭)나라 대부(大夫)인 공손교(公孫僑)의 자(字)임. 당시 주위의 강대국인 진(晉)ㆍ초(楚)에서 계속 괴롭혔는데, 마침 진후(晉侯)의 질병이 있어 정나라에서 자산을 보내 문병케 했을 때, ‘진후의 병은 여색(女色)을 탐하고 정사를 게을리 한 소치이다.’라고 말하였던 일.
6) 포서(包胥)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大夫)로, 당시에 오(吳)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함락하자 신포서(申包胥)가 진(秦)나라로 가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대궐의 뜰에서 7일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울고 있으매, 진 애공(秦哀公)이 감동해 군사를 출동하여 초나라를 구해 주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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