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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
 
 
 
카페 게시글
서원이야기 스크랩 경덕사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101 14.09.07 16: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경덕사(景德祠)
소 재 지 :  의성군 구천면 용사2리 290
(원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용사 2리 290.)
건축시기 :  1700년대
중건시기 :  1912(중수), 1985년(중건), 1988년(유물관설립)
소 유 자 :  순천장씨(順天張氏) 장길(張吉)

건축 배경
경덕사는 장시규(張是奎)와 장한상(張漢相) 부자를 제향 하는 곳이다. 처음 창건된 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략 1700년대에 사당을 세우고 영전 1본(本)을 두고 제향 하였다. 그 뒤 1912년에 지역 선비인 송홍운(宋鴻雲)의 발의로 영각(影閣)을 중수하고 ‘경덕사(景德祠)’로 이름을 고쳤다. 이 당시에는 사당 건물이 2동이었는데, 동편에 장시규의 처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와 장한상의 처 정부인(貞夫人) 신씨(申氏)를 제향 하는 2칸 규모의 사당과 두 부자를 모시는 3칸 규모의 사당이 있었다. 그런데 1984년 부자를 모시던 사당이 퇴락하여 붕괴되어, 1985년에 중건하였고, 1988년 전 도유사(都有司)의 주선으로 유물관을 경덕사의 동편에 세웠다. 그래서 가장 동쪽에는 부인 사당, 가운데는 유물관, 서편에는 부자 사당으로 구성되었는데, 2005년 할머니 사당이 퇴락하여 붕괴되어, 이 사당은 현재 기단만 남아 있다.

건축 특징
경덕사는 가장 서편에서 자리 잡고 있다. 옛 사당보다 2m 가량 앞쪽에 위치하여 남향하였다. 자연석으로 60cm정도의 기단을 만들고 윗부분은 콘크리트로 평평하게 다졌다. 자연석과 둥글게 깎은 돌을 섞어서 주초를 하고 둥근 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양쪽 측면에는 방풍판이 있다. 경덕사의 안에는 각각 ‘자헌대부행절도사장선생(資憲大夫行節度使張先生)’, ‘가선대부행절도사장공(嘉善大夫行節度使張公)’이라고 새긴 위패 2점이 있다. 자헌대부 장시규(張是奎)의 위패는 가운데 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고, 가선대부 장한상(張漢相)의 위패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다. 경덕사의 계단은 가운데 칸에만 두었다. 부인을 제향 하던 사당이 붕괴되면서 부인의 위패는 부자의 제상(祭床) 아래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유물관은 경덕사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전면 2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양쪽 측면에는 방풍판이 있다. 경덕사와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는데, 사당과의 구별을 위해 30cm 정도의 기단 위에 주초를 둥글게 깎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사주문은 주초위에 사각형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얹었다. 1칸 규모이고, 두 짝의 판문을 달았다.
경덕사의 담장은 북서남쪽으로는 석회석을 쌓았고, 동쪽과 옛 터의 구역은 기와를 얹은 토석담을 세웠다.

건축 구성
경덕사는 출입문인 사주문과 장시규, 장한상 부자를 제향 하는 경덕사, 교지(敎旨)와 유서(諭書) 등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유물관과 두 부인을 제향 하는 사당의 유허단(遺墟壇), 그리고 이 경내를 둘러싸고 있는 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허단과 경덕사와 유물관은 같은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다. 가장 오랜 건물인 유허단은 다른 건물보다 2m 뒤쪽에 자리한다. 사주문은 건동남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담은 유허단의 뒷부분에서 사주문까지는 기와를 얹은 토석담이고, 나머지 부분은 석회석으로 에워싸고 있다.

현판
경덕사(景德祠)
1932년에 쓴 것이다.
유물관(遺物館)
1988년 성균관 총무처장 이중기(李重基)의 글이다.
경덕사유물관기(景德祠遺物?記)
1988년 신천(信川) 강재기(康在璣)의 글이다.
경덕사기(景德祠記)
1998년 구현(具玹)의 글이다.
문중 이야기
- 향사일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한다. 순천 장씨 문중에서 향사를 지낼 때에는 장시규(張是奎), 장한상(張漢相) 부자와 장시규의 처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와 장한상의 처 정부인(貞夫人) 신씨(申氏) 네 분에 대해 경덕사와 부인의 사당에서 각각 제사지냈으나, 유림의 참여로 부자만 종사하게 되었다.


관련문집
- 관련문집
-절도공양세보(節度公兩世譜)


관련유물
- 유서. 교지. 유지. 병서. 호패. 화살통. 지휘봉. 도장
순천 장씨 문중에는 장시규(張是奎)와 장한상(張漢相) 및 두 정부인(貞夫人), 후손과 관련 된, 교지(敎旨)와 유서(諭書)를 비롯한 고문서가 약 300점 가량 보관하고 있다. 경덕사유물관에는 경덕사와 유물관에 관한 기문의 현판과 찬조방명록 현판, 장시규와 장한상, 장광린이 받은 교지와 유서 16점과 장시규의 유물 등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문서에 비해 매우 극소수만 전시되어 있다. 유물관에 전시된 교지와 유서는 모두 액자로 만들었는데, 2점은 현판과 겹쳐져 판독이 어렵다. 전시된 유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태안군수장시규(諭泰安郡守張是奎)
강희(康熙) 14년(1675) 10월 4일에 받은 유서이다.

-유수충청도안흥진무방어사태안군수장시규(諭守忠淸道安興鎭撫防禦使泰安郡守張是奎
강희 14년(1675) 7월 28일에 받은 유서이다.

-유수황해도병마절도사장시규(諭守黃海道兵馬節度使張是奎)
강희 20년(1681) 3월 15일에 받은 유서이다.

-교지장시규위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敎旨張是奎爲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
강희 27년(1688) 11월에 받은 교지이다.

-교지장시규교동도호부사자(敎旨張是奎喬桐都護府使者)
강희 27년(1688년) 11월 25일에 받은 교지이다.

-유경기수군절도사겸삼도통어사교동부사장시규(諭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統禦使喬桐府使張是奎)
강희 27년(1688년) 12월에 받은 교지이다.

-유경상좌도수군절도사장시규(諭慶尙左道水軍節度使張是奎)
강희 31년(1692) 3월 13일

-유경기겸방어사양주목사장시규(諭京畿兼防禦使楊州牧使張是奎)

-교지장시규위자헌대부자(敎旨張是奎爲資憲大夫者)
강희 45년(1706) 5월 25일에 받은 교지이다.

-유함경북도병마절도사장한상(諭咸鏡北道兵馬節度使張漢相)
강희 50년(1711년) 11월에 받은 유지이다.

-교지장한상위가선대부행용양위부호군자(敎旨張漢相爲嘉善大夫行龍?衛副護軍者)
강희 51년(1712) 12월에 받은 교지이다.

-유전라도병마절도사장한상(諭全羅道兵馬節度使張漢相)
강희 52년(1713년) 12월 8일에 받은 유서이다.

-교지장한상위가선대부행충무위부호군겸오위도총부부총관자(敎旨張漢相爲嘉善大夫行忠武衛副護軍兼五衛都摠府副摠管者)
강희 54년(1715년) 3월에 받은 교지이다.

-교지금군장광린무과병과제466인급제출신자(敎旨禁軍張光麟武科丙科第四百六十六人及第出身者)
건륭 60년(1795) 9월에 장광린(張光麟)이 무과에 급제하고 받은 교지이다.

-병서(兵書) 1권

-장시규(張是奎)의 호패(號牌) 1점

-화살통 1점

-무관지휘봉(武官 指揮棒) 1점

-순천 장시규 호상장(順天張是奎虎祥章)이라고 새긴 도장 1점.

주향자
- 장시규. 장한상
-장시규(張是奎; 1627∼1708)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자는 여상(汝常)이고, 아버지는 장익(張翊)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구천면(龜川面) 비산동(飛山洞)에서 출생하였다.
1648년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효종(孝宗)의 눈에 들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70년 경상도좌수사를 지내고, 1673년 전라도우수사로 옮겼다. 1675년 무신 중에서 당상관(堂上官)으로 등용할 수 있는 사람을 조사하였는데, 30인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1685년 회령부사를 지내고, 1687년에는 총융중군(摠戎中軍)으로 승격하였다. 곧이어 경기도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1700년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내고 1702년 여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벼슬을 사직하여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자질과 후진들을 가르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장한상(張漢相; 1656~1724)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자는 필경(弼卿)이고, 장시규의 아들이다. 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정략장군(定略將軍) 선전관(宣傳官), 진위장군(振威將軍), 훈련원정(訓鍊院正), 내금위장(內禁衛將), 희천(熙川)?자산(慈山)?옥천(沃川)?칠곡(漆谷)?회령(會寧) 등지의 수령을 두루 거치고, 1682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 1684년 삼척포진영장(三陟浦鎭營將)으로 기용되어 울릉도에 잇따른 왜구의 침범을 막았다. 그 뒤 호남에 대기근이 들어 도적이 들끓자, 장한상이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는데, 이곳 주민들이 생사당비(生祠堂碑)를 세워 송덕을 새겼다. 이후로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경기도수군절도사, 영변부사, 황해도병마절도사로 활약하였다.


관련인물
- 관련인물
장시규(張是奎), 장한상(張漢相)

의성 > 서북권 > 용사2리
- 윗뱅개[上蛇]와 애못(肝堤) 마을을 합쳐서 이룬 마을
구천면 용사리는 1892년까지 상주군 단동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당시 의성군 구천면으로 속하게 되었다. 이곳은 세 마을로 나뉘어 진다.
용사 1리는 약 500년 전에 생성된 마을로, 1680년에 선산김씨(善山 金氏)가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뱀개[蛇浦] 혹은 뱅개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이 생겨날 때 들판의 늪에서 뱀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앞산의 생김새가 뱀이 갯벌로 들어가는 형국이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아주 신씨(鵝洲申氏) 퇴재선생 묘소 앞에 인위적으로 개구리봉[蛙峯]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일합방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이 위아래 분리되어 윗뱀개(上蛇), 아랫뱀개(下蛇)라고 하였다.
용사 2리는 윗뱅개[上蛇]와 애못(肝堤) 마을을 합쳐서 이룬 마을이다. 애못은 구천면의 중앙에 위치하여 사람의 신체 중에 간(肝)의 위치와 같다는 뜻에서 부른 것인데, 간을 속칭 ‘애’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용사 3리는 1665년에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처음 마을을 개척 하였다고 전한다. 개척 당시에 마을 너머 있는 위천(渭川)의 소에서 용이 놀았다 하여 용포(龍浦)라 하였고 거기에 연유하여 용포동이라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또 이곳도 조선말엽까지 상주군 단동면 용신동이었는데 일제시대에 이 마을 동장이 자기의 성이 신씨(申氏)여서, 용신(龍申)으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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