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재판정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본 적 없으시다고요. 저도 그랬습니다. 법원은 민원서류발급을 위해 찾던 곳 정도여서 저와는 상관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최근 2∼3년간은 매주 법원 휴정 기간을 빼고는 빠지지 않고 재판정에 갑니다. 바로 성범죄 관련 재판 방청을 위해서입니다.
춘천여성민우회에서 2019년부터 ‘성범죄 관련 재판방청 연대’를 하고 있는데 강제추행·스토킹·강간·성매매 알선·미성년자의제강간·불법촬영·성착취물 제작 배포 등 성범죄 재판이 한 주도 빠짐없이 열리니 주마다 달마다 가게 됩니다. 성범죄 재판이 이렇게 많은 줄 알면 여러분 누구라도 놀라실 거예요. 매주 형사 재판 일정 중 어림잡아도 20∼30%는 되리라 생각합니다. 재판정까지 오지 못한 사건까지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지 그 심각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교제살인’이라는 용어는 들어보셨죠? 예전엔 데이트폭력으로 불렸는데 범죄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지 못해 대치됐습니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폭력이 교제폭력,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교제살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최근 먹방 유튜버로 유명한 모 여성이 전 남자친구에게 4년간 성폭행 등 폭력을 당해왔던 것이 밝혀졌지요. 피해 여성은 교제폭력을 의심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는 올리고 싶지 않았을 피해 사실을 공개까지 해야 했습니다. 바로 2차 피해입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당해야 온전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죽어야만 피해자가 되는 걸까요? 올해 1∼4월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가해자가 43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여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친구와의 교제를 거절하면 되는 걸까요? 불행히도 아닙니다. 교제 거절 후 스토킹에 시달리다 살해당하는 교제살인 건수는 한 시민단체가 언론 보도를 모아 낸 통계에 의하면 2020년 살인에 이른 것이 97건, 2023년 138건이니 기막힌 증가율을 보여줍니다. 작년 살인 미수에 그친 449건까지 감안하면 2∼3일에 1명이 살해당하고 매일 1∼2명이 살해 위협을 당하는 것이죠.
심각성이 이러한데도 정부에는 교제폭력 및 살인 관련 공식 통계도 없을뿐더러 대책도 미온적입니다. 여성가족부는 교제폭력 범부처 통합대책 관련 논의도 없이 ‘법무부, 경찰청과 공조하고 피해자 보호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 그런데 성범죄 재판 방청 연대가 뭐냐고요?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에게 힘을 싣기 위해 연대해 방청하는 활동입니다. 성범죄는 피해가 장기적이고 인생을 바꿀 만큼 충격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어릴 적 당한 성폭행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수십 년 후 가해자를 고발하는 용기 있는 여성의 경우를 언론에서 보셨을 줄 압니다. 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은 변호인의 조력으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피해자는 종종 적극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국선 변호인을 만나기 쉽습니다.
성범죄 재판을 처음 방청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충격을 받습니다. 가해자의 뻔뻔한 태도와 아무 감정 없이 일사천리로 내리읽는 검사의 무성의한 태도(물론 안 그런 분도 있겠으나), 잘 들리지도 않게 읊조리는 판사(피고가 못 알아들어 변호사에게 묻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에 답답해 합니다. 심지어 마구 흐느끼다가 진술이 끝나면 멀쩡한 얼굴로 변하는 ‘변검’의 연기를 보여주는 가해자, 천편일률적으로 선처해 달라는 가해자 측 변호, 그 어디에도 피해자의 절규가 드러나지 않는 재판 현장에서 방청연대자들은 좀 더 피해자의 입장이 돼주시라는 연대의 마음을 검사에게, 재판부에 무언의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성범죄는 피해 회복을 피해자 개인의 몫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부디 다양한 사회적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재판 후에도 피해 회복과 사회 복귀가 이뤄지는 시스템을 기대합니다.
어느 피해자의 말, “가해자의 범행은 과거에 있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현재에 있습니다”에 덧붙여봅니다. “당연히 미래에도 있다.” 정비된 사법적·사회적 시스템으로 피해자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경감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도 피해자와 한마음이 되어 재판정 방청석에 앉습니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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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시론] 재판정에서 < 기사 - 강원도민일보 (kad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